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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느헤미야 1: 4 ~ 11

김경진 목사

2020.06.21

< 오늘날 한국 사회와 교회의 위기를 바라봅니다. >

2020년 6월입니다. 1950년 6월 25일에 6.25 전쟁이 일어났으니, 꼭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6.25 전쟁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6.25 전쟁 시 이 나라가 적화되고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면, 만일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남침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 정말 속도전과 같이 일어났던 전쟁의 위험 속에서 UN군이 참전을 결정해 파병한 것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우리나라의 번영의 근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기도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이 있었다고 굳게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거주한 이래 최고의 전성기와 번영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세계 여러 나라가 부러워하는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까?
저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던 기도를 기억합니다. 유례없이 간구했던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선조들의 간절한 기도가 일제강점기를 지날 수 있게 해 주었고, 6.25 전쟁을 넘어, 오늘날 이토록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도록 해 주신 것에 정말 감사하며, 어떻게 그 감사를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있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 채, 대한민국을 겁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핵무기를 개발했으며, 여전히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 채 우리를 주시합니다. 그들의 추종 세력이 이 나라를 이념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끊임없이 노략질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승리했고, 자유와 인권, 민주의 가치를 드높였으며, 여러 측면에서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으나, 여전히 사상적인 도전과 이념적인 도발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무신론적이고 유물적인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은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이 땅에 서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있는 한, 건강한 교회가 있는 한, 그들의 사상과 이념이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각종 이단의 출현은 교회를 향한 공격을 가속화합니다. 거짓 영으로 가득한 이단들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지금도 적의를 불사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 앞에서 한국 사회의 위기를 봅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한 생각을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는 번영했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념의 문제, 갈등의 고리, 전쟁의 위기 속에서 마음을 놓지 못하는 분들이 꽤 많으실 것입니다.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파괴 소식에 슬피 울며 금식 기도합니다. >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울고 있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와 같은 모습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무너진 성벽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은 아닌가? 우리나라의 이념적인 상태는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더불어 ‘교회가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공격 받고,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이 침해당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6.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묻게 됩니다. 오늘 느헤미야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느헤미야 1;1)

‘하가랴의 아들’이라는 데서 느헤미야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가랴는 포로로 잡혀 와 바벨론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그 하가랴의 아들이 느헤미야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포 3세쯤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수산 궁에 있습니다. 수산 궁은 고대 엘람 왕국의 수도였고, 페르시아 제국의 네 수도 중 한 곳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지금 그곳에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 집안에서 3대 만에 궁에 들어가 일할 정도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통해 당시 술 맡은 관원이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진 자였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 혹은 경호실에 근무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독살이 만연하던 시기에 왕의 음료를 담당하면서 지근거리에서 왕을 모시는, 왕의 건강을 책임지고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이 바로 술 맡은 관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왕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던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던 느헤미야가 한 가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자신의 고향 예루살렘으로부터 들려온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 1;2~3)

그가 들은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참혹한 소식이었습니다. 성문이 부서졌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백성은 유린당하고 침략을 당해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느헤미야는 슬피 울며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그 내용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 1;4)

얼마나 슬펐던지 며칠 동안 음식도 먹지 못한 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느헤미야입니다.

<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언약을 되뇌며 선조들의 죄악을 회개합니다. >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고레스 왕 시절, 스룹바벨이 1차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지었습니다. 과거 솔로몬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그들이 이루었습니다.
성전 재건이 이루어지고 한참 후, 또 다른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으로 에스라가 또 다른 포로민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에스라는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신앙 회복 운동을 전개합니다. 율법을 펴서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한 뒤, 그분의 말씀에 청종하는 이스라엘을 꿈꿉니다. 그렇게 신앙 회복 운동은 전개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이 복 받을 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잘 될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신앙을 잘 지키고, 그들의 성전을 잘 세워서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고 모든 것을 지켜 주실 줄로만 믿었습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소식이 들리는데, 예루살렘이 환란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전도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고, 신앙의 정화도 일어났으나, 외부의 침입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문을 다시 달고 성벽을 재건해야 했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불탄 성문과 허물어진 성벽의 틈을 타 수많은 외세 민족이 들어와 백성을 유린하고 침공하며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고향에 남겨진 힘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금식하고 울며 주님께 나아갑니다. 교포 3세쯤 되는 이방 사람이지만, 게다가 이방 나라 페르시아에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사람이지만, 자기 민족을 잊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고향 땅을 생각하면서 울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느헤미야가 금식하고 애통하며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꺼내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다시 생각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주님께 첫 번째로 기도한 내용은 바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탄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며 간청합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 1;6~7)

