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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 살리시는 주님

요한복음 21: 12 ~ 17

김경진 목사

2020.04.19

<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부활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5월 첫 주일부터는 예배당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분이 다 모이지는 못하겠지만, 5월부터는 현장에서도 함께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독특성과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가 전 세계적으로 10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다른 질병이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 교우들 가운데 몇몇 분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고, 그 가운데는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도 있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간접적으로 계속해서 겪어야 할 아픔입니다. 죽음을 직면할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회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인간은 참 절망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하지만 부활 신앙은 종말론적인 죽음 앞에서만 희망을 주는 게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통해 전해 드렸듯이, 부활 신앙은 현세적인 우리 삶에도 매우 큰 도움을 주며 희망을 선사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중)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은 사람에게도, 죽어 가는 사람에게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매우 놀랍고 고귀한 진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또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부활 신앙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하며, 의미가 있고, 희망을 준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를 통해 저는 ‘우리가 어떻게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살아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지난 주일에 한 가지 강조하지 않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지만, 현세적인 의미에서의 부활 역시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살리시는 주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부활의 삶이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 신앙을 이렇게 다시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부활입니다.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어느 신문사에서 지난 주일에 전한 설교 전문을 실어 주셨습니다. 담당 기자분이 제 설교문을 간단히 요약하면서 “부활 신앙은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표현해 주셨는데, 아주 잘 정리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로 태어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내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 실망하고 좌절한 삶의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

지난 주 설교에 이어, 오늘은 ‘부활 신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것이 되는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죽음을 맞은 순간 부활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부활해야지.’라고 마음먹거나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완벽히 죽음에 삼켜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부활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현세적으로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 즉 삶 속에서 부활을 경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지.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나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새롭게 창조되는 경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펴주셔서 진정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부활 신앙과 부활의 삶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례 중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려 합니다. 잘 알려진 베드로의 경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의 부활로 이어지는지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참 마음이 묘합니다. 마치 어떤 동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요한복음 20장까지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 같은데, 그 뒤에 한 장이 덧붙여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시고, 그에게 소명을 허락하신 사건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고, 그림이 그려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뭔가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지는 듯하고, 바닷가 소리도 들리는 듯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상상하시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립니다. 잔잔한 바닷가에 찾아온 깜깜한 밤, 그리고 서서히 동이 틉니다. 밤새 고기를 잡으려 한 제자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들이 바다 위의 배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실망감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도망치듯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아무런 의미도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배를 타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이들이 ‘고기를 잡아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 3년 동안이나 못 잡은 고기를 잡아 세상으로 돌아가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바다로 나갔을까요? ‘이제 다시 실력 발휘를 해 보자. 옛 실력이 살아 있는지 확인해 보자.’라며 그물을 던졌을까요? 적어도 그런 마음으로 그물을 던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한복음 21:3)

어떤 느낌이 오십니까? “고기를 잡으러 가야겠다.”라는 이 말을 베드로가 언제쯤 했을까요? 바닷가에 앉아서 떠 있는 배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 생각을 했겠지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아마 그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주님을 만나면 무슨 낯으로 뵐 수 있을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건 맞나?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무슨 말로 사죄를 해야 할까?’
밤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배를 타고 나가야겠다. 고기나 잡으러 나가야겠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올라탄 배에 다른 제자들도 함께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고기잡이에는 큰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하염없이 배를 타고 나갔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물을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내렸다가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을 보곤, 한참 동안 머물러 있다가 다시 그물을 내릴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하염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고기를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날이 새어가는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멀리 서 계십니다. 바닷가에 서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한마디 말씀’을 하시고 ‘그 일’을 하는 순간, 그분이심을 확신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들어본 목소리입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자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사실 그들에게 많은 고기를 잡는다는 건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사인이 되었습니다.

< 부활 신앙이란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때로 내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

그 순간 베드로는 이전에 처음 주님을 만났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던 첫날을 누가복음 5장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바닷가의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는데, 사실 그 전날부터 베드로는 하루 종일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와 그물을 정리하고 있던 그의 배에 예수님이 올라타십니다. ‘이분이 갑자기 왜 오셨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예수님이 배를 조금 띄우라고 말씀하시고는 몰려든 많은 사람을 향해 긴 연설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옆에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참 신기한 분이다. 대단한 분이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신 후 ‘깊은 데’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또 그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님께 엎드려 외쳤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십시오.” 이것이 베드로가 경험한 첫 번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 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 베드로는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만드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자리,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죽이고,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단,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찾아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선포는 단순한 외침만이 아닙니다. 이 선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셨다는 환호인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환호입니다.
부활 신앙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신다.”라는 믿음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이 살아나셔서 그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로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날의 기억으로 베드로를 초청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났던 장소와 시간으로 초청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 은혜의 장소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 부활 신앙이란 부끄러운 내 삶을 수용하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

