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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조를 네게 보이리라

이사야 7: 10 ~ 16

김경진 목사

2019.12.22

< 이사야에는 메시아 탄생에 관한 예언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

오늘 본문과 같은 이사야 말씀은 성경의 흐름을 잘 알지 못하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낯익은 한 구절을 보셨을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중)

이 말씀이 익숙한 이유는 신약 마태복음 1장 23절에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말씀으로 인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접해 온 마태복음 1장 23절의 출처가 이사야 7장 14절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에는 크게 세 부분 메시아 탄생과 관련된 직접적인 예언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조금 전에 읽은 이사야 7장 14절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이사야 9장 6절로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세 번째 말씀은 이사야 11장 10절입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 11:10)

이렇듯 이사야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암시하는 특별한 예언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한순간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성경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게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인용되는 이사야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히 그 실제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과연 이곳에 이런 말씀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아하스 왕 통치 당시 남유다는 정치·종교적으로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

우리는 지금까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마1:23)라는 말씀을 신약의 관점에서 신약의 렌즈로 살펴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 다른 렌즈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사야서 자체에서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관점에서 선포된 말씀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이 말씀을 성탄을 앞둔 시점에 되짚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이 있는 이사야 7장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아하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웃시야의 손자며, 요담의 아들입니다. 이사야 7장과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본문이 열왕기하 16장입니다. 열왕기하 16장 2절은 아하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열왕기하 16:2)

아하스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못했으며, 제대로 정치를 계승하지도 못했습니다. 열왕기하 16장 이후의 말씀을 보면, 아하스가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6장 3~4절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갔고, 자기의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은 행위였다. 그는 직접 산당과 언덕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하였다. (열왕기하 16:3~4, 새번역)

아하스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았고, 당시 이방 민족이 섬기는 역겨운 풍습을 받아들였습니다. 산당과 언덕의 푸른 나무 아래서 풍요와 다산을 비는 풍요 제의를 드리도록 허용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을 잡아 바치는 인신 제사까지 허용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다윗 가문인 유다, 그리고 유다 왕이었던 아하스가 다양한 신, 이방 신들을 섬기며 통치하던 때가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하스 왕이 스무 살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려 했던 즈음, 주변국과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등장하는 이사야 7장 앞부분과 열왕기하 16장이 그와 같은 역사적인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아하스 왕이 남유다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 주변에는 강대국들과 여러 나라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시리아가 있었고, 북쪽에는 이스라엘이 있었으며, 앗수르도 있었습니다. 시리아의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연합해 앗수르를 견제하며 대항하고 있던 터입니다. 유다 왕 아하스가 즉위하게 되었을 때,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왕들은 전령을 보내 아하스에게 반 앗수르 동맹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앗수르와의 관계를 열고자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앗수르를 의지해 주변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정치적인 상황이 전개되던 상황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군대는 유다를 쳐들어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계속해서 정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이사야 7장 1~2절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가 나라를 다스릴 때에, 시리아 왕 르신이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와 함께 예루살렘을 치려고 올라왔지만, 도성을 정복할 수 없었다. 시리아 군대가 에브라임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 (이사야 7:1~2, 새번역)

국가적인 위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유다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군대가 북이스라엘에 진 치고 호시탐탐 공격할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유다를 다스리던 아하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보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주신 말씀은 뜻밖이었습니다. 유다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떠난 남유다를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아하스 왕과 그의 나라를 하나님은 왜 보호해 주시려는 것입니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 아하스에게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공격이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예언을 전해 주십니다.