느헤미야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지금 고난받고, 힘든 일을 당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여기신 선조들의 죄악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탄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 민족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어려움 속에 빠졌습니다.”라고 죄과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사실, 이 기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루살렘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거민들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멀리 예루살렘에서는 약탈과 노략질,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성문이 불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일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느헤미야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의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장의 모습을 봅니다. 이스라엘을 대신해 그들의 죄악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제사장 말입니다.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서 금식하며 간절히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기 민족을 구해 달라고 간절히 탄원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 모습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 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 교회를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 느헤미야가 조국을 위해 자신의 형통을 구합니다. >

일찍이 많은 믿음의 선조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실지언정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했습니다(출32:32). 바울 역시 자신에게는 큰 근심이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언정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롬9:1~3).
느헤미야가 가진 위대한 점이 있다면, 이스라엘의 불행과 재난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차원에서 이해하고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앞에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높이며, 하나님 앞에 믿음의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모습을 봅니다. 더불어 그가 마지막으로 하는 기도의 내용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 1;11)

이 기도의 내용을 읽다 보면, 참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울며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했고,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가 마무리될 즈음,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하나님, 나를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이 사람 앞에서,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나는 지금 술 맡은 관원입니다.”
도대체 이 기도가 무슨 기도일까요? 언뜻 이 기도만 떼어 본다면, 자신의 영달과 높아짐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 같습니다. 앞으로 더 잘 나가기 위해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후 맥락을 살펴본다면, 다소 어색하지 않습니까?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기도처럼 들립니다.
앞선 내용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안타깝게 눈물로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이어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를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내가 지금 술 맡은 관원의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라고 청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흥미롭게도 그는 기도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일과 위치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있습니다. “나는 술 맡은 관원입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으로 본다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라고 기도했더니 ‘내가 술 맡은 관원이 되었다.’라고 느껴지도록 해석이 되어 있지만, 사실 완료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술 맡은 관원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의 일을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느헤미야가 왜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요? 느헤미야는 자신이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그저 ‘누군가’를 통해 일하실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시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거나 묻어두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유린당하고 약탈당하는 예루살렘을 보면서, 다시 성벽을 재건하고 성문을 굳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성벽을 세우고 성문을 바로 세우는 일에 ‘자기 자신’이 사용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외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겸손하게 하나님의 허용과 역사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술 맡은 관원, 곧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였으나,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왕 앞에서 은혜를 받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느헤미야입니다. 이때 ‘이 사람 앞에서’라는 말이 참 흥미롭습니다. 이 ‘왕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당시 권력자는 왕이었습니다. 물론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질서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 질서 안에서 자신을 사용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 앞에서’라는 말을 오늘의 말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 앞에서,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이 사회 안에서, 내가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인정을 좀 받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리를 주셨습니다. 왕의 술을 담당하는 관원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주신 이유를 하나님 앞에서 다시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신 그 자리에서 기회를 찾고자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방어선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서, 안전한 성을 재건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가 설 자리와 역할을 찾아봅시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25 전쟁 70주년을 보내는 우리 속에 과연 이 민족을 향한 깊은 근심이 있습니까? 교회를 향한 깊은 근심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대안이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해야겠다.’, ‘나는 어떻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느헤미야가 드린 기도를 어떻게 이루시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 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느헤미야 2;1)

성경은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참혹한 현실을 들었을 때가 기슬르월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11~12월에 해당하는 달입니다. 그런데 2장으로 넘어가면 니산월이 됩니다. 3~4월에 해당하는 달입니다. 약 한 4개월이 흘렀다는 뜻입니다.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4개월 동안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가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금식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기도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당연히 수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근심하다 보니 얼굴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만 그의 근심이 왕에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큰 위기였습니다. 왕 앞에서 근심이 드러나는 것은 불경입니다. 왕에게 근심을 전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심기가 흐트러질 수 있기에 얼마든지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도리어 그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느헤미야 2;2 중)

