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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히브리서 11: 1 ~ 7

박경수 목사

2020.08.16

<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입니다. >

오늘 저희가 함께 읽은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장이라고 불립니다. 저는 히브리서 11장을 읽을 때마다 정몽주(1337~1392)가 지은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가 떠오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정몽주는 고려 말의 학자요, 충신이었습니다. 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새롭게 건국되면서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건국자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몽주만은 회유해서 조선 건국에 참여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떠보기 위해 보낸 시가 하여가(何如歌) 아닙니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 년까지 누리리라.” 아마 ‘고려면 어떻고 조선이면 어떻겠나? 그저 백 년 부귀장수 누리면 그만이지. 고려에 그렇게 큰 미련을 둘 필요가 있겠나?’ 하는 의미의 시일 것입니다.
얼마 후 정몽주가 보낸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는 이런 내용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내가 백 번 죽는다 하더라도 한 번 정한 일편단심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는가? 고려의 충신으로 살기로 마음 정했으니 조선으로 갈 수가 없다.’라는 결기가 담긴 답변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비록 정몽주는 죽었지만, 역사에서 영원히 사는 충신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이것이 오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변하지 않는 한 조각 붉은 마음, 곧 일편단심을 오롯이 드리는 것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세 명의 믿음의 선배가 나옵니다. 아벨, 에녹, 노아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믿음의 진수를 생각하고, 오늘 우리의 믿음도 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아벨의 믿음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

먼저 히브리서에 나오는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아벨의 믿음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입니다. 왜 성경은 동생 아벨의 제사가 형 가인의 제사보다 나은 제사라고 말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가인은 농산물로 제사 드렸고, 아벨은 양으로 제사 드렸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농부였기 때문에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소산인 곡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고, 목자인 아벨은 자기가 키운 양 중에 가장 건강한 양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업을 차별하시는 분도 아니고, 곡식보다 양으로 드린 제사가 더 나은 제사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아벨이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흠향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레위기의 제사 규정을 살펴보면, 양이나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라는 제사도 있지만,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라는 제사도 있습니다. 더 엄격히 말하자면 레위기의 제사 규정으로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해석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피라는 것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상징적으로 연결된다는 면에서 구속론적인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 해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풀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예배의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바로 아벨의 삶이 가인의 삶보다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 4~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창세기 4:4~5 중)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4:7 중)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가인이 의롭고 선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낯을 들 수 없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석해 줍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에는,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23장 35절에서 ‘의인 아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에서도 아벨은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아벨의 삶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이었습니다. 반면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가 기뻤던 것입니다.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삶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로마서 12:1 중)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믿음은 매일 매일의 삶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생활과 분리된 이벤트가 아니라 삶을 묶어서 드리는 믿음의 제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한 시간 동안 드리는 예배도 참으로 귀합니다. 현장에서 혹은 온라인으로 가정과 각 처소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 예배가 얼마나 복됩니까? 그러나 이것이 예배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축도가 끝나고 문밖으로 나설 때, 진정한 삶의 예배가 시작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관계에서, 삶의 자리에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곧 예배입니다. 예배 후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분투하고 노력한 뒤, 다음 주일 이 시간 이곳에 나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주님 뜻대로 살아낼 수 있게 하셨으니, 이것이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 제가 부족해서 넘어지고 실수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힘을 주옵소서.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라며 주님 뜻대로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현장 예배이자 참된 예배의 의미일 것입니다.
아벨의 삶은 그 자체로 예배였습니다. 그 삶이 의롭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예배였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아벨처럼 삶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이었습니다. >

아벨의 믿음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였다면,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에녹에 관한 내용은 아주 적습니다. 창세기 5장에도 에녹의 이야기는 몇 구절에 불과합니다. 내용 면에서도 크게 중요하거나 부각되는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창세기 5장 21~24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5:21~24)

