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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긍휼을 입은 이유

디모데전서 1: 12 ~ 17

김경진 목사

2020.06.28

<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난다면 함께 사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2006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치로의 망언’이란 말이 회자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야구의 월드컵이라 불리는 WBC 세계 대회가 열렸을 때입니다. 아시아 예선에 이어 본선이 치러진 큰 경기였습니다. 이때 스즈키 이치로가 한 말이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이치로가 아시아 예선전에 돌입하면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을 30년 동안 이길 생각도 못 할 만큼 이기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지면서, 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한국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사건입니다.
이 일로 아시아 선수들과 한국 선수들이 경기에 자존심을 걸게 되었고, 이로써 상당히 박진감 넘치는 시합이 이어졌습니다. 아시아 예선전 중 한국과 일본이 맞붙은 경기에서는 한국이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당시 경기가 끝난 뒤 이치로가 “이날은 치욕의 날이다.”라고 말했고, 또다시 그의 이야기가 회자되었습니다. 본선에 올라가 다시 한국과 일본이 맞붙는데, 그때도 한국이 일본을 이겼습니다. 그러자 이치로가 또다시 “내 생에 최대의 치욕의 날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졌습니다.
당시 일본팀은 굉장히 강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한국에 두 번 패했지만, 결국 결승에 올라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에게 축하받을 만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치로의 말 때문에 당시 일본팀이 큰 호응을 얻지 못한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치로에 대해 잘 몰랐는데,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니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1992년부터 시작한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2001년부터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의 야수로 선수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 해 신인상을 받았고, 올스타가 되었습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 줄곧 메이저리그에서 올스타로 등극한 아주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작년에 은퇴했는데,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리그에서 2,653경기를 뛰었고, 타율이 3할 1푼, 총 3,089 안타, 117개 홈런을 쳤습니다. 아주 대단한 기록을 보유한 분입니다. 2016년에 이미 세계 기네스북에 기록이 올랐으며, 일본과 미국을 통틀어 안타 수가 4,257개로 세계 최고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그러니까 2016년에 최고 기록을 달성하고, 또 3년여 동안 활동했으니까 이미 세계 기록에 훨씬 앞선 기록을 보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2006년에 했던 인터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원래 그가 한 이야기에서 조금 와전되었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조금 더 정확히 해석한 내용을 살펴보니, 당시 그의 인터뷰 내용은 이렇다고 합니다. “단순히 이기는 것만 아니라 굉장하다고 생각되고 싶습니다. 싸우는 상대가 ‘앞으로 30년은 일본에 손대지 말아야 되겠다.’라고 느끼도록 해 주고 싶습니다.” 국가 간 대항이자 자신의 팀에 힘을 주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듭니다. 자긍심 있는 포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이야기는 ‘이치로의 망언’이라고 회자되면서 이치로에게는 상당히 힘든 일을 안겨 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치로가 아시아 예선을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시아에는 사실 세상이 주목하지 못하는, 세계가 알지 못하는 좋은 선수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시아의 대표들로서 세계에 아시아의 야구 수준을 멋지게 펼쳐 보이겠습니다.” 이런 말을 했더라면, 모든 아시아 선수가 이치로를 참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마다 모든 아시아인이 마치 자기편인 것처럼 이치로를 응원하지 않았을까요?
이치로가 대한민국과의 1차전에서 패했을 때도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시아의 야구가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성장한 것이 참 감탄스럽습니다. 한국은 대단했습니다. 한국과 함께 이제 아시아의 대표로 우리가 세계 무대에 올라서게 된 것이 기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더라면, 한국도 일본도 서로 좋은 관계에서 경쟁하며 우애를 다질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일본이 그해 우승을 했을 때도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함께 축하해 줄 수 있었을 테고 말입니다.
이치로의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일본 중심적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겨야 하고, 내가 진 것은 치욕이고, 내가 두 번 진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치욕이다.’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대단한 승부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부를 갈라야 하는 운동선수에게는 좋은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조금 더 주위를 살피면서 아시아 선수 대표로서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했다면, 정말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야구 인생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 우리의 신앙 고백이 타인을 위할 때 성숙한 고백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분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간증의 내용은 그 당시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던 것으로,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총탄이 퍼부어지고 폭탄이 터지는 전투 상황에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던 이야기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에서 살려 주신다면, 제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절대로 떠나지 않고, 평생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수없이 폭탄이 터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시체를 치울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그중에는 자신의 친구도 여럿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자신만큼은 손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셔서 살아날 수 있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을 굳게 믿게 되었다는 간증이 이어졌습니다. 많은 교우가 “아멘!” 하고 화답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간증의 유형입니다. 물론 전쟁이라는 특별한 상황, 즉 생사가 걸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온 생명을 걸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살아난 것에 감사하는 모습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런 경험들을 충분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이란 판정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 간절히 울부짖으며 “나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또 그렇게 하여 살아난 것에 감사하는 것은 좋지만,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때는 조금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 이야기를 참혹한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가족이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전쟁에서 죽어 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도대체 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처참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혹은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오히려 괜찮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살았다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내가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은 철없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종종 과거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런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자세로 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이런 모습이 잘못된 것임을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의도는 좋은 쪽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나 좋은지, 어떤 축복을 받는지, 우리가 어떤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까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 세상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는 주인공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너희는 조연이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너희는 얼마든지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베트남 전쟁을 경험한 그분이 이렇게 간증했다면 어땠을까요? “참혹한 베트남 전쟁을 경험하면서 나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전쟁의 비극 앞에서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생명을 허락해 주신다면,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나가게 해 주신다면, 앞으로는 이 땅에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헌신하겠습니다.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그 전쟁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저는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허락해 주셨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제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저는 전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제 모든 삶을 바치고 있습니다.”