그 곁에 왕후도 함께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왕후와 함께 있는 자리, 아마도 너그러움이 넘쳤을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때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은혜의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청하여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벽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문을 다시 세우는,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다시 굳건하게 하는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지만,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지 말라.”라고 주님께서 분명히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근심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7;10)

영혼을 위하여 하는 근심, 나라를 위하여 하는 근심, 교회를 위하여 생각하는 근심, 민족을 생각하며 주님 앞에 드리는 근심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민족, 백성, 교회에 무너진 성벽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 성벽을 재건할 수 있을까요? 고민하며 함께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백성의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우리 교회의 죄악을 주님 앞에 고백합시다. 용서를 구합시다.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주님 앞에서 중보의 자리에 함께 서십시다.
또한 느헤미야가 기도한 마지막 기도를 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를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형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민족을 위해서, 이 나라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이 교회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나에게 이 자리를 주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 이유를 압니다. 하나님, 이 자리에서 나를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나로 하여금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그 기도를 드리길 원합니다.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념의 경계를 세우는 이들이 있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유린당하며, 자유 민주주의 이념은 대한민국에서 점점 힘을 잃어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렸고, 성문이 불에 탔습니다. 이제 70주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느헤미야가 주님 앞에 고백했던 그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Why I Am Here

Nehemiah 1: 4-11

This year we commemorate the 7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The very existence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what it has become today are a miracle. If South Korea had been communized during the War, the ROK would not stand today. With Seoul besieged withinthree days of the invasion from the North, the United Nations’decision to participate in the War and send troops can only be explained as the sheer grace of God.

Furthermore, this nation would not be what it is today had it not been for the earnest prayers and struggle of Christians who interceded for their country faced with the threat of communism that sought to eradicate Christianity.

As a pastor and believer, I believe that an important foundation of Korea’s prosperity today is none other than Christians’ dedication and commitment to guard freedom and democracy on this land. I believe it was God’s hand that guided and protected the Korean people.

Today Koreans are the envy of the world. We are at the height of our history. How was this possible? As a Christian, I believe it owes to our passion for God—a passion unprecedented in world history. Korean Christians cried out ever so earnestly to God as the country went through tragic times such as the Japanese colonial rule and the Korean War. They put their hope only in God. I believe that Koreans are reaping the fruit of those prayers today.

Although we built a great ROK by God’s grace, we still face a grave threat: the DPRK. North Korea, a dictatorial regime that has passed down power from father to son for three generations, still pursues an ambition to unify the two Koreas by communizing the South. Furthermore, North Korea and its followers continue to erode South Korean society with their misled thoughts and ideas. Even though South Korea has already defeated North Korea with its successful economic development and superior system based on freedom, democracy, and human rights, South Koreais still faced with ideological challenges and crises.

People armed with atheism and materialist socialism try their best to destroy Korean churches and Christians. Such attempts aremost likely based on an assessment that Christianity and strong, healthy churches prevent the South from becoming communist. To make things worse, heresies are attacking the church, too. Today Korean churches are under attack from lying heresies and God-denying ideologies.

In today’s passage from Nehemiah, it is mentioned that Jerusalem’s walls are broken down and its gates burned with fire. This may be the very picture of Korean churches and Korea’s ideological situation today.

How should Christians live in this crisis where churches are attacked by the world and freedom and democracy threatened? As we commemorate the 7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I ask this question: How should Christians live for the nation and for the church? I pray that we will all hear God speaking to us today through Nehemiah.

The Book of Nehemiah starts with this verse: “The words of Nehemiah son of Hakaliah: ‘In the month of Kislev in the twentieth year, while I was in the citadel of Susa,’”(Nehemiah 1:1)

That Nehemiah was the son of Hakaliah reveals Nehemiah’s status and identity. Since Hakaliah was born after the Israelites went into Babylonian captivity, you may say that his son Nehemiah was a sort of third-generation Israelite living in a foreign land. Nehemiah is now working for the king in the citadel of Susa, one of the four capitals of the Persian Empire. What a tremendous achievement for an exile!

