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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없는 후회 : 가룟유다 – 예수님의 제자들 2 –

마태복음 27: 3 ~ 8

김지철 목사

2014.08.03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하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습니까?
첫째, 기다림의 영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결단하며 용기 있게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생각은 있어도 결단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지금까지의 삶을 떠날 수 있어야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석이 아니라 원석을 선택하셨습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기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심도 있습니다. 경쟁하며 다투기도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모습들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고 닦으면 빛이 날 사람들임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대하시며 정성과 사랑을 쏟아부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꿈과 비전을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동을 받아도 그 순간뿐입니다. 결심을 해도 그것이 지속되지를 못합니다. 삶 전체가 변화되기를 원해도 엄청난 충격이 다가오지 않는 한, 인간은 그냥 익숙한 것에 주저앉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인간이 변하게 될까요? 첫 번째, 자발적으로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시도하면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경험해 보았듯이 보통 사람에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끊임없이 마지막까지 자기 인생을 갱신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누군가 강제로 규제할 때 인간이 변합니다. 나보다 더 힘이 센 사람, 나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 나를 몰아갈 때, 내가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뿐입니다. 속은 쓰리고 기분이 나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내가 세운 계획들이 완전히 무너질 때, 내 인생이 폐기처분 당했다고 느낄 때, 자신의 무능력을 경험할 때입니다. 그렇게 인생에서 바닥을 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부딪히면서 사람은 변화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다 마지막 순간에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게 된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잠시 거꾸로 생각을 해봅시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이 살고 있던 나라는 가진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판치는 나라,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종교인들이 떵떵거리는 나라, 부자들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만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으니 얼마나 기대가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씀 앞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병치유와 기적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친히 만지시고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 모든 기적 행위를 보여 주시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은,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충격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느끼며 따라왔던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가르침에 지혜와 총명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이야기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입을 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들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예수님께 권위를 주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 예수님을 접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인품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 곁에 있어 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배려와 넉넉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이 네 가지의 특징을 동시에 다 깨달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따라가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과 같은 거대한 정치체계가 무너져야 된다, 지금과 같은 종교인들의 체제가 무너져야 된다’는 생각 속에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문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오늘은 가룟 유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그에게는 ‘예수님을 판 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보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가룟 유다를 느낍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동정심을 표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판 자, 배반자라고 낙인찍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유다는 악역을 도맡은 사람이 아닌가? 악역이 있어야 주인공이 빛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운명론적으로 주어졌다고 하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온 인류를 위해 가장 비열하고 비겁한 역할을 그가 했다고 하면, 그를 너무 비난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저도 그런 마음으로 다시 성경을 읽어보았습니다. 유다라는 인물이 있는 구절들을 보면서 다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것입니다. 유다에게는 유다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다의 영, 배반의 영이 있는 나도, 내가 잘못하면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인격보다는 예수님이 가지신 기적의 능력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돈에 관심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세상을 살 수 있고, 돈이 있어야 혁명도 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권력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는 열두 제자 중에 이러한 것에 가장 큰 관심과 호기심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다를 제자로 택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택하시면서 그가 가진 문제를 모르셨을까요? 아니요.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문제, 위험성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있었습니다. 야고보, 요한에게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를 받으라고 유다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유다에게 변화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하셨습니다. 다음 주일에 베드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베드로도 역시 유다처럼 실패했던 사람입니다. 유다가 배반한 것처럼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후회를 넘어서 회개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회개 없는 후회로 인생을 종결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유다에게 주신 회개의 기회, 변화 받을 기회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 번째, 예수님이 유다를 제자로 부르신 사실입니다. 나를 따르면서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유다야, 너의 문제를 내게 맡기지 않을래? 네가 갖고 있는 연약함을 내게 토로하지 않을래? 너의 인간적인 야망과 비전을 내가 주는 비전으로 바꿔보지 않을래?” 예수님은 그에게 요청하신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유다를 “너는 나를 배반하는 자로 죽어야 되겠다!”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숙명론을 거절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잘못들을 내가 책임지는 대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며 운명론적으로 숙명론적으로 몰고 가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관이나 인간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유다에게 재정업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책임을 지게 하신 것입니다. 책임을 지게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임한다는 뜻이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실제로 다른 제자들보다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리와 계산에 밝은 제자였습니다. 유능한 제자였습니다. “그래, 너는 똑똑한 아이니 먼저 깨닫게 되리라 생각한다. 너에게는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너의 신실함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면 좋겠다.” 하시며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직분이란 게 무엇일까요? 직책을 가졌다는 게 무엇일까요? 책임이 더 크다는 것 아닙니까? 신뢰를 더 받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즉 존중받는 귀한 자리라는 것 아닙니까? 그만큼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응답하도록 부름 받는 것이 바로 직책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두 번째 기회도 실패하게 됩니다.
세 번째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향유 붓는 여인을 통해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수난 당하는 메시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붓는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는 화를 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 얼마나 큰돈이냐! 그것은 이 공동체를 운영할 수도 있고, 나중에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킬 때 필요할 수 있는 돈인데 그것을 왜 낭비하느냐?”
유다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유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왔습니다. ‘돈이 해결책인데, 권력이 이 난국을 돌파할 능력인데, 그것들이 바로 이 민중이 억압받는 로마 세계에서 살아갈 길인데…’ 예수님의 생각과 가룟 유다의 생각이 충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이었지만 유다가 예수님을 통해서 바라보았던 것은 보이는 세계의 영광과 충만함이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 기회는 마지막 만찬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배반할 제자가 있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돌아보십니다. 그러면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팔리라.”하고 예언하십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6:25)