< 신앙인의 자기중심적인 발화는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

꽤 오래전에 읽고 마음에 담아 둔 글이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오만함의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그 글의 일부를 읽어 보겠습니다.

『근자에 한 원로 성직자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상한 표현을 한 게 마음에 걸린다. 어떻게 생각하면 종교인들의 보편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새삼스럽게 그 말이 걸린 것은 그 당사자가 일반 신도가 아니라 신도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고위 성직자였기 때문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옛날에 한국 전쟁 당시 북에서 피난을 나올 때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데, 포탄이 작렬하고 얼음장이 깨어지면서 앞뒤에서 많은 사람이 마구 빠져 죽어가더라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만은 무사히 강을 건너면서 생각할 때에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믿음이 강한 자기 자신을 나중에 귀하게 쓰시려고 일부러 살려 주셨다는 것인데, 너무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고? 그럼 죽은 사람은 뭐란 말인가?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신 것은 그들이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과 똑같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속이 좁으신 분이라는 말인가? … ‘KAL 참사가 일어나 수백 명이 생명을 잃었을 때, 그래도 기적적으로 몇 명의 사람이 살아났다. 인터뷰를 보니 역시 살아난 한 사람이 “하나님이 나중에 자신을 쓰시려고 나를 살리신 것 같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열성적인 성도라면 ‘아멘’이라고 화답하겠지만, 나의 느낌은 가슴이 쿵 무너지는 것 같이 내려앉았다. 저러면 안 되는데…. 저런 소리 하면 안 되는데…. 앞에서 고위 성직자나 이 사람이나 조금 생각을 달리했다면 진정 신도다운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분께 너무 죄송합니다. 그분들의 넋을 위로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할까? “삶과 죽음이 순간이라는 것을 절실히 경험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버리고, 나는 죽은 셈 치고 세상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말이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니, 그럼 죽은 이들의 유가족이 들으면 얼마나 통분할 일인가?』

