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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낭비

요한복음 12: 1 ~ 8

김경진 목사

2020.12.06

< 예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효용의 관점으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요한복음 12:1)

이 짧은 문장에는 두 가지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는 유월절 엿새 전 예수께서 십자가 지기 얼마 전에 벌어진 사건이란 점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기적을 일으킨 동네였다는 점입니다. 한편 본 사건은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도 공통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각 복음서 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당시 베다니 지역의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곳에 나사로가 있었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합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수많은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고, 시몬도 치유되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잔치가 벌어졌으니, 얼마나 큰 감사와 기쁨이 넘쳤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조금은 과도한 모습이 포착됩니다.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향유를 부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당황했는데, 그녀가 부은 향유의 가치가 300데나리온은 족히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당시 가룟 유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꾸짖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요한복음 12:5, 새번역)

300데나리온은 상당한 금액입니다. 당시 하루 일당이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300일 동안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소득, 곧 오늘날로 말하면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이렇게 소비해도 되는가? 아무리 고귀한 분께 드리는 것이라지만 이렇게 허비해도 되는 것인가?’
당시 사용된 나드 향유는 킹 제임스 번역 성경에 따르면, ‘스파이크 나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말라야 지방에서 나는 식물에서 얻어지는 향유로, 고대 아로마 가운데 가장 고귀한 향이라고 합니다. 또한 향유는 오늘날의 향수와 비슷합니다. 한두 방울만 사용해도 향이 충분합니다. 즉 아주 소량만 발라도 향이 가득 퍼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한꺼번에 부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렇게까지 부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효율적인 행동이었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 오늘 사건의 배경과 관련해 질문이 생깁니다. 당시 사건이 벌어진 곳은 ‘베다니’였습니다. 수도가 있는 도시거나 중심적인 도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골의 한 동네로, 서민들이 모여 살던 지역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들어서신 곳은 나병 환자였던 시몬이 살던 집입니다. 서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예수님이 단출하게 식사를 나누고 계십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부어 버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녀의 행동이 당시의 상황과 배경에 어울릴 법한 행동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 마리아의 행동은 사랑에 근거한 헌신이었습니다. >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향유 중 일부를 팔아 예수님에게 멋진 옷을 마련해 드렸을 것 같습니다. 새 신발도 신겨 드리고, 좋은 것들을 준비해 예수님을 치장해 드렸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양의 향유를 뿌려드렸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온 방에 향기가 퍼질 테니 말입니다. 그런 후 남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써 달라고 예수님 앞에 내어 드렸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까요? 이 정도는 해야 보다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헌신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우리가 가진 나름의 삶의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경제 법칙, 곧 효용의 법칙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또 무엇을 사든지 ‘과연 이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효용성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집니다. 경제적인 가치를 따져 묻고, 그 가치에 따라 삶을 택해 나갑니다. 경제적 효용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마리아의 행동에 주님은 도리어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6 중)

게다가 이런 말씀도 덧붙이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6:13, 새번역)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치 그녀의 행동이 모범 사례임을 확증해 주듯이, 이 사건이 오랫동안 기억되고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이유로 마리아를 칭찬하셨을까요? 먼저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하셨다는 것은 적어도 마리아가 행한 일을 효용의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효용, 소비, 경제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은 접근부터 잘못된 방식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관점에서 마리아의 행위에 손을 들어 주셨을까요? 또 마리아는 어떤 관점과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향유 전부를 쏟아부었을까요?
만약 마리아의 행위를 사랑에 의한 헌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과 어떤 거래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경제적인 목적에서 향유를 부은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예수님이 자신의 오라비를 살려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분께 무엇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 전부라도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인 향유를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바침’ 곧 ‘온전한 헌신’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고귀한 낭비를 행하셨습니다. >