이 말씀이 에녹에 대한 내용의 전부입니다.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갔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동행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온다는 점입니다. 에녹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일인 듯합니다. 그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계기로 에녹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고, 이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고 증언합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창을 던지는 자’입니다. 창을 던진다는 것은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아마 에녹은 하나님께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버렸습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방법대로 살아오던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고, 하나님과 손잡고 동행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 뜻과 방법, 하나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이보다 명예로운 호칭이 어디 있을까요? 얼마나 감격스러운 호칭입니까?
부모를 기쁘게 하는 사람을 ‘효자’, ‘효녀’라고 부릅니다. 정몽주처럼 임금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충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요? ‘신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 말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신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소원이 있다면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찬양대, 교사,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원이 있다면,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63장에 1절 가사가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 되기 원합니다.”입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평생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 노아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

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노아에게 믿음은 곧 ‘순종’이었습니다. 아벨의 믿음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 증명되었고, 에녹의 믿음이 동행하는 믿음이었다면, 노아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에 보니,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엄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할 때, 당연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의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 말씀을 읽다 보면, 창세기 6장 22절과 7장 5절에 두 번이나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22)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7:5)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그 말씀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순종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알아가면서 신앙적 지식을 쌓아 가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할 것입니다. 나아가 결국에는 그 말씀이 우리의 손과 발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순종이란 손과 발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순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준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노아를 보고 뭐라고 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아마 굉장히 비웃었을 것입니다. 홍수가 온다고 방주를 만들고 있는데, 하늘을 보니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입니다. 육지에서 그것도 산 위에서 배를 만들고 있는 노아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미래가 곧 현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니 홍수가 올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방주를 짓는 일에 헌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결국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시킨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의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는 말씀이 노아와 그 가족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자 되기 원합니다. >

오늘 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그 뒤에 이어지는 믿음의 선배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두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는 ‘마지막 날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나를 뭐라고 불러주실까? 아벨은 의로운 자,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노아는 의의 상속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는데, 과연 나는 하나님께 어떻게 불릴까?’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정말 멋진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사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지만 가정을 해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계속해서 기록된다면, 과연 그 기록에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아무개는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이런 사람으로 불렸다.’라는 한 줄이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벨은 삶의 예배로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고 인정받았습니다. 에녹은 동행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불렸습니다. 노아는 순종함으로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처음에 정몽주의 단심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고려 왕을 향해 일편단심을 노래했지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해 한 조각 붉은 마음을 전할 수 있기를, 끝까지 이 마음이 변치 않도록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예전에 복음송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었습니다.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오늘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섬기기로, 하나님을 믿기로, 하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우리의 마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전서 1:8 중)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벅찼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온 세상으로 퍼져 가는 것을 보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소망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온 세상으로 퍼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더는 다른 할 말이 없구나. 참으로 기쁘구나.”라고 말씀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 한 주간 믿음으로 승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Pleasing God With Faith

Hebrews 11:1-7

Hebrews chapter 11 reminds me of a poem you probably well know:Jeong Mong-ju’s“Dansimga.” Jeong (1337-1392) was a respected scholar and civil servant in the late Goryeo Dynasty. “Dansimga”was written when the Goryeo Dynasty was declining and the new Joseon Dynasty, led by Yi Seong-gye,was rising. Supporters of the newdynasty argued that all those loyal to the old one had to be purged and killed. But Yi wanted to persuade at least Jeong to join him in building his new dynasty. So, he ordered his son, Yi Bang-won, to sway Jeong’s heart. “Hayeoga” was the poem that Yi Bang-won wrote to probe Jeong’s intentions: “What shall it be: this or that? / The walls behind the temple of the city’s deity has fallen – shall it be this? / Or if we survive together nonetheless – shall it be that?” Jeong responded with “Dansimga”:“Though I die and die again a hundred times, /That my bones turn to dust, whether my soul remains or not, / Ever loyal to my Lord, how can this red heart ever fade away?”This poem made Yi Bang-won realize that persuading Jeong was impossible, prompting him to kill Jeong on a dark, stone bridge. A green bamboo shoot is known to have budded where Jeong’s blood was spilled, giving the bridge its name Sungjookgyeo. Although Jeong was murdered, he became the perfect example of a loyal servant and his name lives on forever in history. I believe that the Christian faith is likeJeong’scomplete loyalty. The common trait of all those mentioned in Hebrews 11 istheir complete loyalty to God. Among the names mentioned in Hebrews 11,today I would like to explore the lives of Abel, Enoch, and Noah, in particular, to find the essence of faith.

