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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마가복음 7: 24~30

김경진 목사

2022.09.25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는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방 지역인 두로에서 행하신 치유 사건입니다. 배경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에 가시기 전에 갈릴리 호숫가 주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게네사렛이라는 동네에 머무실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로 떡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이때 주님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면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 7:15~16)

 

또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1~23)

 

바리새인과 논쟁을 마치신 예수님이 조금 피곤하셨는지, 아니면 조금 지겨우셨는지 먼 길을 다시 가기 시작하십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지경을 넘어서 이방 지역인 두로를 향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본다면 북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유대인과의 만남을 단절하신 채로 조금 쉬시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막 7:24, 새번역)

 

예수님께서 두로 지역으로 건너가셔서 유대인들과의 만남을 일단 단절하시고 쉬시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죠. 그때 한 여인이 주님을 찾아옵니다. 그 여인은 수로보니게 족속이었고 헬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여인에 대하여 또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는데, 그 여인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주님의 발아래 엎드립니다.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주님께서는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시기보다 전에 없는 단호한 모습으로 거절하셨습니다. 도리어 그 여인을 모독하는 듯한 말씀도 덧붙이셨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7)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방인을 개로 취급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요, 생각의 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입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죠. “너는 개다. 그리고 너에게 줄 떡이 없다. 너는 네가 구하는 것을 나에게서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단호한 거절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말씀에 당황하지 않았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씀드립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8)

 

그러자 주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감동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막 7:29 중)

 

그리고 정말 집으로 돌아가니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 30)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수치를 당하면서도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간절히 구하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딸을 고치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간절히 구하고 있는, 마치 딸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개가 되어도 좋다는 듯이 엎드려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여인이 가졌던 그 간절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엎드린 모습을 배우게도 되죠.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향한 기대를 놓지 않으려 하는 믿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겸손함으로 우리도 주님 앞에 나가야겠다는 감동과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은 간절히 딸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는 여인에게 야멸차고도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렇게까지 여인을 시험하신 것이라면 좀 너무하신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믿음을 시험하셨던 의도라면 우리에게도 부담이 아닐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정말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전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씀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므로 시험에서 통과한 여인을 전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큰 믿음이 있었기에 그녀는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이렇듯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우리는 더 큰 믿음, 더 간절함, 더 겸손함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 이야기를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요?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7 중)

 

여기서 ‘떡’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르토스(ἄρτος, artos)’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은 떡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사실은 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당시 상황에 보다 더 맞는 번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곧 아르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문을 읽다 보면 아르토스라는 단어가 유독 마가복음 6장에서부터 7~8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등장한 곳은 6장입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막 6:7~9)

 

우리말 성경은 ‘빵’이라는 단어를 ‘양식’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아르토스라는 단어가 잘 보이지는 않죠. 그럼에도 원어로 보면 양식으로 번역된 이 단어가 아르토스입니다. 이 짧은 본문에 오늘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두 주제어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하나는 “더러운(ἀκάθαρτον, akatharton) 귀신(πνεῦμα, pneuma)”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빵(ἄρτος, artos)” 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각 지역으로 파송하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고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빵을 가지지 말라.” 즉 아르토스를 가지지 말고 전대나 배낭,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시죠. 흥미롭게도 이렇게 등장한 아르토스 곧 빵이라는 단어는 6장에서 무려 6번 사용되고, 7장에서는 3번, 8장에서는 7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 단어가 사라졌다가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사용됩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두 기적 사건,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떡 일곱 개를 가지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 사이에 위치합니다. 그러니까 빵 곧 아르토스라는 주제어로 다시 보는 마가복음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 6:7~1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십니다.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고는 빵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6:30~44,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적인 사건이 묘사되고 있죠.

– 6:45~52,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떡 떼시던 기적을 차마 깨닫지 못합니다.

– 7:1~23,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은 제자들에 관한 논쟁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내용이죠.