그(아하스)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그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이사야 7:4)

새번역은 “너는 삼가며, 조용히 하라.”라는 이 말씀을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라는 말씀으로 번역했습니다. 마치 유다의 편이 되셔서 유다를 격려하시고, 그들에게 무언가 작전 지시를 내리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의 편이 되어 주시고자 하는 의도를 느끼게 되는 내용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는 아하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도 않고 이방 신을 섬기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위기 속에서 그에게 다가가셔서 그의 나라를 보호해 주시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이사야 7:10~11)

하나님의 한없이 자비로우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아하스, 이방 신을 섬기는 아하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는 그입니다. 그러한 아하스가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나라를 보호할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징조든지 구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하스가 어떤 어려운 징조를 보여 달라고 했어도, 하나님은 보여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그러니 징표를 너에게 보여주마. 그 징조를 내가 보여주마. 무엇이든지 말해 봐라. 내가 너의 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증명해 보이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전개를 마주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이자 하나님을 멀리 떠난 유다를 하나님이 아직도 짝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의 집’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하스 왕의 가문을 다윗의 집이라고, 다윗의 가문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다윗의 왕권이 이어지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셨기에, 다윗의 후손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악행을 반복해 저지르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떠났을지라도, 하나님은 다윗과 약속하신 것을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유다를 사랑하시고, 돌아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아하스 왕의 불신앙에도 하나님은 신실한 약속을 더하십니다. >

그런데 참으로 흥미롭고 반전이 되는 장면이 이후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구원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내가 보여주겠다고 하시는데, 정작 아하스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겠다는 징조를, 아하스 왕 자신은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 7:12)

시리아와 북이스라엘로부터 공격받는 위협적인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의 순간에 다가오셔서 그들의 공격을 막아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징조를 보여 달라면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정작 아하스는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아하스의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성경에 적힌 말씀 가운데 이 말처럼 표현 자체와 속뜻이 다른 것도 드물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이 말은 언뜻 보면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의 믿음의 선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아하스 왕의 말은 불신앙의 말이었습니다. “나는 여호와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간섭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 없이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기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나에게 징조를 요구하기만 하면, 내가 너에게 보여주고 너와 너의 나라를 보호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아하스는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내 생각대로 하겠습니다. 내게 하나님의 징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불신앙이요, 찾아오시는 하나님에게 불명예를 드리는 것이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이렇게 책망합니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이사야 7:13, 새번역)

그런 뒤 이사야는 그 유명한 말씀, 우리가 잘 아는 그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사야 7:14, 새번역)

그리고 바로 이어, 이제 이 아이가 다 성장하기 전에 유다를 치러 온 두 나라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땅이 황무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남유다도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재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 가운데 들어 있는 말씀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7:14)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 세상은 임마누엘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

지금까지 저는 오늘 본문과 관련된 여러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하스가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징조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의 탄생과 관련한 예언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유다를 도우시려는 의지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유다 왕 아하스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징조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곳에 징조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아하스는 징조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징조를 주십니다. 참으로 초라해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하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징조를 그에게 던져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징조의 말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한편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는 아하스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처럼 들립니다. 표면적으로는 아이가 태어나서 선악을 구별하기 전에, 그만큼 오래되지 않아서 유다에 재난이 이를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또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선포입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이 이름을 가진 아들이 태어나게 되리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불신앙의 유다와 아하스를 향해 주셨던 말씀이 바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이제 너희에게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순종하지 않는 왕이 아닌, 아하스와 같은 왕이 아닌, 다윗의 가문에서 새로운 왕이 태어날 것입니다. 새로운 왕의 도래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진정한 왕, 임마누엘의 왕, 그 왕의 도래를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 설계도를 하나님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나아가 이 하나님의 말씀, 이 징조는 먼 훗날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그때, 성령님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중)

이 위대한 징조이자 예언의 말씀은 세상의 군왕들이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하던 그때,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가득한 왕이 통치하고 있던 그때, 온갖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바로 그때, 그 땅에 주어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 징조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땅에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게 이토록 어려웠는가!’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임마누엘을 보내리라는 말씀을 하시려 한 그 순간에도 아하스 왕은 징조가 필요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이 말씀은 사실 받기를 거부하는 아하스에게 억지로 주신 예언의 말씀이자 증거였습니다. 처음부터 세상은 이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를 위해 오고 계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맞이합시다. >