예수님은 그에게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주신 것입니다. “너 자신을 돌아볼 수 없겠느냐. 네가 가던 길을 멈출 수 없겠느냐. 네가 하는 그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닌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멈추라.”
하지만 가룟 유다는 이미 마음 속에서 달려왔던 자신의 생각을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예수님을 향한 배반의 길로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정죄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그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 버렸습니다. 목을 매달아 자기의 목숨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하신 것은 그가 회개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회개 없는 후회만으로 자기 인생을 끝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4절은 이러합니다.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 (마태복음 27:4)

가룟 유다는 분명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스스로에게 한계를 느끼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목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할 당위성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후회만 했습니다.

이 유다의 사건을 보다 더 정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여러 학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이 특별히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현실 감각이 뛰어났던 사람으로 열심당에 속하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거대한 제국주의 억압에서부터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 모이는 그 마음에 환호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예수님이 당신은 마지막에 수난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도 기겁을 했고, 다른 제자들도 거부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 그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유다가 예수님의 적대 세력과 야합하게 되고 손을 붙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능력을 이 세상에 보여주라고 강요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렇게 정죄 받고 십자가에서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길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길과 가룟 유다의 길은 마지막까지 평행선을 긋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까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그 마음에 독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인간적인 교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음에 기대했던 대로 예수님이 움직이지 않으시면 더 이상 예수에게 상관하지 않겠다는 자기 분리, 자기 격리를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변화받기보다는 자신에 의해서 예수님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후회는 하지만 회개하지는 않겠다고 마지막까지 버텼습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하면 그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완악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지만 내 안에는 예수님의 목표가 아니라 내 가치와 내 목표가 있습니다. 내 야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예수님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돈이 필요해서 당신을 믿게 된 것입니다. 병에 걸려서 당신을 믿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어서 당신을 믿고 따라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들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당신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는 반역의 영, 배반의 영이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하려 하지 않고, 때로는 후회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가려고 합니다. 후회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잘못을 행한 후에,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이 부정적인 후회의 감정이 커지면 자책하게 되고, 분노와 우울함으로 때로는 자살충동을 느끼게도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은 늘 절망으로 끝나버립니다.
하지만 회개는 다릅니다. 스스로 느끼는 감정은 후회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구하지만, 스스로는 용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만드신 하나님,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께 내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후회에서 회개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잘못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면서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후회를 하면 감정에 찌꺼기가 계속 쌓입니다. 그래서 후회는 후회를 낳습니다. 후회는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용서받음의 기쁨을 우리에게 허락해 줍니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줍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후회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많은 것을 하나님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잦은 실패 모두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과 함께 그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유다처럼 그저 후회만 하고 있습니까? 나를 위하여, 내 목표를 위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도구로 삼는 신앙에 멈춰서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 내 속에 이런 악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과 내 인생을 다시 열겠습니다. 나의 문제를 주님께 아룁니다.” 기도하며 내 안의 모든 것을 토해내고 있습니까?
나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나 자신만을 바라보지 않는 것, 예수님이 주신 축복에 만족하지 않고 축복을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기쁨이고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 속에도 유다에게 있었던 배반의 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하면 가까이 하고, 필요 없으면 저 멀리 가시라고 밀어내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주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실수나 실패, 좌절도 주님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그분을 내 안에 모셔 드리십시오.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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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 3 ~ 8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하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습니까?
첫째, 기다림의 영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결단하며 용기 있게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생각은 있어도 결단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지금까지의 삶을 떠날 수 있어야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석이 아니라 원석을 선택하셨습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기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심도 있습니다. 경쟁하며 다투기도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모습들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고 닦으면 빛이 날 사람들임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대하시며 정성과 사랑을 쏟아부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꿈과 비전을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동을 받아도 그 순간뿐입니다. 결심을 해도 그것이 지속되지를 못합니다. 삶 전체가 변화되기를 원해도 엄청난 충격이 다가오지 않는 한, 인간은 그냥 익숙한 것에 주저앉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인간이 변하게 될까요? 첫 번째, 자발적으로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시도하면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경험해 보았듯이 보통 사람에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끊임없이 마지막까지 자기 인생을 갱신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누군가 강제로 규제할 때 인간이 변합니다. 