Moreover, Nehemiah was the king’s cupbearer. This was a very prominent position as the story of Joseph tells us. In today’s world it would be the equivalent of the president’s personal bodyguard or the president’s secretary.

When Nehemiah was serving the king in such a capacity, he heard news about his home Jerusalem: “Hanani, one of my brothers, came from Judah with some other men, and I questioned them about the Jewish remnant that had survived the exile, and also about Jerusalem.They said to me, ‘Those who survived the exile and are back in the province are in great trouble and disgrace. The wall of Jerusalem is broken down, and its gates have been burned with fire.’”(Nehemiah 1: 2-3)

He hears that the Jewish remnants are in distress, with the walls of Jerusalem in ruins and its gates burnt down. Hearing this, Nehemiah weeps and fasts before the Lord: “When I heard these things, I sat down and wept. For some days I mourned and fasted and prayed before the God of heaven.” (Nehemiah 1: 4)

This is the historical context of Nehemiah’s time. Zerubbabel led the first return of Jewish exiles to Jerusalem during the reign of Cyrus, building a small temple called the Zerubbabel temple. Many years later, Ezra, with the permission of King Artaxerxes, led the Jews back to Jerusalem again and started a spiritual revival. After this, the Israelites thought they would fare well in Jerusalem.

But another piece of news comes. Jerusalem is in trouble. The temple was built, and a spiritual revival had taken place, but still the Jews could not fend off attacks from other peoples. Without restoring the gates and the walls, the Jews would continue to suffer and be threatened. Nehemiah was deeply saddened. So he wept for several days and even fasted. It is astounding that a third-generation Jew who had made it to the highest ranks in a powerful foreign country wept for his homeland, a land he had never seen or set foot on. And he prayed passionately, fasting and weeping.

Today’s passage is about this prayer. How did he pray?

First, Nehemiah called upon the name of the Lord based on God’s words and covenant. Then he confessed the sins of Israel: “Let your ear be attentive and your eyes open to hear the prayer your servant is praying before you day and night for your servants, the people of Israel. I confess the sins we Israelites, including myself and my father’s family, have committed against you. We have acted very wickedly toward you. We have not obeyed the commands, decrees and laws you gave your servant Moses.” (Nehemiah 1: 6-7)

Nehemiah is saying that the fallen state of Jerusalem, the attacks, the distress, and burnt down gates are attributable to the sins of the Israelite people. He is praying to God on behalf of the wicked, stubborn, and disobedient people of Israel.In this sense, Nehemiah is like a priest before the Lord, a priest confessing the people’s sins in their stead. Through Nehemiah who weeps, fasts, and prays for the remaining Jews in Jerusalem and for his people, we learn what we should do for our country, for our people, and for our church.

Many ancestors of faith did what Nehemiah did. Moses prayed that God would forgive the sins of the Israelites even if it meant blotting him out from His book(Exodus 32:32). Paul, too, hoped his fellow Jews would be saved even if it meant himself being cursed andcut off from Christ (Romans 9:1-3).

Nehemiah takes on the sins of his people and goes to God. And holding on to God’s promises, he asks for His mercy and forgiveness.

“Remember the instruction you gave your servant Moses, saying, ‘If you are unfaithful, I will scatter you among the nations, but if you return to me and obey my commands, then even if your exiled people are at the farthest horizon, I will gather them from there and bring them to the place I have chosen as a dwelling for my Name.’They are your servants and your people, whom you redeemed by your great strength and your mighty hand.” (Nehemiah 1:8-10)

Nehemiah greatness lies in that he interpreted the disasters and suffering of the Israelites from the viewpoint of their relationship with God.

