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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쇠

요나 3: 5 ~ 10

김지철 목사

2016.07.10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요나의 메시지는 아주 단순하고 명확했습니다. 우리말 다섯 어절로 표현된 그의 메시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요나 3:4)”는 히브리어로도 다섯 어절로 표현됩니다. 이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요나는 하루 동안 선포했습니다.
요나는 이 말을 하루 동안 몇 번 외쳤을까요? 제가 그가 전한 메시지를 읽어 보니 빠르면 5초, 천천히 읽으면 10∼15초 정도 걸렸습니다. 1분에 한 번씩 외쳤다고 한다면 1시간에 60번입니다. 그가 하루 동안 다녔으니, 8시간을 외쳤다고 가정하면 약 480번에서 500번 정도 외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이해하는 아람어로 말했을 것입니다. 강력하게 반복되는 이 단순한 메시지는 매우 충격적인 결실을 맺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기독교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에서 가장 근접한 단어를 찾는다면, ‘자기반성’, ‘자기 성찰’일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았던 지혜의 스승들은 자기반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기반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점검하는 내적인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누구일까?’,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까?’, ‘내가 한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등의 질문으로 나타납니다.

지혜의 스승들은 자기 성찰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간파한 지혜의 스승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지혜롭다”고 말하며 “너 자신을 알라”는 명구를 남겼습니다. 또 공자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즉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알아야 진정한 앎이라고 지혜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법구경(法句經)을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不務觀彼 作與不作 常自省身 知正不正
불무관피 작여부작 상자성신 지정부정

남의 잘못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말라, 언제나 스스로를 먼저 살펴 옳고 그름을 알라는 뜻입니다.
계몽주의 근대 철학을 연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생각하는 나, 성찰하는 내가 있어야 모든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철학적 사고의 기초로 세워 나가면서 계몽주의 근대철학이 열립니다.
우리의 선배들 중에도 자기 성찰을 한 이들이 많습니다. 민족시인이었던 윤동주는, 젊은 시절 나라를 잃은 시대를 반추하면서 자기 성찰의 시를 지었습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살면서 자기반성, 자기 성찰을 탁월하게 표현한 시입니다. 제목은 ‘참회록’입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치욕의 역사 속에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고, 꿈도 꿀 수 없는 부끄러움을 표현한 시입니다. 스물네 살의 윤동주는 이 시 안에 깊은 고뇌를 담았습니다.

회개와 자기 성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자기반성, 자기 성찰을 망각한 시대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건이 터지면 우선 남을 탓하며 분노하고,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은 등한시하며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자기 성찰을 멈춘 사람들, 자신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집단은 마치 자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과도 같습니다. 이런 사회적 자폐성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불평과 분노의 치수가 자꾸만 높아감에도 불구하고 함께 고뇌하려는 노력은 점점 줄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이란 굉장히 중요한 삶의 지혜이자 태도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과 사회 전체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자기 성찰의 종교입니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자기 성찰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철저한 자기 성찰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회개와 세상에서 말하는 자기 성찰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 성찰은 사람 앞에서 하는 반성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내 내면의 세계, 즉 내가 생각하는 것, 내 속에 꿈틀거리는 욕망까지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 자기 성찰에서는 마지막까지 자아를 붙듭니다. 그 꽉 붙잡은 자아 때문에 온전한 자아 성찰이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자아를 놓지 못하는 것이 자기 성찰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니, 내 자아를 거대한 하나님 속에서 깨뜨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회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옛 자아를 벗어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삶의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의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온전한 자유자로 거듭나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기독교 입문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면서 신앙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회개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회개의 과정이 몇 개의 단계로 나타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 3:5)

평민들뿐만 아니라 지위가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곧 자신들의 죄 때문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왕도 참여했습니다(6절). 여기에 첫 번째 단계가 나타납니다. 회개란 “저 사람 탓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을 탓하는 자리에는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갈등 구조를 깨뜨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내가 누리고 가진 것이 별것 아님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요나 3:6)