나보다 더 힘이 센 사람, 나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 나를 몰아갈 때, 내가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뿐입니다. 속은 쓰리고 기분이 나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내가 세운 계획들이 완전히 무너질 때, 내 인생이 폐기처분 당했다고 느낄 때, 자신의 무능력을 경험할 때입니다. 그렇게 인생에서 바닥을 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부딪히면서 사람은 변화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다 마지막 순간에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게 된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잠시 거꾸로 생각을 해봅시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이 살고 있던 나라는 가진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판치는 나라,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종교인들이 떵떵거리는 나라, 부자들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만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으니 얼마나 기대가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씀 앞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병치유와 기적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친히 만지시고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 모든 기적 행위를 보여 주시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은,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충격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느끼며 따라왔던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가르침에 지혜와 총명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이야기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입을 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들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예수님께 권위를 주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 예수님을 접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인품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 곁에 있어 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배려와 넉넉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이 네 가지의 특징을 동시에 다 깨달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따라가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과 같은 거대한 정치체계가 무너져야 된다, 지금과 같은 종교인들의 체제가 무너져야 된다’는 생각 속에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문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오늘은 가룟 유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그에게는 ‘예수님을 판 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보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가룟 유다를 느낍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동정심을 표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판 자, 배반자라고 낙인찍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유다는 악역을 도맡은 사람이 아닌가? 악역이 있어야 주인공이 빛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운명론적으로 주어졌다고 하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온 인류를 위해 가장 비열하고 비겁한 역할을 그가 했다고 하면, 그를 너무 비난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저도 그런 마음으로 다시 성경을 읽어보았습니다. 유다라는 인물이 있는 구절들을 보면서 다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것입니다. 유다에게는 유다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다의 영, 배반의 영이 있는 나도, 내가 잘못하면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인격보다는 예수님이 가지신 기적의 능력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돈에 관심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세상을 살 수 있고, 돈이 있어야 혁명도 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권력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는 열두 제자 중에 이러한 것에 가장 큰 관심과 호기심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다를 제자로 택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택하시면서 그가 가진 문제를 모르셨을까요? 아니요.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문제, 위험성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있었습니다. 야고보, 요한에게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를 받으라고 유다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유다에게 변화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하셨습니다. 다음 주일에 베드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베드로도 역시 유다처럼 실패했던 사람입니다. 유다가 배반한 것처럼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후회를 넘어서 회개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회개 없는 후회로 인생을 종결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유다에게 주신 회개의 기회, 변화 받을 기회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 번째, 예수님이 유다를 제자로 부르신 사실입니다. 나를 따르면서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유다야, 너의 문제를 내게 맡기지 않을래? 네가 갖고 있는 연약함을 내게 토로하지 않을래? 너의 인간적인 야망과 비전을 내가 주는 비전으로 바꿔보지 않을래?” 예수님은 그에게 요청하신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유다를 “너는 나를 배반하는 자로 죽어야 되겠다!”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숙명론을 거절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잘못들을 내가 책임지는 대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며 운명론적으로 숙명론적으로 몰고 가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관이나 인간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유다에게 재정업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책임을 지게 하신 것입니다. 책임을 지게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임한다는 뜻이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실제로 다른 제자들보다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리와 계산에 밝은 제자였습니다. 유능한 제자였습니다. “그래, 너는 똑똑한 아이니 먼저 깨닫게 되리라 생각한다. 너에게는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너의 신실함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면 좋겠다.” 하시며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직분이란 게 무엇일까요? 직책을 가졌다는 게 무엇일까요? 책임이 더 크다는 것 아닙니까? 신뢰를 더 받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즉 존중받는 귀한 자리라는 것 아닙니까? 그만큼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응답하도록 부름 받는 것이 바로 직책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두 번째 기회도 실패하게 됩니다.
세 번째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향유 붓는 여인을 통해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수난 당하는 메시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붓는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는 화를 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 얼마나 큰돈이냐! 그것은 이 공동체를 운영할 수도 있고, 나중에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킬 때 필요할 수 있는 돈인데 그것을 왜 낭비하느냐?”
유다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유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왔습니다. ‘돈이 해결책인데, 권력이 이 난국을 돌파할 능력인데, 그것들이 바로 이 민중이 억압받는 로마 세계에서 살아갈 길인데…’ 예수님의 생각과 가룟 유다의 생각이 충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이었지만 유다가 예수님을 통해서 바라보았던 것은 보이는 세계의 영광과 충만함이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 기회는 마지막 만찬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배반할 제자가 있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돌아보십니다. 그러면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팔리라.”하고 예언하십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6:25)

