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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않는 자

요한계시록 2: 18 ~ 29

김지철 목사

2007.09.16

두아디라의 상반된 두 여인 루디아와 이세벨

두아디라는 1세기 중엽 염색공업이 발전된 공업과 상업의 도시였습니다. 돈과 시간과 여유가 많이 생기면서 이곳은 자유분방한 도시가 됨과 동시에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에 따르는 성적인 음행이 이곳저곳에서 성행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에는 두 여성이 아주 유명합니다. 한 여성은 긍정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여인이고, 또 한 여성은 부정적인 인물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두아디라 출신인 루디아가 빌립보에 와서 자주색 옷감장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바울과 루디아라는 여인이 만납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죄를 깨달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며 세례 받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말씀을 온 가족과 집안의 종들이 함께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에게 자기 집에 더 머물도록 요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믿었던 여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루디아라는 여인을 통해서 선교사역의 위로와 격려를 받을 뿐만 아니라 빌립보와 두아디라 지방의 복음의 기초를 놓게 됩니다. 이런 여인을 만나는 것은 복음 증거자에 있어서는 큰 축복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신실하고 경건한 여인들을 통해서 힘과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소중한 권사님들과 여전도회 회원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신앙과 기도의 힘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성도들의 모든 경조사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봉사와 섬김을 통해서 기도의 어머니로서 사랑의 역사를 베푸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은혜는 참으로 크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또 다른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부정적인 인물로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구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악녀였습니다. 북 이스라엘 7대 왕인 아합 왕의 왕비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있었던 족속에서부터 바알 신을 끌고 들어와 아세라 신상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거부했던 악한 여인이었습니다. 선지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알려진 엘리야와 대결하며 핍박했고 마지막에는 죽이려고 작정했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 때문에 담대했던 엘리야마저도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로뎀 나무 밑에 앉아서 죽겠다며 이세벨의 공격과 죽임의 위협 속에 단식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 여인의 집념이 아주 무섭습니다. 이런 이름을 따서 등장한 여인이 두아디라에 나타난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칭찬받던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에 이세벨은 자기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부르면서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가한다고 하면서 말씀과 더불어 성적 관능으로 유혹하며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무시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성적으로 미혹하며 음란을 통해서 성적인 문란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성적인 절제, 성적인 한계성을 무너뜨려 아내 아닌 다른 여자,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의 불륜을 부추겼습니다. 가정의 질서를 깨뜨려 사람과 사람인 인격이 아니라 유혹적인 존재로 물격화 시켰습니다.
이 여인이 퍼뜨린 교훈은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피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하는 것을 살펴보면 큰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한번 용서받으면 영원히 용서받는다. 어제의 죄도 용서받고, 오늘의 죄도 용서받고, 내일의 죄도 용서받는다. 한번 용서 받으면 무슨 짓을 행하든 다 용서받는다.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마라. 이제 부정한 짓을 해도 이미 용서 받았다.”
오늘날 구원파라는 이단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악한 일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음란한 행위를 해도 다 용서 받았으니까 괜찮다는 잘못된 교훈을 두아디라교회에 퍼뜨렸습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고 성적으로 문란해도 하나님께서는 괘념치 않을 것이라면서 사람들을 꼬드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파괴하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잘못된 교훈에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두아디라교회는 예수님에게 칭찬받는 훌륭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지닌 축복받은 교회였습니다. 기독교가 자랑하는 세 가지 덕인 믿음과 인내하는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무엇보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크다고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지만 이 교회는 퇴보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장하고 진보하는 교회였습니다. 어디를 봐도 잘못된 것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세벨의 잘못된 교훈에 의해서 소중한 교회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세벨이 영적인 종교가 아니라 육체를 숭상하는 음란한 종교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색욕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와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색욕적인 적으로 대체시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곳곳에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은 육체를 숭상하는 종교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짱’, ‘몸짱’을 이야기할 때 그냥 웃으면서 지나갑니다. 사실 육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관심을 육체에 쏟아 붓는 삶의 모습으로 이 시대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육체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시간과 정성과 돈을 쏟아 붓습니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까지도 이 일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성형수술을 해서 조금 더 예뻐지는 것이 뭐 그렇게 나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성형수술을 하면서 자기 아닌 다른 인격을 추구하고 육체를 숭상하는 종교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유명한 탤런트의 모습을 뒤따라가려고 하면서 내 인격을 다른 모습으로 바꿔가려는 것이 육체 지상주의가 갖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만이 인생의 전체이고, 사람을 평가하는 전체인 것처럼 외모지상주의로 사람을 몰고 가는데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육체가 좋아하는 것은 쾌락과 즐거움입니다. 육체의 쾌락과 즐거움이 마지막으로 추구하는 것은 성입니다. 육체를 기분 좋게 하는 마지막이 바로 성의 문제입니다. 성은 가장 강렬한 자극을 인간의 육체에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이세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성을 우상으로 삼는 시대에 들어와 있습니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소중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칭찬한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한 남자와 여자를 세우시고 둘이 결혼하는 것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구약성경 아가서를 보면 한 남자와 여자가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것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이 자기 절제를 잃어버리고 대상을 잘못 선택하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장 추악한 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색욕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음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그러나 성을 육신의 욕구대로 사용하면서 육체를 손상하는 종교성속에 빠지게 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육체가 최고의 존재로 탈바꿈하여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성은 사라지며 경건성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육체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바뀝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두아디라교회가 흔들렸고 성적인 음행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서 경고와 꾸중을 하십니다.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하라. 내가 회개할 기회를 주겠다. 그 악에서부터 벗어나라.” 그러나 이들은 더 즐거운 것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우상숭배가 하나님보다 더 앞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면서 통탄해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알면서도 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하고 싶고 도전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싶어 하고 내 인생의 욕구대로 살고 싶어 하며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쓰면서 16세 되던 청소년 시절에 행한 죄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도둑질을 하고 싶었고 또한 사실 도둑질을 했습니다. 내가 도둑질을 한 것은 배가고파서가 아니오, 궁핍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착한 일을 무시하고 싶고 또 죄를 짓고자하는 강한 충동에 어쩔 수 없어 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내가 이미 더 좋은 것을 많이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훔치게 되었겠습니까? 내가 즐기고 싶었던 것은 훔친 물건이 아니라 도둑질 그 자체, 죄 그 자체였습니다. 악한 일을 할 때 악한 일을 하도록 자극한 동기는 바로 악한 의지였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내가 망해가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나의 나쁜 짓을 사랑했습니다. 그 나쁜 짓을 해서 무엇을 얻는다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짓 그 자체의 죄악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탄이 주는 이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무조건 거절하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 하는 잘못된 마음이 있어서 회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노출시키기 싫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자기가 행한 것이 악인 줄 알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개할 때 자기의 악한 모습이 노출될까봐 이것이 싫어서 회개하기를 거절합니다. 회개할 때 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누추하며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자기 스스로 대면하기 싫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스스로 괜찮은 존재라고 여기며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었는데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스스로 봐도 창피해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때로 돈을 함부로 쓰고 자랑하면서 회개를 거절합니다. 때로는 술에 잠겨 세상일을 잠시 잊으면서 회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육체의 쾌락에 빠져들면서 지금은 회개할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명예와 권력에 혈안이 되어 따라가면서 여기에 더 좋은 것이 있다며 회개를 거절합니다. 때로는 가정이라는 안온한 자리에 있으면 편안하게 여기고, 지식인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갖고 있는 적나라한 모습에 스스로를 직접대면하며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을 겁내고 도망갑니다.