– 7:24~30, 여기서부터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에 대한 말씀이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르토스를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빵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장에서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8장 14절 이후에는 떡 가져오기를 잊은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상기시키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6장부터 8장에 이르는 모든 내용들이 한결같이 ‘떡’, ‘빵’이라는 ‘아르토스’ 단어와 연결되면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흐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빵이 계속 등장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빵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빵을 주어서 먹게 하시는 예수님, 그 주님이 부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제자들에게는 빵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고, 후에는 빵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말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이유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바로 그분을 알려 준 것입니다. 아르토스라는 단어는 8장 이후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한참 후인 마가복음 14장에 단 한 번 다시 등장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막 14:22)

 

마가복음 6~8장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수없는 사건 속에서 보여 주신 빵, 곧 아르토스가 바로 우리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증거해 주신 순간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시자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간청합니다.>

 

자, 이러한 구도 속에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간절히 간청합니다. 자신의 딸에게 들어온 귀신을 쫓아 달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7)

 

언뜻 보면 이방인들을 비하하는 발언 같지만 구원의 방향과 순서를 말씀하신 구절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그분이 아직 이방인에게까지는 열려 있지 않다고 전달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계획은 지금 유대인에게 집중되어 있고, 유대인을 통하여서 이방인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 계획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아직 아니다.”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네가 나에게 와서 은혜를 구하고 있지만 아직 너에게 은혜가 이르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말씀이죠. 특별히 빵이라는 관점에서 주님은 개에게 빵을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아직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8 중)

 

사실 그녀는 주님이야말로 생명의 아르토스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은혜를 얻기 원합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빵 부스러기만이라도 충분합니다. 저에게 그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주십시오.” 여인은 문자적으로 빵 부스러기를 말하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믿음의 관점에서 주님께 청원한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온전한 빵을 받지 못할 처지에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부스러기만이라도 제 마음속에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막 7:29 중)

 

수로보니게 여인의 청원을 들으신 주님께서 그 말씀을 인정하시고, 그녀의 딸에게 축귀의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아직 구원의 계획이 이방인에게까지는 이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그 간절한 기도, 부스러기라도 좋다는 말 한마디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가나 혼인 잔치에 오신 주님께 청원하니 때가 이르지는 않았지만 기적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구했던 것은 이루어졌고, 주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부스러기를 구하는 믿음, 이 믿음이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신앙의 중심이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생명의 빵인 우리 예수님은 부스러기만으로도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어렸을 때 성경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앞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면서 나중에는 왜 일곱 개로 사천 명밖에 먹이지 못하셨는가? 예수님의 능력이 좀 약해지셨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차라리 본문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했죠. 그런데 말씀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떡의 양에 국한되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5개든, 7개든 의미가 없습니다. 5개로 5천 명을 먹이실 수도 있고, 7개로 4천 명을 먹이실 수도 있고, 부스러기로 온전한 기적을 베푸실 수도 있습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며 두려워하던 제자들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막 6:51)

 

그때 그들은 예수님이 아르토스를 떼신 것을 깨닫지 못할 만큼 마음이 둔한 상태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꼬집습니다. 참된 양식이 되시는, 참된 아르토스가 되시는 그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허상으로서의 보리떡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아르토스가 되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그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아니 그분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합니다. 혹시 어려운 문제가 있으십니까? 인생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아직 주님께 나아가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있으십니까? ‘나는 아직 주님과 가깝지 않아. 주님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 거야. 내 믿음은 작아. 나의 믿음은 약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는 이방인이고 예수님은 유대인이시니까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얻겠다는 심정으로 나아갔기에 얻을 수 있었고, 그 은혜가 무한한 것이었기에 부스러기 또한 무한한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부스러기만 붙잡고도 치유의 기적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부스러기만으로도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의 이름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완전함으로 다가오십니다. 부스러기 은혜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거슬러 올라가게 만들었고,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작은 믿음뿐입니까? 괜찮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분께 간청하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필요를 아뢰십시오. “주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부스러기만으로도 나는 만족합니다. 주님, 그 은혜의 부스러기를 내려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러한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주님을 찾는 이들의 간구를 결코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은혜의 부스러기를 바라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ven Just The Crumbs of Grace

 

Mark 7:24-30

 

Today’s passage is about Jesus healing a woman’s daughter in Tyre, a Gentile region. This is the background of the story.