Nehemiah ends his prayer with an impressive and interesting finish: “‘Lord, let your ear be attentive to the prayer of this your servant and to the prayer of your servants who delight in revering your name. Give your servant success today by granting him favor in the presence of this man.’ I was cupbearer to the king.” (Nehemiah 1:11)

Here Nehemiah is asking God for success. He is praying for the favor of the king. The Korean translation makes it appear that Nehemiah became cupbearer after he had prayed for the favor of the king, while the original text seems to imply that he was already cupbearer at the time of his prayer. Whether he became cupbearer after or before his prayer is not critical. What is clear is that Nehemiah’s earnest prayer for his people and the fact that he was cupbearer were two inseparable things.

Nehemiah didn’t expect God to send someone else to do His work after praying for his people. He didn’t expect his prayers to be answered by God who was working in the heavenly realms. As he saw Jerusalem being attacked and looted, he knew that he had to restore its gates and its walls. And he found a concrete solution to the problem. He also found a specific way to reach that solution.

Then what was the first thing needed for the restoration of the gates and the wall? First and foremost, Nehemiah had to confess the sins of his people and ask for God’s forgiveness. So he wept, fasted, and prayed earnestly. Next, he desired to be used for the work of restoring the gates and the wall. But not by his own courage or resolve. He wanted to do this work only by the workings and allowance of God.

Although he was a trusted cupbearer of the king, he did not act rashly. He prayed that God would grant him favor “in the presence of this man,” the king.The expression “in the presence of this man” is interesting. The ruler was the king at the time. Of course, God ruled above the king, but the world’s order was moved by the king. Nehemiah knew this very well and asked God to intervene. Today, “in the presence of this man” would be the equivalent of “in the presence of the Korean people or the people of this world.” This is a prayer asking for favor in the eyes of the people who have power in this world.

God gave Nehemiah a job, a position. He made him the king’s cupbearer. God gave him this position for a reason. One must seek one’s God-given opportunity in one’s position. To do what? To rebuild the walls of Jerusalem, to restore the line of defense, to rebuild a safe and strong Jerusalem.

Dear Church, do we grieve for our people like Nehemiah? Do we have a clear, specific picture of what a solution for our people looks like? Or is it just a vague picture to you?

Chapter 2 of Nehemiah tells us how Nehemiah’s prayers were answered: “In the month of Nisan in the twentieth year of King Artaxerxes, when wine was brought for him, I took the wine and gave it to the king. I had not been sad in his presence before,” (Nehemiah 2:1)

Nehemiah first heard the devastating news about Jerusalem in the month of Kislev, which is around November and December. Chapter 2 tells us that it was the month of Nisan when his prayers were answered, that is,between March and April. Nehemiah had been praying and grieving for 4 months when one day his sadness was spotted by the King: “So the king asked me, ‘Why does your face look so sad when you are not ill? This can be nothing but sadness of heart.’ I was very much afraid,” (Nehemiah 2:2)

The king was sympathetic to Nehemiah’s sadness. The queen was alsopresent according to the Bible. With the queen by his side, the king would have kinder. This was definitely God’s time of grace. Nehemiah did not lose the moment. He asked the king’s permission to go and rebuild the walls of Jerusalem. The king consented. This was God’s grace. This was how Nehemiah was able to travel to Jerusalem and rebuild its gates and walls.

A lot happens after this, but today I will stop here. I want us to hear and learn what God is telling us today through the first part of Nehemiah’s story.

God clearly commanded us not to worry. He said not to worry about what to wear or what to eat. Yet, the Lord tells us to worry about something else. God talks about a godly worry, a godly sorrow: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1 Corinthians 7:10)The sorrow and prayers that we have for our people, our nation, and the church are godly sorrow—something that pleases the Lord.

Today what are the “destroyed gates and walls”of our nation, of our people, and of the church? May we weep and pray for these fallen walls, thinking hard about how we can rebuild them. Let’s confess the sins of our people in earnest. Let’s confess the sins of our church to God. Let’s ask for His forgiveness. Let’s intercede for them, as if their sins were mine.

And let’s remember the last part of Nehemiah’s prayer: “Give your servant success today by granting him favor in the presence of this man.’”Give me a chance to do Your work. Tell me why I am in this position, God.

A cupbearer in the citadel of Susa began the work of rebuilding Jerusalem by the favor of God. This is what we too must do. There is work to be done for our survival, but there is also work to be done for God, for His people, and for the church.