회개란 용기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자신의 문제에 직면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인간의 마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것이 악한 줄 압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서 ‘아니오’를 하지 못해서 악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남이 잘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남을 꼬드기면 거기에 빠져 들어가서 함께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싫으면서도 탈출할 용기가 없어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렇게 순수하지도 착하지도 않으면서 착해야하는 강박증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인정할까? 나를 사랑할까?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이것에 따라서 선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자체가 늘 반대급부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 기대대로 해주지 못하면 마음속에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남의 눈치를 봐서 그냥 이끌려갑니다. 결정적인 ‘아니오’를 말하며 정당한 반대를 하지 못합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남이 나를 유혹할 때도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거부하고 싶은 일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끌려가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무리 못된 아들, 못된 딸이라고 해도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이는 원래 이렇지 않은데 몹쓸 친구를 만나서 이렇게 된 거에요.”
우리가 내 자신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가 할일이 아니다.” 남이 잘못된 길로 이끌어갈 때도 이렇게 말하며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난 여기서 끝낼 거야. 더 가지 않을 거야.” 때로는 친구와의 의리라고해도 끝내야 합니다. 부모라고 해도 끝내야 합니다. 우리는 용기와 담대함이 없어서 회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 실존을 흔드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부흥과 회복을 이룹시다.