 

Before visiting Tyre, Jesus was in the region of Galilee. When He was staying in Gennesaret,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came and debated with Him because they saw His disciples eating with unwashed hands. They asked Jesus why His disciples did not follow the tradition of the elders and ate with defiled hands.

 

At this, Jesus responded by quoting from Isaiah: “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He also said to them:

 

“Nothing outside a person can defile them by going into them. Rather, it is what comes out of a person that defiles them.” (Mark 7:15-16)

 

Then He said, “For it is from within, out of a person’s heart, that evil thoughts come—sexual immorality, theft, murder, adultery, greed, malice, deceit, lewdness, envy, slander, arrogance and folly. All these evils come from inside and defile a person.” (Mark 7:21-23)

 

Perhaps it was because He was exhausted after the debate or just tired of it, but after this incident Jesus left Israel and went to Tyre, a foreign land. Tyre was a coastal city in the Mediterranean, located northwest from the Sea of Galilee. This is how the Bible describes the context of and motive for Jesus’ visit to Tyre.

 

“Jesus left that place and went to the vicinity of Tyre. He entered a house and did not want anyone to know it; yet he could not keep his presence secret.” (Mark 7:24)

 

But a woman came to Him. She was a Greek citizen, born in Syrian Phoenicia. The Bible reveals one more detail about her: her daughter was possessed by a demon.

 

First, the Bible describes that she knelt before Jesus, which shows just how desperate she was. Then she begs Jesus to drive the demon out of her daughter. To our surprise, however, Jesus declines, displaying a firm attitude never seen in Him before. He even says things that seem insulting:

 

“‘First let the children eat all they want,’ he told her, ‘for it is not right to take the children’s bread and toss it to the dogs.’” (Mark 7:27)

 

Although Jews have long treated Gentiles as “dogs” following their tradition and perspective, it is unsettling that Jesus, the One who came as the Savior of all mankind, would say such a thing. In short, He is saying, “You are a dog. So I have nothing to give you.” It is also an outright refusal, meaning, “You will not get what you want from me.”

 

Yet the woman is unfazed and calmly persuades Jesus:

 

“‘Lord,’ she replied,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crumbs.’” (Mark 7:28)

 

At this Jesus replies, “For such a reply, you may go; the demon has left your daughter.” (Mark 7:29) And, indeed, when she returns home, she finds “her child lying on the bed, and the demon gone.” (Mark 7:30)

 

Whenever we read this story, we are moved by a mother who humbly and earnestly seeks the Lord’s favor, despite beingshamed. We see her love for her daughter, her determination to see her healed, and her prayer that desperately seeks the Lord’s favor in order to save her daughter, even if that means kneeling like a “dog.”

 

Still someunsettling aspects remain. Why was Jesus so harsh and insulting toward this desperate woman, a woman whose only wish was to see her daughter healed? If His actions were to test her faith, this puzzles us too. Does it mean that we can receive His mercy only by passing a test? Is this what it means?

 

The more the faith of the Syrophoenician woman is emphasized, the harder it is for us to escape such thoughts.

 

Is there another way to interpret this story? Today I want to unpack the message of this story from the perspective of “bread.”

 

Jesus tells the Syrophoenician woman, “It is not right to take the children’s bread and toss it to the dogs.” (Mark 7:27) The Greek word for “bread” in this verse is “artos (ἄρτος).” Although the Korean Bible translates this as “rice cake,” “bread” is theappropriate translation.

 

In Mark, the word “bread” (or “artos”) first appears in Chapter 6:

 

“Then Jesus went around teaching from village to village. Calling the Twelve to him, he began to send them out two by two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impure spirits. These were his instructions: ‘Take nothing for the journey except a staff—no bread, no bag, no money in your belts. Wear sandals but not an extra shirt.’” (Mark 6:7-9)

 

Although the New Korean Revised Version translates “bread” as “food,” the above NIV translation is more accurate asthe original Greek word used for bread is “artos.”

 

In the above short passage, two key themes of the Syrophoenician woman’s story are mentioned: “impure (ἀκάθαρτον, akatharton) spirits (πνεῦμα, pneuma)” and “bread (ἄρτος, artos).”