두 번째로 베드로가 육지로 올라왔을 때, 주님은 숯불을 피워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자리로 베드로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 내놓고 싶지 않은 자리, 죄악의 자리입니다. 너무나 죄송한 자리, 그 자리로 베드로를 이끄십니다. 그리고 음식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 “네가 왜 나를 배신했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또 “내가 너에게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지? 그대로 되었지?”라고 확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식탁을 차려 주시며, 십자가에 달리기 전 마지막 날 함께했던 식탁과 똑같은 자리로 초대하셨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들과 헤어졌던 마지막 식탁과 똑같은 자리로 베드로와 제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과거와는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제자였습니다. 수제자였습니다. 가까이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는 그랬습니다. 그때는 당당했습니다. 떳떳했습니다. 힘찼습니다. 그러나 이 새벽은 다릅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두려워 떨며 배신했던 뼈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제자들을 대우하십니다. 그들에게 똑같은 식사를 허락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용서’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죄’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회개’와 ‘주님의 용서’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라는 말도 없고, 용서라는 말도 없고, 회개라는 말도 없는데, 어떻게 이 장면에서 용서와 회개, 연합이 생각나는 것일까요?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음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정작 두 번째,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는 그런 말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죄송해서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의 자리, 나의 현실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우십니다. 나의 죄악의 자리, 부족함의 자리를 보게 하시며, 식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곳이 바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죄라는 말은 없지만, 용서가 경험됩니다. 사죄라는 말이 없는데도 연합이 경험됩니다. 죄라는 말이 없어도 좋습니다. 회개라는 말이 없어도 좋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어도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십니다. “용서는 내가 했다. 이미 모든 죄를 내가 용서했다. 하나님과 모든 죄를 해결했다. 그러므로 이제 너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수용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십니다. 나를 안아주십니다. 가장 추한 자리까지 알고 계시는 그분이 나를 온전히 안아 주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경험입니다. 우리도 이 부활의 자리로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실패한 자리, 좌절하는 자리, 부끄러운 자리에 찾아오시며, 다시 우리를 초대하시고 안아 주시는 주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 부활 신앙이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삶에서 실현됩니다. >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해서였을까요? 주님께서는 세 번 다시 고백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어보신 것은 단 하나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없고, 나 자신을 스스로 죽일 수도 없고, 나 자신이 스스로 살아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가 다시 만날 때, 한 가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고백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단 한 가지 일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할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소명을 새롭게 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새 소명이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다시 소명을 받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양을 먹이고, 양을 이끄는 막중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부활입니다.
이제는 그저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망하고 좌절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존재도 아닙니다. 과거에 지은 죄에 치여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회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닙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새 소명을 받았습니다. 사명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죽어서 천당 간다는 내세적인 신앙만이 부활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림 받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가 아닙니다. 내 결심으로도 아닙니다. 내 생각으로도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용서로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한 가지 사실만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 앞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듯이 오늘 우리 앞에 계십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모든 죄를 용서하고, 내가 너를 받아들이고, 내가 너를 새롭게 하리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너를 고치리라. 네가 나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너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축복이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십시다. 새로운 존재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The Risen Lord, The Lord Who Saves

John21:12-17

“Jesus is risen! He trulyis!”

Resurrection faith is at the very center of the Christian faith. Its identity and uniqueness lie in His resurrection.

The coronavirus has taken more than 100,000 lives worldwide. Sadly, SomangChurch has seen a death, too. As the number of deaths rises, His resurrection is our source of a deeper hope, one that defeats death.

This, however, does not mean that resurrection faith provides hope only from an eschatological perspective. Last week, I said that resurrection faith providesmeaning and poses challenges in our “present” lives.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The 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they die;and whoever lives by believing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John 11:25-26)

Here Jesus says that He is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also says this affects both the living and the dead. In other words, His resurrection gives eternal life to all, both the living and the dead.

Last week, I talked about how we can participate in His resurrection. While it is true thatresurrection faith provides comfort to those facing death and to the bereaved, it also gives hope and meaning to all that are living in this world.