First, through Abel’s story we find that faith is worshiping God with our lives. Hebrews 11:4 says, “By faith Abel brought God a better offering than Cain did.” Then how exactly was Abel’s offering better than that of Cain? Many have it that Abel’s offering was better because he gave God his cattle, while Cain offered crops. However, this does not make any sense at all. Cain was a farmer and Abel a shepherd, which makes it only natural for Cain to offer crops and Able his flock. If a lamb were a better sacrifice than a fruit, who would want to be a farmer? God does not discriminate on the basis of profession. Furthermore, the explanation that Abel’s offering was better because it shed blood does not make sense either. In Leviticus, we find not only animal sacrifices but also the Grain Offering. Focusing on blood is not entirely without merit in terms its emphasis on redemption, but it would be farfetched to say that “blood” was the differentiating factor between the offerings of Cain and Abel. God is not exactly a blood-thirsty vampire, is He?

Then what differentiated Abel’s offering from that of Cain? It was his life. Genesis 4:4-5 says, “the Lordlooked with favor on Abel and his offering, but on Cain and his offering he did not look with favor.” This verse tells us that God did not just look at the offerings themselves but at Abel and Cain.In fact, it is the person, not his offering, that is important. Genesis 4:7 tells us why God was displeased with Cain and his offering. God rebukes Cain with these words: “If you do what is right, will you not be accepted?” This tells us that Cain’s life was not righteous. First John 3:12 says, “Do not be like Cain, who belonged to the evil one and murdered his brother. And why did he murder him? Because his own actions were evil and his brother’s were righteous.” Here we also see that Cain’s actions were evil,while Abel’s were righteous. Our Lord also recognized Abel as “righteous” in Matthew 23:35—as does today’s passage from Hebrews. In other words, God received Abel and his worship because his life was more righteous and pure than that of Cain. Abel worshipped God with his righteous life, which God accepted.

Paul says in Romans 12:1: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and sist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pleasing to God—this is your true and proper worship.” Here worship means giving your life as a living sacrifice. Faith is worshipping God with your life every day. Worship cannot be separated from life. They must be bound together to give God an offering of faith. Dear Church, what is worship? This one-hour service on Sunday is a worship to God. But it’s not all. It’s only part of the whole worship. In fact, our worship continues the moment we leave this hall, which is why we have the term “liturgy after liturgy.” After this service, our struggle to please God by living according to His will—in our homes, workplaces, schools, and relationships—starts. Next Sunday, when we come back to service—here or online—we will thank God for giving us faith and grace to live according to His will, repent honestly about our failures and mistakes despite our efforts, and askHim to give us strength to stand again. God will surely receive our worship after examining our lives this past week. He will also give us the strength and courage to live another week according to His will. God accepted the sacrifice of Abel who lived a righteous life. I pray that you and I will become men of faith who offer God our lives as a pleasing sacrifice.

Through Enoch we learn that faith is to walk with God. Genesis 5:21-24 tells us that Enoch had Methuselah at the age of 65 and walked with God for another 300 years. This tells us that Enoch started to walk closely with God after giving birth to Methuselah. Methuselah’s birth marked a critical turning point for Enoch. That is why he started walking closely with God. Methuselah literally means “one who throws a spear,” which is God’s warning against judgement. Methuselah was God’s warning signal about judgement. After this warning, Enoch got his act together and started living a life of faith, walking closely with God.