The Korean War is not over yet. There are people out thereblurring ideological lines and destroying the church. The church continues to be attacked by the people of this world, and the values of freedom and democracy being undermined in Korea. The walls have fallen, and the gates have been burned down.

This year marks the 7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And we are here. What must we do?I earnestly pray that God will use us all for the restoration of fallen walls, for the rebuilding of the walls of Jerusalem so that we may be s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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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 4 ~ 11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 오늘날 한국 사회와 교회의 위기를 바라봅니다. >

2020년 6월입니다. 1950년 6월 25일에 6.25 전쟁이 일어났으니, 꼭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6.25 전쟁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6.25 전쟁 시 이 나라가 적화되고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면, 만일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남침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 정말 속도전과 같이 일어났던 전쟁의 위험 속에서 UN군이 참전을 결정해 파병한 것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우리나라의 번영의 근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기도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이 있었다고 굳게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거주한 이래 최고의 전성기와 번영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세계 여러 나라가 부러워하는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까?
저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던 기도를 기억합니다. 유례없이 간구했던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선조들의 간절한 기도가 일제강점기를 지날 수 있게 해 주었고, 6.25 전쟁을 넘어, 오늘날 이토록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도록 해 주신 것에 정말 감사하며, 어떻게 그 감사를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있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 채, 대한민국을 겁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핵무기를 개발했으며, 여전히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 채 우리를 주시합니다. 그들의 추종 세력이 이 나라를 이념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끊임없이 노략질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승리했고, 자유와 인권, 민주의 가치를 드높였으며, 여러 측면에서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으나, 여전히 사상적인 도전과 이념적인 도발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무신론적이고 유물적인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은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이 땅에 서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있는 한, 건강한 교회가 있는 한, 그들의 사상과 이념이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각종 이단의 출현은 교회를 향한 공격을 가속화합니다. 거짓 영으로 가득한 이단들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지금도 적의를 불사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 앞에서 한국 사회의 위기를 봅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한 생각을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는 번영했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념의 문제, 갈등의 고리, 전쟁의 위기 속에서 마음을 놓지 못하는 분들이 꽤 많으실 것입니다.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파괴 소식에 슬피 울며 금식 기도합니다. >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울고 있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와 같은 모습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무너진 성벽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은 아닌가? 우리나라의 이념적인 상태는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더불어 ‘교회가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공격 받고,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이 침해당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6.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묻게 됩니다. 오늘 느헤미야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느헤미야 1;1)

‘하가랴의 아들’이라는 데서 느헤미야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가랴는 포로로 잡혀 와 바벨론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그 하가랴의 아들이 느헤미야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포 3세쯤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수산 궁에 있습니다. 수산 궁은 고대 엘람 왕국의 수도였고, 페르시아 제국의 네 수도 중 한 곳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지금 그곳에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 집안에서 3대 만에 궁에 들어가 일할 정도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통해 당시 술 맡은 관원이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진 자였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 혹은 경호실에 근무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독살이 만연하던 시기에 왕의 음료를 담당하면서 지근거리에서 왕을 모시는, 왕의 건강을 책임지고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이 바로 술 맡은 관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왕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던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던 느헤미야가 한 가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자신의 고향 예루살렘으로부터 들려온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 1;2~3)

그가 들은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참혹한 소식이었습니다. 성문이 부서졌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백성은 유린당하고 침략을 당해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느헤미야는 슬피 울며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그 내용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 1;4)

얼마나 슬펐던지 며칠 동안 음식도 먹지 못한 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느헤미야입니다.