However, this does not imply that the Christian resurrection is a resurrection in the secular sense. As I said last week,resurrection faith is to die with Christ and to be reborn as a new creation whose character resembles that of Jesus.

The secular resurrection is different from our Lord’s resurrection in two aspects. First, the secular notion of resurrection does not abandon its secular values. Someone who follows a secular resurrection uses the word “resurrection” when he makes money, gains power, or restores his athletic abilities. Second, a secular resurrection believes thatto be resurrected is to get back up with one’s own might. When a person recovers physically or gets re-elected, he believes he has been “resurrected” by his own strength,by his efforts, or with other people’s help.

However, our faith in Christ’s resurrection is not based on worldly values. Although we live in this world, we are reborn as a new creation that seeks to be like Him in character. This means we are reborn as a changed person, not asour old self whoholds on to greed and desire. Thisresurrection can never be achieved with our might. It is possible only through our Lord who saves.

In this sense, resurrection faith can be defined as “a faith that receives new life through God’s might.” In other words, to have a resurrection faith means to be reborn as a new creation by God’s power.It is not by my might. It is by His might that we gain new life. We are reborn as a new being, not as our old selves. This is resurrection faith.

This was a summary of last week’s sermon with just an emphasis on “His might.”

Today, I want to continue to preach on how this resurrection faith becomes ours. What process do we go through to make this resurrection faith ours?

Resurrection faith is to be reborn as a new being. But this does not happen by just thinking about it or trying to make it happen. The experience of being resurrected does not start from within us, but from God. Therefore, our resurrection is completely up to God, up to His authority, and up to His might. We do not get resurrected by trying to be raised after we die. When death fully takes over, God raises us up—as He did Jesus. Resurrection is to believe in this.

This applies also to our resurrection faith in our present lives. We cannot experience resurrection by wanting to or trying to be reborn. We may succeed in becoming somehow more ethical, but this does not mean that we have a true, new life within us.

Then how can we experience resurrection? How can we experience a Godly resurrection that transforms us into a new creation? Today, I want to look at how Peter attained his resurrection faith.

The story of Peter meeting Jesus after He was resurrected at Lake Tiberias is like an old fairytale—beautiful and familiar. It is dawn. There is the soft sound of waves lapping against the shore. After Jesus was crucified, the disciples returned to their old lives. They are now hiding. They have gone out to fish, but fishing has no meaning. And they have caught nothing all night.

“‘I’m going out to fish,’ Simon Peter told them, and they said, ‘We’ll go with you.’ So they went out and got into the boat, but that night they caught nothing.” (John 21:3)

It is unclear why they went out fishing, but I can imagine how they felt. They probably feltempty, guilty, and burdened. They had followed Jesus, but He was crucified. They, too, may face the same fate. They probably returned to Lake Tiberius out of fear. Peter says he will go fishing, and the rest seems to have just followed suit.

They weren’t interested in catching fish. They just wandered out absent-mindedly. They probably reminisced their time with Jesus. Peter who had denied Himthrice was especially heavy-hearted and filled with remorse. ‘Oh, how will I ever see Him again?! Why did I deny Him? Oh, why!’ With a lot on their minds, the disciples would have just gone through the motions of fishing.

But, at dawn, who would appear but Jesus? The LordvisitedHis disciples! And the disciples would later see a miraculous catchafter casting their nets to the right as Jesus told them to. The size of the catch was not so important. The fact that Jesus had come to them was amazing!

When Jesus first called them to be disciples, He approached them in a similar way. He called Peter when he was mending his net on the shore of Lake Tiberius. This was Peter’s first encounter with the Lord. When Peter first met Jesus, the Lord told him to cast his net in deeper waters. Peter had caught nothing all night, but he listened to Jesus. The result was a miraculous catch. The Book of Luke writes about this.

So when Peter heard a voice telling him to cast his net to the right, I imagine he knew intuitively that it had to be Jesus. Because this wasexactly how he had first met His Lord.Our resurrected Lord came to Peter in the same way that He had first approach him at Lake Tiberius. Right there, He wanted to save Peter who was all but dead.

Dear Church, how can we participate in resurrection? How can we possibly die with Christ, be united with Him, and be reborn as a new being?

First, we must remember that the Lord comes to us in the very midst of our lives and reality—just as He visited Peter. When we joyfully cry out, “He has risen!”, we are exerting a faith that believes our resurrected Lord will come and visit us. Our resurrected Lord is a Lord who approaches us—despite our sins and weaknesses—out of His love and compassion for us.Even now, our resurrected Lord visits us in the form of the Spirit.