회개란 인간의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뒤흔들리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하나님 앞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며 소유했던 모든 것을 인생이 보장할 수 없고, 구원을 베풀어 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회개란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 무가치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만족감, 가치관을 하나님 앞에 내동댕이치는 것입니다.
회개란 내 자신의 자아에 대한 죽음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옛 인간을 버리고 새 인간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 없는 신앙은 불가능하고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은 자기 영혼의 비참함과 누추함을 알았습니다. 죄에 대해서 이것은 ‘아니오’라는 선언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은 위기에 처해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한 거룩성을 깨달으면서 회개할 준비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종교를 잠깐 즐기고, 즐거운 말을 들으며 정신적인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기에 이런 문제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내 실존, 내 영혼 전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생명이 있고, 하나님에게 참된 구원이 있고, 하나님에게 참된 진리가 있음을 깨닫고 소중했던 것을 내려놓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나타날 때 영적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가정과 교회와 한국 교회 전체에 일어나게 될 것 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섭니다. 말씀을 우리 것으로 삼고,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옛 자아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위에서 영적인 부흥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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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 18 ~ 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의 상반된 두 여인 루디아와 이세벨

두아디라는 1세기 중엽 염색공업이 발전된 공업과 상업의 도시였습니다. 돈과 시간과 여유가 많이 생기면서 이곳은 자유분방한 도시가 됨과 동시에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에 따르는 성적인 음행이 이곳저곳에서 성행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에는 두 여성이 아주 유명합니다. 한 여성은 긍정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여인이고, 또 한 여성은 부정적인 인물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두아디라 출신인 루디아가 빌립보에 와서 자주색 옷감장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바울과 루디아라는 여인이 만납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죄를 깨달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며 세례 받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말씀을 온 가족과 집안의 종들이 함께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에게 자기 집에 더 머물도록 요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믿었던 여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루디아라는 여인을 통해서 선교사역의 위로와 격려를 받을 뿐만 아니라 빌립보와 두아디라 지방의 복음의 기초를 놓게 됩니다. 이런 여인을 만나는 것은 복음 증거자에 있어서는 큰 축복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신실하고 경건한 여인들을 통해서 힘과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소중한 권사님들과 여전도회 회원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신앙과 기도의 힘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성도들의 모든 경조사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봉사와 섬김을 통해서 기도의 어머니로서 사랑의 역사를 베푸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은혜는 참으로 크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또 다른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부정적인 인물로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구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악녀였습니다. 북 이스라엘 7대 왕인 아합 왕의 왕비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있었던 족속에서부터 바알 신을 끌고 들어와 아세라 신상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거부했던 악한 여인이었습니다. 선지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알려진 엘리야와 대결하며 핍박했고 마지막에는 죽이려고 작정했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 때문에 담대했던 엘리야마저도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로뎀 나무 밑에 앉아서 죽겠다며 이세벨의 공격과 죽임의 위협 속에 단식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 여인의 집념이 아주 무섭습니다. 이런 이름을 따서 등장한 여인이 두아디라에 나타난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칭찬받던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에 이세벨은 자기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부르면서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가한다고 하면서 말씀과 더불어 성적 관능으로 유혹하며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무시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성적으로 미혹하며 음란을 통해서 성적인 문란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성적인 절제, 성적인 한계성을 무너뜨려 아내 아닌 다른 여자,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의 불륜을 부추겼습니다. 가정의 질서를 깨뜨려 사람과 사람인 인격이 아니라 유혹적인 존재로 물격화 시켰습니다.
이 여인이 퍼뜨린 교훈은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피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하는 것을 살펴보면 큰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한번 용서받으면 영원히 용서받는다. 어제의 죄도 용서받고, 오늘의 죄도 용서받고, 내일의 죄도 용서받는다. 한번 용서 받으면 무슨 짓을 행하든 다 용서받는다.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마라. 이제 부정한 짓을 해도 이미 용서 받았다.”