왕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회개하는 장면이 이채롭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권력을 지닌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 소유가 많은 사람이 쉽게 회개하기란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면, 자신이 쌓은 지식의 탑, 권력의 탑, 재산의 탑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니느웨 왕은 왕좌에서 내려왔습니다. 먹을 것을 금하고 재 속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별것 아닙니다. 나는 죽은 존재와도 같습니다. 나보다 더 큰 통치자가 있습니다. 내가 왕이지만 나보다 더 큰 왕이 있습니다”라고 무릎을 꿇고 회개하게 됩니다. 기득권의 자리를 박찰 수 있는 것, 권위와 사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것, 교만한 자리에서 겸손한 자리로 내려오는 것, 이것은 축복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권력자와 독재자는 종종 정치적 속죄양을 만들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공표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 아버지나 남편이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야” 하면 그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가장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당신 때문이야!”라며 아내를 탓하거나 “너 때문이야”라고 자녀에게 책임을 돌리기 시작하면 가정 안에 서로를 향한 불평과 원망이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아버지이자 남편이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아룁니까? 가족들을 불러 모아놓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고백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이야기합니까?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고, 회복이 시작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 행했던 악과 불의를 과감하게 쳐부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거룩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요나 3:8)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으면서 그동안 행한 모든 악한 일에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 불이익, 거짓, 시기, 탐욕, 음란, 무자비와 폭력의 자리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베이스캠프입니다. 아내 아닌 여자를, 남편 아닌 남자를 사랑한다면 멈춰야 합니다. 가정의 축복이 곧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멈춰야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신뢰하며 내 죄악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요나 3:9)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에서의 ‘돌이키다’는 단어는 주어를 인간으로 바꾸면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KJV)에는 ‘God will repent’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바꾸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돌멩이가 아닙니다. 혹은 시계추처럼 한번 감으면 제 시간에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시는 살아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와 우리의 죄악을 토해 내면, 하나님은 그것을 들으시고 우리를 다시 받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회개는 굽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강력한 축복입니다. 부끄러운 옛 자아를 버리고 죄악을 끊어 버리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징계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십니다. 이 축복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하기를 싫어합니다. 우리의 못된 마음이 회개하기를 거부합니다. ‘회개하는 순간에 내가 너무 초라해지는 게 아닐까?’, ‘나의 형편없는 모습을 노출시키기가 싫어!’ 등의 저항의식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회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 서면, 우리는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성 앞에 서면, 우리는 연약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 앞에 서면, 우리는 안개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폼 잡아서는 안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과 대응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믿음과 신뢰와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컴퓨터에 갑작스러운 오류가 났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리셋(reset) 버튼을 누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리셋 버튼을 주셨습니다. 인생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될 때 바로 이 버튼을 누르라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주신 리셋 버튼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토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세우시고 다시 새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회개의 축복을 누리며 삽시다.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6:1)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남의 탓을 멈추고 나부터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 속에 불의와 거짓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용기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다 내려놓고 과거와 단절시킬 때,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속에 우리가 참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가 주는 복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다시 세우고 싶지 않습니까? 내가 속한 공동체를 다시 세우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회개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감싸 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시작하자고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이 귀한 회개의 은총을 경험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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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3: 5 ~ 10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요나의 메시지는 아주 단순하고 명확했습니다. 우리말 다섯 어절로 표현된 그의 메시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요나 3:4)”는 히브리어로도 다섯 어절로 표현됩니다. 이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요나는 하루 동안 선포했습니다.
요나는 이 말을 하루 동안 몇 번 외쳤을까요? 제가 그가 전한 메시지를 읽어 보니 빠르면 5초, 천천히 읽으면 10∼15초 정도 걸렸습니다. 1분에 한 번씩 외쳤다고 한다면 1시간에 60번입니다. 그가 하루 동안 다녔으니, 8시간을 외쳤다고 가정하면 약 480번에서 500번 정도 외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이해하는 아람어로 말했을 것입니다. 강력하게 반복되는 이 단순한 메시지는 매우 충격적인 결실을 맺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기독교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에서 가장 근접한 단어를 찾는다면, ‘자기반성’, ‘자기 성찰’일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았던 지혜의 스승들은 자기반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기반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점검하는 내적인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누구일까?’,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까?’, ‘내가 한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등의 질문으로 나타납니다.

지혜의 스승들은 자기 성찰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간파한 지혜의 스승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지혜롭다”고 말하며 “너 자신을 알라”는 명구를 남겼습니다. 또 공자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즉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알아야 진정한 앎이라고 지혜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법구경(法句經)을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不務觀彼 作與不作 常自省身 知正不正
불무관피 작여부작 상자성신 지정부정

남의 잘못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말라, 언제나 스스로를 먼저 살펴 옳고 그름을 알라는 뜻입니다.
계몽주의 근대 철학을 연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생각하는 나, 성찰하는 내가 있어야 모든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철학적 사고의 기초로 세워 나가면서 계몽주의 근대철학이 열립니다.
우리의 선배들 중에도 자기 성찰을 한 이들이 많습니다. 민족시인이었던 윤동주는, 젊은 시절 나라를 잃은 시대를 반추하면서 자기 성찰의 시를 지었습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살면서 자기반성, 자기 성찰을 탁월하게 표현한 시입니다. 제목은 ‘참회록’입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치욕의 역사 속에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고, 꿈도 꿀 수 없는 부끄러움을 표현한 시입니다. 스물네 살의 윤동주는 이 시 안에 깊은 고뇌를 담았습니다.