<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언약을 되뇌며 선조들의 죄악을 회개합니다. >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고레스 왕 시절, 스룹바벨이 1차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지었습니다. 과거 솔로몬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그들이 이루었습니다.
성전 재건이 이루어지고 한참 후, 또 다른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으로 에스라가 또 다른 포로민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에스라는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신앙 회복 운동을 전개합니다. 율법을 펴서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한 뒤, 그분의 말씀에 청종하는 이스라엘을 꿈꿉니다. 그렇게 신앙 회복 운동은 전개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이 복 받을 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잘 될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신앙을 잘 지키고, 그들의 성전을 잘 세워서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고 모든 것을 지켜 주실 줄로만 믿었습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소식이 들리는데, 예루살렘이 환란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전도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고, 신앙의 정화도 일어났으나, 외부의 침입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문을 다시 달고 성벽을 재건해야 했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불탄 성문과 허물어진 성벽의 틈을 타 수많은 외세 민족이 들어와 백성을 유린하고 침공하며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고향에 남겨진 힘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금식하고 울며 주님께 나아갑니다. 교포 3세쯤 되는 이방 사람이지만, 게다가 이방 나라 페르시아에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사람이지만, 자기 민족을 잊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고향 땅을 생각하면서 울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느헤미야가 금식하고 애통하며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꺼내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다시 생각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주님께 첫 번째로 기도한 내용은 바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탄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며 간청합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 1;6~7)

느헤미야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지금 고난받고, 힘든 일을 당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여기신 선조들의 죄악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탄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 민족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어려움 속에 빠졌습니다.”라고 죄과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사실, 이 기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루살렘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거민들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멀리 예루살렘에서는 약탈과 노략질,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성문이 불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일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느헤미야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의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장의 모습을 봅니다. 이스라엘을 대신해 그들의 죄악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제사장 말입니다.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서 금식하며 간절히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기 민족을 구해 달라고 간절히 탄원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 모습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 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 교회를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 느헤미야가 조국을 위해 자신의 형통을 구합니다. >

일찍이 많은 믿음의 선조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실지언정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했습니다(출32:32). 바울 역시 자신에게는 큰 근심이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언정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롬9:1~3).
느헤미야가 가진 위대한 점이 있다면, 이스라엘의 불행과 재난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차원에서 이해하고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앞에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높이며, 하나님 앞에 믿음의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모습을 봅니다. 더불어 그가 마지막으로 하는 기도의 내용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 1;11)

이 기도의 내용을 읽다 보면, 참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울며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했고,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가 마무리될 즈음,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하나님, 나를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이 사람 앞에서,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나는 지금 술 맡은 관원입니다.”
도대체 이 기도가 무슨 기도일까요? 언뜻 이 기도만 떼어 본다면, 자신의 영달과 높아짐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 같습니다. 앞으로 더 잘 나가기 위해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후 맥락을 살펴본다면, 다소 어색하지 않습니까?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기도처럼 들립니다.
앞선 내용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안타깝게 눈물로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이어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를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내가 지금 술 맡은 관원의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라고 청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흥미롭게도 그는 기도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일과 위치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있습니다. “나는 술 맡은 관원입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으로 본다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라고 기도했더니 ‘내가 술 맡은 관원이 되었다.’라고 느껴지도록 해석이 되어 있지만, 사실 완료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술 맡은 관원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의 일을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느헤미야가 왜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요? 느헤미야는 자신이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그저 ‘누군가’를 통해 일하실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시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거나 묻어두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유린당하고 약탈당하는 예루살렘을 보면서, 다시 성벽을 재건하고 성문을 굳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성벽을 세우고 성문을 바로 세우는 일에 ‘자기 자신’이 사용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외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겸손하게 하나님의 허용과 역사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술 맡은 관원, 곧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였으나,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왕 앞에서 은혜를 받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느헤미야입니다. 이때 ‘이 사람 앞에서’라는 말이 참 흥미롭습니다. 이 ‘왕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당시 권력자는 왕이었습니다. 물론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질서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 질서 안에서 자신을 사용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 앞에서’라는 말을 오늘의 말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 앞에서,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이 사회 안에서, 내가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인정을 좀 받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리를 주셨습니다. 왕의 술을 담당하는 관원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주신 이유를 하나님 앞에서 다시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신 그 자리에서 기회를 찾고자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방어선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서, 안전한 성을 재건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가 설 자리와 역할을 찾아봅시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25 전쟁 70주년을 보내는 우리 속에 과연 이 민족을 향한 깊은 근심이 있습니까? 교회를 향한 깊은 근심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대안이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해야겠다.’, ‘나는 어떻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느헤미야가 드린 기도를 어떻게 이루시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 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느헤미야 2;1)