오늘날 구원파라는 이단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악한 일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음란한 행위를 해도 다 용서 받았으니까 괜찮다는 잘못된 교훈을 두아디라교회에 퍼뜨렸습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고 성적으로 문란해도 하나님께서는 괘념치 않을 것이라면서 사람들을 꼬드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파괴하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잘못된 교훈에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두아디라교회는 예수님에게 칭찬받는 훌륭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지닌 축복받은 교회였습니다. 기독교가 자랑하는 세 가지 덕인 믿음과 인내하는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무엇보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크다고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지만 이 교회는 퇴보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장하고 진보하는 교회였습니다. 어디를 봐도 잘못된 것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세벨의 잘못된 교훈에 의해서 소중한 교회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세벨이 영적인 종교가 아니라 육체를 숭상하는 음란한 종교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색욕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와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색욕적인 적으로 대체시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곳곳에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은 육체를 숭상하는 종교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짱’, ‘몸짱’을 이야기할 때 그냥 웃으면서 지나갑니다. 사실 육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관심을 육체에 쏟아 붓는 삶의 모습으로 이 시대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육체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시간과 정성과 돈을 쏟아 붓습니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까지도 이 일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성형수술을 해서 조금 더 예뻐지는 것이 뭐 그렇게 나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성형수술을 하면서 자기 아닌 다른 인격을 추구하고 육체를 숭상하는 종교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유명한 탤런트의 모습을 뒤따라가려고 하면서 내 인격을 다른 모습으로 바꿔가려는 것이 육체 지상주의가 갖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만이 인생의 전체이고, 사람을 평가하는 전체인 것처럼 외모지상주의로 사람을 몰고 가는데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육체가 좋아하는 것은 쾌락과 즐거움입니다. 육체의 쾌락과 즐거움이 마지막으로 추구하는 것은 성입니다. 육체를 기분 좋게 하는 마지막이 바로 성의 문제입니다. 성은 가장 강렬한 자극을 인간의 육체에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이세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성을 우상으로 삼는 시대에 들어와 있습니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소중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칭찬한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한 남자와 여자를 세우시고 둘이 결혼하는 것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구약성경 아가서를 보면 한 남자와 여자가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것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이 자기 절제를 잃어버리고 대상을 잘못 선택하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장 추악한 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색욕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음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그러나 성을 육신의 욕구대로 사용하면서 육체를 손상하는 종교성속에 빠지게 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육체가 최고의 존재로 탈바꿈하여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성은 사라지며 경건성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육체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바뀝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두아디라교회가 흔들렸고 성적인 음행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서 경고와 꾸중을 하십니다.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하라. 내가 회개할 기회를 주겠다. 그 악에서부터 벗어나라.” 그러나 이들은 더 즐거운 것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우상숭배가 하나님보다 더 앞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면서 통탄해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알면서도 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하고 싶고 도전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싶어 하고 내 인생의 욕구대로 살고 싶어 하며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쓰면서 16세 되던 청소년 시절에 행한 죄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도둑질을 하고 싶었고 또한 사실 도둑질을 했습니다. 내가 도둑질을 한 것은 배가고파서가 아니오, 궁핍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착한 일을 무시하고 싶고 또 죄를 짓고자하는 강한 충동에 어쩔 수 없어 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내가 이미 더 좋은 것을 많이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훔치게 되었겠습니까? 내가 즐기고 싶었던 것은 훔친 물건이 아니라 도둑질 그 자체, 죄 그 자체였습니다. 악한 일을 할 때 악한 일을 하도록 자극한 동기는 바로 악한 의지였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내가 망해가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나의 나쁜 짓을 사랑했습니다. 그 나쁜 짓을 해서 무엇을 얻는다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짓 그 자체의 죄악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탄이 주는 이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무조건 거절하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 하는 잘못된 마음이 있어서 회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노출시키기 싫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자기가 행한 것이 악인 줄 알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개할 때 자기의 악한 모습이 노출될까봐 이것이 싫어서 회개하기를 거절합니다. 회개할 때 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누추하며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자기 스스로 대면하기 싫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스스로 괜찮은 존재라고 여기며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었는데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스스로 봐도 창피해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때로 돈을 함부로 쓰고 자랑하면서 회개를 거절합니다. 때로는 술에 잠겨 세상일을 잠시 잊으면서 회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육체의 쾌락에 빠져들면서 지금은 회개할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명예와 권력에 혈안이 되어 따라가면서 여기에 더 좋은 것이 있다며 회개를 거절합니다. 때로는 가정이라는 안온한 자리에 있으면 편안하게 여기고, 지식인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갖고 있는 적나라한 모습에 스스로를 직접대면하며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을 겁내고 도망갑니다.