언젠가 지인의 장례식이 있어 화장장까지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예배를 인도하신 분은 젊고 힘찬 목사님이셨습니다. 탁월한 능력을 갖고 계셨고, 사람들을 잘 독려하면서 매끄럽게 모든 장례 예식을 진행하는 목사님이셨습니다. 마지막 화장장에서 화로에 시신이 들어갈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열하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했습니다. 그때 이 젊은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찬송을 부를 텐데, 부르실 때 크게 부르십시오. 힘차게 불러서 다른 소리가 다 들어가도록 크게 불러 주십시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유족들이 큰 목소리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여러분도 가 보셔서 아시겠지만, 화장장에는 한 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 찬송, 저기서는 저 찬송을 부르기도 하고, 저쪽에서는 염불하는 소리도 들리고, 여러 소리가 섞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크게 찬송을 해서 모든 소리를 잠재우자는 것입니다. 예식이 다 끝나고 정리한 뒤, 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번에는 다른 교회 찬송에 눌려 우리가 영 그랬는데, 이번에는 참 좋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고인이 가시는 마지막 길목이 아닙니까? ‘모든 것이 다 끝나는 엄숙한 자리인데, 거기서조차 우리가 찬송 소리로 경쟁을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계속 마음에 스쳤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 목사님께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 보았습니다. “작은 소리로 찬송하며 예를 갖추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목사님, 작은 소리로 하거나 다른 장례식보다 집례자가 힘이 없으면 유족들이 섭섭해 해요.”
저는 화장장에 갈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불교인을 위한 시간을 잠시 드립니다. 그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조용히 기다립니다. 또 기독교인들을 위한 시간이 주어지고, 그때 찬송을 부르며 유족을 위로하고 고인을 떠나 보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화장장에 가면, 여기저기 다른 찬송과 다른 종교의식으로 정신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고인이 가는 마지막 엄숙한 시간을 조금 더 경건하게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에서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경청해 보십시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13~16)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셨고,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과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고백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는 내가 쓸모가 있어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는 나를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혹은 “내가 언젠가 로마서도 쓰고, 고린도서도 쓰고, 갈라디아서도 쓸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입게 하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택하신 것은, 나에게 긍휼을 입도록 하신 이유는, 나 같은 사람도 살려주셨다는 것을, 나 같은 사람도 참고 참으셔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기 위함이다.” 16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6, 새번역)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나를 살려 주시고 긍휼을 입도록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인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고,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나를 생각하는 태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압니다. 자랑할 만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오로지 겸손한 태도로 믿지 않은 사람들을 초청할 뿐입니다.

<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우리의 신앙의 지경도 확장되길 원합니다. >

2020년 6월 25일, 우리는 6.25 전쟁 70주년을 보냈습니다. 6.25 전쟁 70주년을 기념하면서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6월 25일 당일, 새벽기도회와 정오기도회를 통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6.25 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전쟁 후 70년을 지나왔는데, 그간 무언가에 포로로 잡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 전쟁의 포로, 그 영향력의 포로 안에 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위기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불렀습니다. 가난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병에서 낫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으며, 생존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가난 속에서, 전쟁 속에서, 절망 속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 보니 나만을 생각하는 나 중심의 신앙, 기복적인 신앙으로 우리의 신앙이 굳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생존을 위한 신앙의 포로기에 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낫게 해 주시는 하나님,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시는 하나님, 나를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다 보니, 나 중심의 신앙, 나의 복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굳어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70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특별한 상황까지 맞이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감염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감염병은 모든 이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배당 문을 닫기도 하고, 여러모로 감염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이 모든 지구 공동체, 생명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님을 코로나19를 통해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분명 나만 살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나만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병에 노출되면, 결국은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생활이 무너지고, 결국 그것이 나에게 또다시 영향을 미치는 경험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함께 살아야만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배워 가고 있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바라고 계시는 새로운 신앙의 차원이라고 믿습니다. 나도 살고 다른 이도 사는 신앙, 나도 살리고 다른 이도 살리는 신앙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코로나19의 상황에서 마스크를 쓰고 예배드리며, 서로 양보하며 적은 인원으로 예배드리고, 또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전쟁과 가난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나만 살기 위한 생존의 신앙을 고수해 왔다면, 이제 우리는 그 신앙의 포로기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이와 함께 공존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응답할 때입니다.

Why I Was Shown Mercy

1 Timothy 1: 12-17

In the 2006 World Baseball Classic Ichiro Suzuki, Japan’s lead player, said something that Koreans and Asians would never forget: “I will win so big that Koreans and Asians will never think of beating Japan for the next three decades.”This offended Asian players, especially Korean players. And when Korea beat Japan in the qualifying round, Ichiro said in another interview, “It was a day of humiliation.”In the end, Japan won the 2006 WBC title, but without getting much applause from its Asian neighbors.