 

Interestingly, the word “bread” (or “artos”) is mentioned a whopping six times in Chapter 6, three times in Chapter 7, and a staggering seven times in Chapter 8. From Chapter 6 to Chapter 8, the key word is none other than “bread.”

 

This theme occurs even in the debate between Jesus and the Pharisees before Jesus goes to Tyre.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ignite their debate by asking why His disciples are eating bread with unwashed hands. As you can see, the theme of bread recurs in this story too.

 

Most important to note is that the story of the Syrophoenician woman is placed between two miracles of Jesus—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with two fish and five loaves of bread and the feeding of the four thousand with seven loaves of bread.

 

Therefore, the flow of Mark,analyz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heme of bread, can be summarized as below:

 

        6:7-13   Jesus sends out the Twelve, telling them to wield authority over impure spirits and to take no bread.

        6:30-44  Jesus feeds the five thousand with two fish and five loaves of bread.

        6:45-52  Jesus walks on water. (The disciples do not remember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        7:1-23   Jesus debates with the Pharisees. (The disciples eat bread with unwashed hands.)

        7:24-30  The Syrophoenician woman pleads with Jesus. (It is not right to give bread to dogs.)

        8:1-9    Jesus feeds the four thousand.

        8:14- 21  The disciples forget to bring bread. (Jesus reminds them of the miracles of feeding the five thousand and the four thousand).

 

What an interesting flow! Jesus commands His disciples not to take any bread in Chapter 6. Then in Chapter 8 He rebukes them for worrying about having no bread, saying, “Do you still not see or understand?” and reminding them of the miracles of feeding the five thousand and the four thousand.

 

In other words, whether we have bread or not is not what matters. The bread that is seen is not the issue. What is important is Jesus who gives us bread, who feeds us. That is why our Lord told His disciples not to take any bread with them when He sent them out and rebuked them when they talked among themselves about not bringing any bread.

 

So who is the true bread? Not the bread that we can see and touch. The true bread is Jesus Christ, who fed five thousand people with five loaves of bread and four thousand with seven. He is the True Bread.

 

However, the word bread (in Greek “artos”) vanishes from Mark 9. Then, after some chapters, in Mark 14 it reappears one last time. Jesus finally proclaims this:

 

“While they were eating, Jesus took bread, and when he had given thanks, he broke it and gave it to his disciples, saying, ‘Take it; this is my body.’” (Mark 14:22)

 

This is the very moment that our Lord testifies that He Himself is the Bread (the “artos”) He talked about in the manyprevious stories in Mark 6-8.

 

Now let’s return to today’s passage with this structure in mind.

 

AGentile woman comes to Jesus, begging Him to heal her daughter who is possessed with an evil spirit. And this is what the Lord says to her:

 

“‘First let the children eat all they want,’ he told her, ‘for it is not right to take the children’s bread and toss it to the dogs.’” (Mark 7:27)

 

At first glance, Jesus seems to be denigrating the woman, but He is actually explaining the direction and order of His salvation. A Gentile woman is begging at Jesus’ feet, asking for His grace. She has come to the feet of the Lord, the Bread of Life. But Jesus does not want to hand out this Bread of Life to the Gentiles, yet. His salvation is currently directed toward the Jews, and His salvation will be delivered to the Gentiles through the Jews.

 

In other words, Jesus is saying to the woman, “Not yet.” He is saying, “You come to Me asking for grace, but the time has not yet come.” From the perspective of bread, Jesus is saying that His bread cannot be handed out to dogs now. Jesus, the Bread of Life, is not accessible to the Gentiles, yet.

 

Yet the woman replies, “Lord,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crumbs.” (Mark 7:28)

 

In fact, this woman does not know that Jesus is the true Bread of Life. Yet she desires His grace. So she says, “It’s okay if I don’t get the bread. Even the crumbs are enough. Give me the opportunity to eat the crumbs at least, Lord.”

 

The woman talks about “crumbs,” but from the perspective of faith, what she is really seeking is Jesus. She is saying, “Just crumbs of You are enough. I know that I am unworthy to receive You, but let me at least have the crumbs of You in my heart, Lord.”