Surprisingly, God’s warning comes to pass. In Genesis 5:25 Methuselah gives birth to Lamech at the age of 187. Genesis 5:28 says Lamech had Noah when he was 182 years old. And in Genesis 7:6, when Noah was 600 years old, there was the great flood. So how old was Methuselah when the flood came? He was 969 years old. (187+182+600=969)The flood started immediately after his death. Methuselah was indeed God’s warning signal.

God was greatly pleased with the faith of Enoch who took His Word seriously and walked closely with Him. That is why he was commended as “one who pleased God.” No commendation would be more precious than this to a man of faith. A daughter/son who pleases his/her parents is called a filial daughter/son. A servant who pleases his king is called a loyal subject. A person who pleases God is called a Christian, that is, a man of faith. A pastor’s desire is to become a true Christian. So is the desire of an elder. This goes for deacons, too. Today’s Scripture from Hebrews 11:6 also clearly says that we cannot please God without faith. I hope that you and I will become men of faith who please God by taking His word to heart and walking with Him.

Through Noah we learn that faith is obedience. In today’s passage it says that Noah built an ark “in holy fear” after hearing God’s Word. Having a holy fear is to tremble before the Lord. Paul also teaches us in Philippians 2:12 to “continue to work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Receiving HisWord with fear and trembling leads to obedience. It is mentioned twice—in Genesis 6:22 and 7:5—that “Noah did everything just as God commanded him.” Faith is to obey God with fear and trembling out of holy reverence of His Word.

Noah’s faith shines in contrast to Lot’s sons-in-law in Genesis chapter 19. Before pronouncing judgement on Sodom and Gomorrah, God tells Lot and his family to leave the city through an angel. But Genesis 19:14 says that Lot’s sons-in-law thought Lot was “joking.” Lot’s wife, who also took God’s words lightly, turned into a pillar of salt after she looked back on the city. God’s Word is not to be taken lightly or as a joke.

Noah and his family who received God’s Word with holy fear and obeyed Him was blessed with salvation. How foolish he would have appeared building a massive ark on dry land—on top of a mountain, at that!—when there wasn’t even a cloud in the sky! But as Hebrews 11:1 tells us, “Faith is confidence in what we hope for and assurance about what we do not see.” Like these words, Noah would have built the ark with urgency because the flood was already the present in his eyes of faith. To the believer, the future is already the present—just as Jesus told Thomas in John 20:29, “Because you have seen me you have believed;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believed.” A believer sees with faith although he has not yet seen it. Noah saw no sign of rain—let alone, a flood—but he knew that God’s warning would come true because he believed in God. As result of his obedience to God out of holy fear, his boat became a salvation ark. Eight people—he and his family—were saved.It is fascinating that the Chinese character for boat (船) is a combination of ark (舟) and eight mouths (八+口). Peter’s words in 1 Peter 1:9, “for you are receiving the end result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were fulfilled in Noah and his family. I hope that we, too, may receive salvation through faith and obedience by receiving God Word with a holy fear.

Abel’s faith was worshipping with his life. Enoch’s faith was to walk with God. For Noah, faith was obedience. What is your faith? What kind of faith do you have? As for myself, faith is to know that I am in God’s good hands—whether I am happy, sad, joyous, down, at peace, or in trials. Like the slogan of Allstate Insurance “You are in good hands,” Faith is to know that you are always in God’s good hands. The 2nd verse of hymn 620, “Gathered Here Within This Place,” goes like this: “Though at times, we may not understand / I believe I’m always in His will.” This is the very essence of faith.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Romans 8:28) This is why Christians can have courage and hope in all circumstances.This hope comes from God’s promise, as stated in Hebrews 13:5: “Never will I leave you;never will I forsake you.” I hope that you and I will become blessed people of God who keep their faith, a flower of hope and thanksgiving that blooms beautifully even in the darkest andmost despairing times.