먼 훗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던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고난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지배 속에서 참된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을 때는 그분을 맞이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날에 베들레헴 여관에는 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도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백성이 징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땅의 백성이 그의 누우실 자리를 준비하든 준비하지 않든, 반드시 오실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위대한 약속은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구하지 않던 우리, 나와 같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조였습니다.
아하스는 거부하는데, 하나님은 주십니다. 세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하나님은 이 세상 안으로 밀어 넣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중)

오늘 본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리고 징조를 구하지 않은 아하스를 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온갖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 지략과 재물, 권력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우리에게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하는데도 필요 없다고 말하던 아하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도리어 귀찮아하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다시,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방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들 탄생의 예언조차, 그 징조조차 받아들일 공간이 없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사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에게는 그런 자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아기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자고 끊임없이 되뇌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준비가 부족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징조를 보이리라.” 2019년에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아하스와 같은 답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징조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 임마누엘 주님’을 창조해 주시고, 우리 안에 함께하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며, 2019년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이 아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I Will Give You A Sign

Isaiah 7:10-16

Today’s passage is hard to understand, but it containsa very well-known verse: “The virgin will conceive and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Isaiah 7:14) Matthew 1:23quotes this verse in describing the birth of Jesus.

In the Book of Isaiah, there are many prophecies alluding to the birth of Jesus, including Isaiah 7:14 above. Two other such verses are Isaiah 9:6 and Isaiah 11:10:“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Isaiah 9:6)“In that day the Root of Jesse will stand as a banner for the peoples; the nations will rally to him, and his resting place will be glorious.” (Isaiah 11:10)These verses reveal that the nativity of Christ was not a haphazard event, but one in accordance with God’s great, magnificent plan.

Interestingly, however, when we take the historical context into consideration, Isaiah’s prophecieson Jesus’ birth seem to be spoken in “odd” places. We cannot but question, ‘Is this really the right place and context for a prophecy on the Messiah?’

Usually, Isaiah 7:14 is interpreted from the viewpoint of the New Testament—that i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fulfillment of the prophecy. However, today, I would like to look at this verse from the perspective and historical context of the Book of Isaiah. This will be meaningful with Christmas ahead of us.

The political and historical context of Isaiah chapter 7 is quite complex. Today’s passage starts with the Lord speaking to Ahaz who is king of Judah, son of Jotham,and grandson of Uzziah.

Second Kings assess Ahaz as follows:“Ahaz was twenty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in Jerusalem sixteen years. Unlike David his father, he did not do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his God. He followed the ways of the kings of Israel and even sacrificed his son in the fire, engaging in the detestable practices of the nations the Lord had driven out before the Israelites. He offered sacrifices and burned incense at the high places, on the hilltops and under every spreading tree.” (2 Kings 16:2-4)

As you can see, Ahaz was not devotedto the Lord. Far from it. He followed the detestable practices of the nations, burned incense at the high places, and even sacrificed his own son in the fire. Therefore, the context of today’s passage is a time when Judah’s king Ahaz was serving other gods and ruling the kingdom as he wished.

Ahaz became kingof Judah at the age of twenty. Around that time,the countrywas faced with an extremely difficult diplomatic problem, which is described in the first part of Isaiah chapter 7 and 2 Kings chapter 16.

Three powers surrounded Judah at the time: Aram, Israel, and Assyria. Simply put, Aram and Israel had formed an alliance against Assyria and was urging Judah to join their alliance. However, Ahaz, King of Judah, rejected this offer. Instead, he tried to keep Aram and Israel in check by forging ties with Assyria.