 

Unknowingly this is what she is saying. Hearing her words, Jesus says,

 

“For such a reply, you may go; the demon has left your daughter.” (Mark 7:29)

 

Clearly, Jesus’ salvation plan has not reached the Gentiles yet. This is precisely what Jesus is saying to the woman: the time has not yet come. But the Gentile woman’s earnest plea moves Him.

 

It is like the wedding in Cana when, although His time had not yet come, Jesus answered His mother’s plea about the wine. Likewise, although His time had not yet come, He could not but answer the plea of the Syrophoenician woman after seeing her faith. Therefore, her plea was granted, and Jesus became her Lord.

 

At first Jesus refused her, saying it is not right to toss the children’s bread to the dogs. But the woman begged Him for even just the crumbs. In the end, moved by her earnest plea, our Lord answered her wish.

 

A faith that asks even for the crumbs… It was this faith that broke down the barriers between the Israelites and the Gentiles.

 

What is the message of today’s passage to us? Our Lord, the Bread of Life, is perfect. Even His crumbs are perfect. He can feed five thousand people with just five loaves of bread, and four thousand with seven. The Bible describes the disciples’ awe when He walked on water.

 

“Then he climbed into the boat with them, and the wind died down. They were amazed for they had not understood about the loaves; their hearts were hardened.” (Mark 6:51)

 

This verse criticizes the disciples who did not properly know their Lord, the True Bread.

 

Our Lord Jesus Christ is our Bread. He is our Food. We are satisfied with Him alone. No, even just His crumbs are enough to satisfy us.

 

Do you have a difficult problem in your life? One that seems totally unsolvable?

 

But do you feel that you are unworthy of approaching the Lord? Do you think you are not close enough to Him? Do you thinkthat He will not remember you, that your faith is too weak and small? Do you feel you have not accepted Jesus wholly and have only His crumbs in your heart?

 

Are you wondering if He will listen to your prayers?

 

If the Syrophoenician woman had thought she was just a Gentile, and Jesus, a Jew, would not answer her request, she would never have been able to approach Him. She received grace because she was determined to get even the “crumbs” of grace.

 

And those crumbs were more than enough—because His grace is perfect and infinite. Even His crumbs are perfect because our Lord is perfect and His love infinite. Therefore, the crumbs of grace that flow from Him are infinite, too.

 

Do you have just a small faith? Do you have only the crumbs of Jesus in your heart? That’s okay. Just call upon His name. Ask Him. Tell Him what you need.

 

Tell Him, “Lord,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crumbs. Lord, give me at least the crumbs of Your grace. Though my faith is small, I desire even just the crumbs of grace that fall from You, my beloved Lord.”

 

Let’s approach Him today with this heart. Our Lord will never ignore anyone who seeks Him with such a heart and attitude. Even if the time has not yet come, He will give us His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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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 24~30

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는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방 지역인 두로에서 행하신 치유 사건입니다. 배경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에 가시기 전에 갈릴리 호숫가 주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게네사렛이라는 동네에 머무실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로 떡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이때 주님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면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 7:15~16)

 

또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1~23)

 

바리새인과 논쟁을 마치신 예수님이 조금 피곤하셨는지, 아니면 조금 지겨우셨는지 먼 길을 다시 가기 시작하십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지경을 넘어서 이방 지역인 두로를 향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본다면 북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유대인과의 만남을 단절하신 채로 조금 쉬시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막 7:24, 새번역)

 

예수님께서 두로 지역으로 건너가셔서 유대인들과의 만남을 일단 단절하시고 쉬시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죠. 그때 한 여인이 주님을 찾아옵니다. 그 여인은 수로보니게 족속이었고 헬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여인에 대하여 또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는데, 그 여인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주님의 발아래 엎드립니다.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주님께서는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시기보다 전에 없는 단호한 모습으로 거절하셨습니다. 도리어 그 여인을 모독하는 듯한 말씀도 덧붙이셨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7)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방인을 개로 취급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요, 생각의 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입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죠. “너는 개다. 그리고 너에게 줄 떡이 없다. 너는 네가 구하는 것을 나에게서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단호한 거절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말씀에 당황하지 않았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씀드립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8)

 

그러자 주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감동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막 7:29 중)

 