우리도 살면서 이와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원리와는 전혀 다른 삶의 원리입니다. 여러분도 살아오면서 한두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어서라도 잡고 싶은 사람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현재 여러분의 남편이자 아내일 줄 믿습니다. 너무 고귀해 잃고 싶지 않은 사람, 어떤 것을 주고서라도 내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헌신’입니다.
자녀에게 병이 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더는 가망이 없다고 판정까지 했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수천만 원, 아니 수억 원의 비용이 든다고 해도 자녀를 포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물론 맹목적인 투자입니다. 거룩한 낭비입니다. 비타산적인 헌신입니다. 때로는 미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절대적으로 헌신합니다. 자녀를 향한 깊은 사랑이 있는 까닭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의 행위를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사랑에 근거한 고귀한 낭비를 귀중히 여겨 주신 것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가 이 거룩한 낭비를 기억할 수 있도록 명령까지 하시면서 말입니다.
사실 이 거룩한 낭비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찌감치 인간을 포기하고 다른 존재를 만드시는 게 훨씬 경제적이었을 것입니다. 그 방법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경제적으로 대우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비의 관점이나 효용성의 관점에서 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못난 우리를 더더욱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내어놓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가장 거룩한 낭비를 몸소 행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중)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왜입니까? ‘사랑’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바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고귀한 낭비의 의미를 압니다. 경제적 원리를 따지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삶의 한 면만 알 뿐입니다. 삶의 또 다른 차원인 ‘거룩’의 영역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고귀한 낭비를 모른 채 인생의 허비할 뿐입니다. 이 거룩한 낭비의 차원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매우 불행한 삶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어머니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머니들이야말로 거룩한 낭비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비타산적으로 투자합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경제의 원리나 소비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할 뿐입니다.
종교의 영역 역시 거룩한 낭비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열병을 앓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삶을 바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진 것들 바치며 헌신합니다. 오지로 선교를 떠나기도 합니다. 거룩한 순교로 생명을 내어 드리기까지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고귀한 낭비, 거룩한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마리아는 고귀한 낭비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아름답게 비추었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내어 줄 만큼 우리를 위해 고귀한 낭비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고귀한 낭비를 해 보았습니까? 어떤 이는 일평생 향유를 모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저 더 큰 향유 옥합으로 바꾸는 데 일생을 바치기도 합니다. 일생 한 번도 제대로 향유 옥합을 깨뜨려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큰 옥합을 가졌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향유를 모았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느냐’, ‘깨뜨릴 수 있다면 언제 깨뜨릴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소비, 거룩한 낭비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이 옥합을 깨뜨려야 하겠습니까? 또 향유를 붓는다는 것은 오늘 내 삶에서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당시 본 사건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벌어졌다고 보도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이 곧 벌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직전인 요한복음 11장 57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요한복음 11:57)

이제 곧 예수님이 붙잡힐 정황이었습니다. 외부적으로도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쓸쓸했을까요?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되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 목요일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셨다고 하는데, 베다니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어땠을까요? 그 자리에는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와 시몬 등 예수께 은혜를 입은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곳을 떠나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은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이 식사는 마지막 식사, 최후의 만찬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순간이 될 그 순간 예수께 향유를 쏟아붓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고 묘사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너무나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놀랍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왕을 향한 복종과도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보인 모습은 당시 황제 앞에서 신하들이 취했던 행동입니다. 온전한 헌신을 드러낼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당시는 황제의 발에 머리를 조아림으로 완전한 헌신과 복종을 표하곤 했습니다. 곁에는 향이 놓여 있었고, 신하들이 복종의 제사를 드리곤 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를 알고 한 행동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이미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왕이신 예수께 쏟아붓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께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그분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합니다. 왕께 경배합니다. 이런 마리아의 헌신이 고귀한 헌신일 수 있었던 것은 ‘시간적인 적절성’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2:7~8)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 마리아는 고귀한 헌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녀에게 “너는 나의 장례를 준비하였다.”라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 이웃을 위해 고귀한 낭비를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언제 옥합을 깨뜨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셔서 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에 우리가 옥합을 깨뜨릴 만한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는데,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누구를 향하여 옥합을 깨뜨릴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소비와 경제의 관점에서, 정치와 사회의 관점에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평가절하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고, 마치 더는 희망이 없는 곳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상태로 교회가 내몰리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 주님께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을지 생각해 봅니다. 마리아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께 옥합을 깨뜨렸던 것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병으로 옥합을 깨뜨렸던 것처럼, 우리도 교회를 위해, 주님의 일을 위해 고귀한 낭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가복음 14:7)