This led to an invasion from Aram and Israel: “When Ahaz son of Jotham, the son of Uzziah, was king of Judah, King Rezin of Aram and Pekah son of Remaliah king of Israel marched up to fight against Jerusalem, but they could not overpower it. Now the house of David was told, ‘Aram has allied itself with Ephraim’; so the hearts of Ahaz and his people were shaken, as the trees of the forest are shaken by the wind.” (Isaiah 7:1-2)

In this national crisis, the Lord sent the prophet Isaiah to Ahaz. To our surprise, God tells Ahaz that He will protect Judah. Why did God decide to protect Ahaz and his kingdom when he was not faithful to Him? Hard as it may be to comprehend, this is what God did. He sent Isaiah to Ahaz, telling him that the attack from Aram and Israel would not succeed: “Say to him, ‘Be careful, keep calm and don’t be afraid. Do not lose heart because of these two smoldering stubs of firewood—because of the fierce anger of Rezin and Aram and of the son of Remaliah.’” (Isaiah 7:4)

How strange! Ahaz was not devoted to the Lord and worshipped foreign gods. Yet, God was not angry with him. Instead, He approached him and said that He would protect him and his country. Furthermore, through Isaiah, He says the following to Ahaz: “Again the Lord spoke to Ahaz, ‘Ask the Lord your God for a sign, whether in the deepest depths or in the highest heights.”” (Isaiah 7:10-11)

God’s mercy abounds. Ahaz was not faithful. He served other gods. His heart didn’t follow the Lord. But, when he was attacked by Aram and Israel, God told him that Judah would be safe and that He would give him a sign that God is with him. Furthermore, He told Ahaz to seek a sign. God seems ready to give whatever sign Ahaz sought.

God’s love for Judah seems unrequited. Judah is deep in sin and has turned away from God. Yet, God still loves Judah. Judah is the country that succeeded the throne of David. God loved David’s descendants because He loved David. Even though they repeatedly did evil and abandoned Him, God kept His promise with David. This is how God loved and cared for Judah.

But, a strange and dramatic turn of events happens right after this scene. God told Ahaz to ask for a sign, but what was Ahaz’s staggering response? He says that he will “not” seek a sign: “But Ahaz said, ‘I will not ask; I will not put the Lord to the test.’” (Isaiah 7:12)What a startling answer!

Dear Church, can you fully grasp the meaning of Ahaz’s answer “I will not put the Lord to the test”? In my view, no other verse in the Bible is as delusive as this one. On the surface, these words seem full of faith. Truth be told, it’s the opposite. These words express Ahaz’s flagrantdisbelief. He is actually saying, ‘God has nothing to do with me. I will do whatever I please without consulting Him.’ Even though God approached him in a crisis and kindly told him to ask for a sign, Ahaz is saying,‘I don’t need a sign from God. I don’t need Your help. I will do as I wish.’

At this, Isaiah says, “Hear now, you house of David! Is it not enough to try the patience of humans? Will you try the patience of my God also?” (Isaiah 7:13) Then he says that before the boy knows enough to reject the wrong and choose the right, the land of the two kings Ahaz dreads, Aram and Israel, will be laid waste. Isaiah also prophesizes that God will bring upon Judah an unprecedented disaster.

Brothers and sisters, this is the context of the verse “the virgin will conceive and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Hearing all this, what comes to your mind?

Ahaz has rejected a sign from God. Yet, God gives him one. He tells Ahaz that “the virgin will conceive and give birth to a son.” On the one hand, these words seem to be a punishment against Ahaz and Judah. On the surface, they appear to be a judgement because God is saying that a son will be born and before the boy knows enough to reject the wrong Judah will face a terrible disaster.

However,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these words can be seen as God’s unilateral message of salvation. God is telling Ahaz that “Immanuel,” whose meaning is God with us, will be born. God is making plans for a new, true king Immanuel—a king that will obey Him. Indeed, centuries later, God’s sign is revealed to us, again, through the Holy Spirit in the birth of Jesus: “The virgin will conceive and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Isaiah 7:14)

This wonderous sign was given when a faithless king ruled over Judah and all kinds of idolatry were taking place. At the time, the people of Judah could not understand God’s words about the sign. Nor could they accept them. God’s words alluded to a new king from David’s lineage, not a faithless one like Ahaz. They were a prophecy about Immanuel—a true King that would become a bridge between God and us.