Ichiro, as I later found out, was a phenomenal player. He was the first Asian to join the Major League Baseball in the United States. It is possible that his offensive remarks during the 2006 WBC were somewhat misunderstood. And he may have made strong remarks on purpose to boost his team’s morale. Still, his remarks were considered “reckless” by many for a long time.

What if he had said something different? What if he had said, “There are many great players in Asia. Japan, representing Asia, will show the world the power of Asia’s baseball.” If he had said something like this, other Asian countries would have applauded Japan for its win. Asians would have cheered Ichiro on whenever he made an appearance in MLB.

Upon closer scrutiny, we will find that Ichiro’s words are highly self-centered and Japan-centered. I must win. Losing is humiliating. Indeed, his desire to win was great. As an athlete this is commendable. But I believe he would have been loved and respected more if he had been more thoughtful toward other people.

When I was ministering in the United States, a man came to speak at our church. In his testimony, he mentioned that he came to believe in God after he survived the Vietnam War. He said that amid the gunfire all around, he prayed that if God delivered him from this war, he would believe that He is a living God. Countless fell around him, including friends. So many died that it was impossible to bury them all. But he did not even cuta finger. God had saved him!So he came to believe in God. The congregation replied, “Amen!”

We hear many similar testimonies. It is truly precious that he prayed to God in the battlefield. And how grateful he must be for being saved!But if we think more deeply, his testimony is rather self-centered. He may think so on a personal level, but to say that in public? Families who lost their loved ones to the Vietnam War would be crushed. Wouldn’t they ask bitterly, “What about all those who died in the Vietnam War?”

It would have been better if the speaker had said something like this: “As I saw death and destruction all around me, I questioned the existence of God and came to understand the cruelty of man.”Testifying that he came to know God was living because he alone was saved is inconsiderate, immature, and self-centered.

We cannot know God’s will completely. And the speaker may have had a certain personal confidence about giving such a testimony. After all, His ways are mysterious.

But what if the speaker had thought differently? ‘I learned the evils of war in the Vietnam War. I knew that such tragedies had to be stopped. So I prayed in that battlefield. Lord, let such devastation never happen again. After I came out of that battlefield alive, my life changed. I started to work for peace.’

Oftentimes, Christians take a similar approach as this speaker. In trying to tell other people about how much blessings they received after believing in God, they often hurt their feelings. I, a believer of Christ, am the protagonist, and you are the supporting actors. Sometimes Christians talk with so much pride and self-righteousness that they consider others worthless.

I want to share part of an impressive article I read long ago. Written by TV scriptwriter Kim Nam and publishedon March 4, 2006 in the Pastors and Elders Press, it is titled, “Pride in Being Chosen by God”:

“A strange remark recently made by a senior pastor at a press conference bothered me. It may be considered something commonly said by believers, but it lingered because the speaker was not just a lay person but a prominent leader of the Christian community.”

“What he said was pretty simple. When he fled the North during the Korean War, shells were being fired all around as he tried to cross a frozen river.People were falling into the river all around him. But amidst all this, he alone made it across the river, leading him to the sure belief that God is alive. ”

“I think he meant to say that God deliberately saved him for his strong faith and because God had plans to use him. But this is so inappropriate. Why? Because if he says that, what about all the people who died? He talks as if God allowed them to die because they were useless. But is God so petty, and does He have so little to do?”

“When a Korean passenger plane exploded in mid-air in 1987, killing hundreds of civilians, some miraculously survived. In an interview, one of the survivors said he believed he was spared because God had plans to use him. An ardent believer may have said “Amen” to this, but my heart plummeted. Please…No… Don’t say that.”

“If the senior pastor above or this survivor had been more considerate, they would have spoken words of a true believer. They would have saidthey are truly sorry for the tragic deaths, that they would live a new life to commemorate their deaths. Why weren’t they able to do so?‘I experienced life and death firsthand. So, now, I will abandon myself and live a life in service to the world.’ Is it so hard to say this? God chose me… How crushing are these words to the families of the deceased?”