회개란 용기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자신의 문제에 직면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인간의 마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것이 악한 줄 압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서 ‘아니오’를 하지 못해서 악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남이 잘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남을 꼬드기면 거기에 빠져 들어가서 함께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싫으면서도 탈출할 용기가 없어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렇게 순수하지도 착하지도 않으면서 착해야하는 강박증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인정할까? 나를 사랑할까?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이것에 따라서 선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자체가 늘 반대급부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 기대대로 해주지 못하면 마음속에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남의 눈치를 봐서 그냥 이끌려갑니다. 결정적인 ‘아니오’를 말하며 정당한 반대를 하지 못합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남이 나를 유혹할 때도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거부하고 싶은 일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끌려가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무리 못된 아들, 못된 딸이라고 해도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이는 원래 이렇지 않은데 몹쓸 친구를 만나서 이렇게 된 거에요.”
우리가 내 자신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가 할일이 아니다.” 남이 잘못된 길로 이끌어갈 때도 이렇게 말하며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난 여기서 끝낼 거야. 더 가지 않을 거야.” 때로는 친구와의 의리라고해도 끝내야 합니다. 부모라고 해도 끝내야 합니다. 우리는 용기와 담대함이 없어서 회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 실존을 흔드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부흥과 회복을 이룹시다.

회개란 인간의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뒤흔들리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하나님 앞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며 소유했던 모든 것을 인생이 보장할 수 없고, 구원을 베풀어 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회개란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 무가치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만족감, 가치관을 하나님 앞에 내동댕이치는 것입니다.
회개란 내 자신의 자아에 대한 죽음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옛 인간을 버리고 새 인간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 없는 신앙은 불가능하고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은 자기 영혼의 비참함과 누추함을 알았습니다. 죄에 대해서 이것은 ‘아니오’라는 선언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은 위기에 처해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한 거룩성을 깨달으면서 회개할 준비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종교를 잠깐 즐기고, 즐거운 말을 들으며 정신적인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기에 이런 문제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내 실존, 내 영혼 전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생명이 있고, 하나님에게 참된 구원이 있고, 하나님에게 참된 진리가 있음을 깨닫고 소중했던 것을 내려놓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나타날 때 영적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가정과 교회와 한국 교회 전체에 일어나게 될 것 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섭니다. 말씀을 우리 것으로 삼고,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옛 자아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위에서 영적인 부흥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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