What is the significance of Jesus leading Peter down memory lane? Why did He make him remember his first encounter with Him? This probably brought back memories of Jesus, the Lord he met and followed, and His ministry. Peter would have reminisced all the things He had done, His teachings, His ministry, how Hehealed the sick and cast out evil spirits, how He washed the disciples’ feet, and how He shared bread and wine at the last supper.

When Peter came to the shore, Jesus was waiting for him with fish cooking in the fire. Jesus led Peter to a place of deep shame. When Peter arrived at this place Jesus had prepared for him, he was painfully reminded of his failures and sins. But it was at this very place that Jesus shared food with the disciples. He served them and fed them.

When Jesus met Peter, He didn’t ask, “Why did you deny me when they took me away?” Nor did He say, “I told you so. I told you that you would deny me thrice.” He said nothing of the sort.Instead, He prepared a table for them. He invited them, again, to His meal—like the one He shared with them at the last supper. They were sinner, traitors, and cowards… Yet, the Lord shared food with them as if nothing had happened.

Today’s passage does not mention the words “forgiveness” or “sin.”But the theme of Peter’s repentance and the Lord’s forgiveness is so poignant that it need not be said. Our Lord never utters the word “sin” to Peter. Peter dare not say he has“sinned”, either.

When Peter first met Jesus, it was quite the opposite. He shouted, “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 But, now, he cannot say a word. He simply can’t. He is too sorry.

Dear Church, how can we participate in Jesus’ resurrection? Our Lord visits us in the midst of our lives and waits for us with a warm fire. He makes us see our sins and weaknesses. And, at that very place, He prepares a table of forgiveness. There, we experience His forgiveness. The words “sin” and “forgiveness” need not be spoken. Our resurrected Lord accepts us. Our Lord—who sees my ugliest sins and knows me—receives me completely.

Then Peter receives a new command from the Lord: “feed my lambs, take care of my sheep.” The Lord gives Peter a new calling. He builds him up again. Peter now receives a new calling.He takes on the heavy responsibility of feeding His lambs and taking care of His sheep. Peter is transformed into a new being. He no longer lives a meaningless existence. He is no longer broken by despair. The shadows of guilt, his past, and regret no longer haunt him.

The resurrected Lord visited him, healed, him, forgave him, renewed him, and gave him a new calling. The Lord did this. This is resurrection. It was the Lord who gave Peter a new life. Our resurrected Lord saved Peter.

After our Lord was resurrected, Peter was resurrected, too. Jesus died and was raised again, and Peter was resurrected from his sins and failures, too. Peter was raised through the Lord’s forgiveness and by His power. This is the resurrection of Peter. Our Lord raised Peter up again with His power, His forgiveness, and His love. This is resurrection faith.

What is resurrection faith? Is it just to believe that we will go to heaven after we die? No. It is to get up again. It is to rise again. It is to receive His mission again. It is to be called again. It is to have meaning restored. And this is not done by my might. Nor by my determination. Nor by my thoughts. It is done by the Lord’s power, His grace, and His forgiveness. We start afresh only through Him. We stand again only through Him. We are given a new life only through Him.

Dear Church, where are you at this moment? What situation are you in? Today, our resurrected Lord calls out to us: “Do you love Me? Do you love Me? Do you love Me?”

This is not the Lord’s voice calling everyone to be pastors. This is His voice calling each of us to each of our places of calling. He is calling us now, urging us to rise again. It doesn’t matter where you are or what kind of situation you are in. We must steadfastly hold on to this resurrection faith until the day we die.

We must rise again. We must do so in His name, by His might. Resurrection faith of the present is to have a faith and a hope that we will rise again not by my might but by His.

Dear Church, rise again. The Lord has ri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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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 12 ~ 17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부활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5월 첫 주일부터는 예배당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분이 다 모이지는 못하겠지만, 5월부터는 현장에서도 함께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독특성과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가 전 세계적으로 10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다른 질병이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 교우들 가운데 몇몇 분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고, 그 가운데는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도 있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간접적으로 계속해서 겪어야 할 아픔입니다. 죽음을 직면할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회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인간은 참 절망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하지만 부활 신앙은 종말론적인 죽음 앞에서만 희망을 주는 게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통해 전해 드렸듯이, 부활 신앙은 현세적인 우리 삶에도 매우 큰 도움을 주며 희망을 선사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중)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은 사람에게도, 죽어 가는 사람에게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매우 놀랍고 고귀한 진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또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부활 신앙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하며, 의미가 있고, 희망을 준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를 통해 저는 ‘우리가 어떻게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살아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지난 주일에 한 가지 강조하지 않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지만, 현세적인 의미에서의 부활 역시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살리시는 주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부활의 삶이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 신앙을 이렇게 다시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부활입니다.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어느 신문사에서 지난 주일에 전한 설교 전문을 실어 주셨습니다. 담당 기자분이 제 설교문을 간단히 요약하면서 “부활 신앙은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표현해 주셨는데, 아주 잘 정리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로 태어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내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 실망하고 좌절한 삶의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