회개와 자기 성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자기반성, 자기 성찰을 망각한 시대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건이 터지면 우선 남을 탓하며 분노하고,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은 등한시하며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자기 성찰을 멈춘 사람들, 자신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집단은 마치 자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과도 같습니다. 이런 사회적 자폐성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불평과 분노의 치수가 자꾸만 높아감에도 불구하고 함께 고뇌하려는 노력은 점점 줄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이란 굉장히 중요한 삶의 지혜이자 태도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과 사회 전체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자기 성찰의 종교입니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자기 성찰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철저한 자기 성찰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회개와 세상에서 말하는 자기 성찰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 성찰은 사람 앞에서 하는 반성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내 내면의 세계, 즉 내가 생각하는 것, 내 속에 꿈틀거리는 욕망까지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 자기 성찰에서는 마지막까지 자아를 붙듭니다. 그 꽉 붙잡은 자아 때문에 온전한 자아 성찰이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자아를 놓지 못하는 것이 자기 성찰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니, 내 자아를 거대한 하나님 속에서 깨뜨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회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옛 자아를 벗어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삶의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의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온전한 자유자로 거듭나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기독교 입문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면서 신앙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회개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회개의 과정이 몇 개의 단계로 나타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 3:5)

평민들뿐만 아니라 지위가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곧 자신들의 죄 때문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왕도 참여했습니다(6절). 여기에 첫 번째 단계가 나타납니다. 회개란 “저 사람 탓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을 탓하는 자리에는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갈등 구조를 깨뜨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내가 누리고 가진 것이 별것 아님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요나 3:6)

왕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회개하는 장면이 이채롭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권력을 지닌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 소유가 많은 사람이 쉽게 회개하기란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면, 자신이 쌓은 지식의 탑, 권력의 탑, 재산의 탑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니느웨 왕은 왕좌에서 내려왔습니다. 먹을 것을 금하고 재 속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별것 아닙니다. 나는 죽은 존재와도 같습니다. 나보다 더 큰 통치자가 있습니다. 내가 왕이지만 나보다 더 큰 왕이 있습니다”라고 무릎을 꿇고 회개하게 됩니다. 기득권의 자리를 박찰 수 있는 것, 권위와 사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것, 교만한 자리에서 겸손한 자리로 내려오는 것, 이것은 축복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권력자와 독재자는 종종 정치적 속죄양을 만들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공표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 아버지나 남편이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야” 하면 그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가장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당신 때문이야!”라며 아내를 탓하거나 “너 때문이야”라고 자녀에게 책임을 돌리기 시작하면 가정 안에 서로를 향한 불평과 원망이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아버지이자 남편이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아룁니까? 가족들을 불러 모아놓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고백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이야기합니까?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고, 회복이 시작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 행했던 악과 불의를 과감하게 쳐부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거룩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요나 3:8)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으면서 그동안 행한 모든 악한 일에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 불이익, 거짓, 시기, 탐욕, 음란, 무자비와 폭력의 자리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베이스캠프입니다. 아내 아닌 여자를, 남편 아닌 남자를 사랑한다면 멈춰야 합니다. 가정의 축복이 곧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멈춰야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신뢰하며 내 죄악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요나 3:9)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에서의 ‘돌이키다’는 단어는 주어를 인간으로 바꾸면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KJV)에는 ‘God will repent’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바꾸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돌멩이가 아닙니다. 혹은 시계추처럼 한번 감으면 제 시간에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시는 살아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와 우리의 죄악을 토해 내면, 하나님은 그것을 들으시고 우리를 다시 받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회개는 굽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강력한 축복입니다. 부끄러운 옛 자아를 버리고 죄악을 끊어 버리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징계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십니다. 이 축복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하기를 싫어합니다. 우리의 못된 마음이 회개하기를 거부합니다. ‘회개하는 순간에 내가 너무 초라해지는 게 아닐까?’, ‘나의 형편없는 모습을 노출시키기가 싫어!’ 등의 저항의식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회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 서면, 우리는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성 앞에 서면, 우리는 연약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 앞에 서면, 우리는 안개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폼 잡아서는 안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과 대응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믿음과 신뢰와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컴퓨터에 갑작스러운 오류가 났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리셋(reset) 버튼을 누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리셋 버튼을 주셨습니다. 인생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될 때 바로 이 버튼을 누르라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주신 리셋 버튼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토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세우시고 다시 새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회개의 축복을 누리며 삽시다.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6:1)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남의 탓을 멈추고 나부터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 속에 불의와 거짓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용기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다 내려놓고 과거와 단절시킬 때,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속에 우리가 참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가 주는 복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다시 세우고 싶지 않습니까? 내가 속한 공동체를 다시 세우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회개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감싸 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시작하자고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이 귀한 회개의 은총을 경험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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