그리고 정말 집으로 돌아가니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 30)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수치를 당하면서도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간절히 구하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딸을 고치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간절히 구하고 있는, 마치 딸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개가 되어도 좋다는 듯이 엎드려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여인이 가졌던 그 간절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엎드린 모습을 배우게도 되죠.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향한 기대를 놓지 않으려 하는 믿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겸손함으로 우리도 주님 앞에 나가야겠다는 감동과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은 간절히 딸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는 여인에게 야멸차고도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렇게까지 여인을 시험하신 것이라면 좀 너무하신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믿음을 시험하셨던 의도라면 우리에게도 부담이 아닐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정말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전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씀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므로 시험에서 통과한 여인을 전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큰 믿음이 있었기에 그녀는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이렇듯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우리는 더 큰 믿음, 더 간절함, 더 겸손함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 이야기를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요?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7 중)

 

여기서 ‘떡’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르토스(ἄρτος, artos)’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은 떡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사실은 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당시 상황에 보다 더 맞는 번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곧 아르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문을 읽다 보면 아르토스라는 단어가 유독 마가복음 6장에서부터 7~8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등장한 곳은 6장입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막 6:7~9)

 

우리말 성경은 ‘빵’이라는 단어를 ‘양식’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아르토스라는 단어가 잘 보이지는 않죠. 그럼에도 원어로 보면 양식으로 번역된 이 단어가 아르토스입니다. 이 짧은 본문에 오늘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두 주제어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하나는 “더러운(ἀκάθαρτον, akatharton) 귀신(πνεῦμα, pneuma)”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빵(ἄρτος, artos)” 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각 지역으로 파송하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고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빵을 가지지 말라.” 즉 아르토스를 가지지 말고 전대나 배낭,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시죠. 흥미롭게도 이렇게 등장한 아르토스 곧 빵이라는 단어는 6장에서 무려 6번 사용되고, 7장에서는 3번, 8장에서는 7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 단어가 사라졌다가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사용됩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두 기적 사건,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떡 일곱 개를 가지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 사이에 위치합니다. 그러니까 빵 곧 아르토스라는 주제어로 다시 보는 마가복음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 6:7~1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십니다.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고는 빵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6:30~44,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적인 사건이 묘사되고 있죠.

– 6:45~52,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떡 떼시던 기적을 차마 깨닫지 못합니다.

– 7:1~23,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은 제자들에 관한 논쟁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내용이죠.

– 7:24~30, 여기서부터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에 대한 말씀이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르토스를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빵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장에서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8장 14절 이후에는 떡 가져오기를 잊은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상기시키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6장부터 8장에 이르는 모든 내용들이 한결같이 ‘떡’, ‘빵’이라는 ‘아르토스’ 단어와 연결되면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흐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빵이 계속 등장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빵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빵을 주어서 먹게 하시는 예수님, 그 주님이 부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제자들에게는 빵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고, 후에는 빵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말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이유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바로 그분을 알려 준 것입니다. 아르토스라는 단어는 8장 이후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한참 후인 마가복음 14장에 단 한 번 다시 등장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막 14:22)

 

마가복음 6~8장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수없는 사건 속에서 보여 주신 빵, 곧 아르토스가 바로 우리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증거해 주신 순간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시자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간청합니다.>

 

자, 이러한 구도 속에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간절히 간청합니다. 자신의 딸에게 들어온 귀신을 쫓아 달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7)

 

언뜻 보면 이방인들을 비하하는 발언 같지만 구원의 방향과 순서를 말씀하신 구절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그분이 아직 이방인에게까지는 열려 있지 않다고 전달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계획은 지금 유대인에게 집중되어 있고, 유대인을 통하여서 이방인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 계획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아직 아니다.”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네가 나에게 와서 은혜를 구하고 있지만 아직 너에게 은혜가 이르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말씀이죠. 특별히 빵이라는 관점에서 주님은 개에게 빵을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아직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8 중)

 

사실 그녀는 주님이야말로 생명의 아르토스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은혜를 얻기 원합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빵 부스러기만이라도 충분합니다. 저에게 그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주십시오.” 여인은 문자적으로 빵 부스러기를 말하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믿음의 관점에서 주님께 청원한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온전한 빵을 받지 못할 처지에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부스러기만이라도 제 마음속에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막 7:29 중)