Reading these verses in Isaiah, I realized how difficult it was for the Son, Immanuel, to come into this world. The prophetic words “the virgin conceiv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were given in the face of Ahaz’s blatant rejection. From the very beginning, the world had no intention to accept these words at all.

The situation was no differentwhen baby Jesus was born centuries later. The Israelites were living in hard times under harsh Roman rule. They were expectantly awaiting a Messiah, but when the Son came, there was no room for Him. According to the Book of Luke, there were no inns available on the day Jesus was born.

The world did not have a room ready for Him. So, our Savior had to be born in a stable. Even then, the world was not ready to accept Jesus. But God says, “the virgin will conceive and give birth to a son…” God is saying that His Son will be born despite the world’s unpreparedness, despite our unaccepting hearts, despite our rejection for a sign, despite there being no room for Him.

This is God’s grace, the gospel. God’s promise of Immanuel—“God with us”—was not given to one who desperately sought a sign, but given to people like us who rejected God and did not seek Him.

Ahaz rejected God. Yet, God gave. The world is not ready to receive. Yet, God gives. A baby. Our sweet Jesus.

“The virgin will conceive and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Isaiah 7:14)

I see us in today’s passage on Ahaz. We are unbelieving. We depend on our own strength, intelligence, wealth, and power. We say we don’t need God’s help or His intervention—just like Ahaz. Therefore, we must ask ourselves, ‘Do we have a room ready for our King Jesus? Are we truly awaiting the coming of our King?’

God was determined to be with Ahaz and Judah, to send them “Immanuel,” and to save them—despite their disobedience and unfaithfulness. This is grace.

“The virgin will conceive and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Dear Church, God spoke these words even when we rejected Him and did not welcome Him. These words are a precious gift to mankind—to us. This “son”, Jesus Christ our Savior, has come to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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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 10 ~ 16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 이사야에는 메시아 탄생에 관한 예언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

오늘 본문과 같은 이사야 말씀은 성경의 흐름을 잘 알지 못하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낯익은 한 구절을 보셨을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중)

이 말씀이 익숙한 이유는 신약 마태복음 1장 23절에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말씀으로 인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접해 온 마태복음 1장 23절의 출처가 이사야 7장 14절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에는 크게 세 부분 메시아 탄생과 관련된 직접적인 예언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조금 전에 읽은 이사야 7장 14절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이사야 9장 6절로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세 번째 말씀은 이사야 11장 10절입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 11:10)

이렇듯 이사야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암시하는 특별한 예언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한순간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성경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게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인용되는 이사야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히 그 실제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과연 이곳에 이런 말씀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아하스 왕 통치 당시 남유다는 정치·종교적으로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

우리는 지금까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마1:23)라는 말씀을 신약의 관점에서 신약의 렌즈로 살펴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 다른 렌즈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사야서 자체에서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관점에서 선포된 말씀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이 말씀을 성탄을 앞둔 시점에 되짚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이 있는 이사야 7장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아하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웃시야의 손자며, 요담의 아들입니다. 이사야 7장과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본문이 열왕기하 16장입니다. 열왕기하 16장 2절은 아하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열왕기하 16:2)

아하스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못했으며, 제대로 정치를 계승하지도 못했습니다. 열왕기하 16장 이후의 말씀을 보면, 아하스가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6장 3~4절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갔고, 자기의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은 행위였다. 그는 직접 산당과 언덕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하였다. (열왕기하 16:3~4, 새번역)