Meditating on today’s Scripture, I asked myself two questions. First, what would God call “me”when I stand before Him at the last day? Abel was called “righteous”, Enoch “one who pleased God”, Noah “heir of the righteousness”,Abraham“the father of faith”, and Moses “friend of God”. What would He call me and you?Second, if God were to rewrite the chapter of faith at the last day, would my name be in it? Dear Church, let’s give ourselves to the Lord completely so that we, too, may be included in the chapter of faith.

Faith is worshipping with our lives. When we do this, God commends us as righteous, just as He did Abel. Faith is to walk closely with God. When we walk with Him, we will please God just as Enoch did. Faith is to obey God. When we obey, we are redeemed like Noah and his family. I talked about Jeong Mong-ju’s complete loyalty at the beginning of my sermon. “Though I die and die again a hundred times, /That my bones turn to dust, whether my soul remains or not, / Ever loyal to my Lord, how can this red heart ever fade away?” Let us be “ever loyal” to our Lord. I pray that this lyric of a gospel song will be our song: “My mind is set / Don’t let it change.” In his letter to the Thessalonians Paul writes, “The Lord’s message rang out from you not only in Macedonia and Achaia—your faith in God has become known everywhere. Therefore we do not need to say anything about it.” (1 Thessalonians 1:8) I pray in the name of the Lord that Somang Church will be known everywhere for its faith and its sweet ar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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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 1 ~ 7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입니다. >

오늘 저희가 함께 읽은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장이라고 불립니다. 저는 히브리서 11장을 읽을 때마다 정몽주(1337~1392)가 지은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가 떠오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정몽주는 고려 말의 학자요, 충신이었습니다. 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새롭게 건국되면서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건국자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몽주만은 회유해서 조선 건국에 참여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떠보기 위해 보낸 시가 하여가(何如歌) 아닙니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 년까지 누리리라.” 아마 ‘고려면 어떻고 조선이면 어떻겠나? 그저 백 년 부귀장수 누리면 그만이지. 고려에 그렇게 큰 미련을 둘 필요가 있겠나?’ 하는 의미의 시일 것입니다.
얼마 후 정몽주가 보낸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는 이런 내용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내가 백 번 죽는다 하더라도 한 번 정한 일편단심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는가? 고려의 충신으로 살기로 마음 정했으니 조선으로 갈 수가 없다.’라는 결기가 담긴 답변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비록 정몽주는 죽었지만, 역사에서 영원히 사는 충신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이것이 오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변하지 않는 한 조각 붉은 마음, 곧 일편단심을 오롯이 드리는 것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세 명의 믿음의 선배가 나옵니다. 아벨, 에녹, 노아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믿음의 진수를 생각하고, 오늘 우리의 믿음도 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아벨의 믿음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

먼저 히브리서에 나오는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아벨의 믿음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입니다. 왜 성경은 동생 아벨의 제사가 형 가인의 제사보다 나은 제사라고 말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가인은 농산물로 제사 드렸고, 아벨은 양으로 제사 드렸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농부였기 때문에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소산인 곡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고, 목자인 아벨은 자기가 키운 양 중에 가장 건강한 양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업을 차별하시는 분도 아니고, 곡식보다 양으로 드린 제사가 더 나은 제사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아벨이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흠향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레위기의 제사 규정을 살펴보면, 양이나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라는 제사도 있지만,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라는 제사도 있습니다. 더 엄격히 말하자면 레위기의 제사 규정으로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해석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피라는 것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상징적으로 연결된다는 면에서 구속론적인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 해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풀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예배의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바로 아벨의 삶이 가인의 삶보다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 4~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창세기 4:4~5 중)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4:7 중)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가인이 의롭고 선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낯을 들 수 없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석해 줍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에는,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23장 35절에서 ‘의인 아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에서도 아벨은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아벨의 삶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이었습니다. 반면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가 기뻤던 것입니다.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삶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로마서 12:1 중)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믿음은 매일 매일의 삶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생활과 분리된 이벤트가 아니라 삶을 묶어서 드리는 믿음의 제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한 시간 동안 드리는 예배도 참으로 귀합니다. 현장에서 혹은 온라인으로 가정과 각 처소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 예배가 얼마나 복됩니까? 그러나 이것이 예배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축도가 끝나고 문밖으로 나설 때, 진정한 삶의 예배가 시작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관계에서, 삶의 자리에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곧 예배입니다. 예배 후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분투하고 노력한 뒤, 다음 주일 이 시간 이곳에 나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주님 뜻대로 살아낼 수 있게 하셨으니, 이것이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 제가 부족해서 넘어지고 실수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힘을 주옵소서.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라며 주님 뜻대로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현장 예배이자 참된 예배의 의미일 것입니다.
아벨의 삶은 그 자체로 예배였습니다. 그 삶이 의롭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예배였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아벨처럼 삶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이었습니다. >