 

수로보니게 여인의 청원을 들으신 주님께서 그 말씀을 인정하시고, 그녀의 딸에게 축귀의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아직 구원의 계획이 이방인에게까지는 이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그 간절한 기도, 부스러기라도 좋다는 말 한마디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가나 혼인 잔치에 오신 주님께 청원하니 때가 이르지는 않았지만 기적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구했던 것은 이루어졌고, 주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부스러기를 구하는 믿음, 이 믿음이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신앙의 중심이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생명의 빵인 우리 예수님은 부스러기만으로도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어렸을 때 성경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앞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면서 나중에는 왜 일곱 개로 사천 명밖에 먹이지 못하셨는가? 예수님의 능력이 좀 약해지셨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차라리 본문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했죠. 그런데 말씀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떡의 양에 국한되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5개든, 7개든 의미가 없습니다. 5개로 5천 명을 먹이실 수도 있고, 7개로 4천 명을 먹이실 수도 있고, 부스러기로 온전한 기적을 베푸실 수도 있습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며 두려워하던 제자들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막 6:51)

 

그때 그들은 예수님이 아르토스를 떼신 것을 깨닫지 못할 만큼 마음이 둔한 상태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꼬집습니다. 참된 양식이 되시는, 참된 아르토스가 되시는 그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허상으로서의 보리떡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아르토스가 되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그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아니 그분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합니다. 혹시 어려운 문제가 있으십니까? 인생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아직 주님께 나아가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있으십니까? ‘나는 아직 주님과 가깝지 않아. 주님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 거야. 내 믿음은 작아. 나의 믿음은 약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는 이방인이고 예수님은 유대인이시니까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얻겠다는 심정으로 나아갔기에 얻을 수 있었고, 그 은혜가 무한한 것이었기에 부스러기 또한 무한한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부스러기만 붙잡고도 치유의 기적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부스러기만으로도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의 이름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완전함으로 다가오십니다. 부스러기 은혜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거슬러 올라가게 만들었고,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작은 믿음뿐입니까? 괜찮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분께 간청하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필요를 아뢰십시오. “주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부스러기만으로도 나는 만족합니다. 주님, 그 은혜의 부스러기를 내려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러한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주님을 찾는 이들의 간구를 결코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은혜의 부스러기를 바라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9월 2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막 7:24-30)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433장, 30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막 7:24-3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2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행하신 오늘의 본문은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기도자의 간절함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여인에게 그렇게 야멸하고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것이 주님의 시험이라면, 우리 또한 이런 시험에 합격해야만 주님의 긍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일까요? 때문에 오늘은 ‘믿음’이라는 주제가 아닌 ‘떡’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 주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9)입니다. 원문은 아르토스, 즉 ‘빵’으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에는 연속해서 빵과 관련된 말씀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진정한 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보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 27)    

    언뜻보면 이방인들을 비하하는 발언같지만, 사실 주님은 구원의 방향과 순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계획은 먼저 유대인에게요, 이들을 통하여 이방으로 구원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아직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 아직은 이방인들에게 열려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빵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구합니다. 여인이 구한 것은 곧 주님 한 분 뿐입니다. 분명 구원의 계획은 아직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간구는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마치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셨을 때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셨지만 마리아의 요청에 응답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가 구하던 것은 이루어 졌고, 주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삶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 나아가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아직 믿음이 작고 약해!’ 이런 걱정이 드십니까?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얻겠다는 심정으로 나갔기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무한하고 완전한 것이었기에 그 부스러기도 완전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그분께 간청하십시오. 여러분의 필요를 아뢰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러한 마음과 태도로 주님을 찾은 이들을 무시하지 결코 무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비록 때가 이르지 않았을 지라도,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나누기

1.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구하는 간절함과 진실함이 나의 기도와 예배 속에 살아있습니까?

2. 주님께서 내 삶에서 행하셨던 은혜의 손길, 즉 부스러기 같은 은혜가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기도

    주님, 주님께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부스러기를 원합니다. 비록 작은 믿음이오나, 주님 앞에 소원을 가지고 엎드린 모든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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