아하스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았고, 당시 이방 민족이 섬기는 역겨운 풍습을 받아들였습니다. 산당과 언덕의 푸른 나무 아래서 풍요와 다산을 비는 풍요 제의를 드리도록 허용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을 잡아 바치는 인신 제사까지 허용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다윗 가문인 유다, 그리고 유다 왕이었던 아하스가 다양한 신, 이방 신들을 섬기며 통치하던 때가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하스 왕이 스무 살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려 했던 즈음, 주변국과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등장하는 이사야 7장 앞부분과 열왕기하 16장이 그와 같은 역사적인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아하스 왕이 남유다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 주변에는 강대국들과 여러 나라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시리아가 있었고, 북쪽에는 이스라엘이 있었으며, 앗수르도 있었습니다. 시리아의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연합해 앗수르를 견제하며 대항하고 있던 터입니다. 유다 왕 아하스가 즉위하게 되었을 때,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왕들은 전령을 보내 아하스에게 반 앗수르 동맹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앗수르와의 관계를 열고자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앗수르를 의지해 주변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정치적인 상황이 전개되던 상황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군대는 유다를 쳐들어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계속해서 정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이사야 7장 1~2절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가 나라를 다스릴 때에, 시리아 왕 르신이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와 함께 예루살렘을 치려고 올라왔지만, 도성을 정복할 수 없었다. 시리아 군대가 에브라임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 (이사야 7:1~2, 새번역)

국가적인 위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유다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군대가 북이스라엘에 진 치고 호시탐탐 공격할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유다를 다스리던 아하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보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주신 말씀은 뜻밖이었습니다. 유다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떠난 남유다를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아하스 왕과 그의 나라를 하나님은 왜 보호해 주시려는 것입니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 아하스에게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공격이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예언을 전해 주십니다.

그(아하스)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그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이사야 7:4)

새번역은 “너는 삼가며, 조용히 하라.”라는 이 말씀을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라는 말씀으로 번역했습니다. 마치 유다의 편이 되셔서 유다를 격려하시고, 그들에게 무언가 작전 지시를 내리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의 편이 되어 주시고자 하는 의도를 느끼게 되는 내용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는 아하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도 않고 이방 신을 섬기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위기 속에서 그에게 다가가셔서 그의 나라를 보호해 주시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이사야 7:10~11)

하나님의 한없이 자비로우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아하스, 이방 신을 섬기는 아하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는 그입니다. 그러한 아하스가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나라를 보호할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징조든지 구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하스가 어떤 어려운 징조를 보여 달라고 했어도, 하나님은 보여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그러니 징표를 너에게 보여주마. 그 징조를 내가 보여주마. 무엇이든지 말해 봐라. 내가 너의 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증명해 보이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전개를 마주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이자 하나님을 멀리 떠난 유다를 하나님이 아직도 짝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의 집’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하스 왕의 가문을 다윗의 집이라고, 다윗의 가문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다윗의 왕권이 이어지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셨기에, 다윗의 후손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악행을 반복해 저지르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떠났을지라도, 하나님은 다윗과 약속하신 것을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유다를 사랑하시고, 돌아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아하스 왕의 불신앙에도 하나님은 신실한 약속을 더하십니다. >

그런데 참으로 흥미롭고 반전이 되는 장면이 이후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구원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내가 보여주겠다고 하시는데, 정작 아하스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겠다는 징조를, 아하스 왕 자신은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 7:12)

시리아와 북이스라엘로부터 공격받는 위협적인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의 순간에 다가오셔서 그들의 공격을 막아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징조를 보여 달라면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정작 아하스는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아하스의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성경에 적힌 말씀 가운데 이 말처럼 표현 자체와 속뜻이 다른 것도 드물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이 말은 언뜻 보면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의 믿음의 선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아하스 왕의 말은 불신앙의 말이었습니다. “나는 여호와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간섭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 없이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기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나에게 징조를 요구하기만 하면, 내가 너에게 보여주고 너와 너의 나라를 보호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아하스는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내 생각대로 하겠습니다. 내게 하나님의 징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불신앙이요, 찾아오시는 하나님에게 불명예를 드리는 것이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이렇게 책망합니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이사야 7:13, 새번역)

그런 뒤 이사야는 그 유명한 말씀, 우리가 잘 아는 그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사야 7:14, 새번역)

그리고 바로 이어, 이제 이 아이가 다 성장하기 전에 유다를 치러 온 두 나라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땅이 황무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남유다도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재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 가운데 들어 있는 말씀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7:14)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 세상은 임마누엘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