지난 주 설교에 이어, 오늘은 ‘부활 신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것이 되는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죽음을 맞은 순간 부활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부활해야지.’라고 마음먹거나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완벽히 죽음에 삼켜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부활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현세적으로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 즉 삶 속에서 부활을 경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지.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나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새롭게 창조되는 경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펴주셔서 진정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부활 신앙과 부활의 삶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례 중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려 합니다. 잘 알려진 베드로의 경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의 부활로 이어지는지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참 마음이 묘합니다. 마치 어떤 동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요한복음 20장까지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 같은데, 그 뒤에 한 장이 덧붙여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시고, 그에게 소명을 허락하신 사건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고, 그림이 그려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뭔가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지는 듯하고, 바닷가 소리도 들리는 듯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상상하시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립니다. 잔잔한 바닷가에 찾아온 깜깜한 밤, 그리고 서서히 동이 틉니다. 밤새 고기를 잡으려 한 제자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들이 바다 위의 배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실망감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도망치듯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아무런 의미도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배를 타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이들이 ‘고기를 잡아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 3년 동안이나 못 잡은 고기를 잡아 세상으로 돌아가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바다로 나갔을까요? ‘이제 다시 실력 발휘를 해 보자. 옛 실력이 살아 있는지 확인해 보자.’라며 그물을 던졌을까요? 적어도 그런 마음으로 그물을 던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한복음 21:3)

어떤 느낌이 오십니까? “고기를 잡으러 가야겠다.”라는 이 말을 베드로가 언제쯤 했을까요? 바닷가에 앉아서 떠 있는 배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 생각을 했겠지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아마 그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주님을 만나면 무슨 낯으로 뵐 수 있을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건 맞나?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무슨 말로 사죄를 해야 할까?’
밤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배를 타고 나가야겠다. 고기나 잡으러 나가야겠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올라탄 배에 다른 제자들도 함께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고기잡이에는 큰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하염없이 배를 타고 나갔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물을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내렸다가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을 보곤, 한참 동안 머물러 있다가 다시 그물을 내릴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하염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고기를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날이 새어가는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멀리 서 계십니다. 바닷가에 서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한마디 말씀’을 하시고 ‘그 일’을 하는 순간, 그분이심을 확신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들어본 목소리입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자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사실 그들에게 많은 고기를 잡는다는 건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사인이 되었습니다.

< 부활 신앙이란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때로 내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

그 순간 베드로는 이전에 처음 주님을 만났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던 첫날을 누가복음 5장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바닷가의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는데, 사실 그 전날부터 베드로는 하루 종일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와 그물을 정리하고 있던 그의 배에 예수님이 올라타십니다. ‘이분이 갑자기 왜 오셨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예수님이 배를 조금 띄우라고 말씀하시고는 몰려든 많은 사람을 향해 긴 연설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옆에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참 신기한 분이다. 대단한 분이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신 후 ‘깊은 데’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또 그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님께 엎드려 외쳤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십시오.” 이것이 베드로가 경험한 첫 번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 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 베드로는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만드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자리,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죽이고,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단,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찾아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선포는 단순한 외침만이 아닙니다. 이 선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셨다는 환호인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환호입니다.
부활 신앙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신다.”라는 믿음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이 살아나셔서 그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로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날의 기억으로 베드로를 초청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났던 장소와 시간으로 초청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 은혜의 장소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 부활 신앙이란 부끄러운 내 삶을 수용하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