In today’s scripture from 1 Timothy Paul describes himself as follows:

“Even though I was once a blasphemer and a persecutor and a violent man, I was shown mercy because I acted in ignorance and unbelief. The grace of our Lord was poured out on me abundantly, along with the faith and love that are in Christ Jesus.Here is a trustworthy saying that deserves full acceptance: Christ Jesus came into the world to save sinners—of whom I am the worst. But for that very reason I was shown mercy so that in me, the worst of sinners, Christ Jesus might display his immense patience as an example for those who would believe in him and receive eternal life.”(1 Timothy 1: 13-16)

Paul says the reason God chose him, the worst of all sinners, was to show that God saves even sinners like himself.

Read verse 16 in the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But since I was worse than anyone else, God had mercy on me and let me be an example of the endless patience of Christ Jesus. He did this so that others would put their faith in Christ and have eternal life.” (1 Timothy 1:16 CEV)

Paul, in no way, says that God chose him and called him, especially, to use him for great works. Paul says that God called him to show God saves even sinners like himself, to display the endless patience of Christ Jesus.

Paul thinks not of himself but of others. His attitude is considerate toward those not yet saved, toward those still far from God. Of course, Paul has confidence that God has saved him. He knows that he has received a special saving grace that the world does not yet enjoy. Yet, he humbles himself and thinks of the people who have yet to come to Christ.

June2020 marks the 7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Through early morning prayer and noon prayer this past week and last week’s sermon, we thought about how we should commemorate the Korean War and what we should do by studying scripture.

The 70 years reminds us of Israel’s 70 years in Babylonian exile. Perhaps the memories of war trapped us for the past seven decades. Our experience of war made us focus on survival. In crises we called out to the Lord.

It was a great gospel that we met a helping God in poverty, war, and despair. By trusting in God who protects us, who is with us, and who gives us victory, we were able overcome challenges and hard times. But our such way of life has made us self-centered Christians who pursue blessings in their faith.

As we continued to trust in God who heals us, who raises us up, who gives us success, our faith became self-centered, and we have come to focus on personal blessings.

Seventy years have passed. Now we are in the midst of a global pandemic caused by Covid-19. Infectious diseases affect everyone. Believers are not exempt from or immune to it. We are learning that all of us here on earth are one community.

We need a faith that seeks the well-being of all, not just that of ourselves. This is a new faith that God wants from us. We need to have a faith that saves not just ourselves but others.

This is why we are limiting size of Sunday service gatherings, giving up our place in Sunday service to others, wearing face masks to service, and worshiping online. We are now learning a faith of togetherness.

Faith will always have a personal level. But if our faith remains only on the personal level, we will not be able to enjoy His full, abundant grace of salvation. Now is the time to transition our faith to one that thinks ofand saves our neighbors.

God told us what we ought to have in our hearts through Paul: “But since I was worse than anyone else, God had mercy on me and let me be an example of the endless patience of Christ Jesus. He did this so that others would put their faith in Christ and have eternal life.” (1 Timothy 1:16 CEV)