지금까지 저는 오늘 본문과 관련된 여러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하스가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징조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의 탄생과 관련한 예언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유다를 도우시려는 의지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유다 왕 아하스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징조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곳에 징조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아하스는 징조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징조를 주십니다. 참으로 초라해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하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징조를 그에게 던져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징조의 말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한편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는 아하스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처럼 들립니다. 표면적으로는 아이가 태어나서 선악을 구별하기 전에, 그만큼 오래되지 않아서 유다에 재난이 이를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또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선포입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이 이름을 가진 아들이 태어나게 되리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불신앙의 유다와 아하스를 향해 주셨던 말씀이 바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이제 너희에게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순종하지 않는 왕이 아닌, 아하스와 같은 왕이 아닌, 다윗의 가문에서 새로운 왕이 태어날 것입니다. 새로운 왕의 도래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진정한 왕, 임마누엘의 왕, 그 왕의 도래를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 설계도를 하나님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나아가 이 하나님의 말씀, 이 징조는 먼 훗날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그때, 성령님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중)

이 위대한 징조이자 예언의 말씀은 세상의 군왕들이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하던 그때,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가득한 왕이 통치하고 있던 그때, 온갖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바로 그때, 그 땅에 주어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 징조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땅에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게 이토록 어려웠는가!’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임마누엘을 보내리라는 말씀을 하시려 한 그 순간에도 아하스 왕은 징조가 필요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이 말씀은 사실 받기를 거부하는 아하스에게 억지로 주신 예언의 말씀이자 증거였습니다. 처음부터 세상은 이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를 위해 오고 계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맞이합시다. >

먼 훗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던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고난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지배 속에서 참된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을 때는 그분을 맞이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날에 베들레헴 여관에는 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도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백성이 징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땅의 백성이 그의 누우실 자리를 준비하든 준비하지 않든, 반드시 오실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위대한 약속은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구하지 않던 우리, 나와 같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조였습니다.
아하스는 거부하는데, 하나님은 주십니다. 세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하나님은 이 세상 안으로 밀어 넣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중)

오늘 본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리고 징조를 구하지 않은 아하스를 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온갖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 지략과 재물, 권력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우리에게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하는데도 필요 없다고 말하던 아하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도리어 귀찮아하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다시,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방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들 탄생의 예언조차, 그 징조조차 받아들일 공간이 없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사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에게는 그런 자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아기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자고 끊임없이 되뇌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준비가 부족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징조를 보이리라.” 2019년에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아하스와 같은 답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징조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 임마누엘 주님’을 창조해 주시고, 우리 안에 함께하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며, 2019년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이 아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2019년 12월 2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징조를 네게 보이리라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99장, 11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사7:10-1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2월 2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이사야서에는 크게 세 곳에 메시아의 탄생과 관련한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사7:14, 9:6, 11:10)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한 순간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우리들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있는 이사야서 7장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아하스 왕이 남유다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에, 주변에는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그리고 앗수르라는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군대가 유다를 쳐들어오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사7:1-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남유다의 왕인 아하스에게 보내어, “유다를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를 향한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사7:4) 아하스가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곤경을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보호받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징조를 보여주시겠다.”(사7:10-11)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아하스 왕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사7:12)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징조를 요구하기만 하면 보여주겠다고 하셨지만, 정작 아하스는 “그런 것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사야는 그 유명한 말씀을 아하스에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사7:14, 새번역)

하나님께서 징조를 보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하스는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절과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억지로 주시는 징조가 바로 아들의 탄생과 관련한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를 사랑하시고, 유다를 도우시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또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아하스와 같은 불신앙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고백하는 참된 왕이 올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땅에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습니다. 받기를 거부하는 아하스에게 억지로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던 사람에게 주어진 징조가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구하지 않던 우리들, 나와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징조입니다. 이 아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나누기

1.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이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아하스 왕과 유다의 거절에게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위대한 선물되신 “임마누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서로 축복하며 함께 기도하세요.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한 우리들을 위하여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2019년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복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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