아벨의 믿음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였다면,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에녹에 관한 내용은 아주 적습니다. 창세기 5장에도 에녹의 이야기는 몇 구절에 불과합니다. 내용 면에서도 크게 중요하거나 부각되는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창세기 5장 21~24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5:21~24)

이 말씀이 에녹에 대한 내용의 전부입니다.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갔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동행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온다는 점입니다. 에녹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일인 듯합니다. 그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계기로 에녹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고, 이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고 증언합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창을 던지는 자’입니다. 창을 던진다는 것은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아마 에녹은 하나님께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버렸습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방법대로 살아오던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고, 하나님과 손잡고 동행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 뜻과 방법, 하나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이보다 명예로운 호칭이 어디 있을까요? 얼마나 감격스러운 호칭입니까?
부모를 기쁘게 하는 사람을 ‘효자’, ‘효녀’라고 부릅니다. 정몽주처럼 임금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충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요? ‘신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 말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신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소원이 있다면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찬양대, 교사,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원이 있다면,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63장에 1절 가사가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 되기 원합니다.”입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평생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 노아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

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노아에게 믿음은 곧 ‘순종’이었습니다. 아벨의 믿음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 증명되었고, 에녹의 믿음이 동행하는 믿음이었다면, 노아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에 보니,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엄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할 때, 당연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의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 말씀을 읽다 보면, 창세기 6장 22절과 7장 5절에 두 번이나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22)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7:5)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그 말씀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순종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알아가면서 신앙적 지식을 쌓아 가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할 것입니다. 나아가 결국에는 그 말씀이 우리의 손과 발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순종이란 손과 발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순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준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노아를 보고 뭐라고 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아마 굉장히 비웃었을 것입니다. 홍수가 온다고 방주를 만들고 있는데, 하늘을 보니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입니다. 육지에서 그것도 산 위에서 배를 만들고 있는 노아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미래가 곧 현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니 홍수가 올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방주를 짓는 일에 헌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결국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시킨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의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는 말씀이 노아와 그 가족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자 되기 원합니다. >

오늘 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그 뒤에 이어지는 믿음의 선배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두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는 ‘마지막 날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나를 뭐라고 불러주실까? 아벨은 의로운 자,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노아는 의의 상속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는데, 과연 나는 하나님께 어떻게 불릴까?’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정말 멋진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사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지만 가정을 해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계속해서 기록된다면, 과연 그 기록에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아무개는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이런 사람으로 불렸다.’라는 한 줄이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벨은 삶의 예배로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고 인정받았습니다. 에녹은 동행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불렸습니다. 노아는 순종함으로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처음에 정몽주의 단심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고려 왕을 향해 일편단심을 노래했지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해 한 조각 붉은 마음을 전할 수 있기를, 끝까지 이 마음이 변치 않도록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예전에 복음송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었습니다.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오늘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섬기기로, 하나님을 믿기로, 하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우리의 마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전서 1:8 중)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벅찼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온 세상으로 퍼져 가는 것을 보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소망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온 세상으로 퍼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더는 다른 할 말이 없구나. 참으로 기쁘구나.”라고 말씀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 한 주간 믿음으로 승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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