God wants us to humble ourselves and interpret His love and ways from the perspective of others—as Paul did. A new era is dawning. God is calling us to break free from the old “me” faith born from war and poverty and pursue new heights in our faith, seeking His righteousness and coexistence with all those around us. Now is our time to res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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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 12 ~ 17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난다면 함께 사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2006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치로의 망언’이란 말이 회자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야구의 월드컵이라 불리는 WBC 세계 대회가 열렸을 때입니다. 아시아 예선에 이어 본선이 치러진 큰 경기였습니다. 이때 스즈키 이치로가 한 말이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이치로가 아시아 예선전에 돌입하면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을 30년 동안 이길 생각도 못 할 만큼 이기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지면서, 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한국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사건입니다.
이 일로 아시아 선수들과 한국 선수들이 경기에 자존심을 걸게 되었고, 이로써 상당히 박진감 넘치는 시합이 이어졌습니다. 아시아 예선전 중 한국과 일본이 맞붙은 경기에서는 한국이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당시 경기가 끝난 뒤 이치로가 “이날은 치욕의 날이다.”라고 말했고, 또다시 그의 이야기가 회자되었습니다. 본선에 올라가 다시 한국과 일본이 맞붙는데, 그때도 한국이 일본을 이겼습니다. 그러자 이치로가 또다시 “내 생에 최대의 치욕의 날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졌습니다.
당시 일본팀은 굉장히 강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한국에 두 번 패했지만, 결국 결승에 올라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에게 축하받을 만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치로의 말 때문에 당시 일본팀이 큰 호응을 얻지 못한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치로에 대해 잘 몰랐는데,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니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1992년부터 시작한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2001년부터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의 야수로 선수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 해 신인상을 받았고, 올스타가 되었습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 줄곧 메이저리그에서 올스타로 등극한 아주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작년에 은퇴했는데,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리그에서 2,653경기를 뛰었고, 타율이 3할 1푼, 총 3,089 안타, 117개 홈런을 쳤습니다. 아주 대단한 기록을 보유한 분입니다. 2016년에 이미 세계 기네스북에 기록이 올랐으며, 일본과 미국을 통틀어 안타 수가 4,257개로 세계 최고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그러니까 2016년에 최고 기록을 달성하고, 또 3년여 동안 활동했으니까 이미 세계 기록에 훨씬 앞선 기록을 보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2006년에 했던 인터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원래 그가 한 이야기에서 조금 와전되었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조금 더 정확히 해석한 내용을 살펴보니, 당시 그의 인터뷰 내용은 이렇다고 합니다. “단순히 이기는 것만 아니라 굉장하다고 생각되고 싶습니다. 싸우는 상대가 ‘앞으로 30년은 일본에 손대지 말아야 되겠다.’라고 느끼도록 해 주고 싶습니다.” 국가 간 대항이자 자신의 팀에 힘을 주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듭니다. 자긍심 있는 포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이야기는 ‘이치로의 망언’이라고 회자되면서 이치로에게는 상당히 힘든 일을 안겨 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치로가 아시아 예선을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시아에는 사실 세상이 주목하지 못하는, 세계가 알지 못하는 좋은 선수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시아의 대표들로서 세계에 아시아의 야구 수준을 멋지게 펼쳐 보이겠습니다.” 이런 말을 했더라면, 모든 아시아 선수가 이치로를 참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마다 모든 아시아인이 마치 자기편인 것처럼 이치로를 응원하지 않았을까요?
이치로가 대한민국과의 1차전에서 패했을 때도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시아의 야구가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성장한 것이 참 감탄스럽습니다. 한국은 대단했습니다. 한국과 함께 이제 아시아의 대표로 우리가 세계 무대에 올라서게 된 것이 기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더라면, 한국도 일본도 서로 좋은 관계에서 경쟁하며 우애를 다질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일본이 그해 우승을 했을 때도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함께 축하해 줄 수 있었을 테고 말입니다.
이치로의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일본 중심적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겨야 하고, 내가 진 것은 치욕이고, 내가 두 번 진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치욕이다.’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대단한 승부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부를 갈라야 하는 운동선수에게는 좋은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조금 더 주위를 살피면서 아시아 선수 대표로서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했다면, 정말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야구 인생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 우리의 신앙 고백이 타인을 위할 때 성숙한 고백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분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간증의 내용은 그 당시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던 것으로,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총탄이 퍼부어지고 폭탄이 터지는 전투 상황에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던 이야기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에서 살려 주신다면, 제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절대로 떠나지 않고, 평생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수없이 폭탄이 터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시체를 치울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그중에는 자신의 친구도 여럿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자신만큼은 손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셔서 살아날 수 있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을 굳게 믿게 되었다는 간증이 이어졌습니다. 많은 교우가 “아멘!” 하고 화답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간증의 유형입니다. 물론 전쟁이라는 특별한 상황, 즉 생사가 걸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온 생명을 걸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살아난 것에 감사하는 모습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런 경험들을 충분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이란 판정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 간절히 울부짖으며 “나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또 그렇게 하여 살아난 것에 감사하는 것은 좋지만,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때는 조금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 이야기를 참혹한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가족이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전쟁에서 죽어 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도대체 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처참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혹은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오히려 괜찮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살았다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내가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은 철없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종종 과거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런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자세로 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이런 모습이 잘못된 것임을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의도는 좋은 쪽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나 좋은지, 어떤 축복을 받는지, 우리가 어떤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까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 세상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는 주인공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너희는 조연이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너희는 얼마든지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베트남 전쟁을 경험한 그분이 이렇게 간증했다면 어땠을까요? “참혹한 베트남 전쟁을 경험하면서 나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전쟁의 비극 앞에서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생명을 허락해 주신다면,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나가게 해 주신다면, 앞으로는 이 땅에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헌신하겠습니다.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그 전쟁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저는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허락해 주셨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제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저는 전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제 모든 삶을 바치고 있습니다.”