예수님은 그에게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주신 것입니다. “너 자신을 돌아볼 수 없겠느냐. 네가 가던 길을 멈출 수 없겠느냐. 네가 하는 그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닌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멈추라.”
하지만 가룟 유다는 이미 마음 속에서 달려왔던 자신의 생각을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예수님을 향한 배반의 길로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정죄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그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 버렸습니다. 목을 매달아 자기의 목숨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하신 것은 그가 회개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회개 없는 후회만으로 자기 인생을 끝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4절은 이러합니다.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 (마태복음 27:4)

가룟 유다는 분명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스스로에게 한계를 느끼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목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할 당위성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후회만 했습니다.

이 유다의 사건을 보다 더 정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여러 학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이 특별히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현실 감각이 뛰어났던 사람으로 열심당에 속하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거대한 제국주의 억압에서부터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 모이는 그 마음에 환호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예수님이 당신은 마지막에 수난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도 기겁을 했고, 다른 제자들도 거부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 그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유다가 예수님의 적대 세력과 야합하게 되고 손을 붙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능력을 이 세상에 보여주라고 강요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렇게 정죄 받고 십자가에서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길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길과 가룟 유다의 길은 마지막까지 평행선을 긋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까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그 마음에 독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인간적인 교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음에 기대했던 대로 예수님이 움직이지 않으시면 더 이상 예수에게 상관하지 않겠다는 자기 분리, 자기 격리를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변화받기보다는 자신에 의해서 예수님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후회는 하지만 회개하지는 않겠다고 마지막까지 버텼습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하면 그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완악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지만 내 안에는 예수님의 목표가 아니라 내 가치와 내 목표가 있습니다. 내 야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예수님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돈이 필요해서 당신을 믿게 된 것입니다. 병에 걸려서 당신을 믿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어서 당신을 믿고 따라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들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당신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는 반역의 영, 배반의 영이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하려 하지 않고, 때로는 후회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가려고 합니다. 후회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잘못을 행한 후에,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이 부정적인 후회의 감정이 커지면 자책하게 되고, 분노와 우울함으로 때로는 자살충동을 느끼게도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은 늘 절망으로 끝나버립니다.
하지만 회개는 다릅니다. 스스로 느끼는 감정은 후회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구하지만, 스스로는 용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만드신 하나님,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께 내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후회에서 회개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잘못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면서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후회를 하면 감정에 찌꺼기가 계속 쌓입니다. 그래서 후회는 후회를 낳습니다. 후회는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용서받음의 기쁨을 우리에게 허락해 줍니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줍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후회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많은 것을 하나님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잦은 실패 모두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과 함께 그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유다처럼 그저 후회만 하고 있습니까? 나를 위하여, 내 목표를 위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도구로 삼는 신앙에 멈춰서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 내 속에 이런 악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과 내 인생을 다시 열겠습니다. 나의 문제를 주님께 아룁니다.” 기도하며 내 안의 모든 것을 토해내고 있습니까?
나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나 자신만을 바라보지 않는 것, 예수님이 주신 축복에 만족하지 않고 축복을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기쁨이고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 속에도 유다에게 있었던 배반의 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하면 가까이 하고, 필요 없으면 저 멀리 가시라고 밀어내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주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실수나 실패, 좌절도 주님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그분을 내 안에 모셔 드리십시오.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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