성경은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참혹한 현실을 들었을 때가 기슬르월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11~12월에 해당하는 달입니다. 그런데 2장으로 넘어가면 니산월이 됩니다. 3~4월에 해당하는 달입니다. 약 한 4개월이 흘렀다는 뜻입니다.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4개월 동안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가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금식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기도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당연히 수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근심하다 보니 얼굴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만 그의 근심이 왕에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큰 위기였습니다. 왕 앞에서 근심이 드러나는 것은 불경입니다. 왕에게 근심을 전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심기가 흐트러질 수 있기에 얼마든지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도리어 그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느헤미야 2;2 중)

그 곁에 왕후도 함께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왕후와 함께 있는 자리, 아마도 너그러움이 넘쳤을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때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은혜의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청하여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벽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문을 다시 세우는,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다시 굳건하게 하는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지만,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지 말라.”라고 주님께서 분명히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근심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7;10)

영혼을 위하여 하는 근심, 나라를 위하여 하는 근심, 교회를 위하여 생각하는 근심, 민족을 생각하며 주님 앞에 드리는 근심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민족, 백성, 교회에 무너진 성벽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 성벽을 재건할 수 있을까요? 고민하며 함께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백성의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우리 교회의 죄악을 주님 앞에 고백합시다. 용서를 구합시다.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주님 앞에서 중보의 자리에 함께 서십시다.
또한 느헤미야가 기도한 마지막 기도를 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를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형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민족을 위해서, 이 나라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이 교회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나에게 이 자리를 주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 이유를 압니다. 하나님, 이 자리에서 나를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나로 하여금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주십시오.” 그 기도를 드리길 원합니다.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념의 경계를 세우는 이들이 있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유린당하며, 자유 민주주의 이념은 대한민국에서 점점 힘을 잃어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렸고, 성문이 불에 탔습니다. 이제 70주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느헤미야가 주님 앞에 고백했던 그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2020년 6월 2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느 1:4-11)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18장, 51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느 1:4-11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2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2020년 6월, 우리는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삼대를 걸쳐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적화통일의 야욕에 불타고 있습니다. 오늘 느헤미야 본문을 보면, 성문이 불에 타고, 성벽이 무너지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나옵니다. 마치 그런 모습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고, 우리나라의 이념적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의 요약

    교포 3세인 느헤미야는 바벨론 수산궁에 있으면서 자신의 고향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습니다 (1:2-3). 그가 들은 소식은, 포로로 잡혀오지 않은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끊임없이 환란을 당하고, 유린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합니다 (1:4). 교포 3세쯤 되는 사람이, 이방나라이지만, 그래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힘을 자랑하는 나라의 높은 권력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가보지 않은 고향땅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1:6-7). 

   이 기도가 놀라운 것은 멀리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약탈과 노략질,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성문이 불타는 불행한 일이 바로 자신의 잘못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고집센 백성,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며 악을 행하는 미련한 백성의 잘못을 자신이 대신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민족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들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하심을 빕니다 (1:8-10). 

   그리고 그는 이 성벽을 세우고 성문을 다시 세우는 일에 자신이 사용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용기나 결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허용하심과 역사하심으로 그 일을 감당하기를 원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이지만, 임금의 총애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오늘 우리 민족, 백성, 교회에 무너진 성벽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어떻게 그 성벽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며 근심하며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합시다. 우리 교회의 죄악을 주님께 고합시다. 용서를 구합시다.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주님 앞에 중보의 자리에 섭시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기도한 마지막 기도를 늘 기억합시다. “하나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1:11).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6.25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념의 경계를 허무는 이들이 있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에,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거하는 성벽을 세우는 일에 우리 모두를 사용하여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나누기

 1. 내가 보는 이 땅과 이 민족의 걱정거리는 무엇입니까?  

 2. 나는 어떻게, 느헤미야처럼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하십니까?  

 마무리 기도

    하나님, 이 나라, 이 백성이 위기 가운데 있음을 알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원하시는 소명을 받게 하시고, 그 일에 매진하는 주님의 종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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