< 신앙인의 자기중심적인 발화는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

꽤 오래전에 읽고 마음에 담아 둔 글이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오만함의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그 글의 일부를 읽어 보겠습니다.

『근자에 한 원로 성직자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상한 표현을 한 게 마음에 걸린다. 어떻게 생각하면 종교인들의 보편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새삼스럽게 그 말이 걸린 것은 그 당사자가 일반 신도가 아니라 신도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고위 성직자였기 때문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옛날에 한국 전쟁 당시 북에서 피난을 나올 때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데, 포탄이 작렬하고 얼음장이 깨어지면서 앞뒤에서 많은 사람이 마구 빠져 죽어가더라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만은 무사히 강을 건너면서 생각할 때에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믿음이 강한 자기 자신을 나중에 귀하게 쓰시려고 일부러 살려 주셨다는 것인데, 너무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고? 그럼 죽은 사람은 뭐란 말인가?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신 것은 그들이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과 똑같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속이 좁으신 분이라는 말인가? … ‘KAL 참사가 일어나 수백 명이 생명을 잃었을 때, 그래도 기적적으로 몇 명의 사람이 살아났다. 인터뷰를 보니 역시 살아난 한 사람이 “하나님이 나중에 자신을 쓰시려고 나를 살리신 것 같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열성적인 성도라면 ‘아멘’이라고 화답하겠지만, 나의 느낌은 가슴이 쿵 무너지는 것 같이 내려앉았다. 저러면 안 되는데…. 저런 소리 하면 안 되는데…. 앞에서 고위 성직자나 이 사람이나 조금 생각을 달리했다면 진정 신도다운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분께 너무 죄송합니다. 그분들의 넋을 위로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할까? “삶과 죽음이 순간이라는 것을 절실히 경험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버리고, 나는 죽은 셈 치고 세상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말이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니, 그럼 죽은 이들의 유가족이 들으면 얼마나 통분할 일인가?』

언젠가 지인의 장례식이 있어 화장장까지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예배를 인도하신 분은 젊고 힘찬 목사님이셨습니다. 탁월한 능력을 갖고 계셨고, 사람들을 잘 독려하면서 매끄럽게 모든 장례 예식을 진행하는 목사님이셨습니다. 마지막 화장장에서 화로에 시신이 들어갈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열하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했습니다. 그때 이 젊은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찬송을 부를 텐데, 부르실 때 크게 부르십시오. 힘차게 불러서 다른 소리가 다 들어가도록 크게 불러 주십시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유족들이 큰 목소리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여러분도 가 보셔서 아시겠지만, 화장장에는 한 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 찬송, 저기서는 저 찬송을 부르기도 하고, 저쪽에서는 염불하는 소리도 들리고, 여러 소리가 섞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크게 찬송을 해서 모든 소리를 잠재우자는 것입니다. 예식이 다 끝나고 정리한 뒤, 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번에는 다른 교회 찬송에 눌려 우리가 영 그랬는데, 이번에는 참 좋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고인이 가시는 마지막 길목이 아닙니까? ‘모든 것이 다 끝나는 엄숙한 자리인데, 거기서조차 우리가 찬송 소리로 경쟁을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계속 마음에 스쳤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 목사님께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 보았습니다. “작은 소리로 찬송하며 예를 갖추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목사님, 작은 소리로 하거나 다른 장례식보다 집례자가 힘이 없으면 유족들이 섭섭해 해요.”
저는 화장장에 갈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불교인을 위한 시간을 잠시 드립니다. 그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조용히 기다립니다. 또 기독교인들을 위한 시간이 주어지고, 그때 찬송을 부르며 유족을 위로하고 고인을 떠나 보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화장장에 가면, 여기저기 다른 찬송과 다른 종교의식으로 정신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고인이 가는 마지막 엄숙한 시간을 조금 더 경건하게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에서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경청해 보십시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13~16)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셨고,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과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고백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는 내가 쓸모가 있어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는 나를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혹은 “내가 언젠가 로마서도 쓰고, 고린도서도 쓰고, 갈라디아서도 쓸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입게 하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택하신 것은, 나에게 긍휼을 입도록 하신 이유는, 나 같은 사람도 살려주셨다는 것을, 나 같은 사람도 참고 참으셔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기 위함이다.” 16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6, 새번역)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나를 살려 주시고 긍휼을 입도록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인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고,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나를 생각하는 태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압니다. 자랑할 만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오로지 겸손한 태도로 믿지 않은 사람들을 초청할 뿐입니다.