이 말씀은 마리아와 함께 있던 이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당시에 옥합을 깨뜨릴 때 예수님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 주십니다. 가난한 자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바로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도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예수님이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중)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 어려움을 당한 자들, 배고픈 사람들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옥합을 깨뜨려야 할 작은 예수입니다. 그저 단순히 구제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드리듯이 그들에게 고귀한 헌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듯이 가난한 자들에게 옥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귀한 낭비가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6 중)

Noble Extravagance

John 12:1-8

Today’s passage starts with this verse: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Jesus came to Bethany, where Lazarus lived, whom Jesus had raised from the dead.”(John 12: 1) This verse reveals two important background information about the story that is to begin. First, it happened right before Jesus went up to Jerusalem. Second, it took place in Bethany, the very place that Lazarus was raised from the dead.

The story about the womanwho poured perfume on Jesus’ feet is written not only in John but in all of the four gospels. Although the details differ somewhat, it is recorded as happening around the time Jesus entered Jerusalem. Mark says it happened while Jesus was in Bethany, “reclining at the table in the home of Simon the Leper.” This supper may have been Jesus’ last at Bethany. So, Jesus was in Bethany, having supper at the home of Simon who was healed of his leprosy by Jesus. In Bethany, Lazarus was raised from the dead. According to the Book of John, Martha and Mary were serving Jesus at this supper.

We can assume that those who gathered weregratefulfor Lazarus’ resurrection and Simon’s healing. John tells the story of Lazarus being raised from the dead in chapter 11, and, in chapter 12, Mary pours the perfume. In short, at this gathering at Simon’s place, the disciples and all those who had been touched by Jesus had a deep gratitude for the Lord’s grace.

But something out of the ordinary—an excessive act—takes place at this very scene. According to John, Mary broke her jar of perfume and poured it on Jesus’ feet. Mark says it was “a woman,” while Luke writesthat a sinful woman anointed Jesus with perfume.

Many, including the disciples, were shocked because the perfume was worth over 300 denarii. Judas Iscariot, who later betrayed Jesus, said, “Why wasn’t this perfume sold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It was worth a year’s wages.” (John 12: 5)Yes, the perfume was extremely expensive. Since a day’s wage was about one denarius at the time, 300 denarii were almost a year’s wages. In today’s terms,it was one’s annual income.

When this unexpected thing happened,those sitting right next to Jesus were baffled. Even the disciples were displeased, which is why the Bible says that they rebuked the woman. John, however, singles out Judas as the one who criticized her. Whenever I read this passage, I also often feel that the disciples’ displeasure and rebukewere appropriate and natural.Such a waste, an excess! Was it really necessary?

Think about it. How should one use 300 denarii? And what is nard? It is a perfume, a scent. The King James Version translates it more clearly as “spikenard,” one of the most expensive aromas of the time extracted from a Himalayan plant. Well, then, how should one use a perfume? In droplets. Just a few would fill a whole room. Mary did not have to pour so much. Why waste the whole bottle when just a few drops would have sufficed? What a waste of money. Once poured, that perfume will disappear. And what difference would that make?

Jesus, His followers, and Mary were not exactly living in Beverly Hills. They weren’t at a fancy party, either. Mary wasn’t all dressed up in luxury clothes. So, pouring out a whole bottle of expensive perfume?What’s the use?And what did Jesus say about loving one’s neighbors? Shouldn’t the perfume be saved to help the poor, instead of pouring it all out?