두 번째로 베드로가 육지로 올라왔을 때, 주님은 숯불을 피워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자리로 베드로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 내놓고 싶지 않은 자리, 죄악의 자리입니다. 너무나 죄송한 자리, 그 자리로 베드로를 이끄십니다. 그리고 음식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 “네가 왜 나를 배신했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또 “내가 너에게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지? 그대로 되었지?”라고 확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식탁을 차려 주시며, 십자가에 달리기 전 마지막 날 함께했던 식탁과 똑같은 자리로 초대하셨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들과 헤어졌던 마지막 식탁과 똑같은 자리로 베드로와 제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과거와는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제자였습니다. 수제자였습니다. 가까이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는 그랬습니다. 그때는 당당했습니다. 떳떳했습니다. 힘찼습니다. 그러나 이 새벽은 다릅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두려워 떨며 배신했던 뼈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제자들을 대우하십니다. 그들에게 똑같은 식사를 허락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용서’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죄’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회개’와 ‘주님의 용서’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라는 말도 없고, 용서라는 말도 없고, 회개라는 말도 없는데, 어떻게 이 장면에서 용서와 회개, 연합이 생각나는 것일까요?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음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정작 두 번째,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는 그런 말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죄송해서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의 자리, 나의 현실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우십니다. 나의 죄악의 자리, 부족함의 자리를 보게 하시며, 식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곳이 바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죄라는 말은 없지만, 용서가 경험됩니다. 사죄라는 말이 없는데도 연합이 경험됩니다. 죄라는 말이 없어도 좋습니다. 회개라는 말이 없어도 좋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어도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십니다. “용서는 내가 했다. 이미 모든 죄를 내가 용서했다. 하나님과 모든 죄를 해결했다. 그러므로 이제 너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수용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십니다. 나를 안아주십니다. 가장 추한 자리까지 알고 계시는 그분이 나를 온전히 안아 주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경험입니다. 우리도 이 부활의 자리로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실패한 자리, 좌절하는 자리, 부끄러운 자리에 찾아오시며, 다시 우리를 초대하시고 안아 주시는 주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 부활 신앙이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삶에서 실현됩니다. >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해서였을까요? 주님께서는 세 번 다시 고백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어보신 것은 단 하나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없고, 나 자신을 스스로 죽일 수도 없고, 나 자신이 스스로 살아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가 다시 만날 때, 한 가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고백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단 한 가지 일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할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소명을 새롭게 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새 소명이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다시 소명을 받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양을 먹이고, 양을 이끄는 막중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부활입니다.
이제는 그저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망하고 좌절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존재도 아닙니다. 과거에 지은 죄에 치여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회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닙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새 소명을 받았습니다. 사명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죽어서 천당 간다는 내세적인 신앙만이 부활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림 받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가 아닙니다. 내 결심으로도 아닙니다. 내 생각으로도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용서로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한 가지 사실만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 앞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듯이 오늘 우리 앞에 계십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모든 죄를 용서하고, 내가 너를 받아들이고, 내가 너를 새롭게 하리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너를 고치리라. 네가 나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너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축복이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십시다. 새로운 존재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2020년 4월 1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부활하신 주님, 살리시는 주님” (요 21:12-17)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61장, 33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21:12-1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1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부활신앙은 새로운 존재로 다시 일어서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활의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세속적 부활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나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그런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잘 알려진 베드로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부활신앙에 이를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설교의 요약

    요 21장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고기잡이는 무슨 의미였을까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3절). 그들은 사실, 고기 잡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하염없이 배를 타고 나갔겠지요. 날이 새어가는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의 삶의 자리로 찾아오셨듯이,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삶의 자리, 현실로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는 우리의 환호는 그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신다는 믿음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너 왜 나를 부인하였니?’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했지!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한 번도 ‘용서,’ ‘죄’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회개’와 ‘주님의 용서’라는 주제를 읽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의 자리, 현실의 자리에 찾아 오셔서 숯불을 피워 놓으십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용서의 떡, 사죄의 식탁’을 주십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주님의 새로운 명령을 받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15, 16, 17절).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새롭게 주시는, 아니 다시 세워 주시는 소명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다시 소명을 얻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당 간다는 내세적 신앙만이 부활의 신앙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기에, 주님을 사랑하기에, 다시 새로운 사명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죽는 날까지 이 부활의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 나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신앙이 바로 부활의 현재적 신앙입니다. 다시 일어나십시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나누기

 1. 나도 베드로처럼, 내가 가장 약할 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2. 눈을 감고, 조용한 디베랴 바닷가를 상상해 봅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조반을 준비하십니다. 아무 말 없이 살점을 떼어주십니다. 제자들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당신이 그 바닷가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이 똑같이 당신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베드로를 찾으셨듯이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구하여 주시며 우리로 부활케 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참된 부활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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