<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우리의 신앙의 지경도 확장되길 원합니다. >

2020년 6월 25일, 우리는 6.25 전쟁 70주년을 보냈습니다. 6.25 전쟁 70주년을 기념하면서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6월 25일 당일, 새벽기도회와 정오기도회를 통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6.25 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전쟁 후 70년을 지나왔는데, 그간 무언가에 포로로 잡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 전쟁의 포로, 그 영향력의 포로 안에 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위기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불렀습니다. 가난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병에서 낫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으며, 생존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가난 속에서, 전쟁 속에서, 절망 속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 보니 나만을 생각하는 나 중심의 신앙, 기복적인 신앙으로 우리의 신앙이 굳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생존을 위한 신앙의 포로기에 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낫게 해 주시는 하나님,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시는 하나님, 나를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다 보니, 나 중심의 신앙, 나의 복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굳어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70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특별한 상황까지 맞이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감염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감염병은 모든 이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배당 문을 닫기도 하고, 여러모로 감염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이 모든 지구 공동체, 생명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님을 코로나19를 통해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분명 나만 살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나만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병에 노출되면, 결국은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생활이 무너지고, 결국 그것이 나에게 또다시 영향을 미치는 경험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함께 살아야만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배워 가고 있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바라고 계시는 새로운 신앙의 차원이라고 믿습니다. 나도 살고 다른 이도 사는 신앙, 나도 살리고 다른 이도 살리는 신앙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코로나19의 상황에서 마스크를 쓰고 예배드리며, 서로 양보하며 적은 인원으로 예배드리고, 또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전쟁과 가난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나만 살기 위한 생존의 신앙을 고수해 왔다면, 이제 우리는 그 신앙의 포로기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이와 함께 공존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응답할 때입니다.

2020년 6월 2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내가 긍휼을 입은 이유” (딤전 1:12-17)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05장, 30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딤전 1:12-1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2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제가 오래전 읽고 마음에 담아 둔 글(김남,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오만함,” 목사장로신문, 2006년 3월 4일 3면)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기자 회견 중에 한국 전쟁 당시 북에서 피란을 나올 때에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데, 포탄이 작렬하고 얼음장이 깨지면서 앞뒤에서 사람이 마구 빠져 죽어가는 상황이었답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만이 무사히 강을 건너오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라고 고백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장이라는 생존이 걸려있는 그 자리에서 그 기도는 지극히 절박했고 당연했지만, 그 간증을 곰곰이 따져보면 너무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의 요약

    만약 그 이야기를 그 전쟁의 현장에서 죽은 유족들이 들으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그러면 그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종종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알려 주려다가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나는 주인공이고, 안 믿는 너희들은 조언, 아니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는 식의 생각으로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찬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택하신 것은 한마디로 나 같은 사람도 살려주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딤전 1:16, 새번역). 사도 바울은 결코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큰일은 하게 하시려고 특별히 부르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나 같은 사람도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끝까지 참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아직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구원의 은혜를 받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낮추고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 예수를 믿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제는 나만 잘되는 신앙이 아니라, 함께 잘 되어야하는 신앙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바라시는 신앙의 자리입니다. 나도 살고 다른 이도 사는 신앙, 나도 살리고 다른 이도 함께 살리는 신앙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나만 생각했던 신앙에서 모든 이와 함께 공존하는 신앙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누기

 1. 믿는 사람들이 자주 실수하는 신앙의 개인적인 태도는 어떤 모습인가요? 

 2.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신앙의 모습을 극복하고, 내가 구원받은 이유 (내가 긍휼을 입은 이유)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나는 어떻게 내 삶 속에서 보일 수 있습니까? 

 마무리 기도

    자비의 하나님,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이유를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 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모두 함께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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