If it were me, I would have used just a few drops on Jesus’ feet. The rest—I would have usedto buy Jesus some new clothes and sandals and to give Him some money to give to the poor.

This train of thought comes from our economic principles of consumption and the law of utility. When we buy a product or do something, we always think about its utility. In our world today, this is a rule of thumb. So, Mary’s extravagance startles us who live and think from a utilitarian point of view. It seems ineffective.

Yet, Jesus’ response was not so. He said something unexpected: “Leave her alone. […] Why are you bothering her? She has done a beautiful thing to me.”(Mark 14:6) He praisedMary. Furthermore, Jesus said, “Truly I tell you, wherever this gospel is preached throughout the world, what she has done will also be told, in memory of her.” (Matthew 26:13)

Why did Jesus praise the woman? His praise means that He did not judge her actions from an economic or utilitarian point of view. Therefore, such perspectives will not aid us in understanding this passage. If so, what is the meaning of Mary’s act? What had she really done to Jesus?

Mary had given herself wholly to Jesus. She had given Him all her love. She was committing herself to Jesus in love. It was a commitment based on love. This may sound a little strange, but we experiencethis often in our lives, too.

Mary did not consume the perfume based on economic principles. She gave Jesus,or committed to Him, what she had. This may be difficult to understand, but “effective consumption” and “love-based giving (or commitment)” are entirely different. They exist on totally different dimensions and are governed by different principles.

Since we are so accustomed to the principles of effective spending, we tend to think only of efficacy in terms of our possession. But our lives are not just made up of consumption. They have another dimension of giving, or committing.

Then what does it mean to give/commit? In life, we sometimes come across someone/something so special that we wouldn’t exchange him/it for the world. There is that someone whose worth is simply immeasurable.

Haven’t we all experienced a burning love in our youth? We know what it’s like to fall for someone so bad that we would give everything for that person. Isn’t there that someone in your life that you would willingly surrender everything for? This is “love-based commitment.”

Imagine that your boy is in a critical condition, unconscious in the ICU and living just day by day. What would you do? If only you could save him, money is not an issue, even if it means spending millions of dollars or falling into debt. Even when others say all your efforts are useless because he is going to die anyway—even when they advise you to be rational for your own sake—words fall on deaf ears. To save your boy you would spend everything.

This is the kind of giving and commitment that I am talking about. This is divine extravagance. An uncalculated investment. It may seem too extravagant—even a waste—but it is unconditional commitment. It is a total commitment devoid of any calculation or reservation.

It was from this perspective that Jesus saw the woman. He valued her holy extravagance and love-based commitment.

Actually, this divine extravagance was shown to us by God. God did not view us from a utilitarian viewpoint or treat us with economic principles. If He had thought about utility or efficacy, it would have been best to just give up on us. But God loved us. He had a burning love for us. He was infatuated with us. So, He was extravagant with us. He spent something too precious on us—His Son.

“For God so love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 (John 3:16)

He gave us his one and only Son. He committed his one and only Son. Behind divine extravagance, there is always love. Love is at the bottom of it. One who does not love cannot give. Without love, one cannot do such an act of holy extravagance.

A person who calculates utility and efficacy may seem smart, but he/she has yet to know a burning love. Our Jesus showed the perfect example of this divine extravagance. Living without knowing this love-based commitment—this divine extravagance—is a tragedy. A life lived without experiencing such a commitment and sacrifice is a life not lived.

Mothers, you know only too well what this noble extravagance is. Mothers are always on the side of their children. They lose sleep, caring for and feeding them. Some even work odd jobs in adverse conditions to support their education. It’s blind, unconditional love, an uncalculated investment. No economic principle or utilitarian theory in the world can explain this mystery. This is giving, commitment.

Our God loved us so that He sent His one and only Son to us. He sacrificed His one and only Son for humans. And that Son, Jesus, willing gave His life for us on the cross because He loved us. Jesus gave His life for us.

Then, for whom and for what must“we” give ourselves and our possessions? The highest level of a religion is a divine extravagance, an infatuation with a god. Countless people have already given their lives to God, sacrificing everything. Some have become missionaries in the poorest and most dangerous regions in the world. Some have become martyrs.

Dear Church, have youhad such an experience of giving extravagantly to God? Have you experienced such a total “giving” out of sheer love and gratitude for God? Have you committed yourself wholly to God—without making any economic considerations whatsoever—for healing you and giving you hope in Christ?

Some people spend their whole lives just trying to earn enough to get an “an alabaster jar,” while some try to get a bigger one. They end up never breaking it.In the end, it doesn’t matter how big or expensive your alabaster jar is. It’s whether, and when, you break it for Jesus.I dearly hope that you will break yours by spending what you have in a beautiful way, by practicingholy extravagance.

Then when—on what occasion—should we break our alabaster jar?

As I mentioned, John says the woman anointed Jesus six days before Passover. The following verse comes right before today’s passage: “But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had given orders that anyone who found out where Jesus was should report it so that they might arrest him.”(John 11:57)

Let’s look at the context of today’s passage. Outside, there are people who want to arrest and kill Jesus. Inside, a disciple is thinking of betraying Him. In other words, people around Jesus are starting to betray Him one by one.

How lonely He would have been, knowing all this? He was surrounded by people who believed there was no hope in Him. And death was nearing. Death awaited Him in Jerusalem. In Jerusalem, Jesus helda last supper with His disciples. In Bethany, this one at Simon’s housewas His last. For Mary and Jesus’ friends in Bethany, this was their last meal with Him.

It was on this very occasion that Mary broke her alabaster jar.Unlike the other gospels, John describes that May poured perfume over Jesus’ feet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Such detail! This kind of act was done whena king’s servant expressedhis total commitment. Lying down at the king’s feet meant total obedience and commitment. Perfume was a present for kings as well as a sacrifice to gods. Its beautiful scent signified total commitment.

Whether intentionally or not, Mary had treated Jesus as her king. At the very last opportunity given her, she gave her all to Jesus. She poured out her alabaster jar for the King of kings.

Mary’s commitment was noble and special because she did it at the appropriate time. The timing was right: “‘Leave her alone,’ Jesus replied. ‘It was intended that she should save this perfume for the day of my burial.You will always have the poor among you, but you will not always have me.’”(John 12:7-8) Jesus says, Mary saved the perfume for His burial.

Dear Church, when will you break your alabaster jar?

Criticism against the Church is fiercer than ever. The world continues to judge us with utilitarian, economic, political, and social standards.

But it is in these very times that our Lord seeks people like the woman who broke her alabaster jar. He seeks Christians who will surrender their all to Him, giving extravagantly out of a burning love for Jesus—just as Mary gave her all for Jesus at a difficult time.

As we celebrate Advent this year, how can we live up to Jesus’ expectation? Jesus clearly said, “The poor you will always have with you, and you can help them any time you want. But you will not always have me.” (Mark 14:7)

When Mary anointed Jesus, Jesus was pleased with the perfume poured on His feet. But, after Jesus’ ascension to heaven, where should we pour our perfume?

In Matthew chapter 25, Jesus says He will separate the sheep from the goats when He comes. Let’s remember Jesus’ teaching in this chapter. Jesus says that when the righteous ask God, “Lord, when did we see you thirsty and give you something to drink?,”the King will reply, “Truly I tell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 least of these brothers and sisters of mine, you did for me.” (Matthew 25:40)

Dear Church, with the spread of the coronavirus times are especially hard. Many people are facing extreme difficulty. Today, at this very hour, the Lord expects us to give extravagantly, making noble sacrifices. It is in these very times that noble extravagance is required of us.

Jesus said to the woman who poured out her perfume, “She has done a beautiful thing to me.”(Mark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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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 1 ~ 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예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효용의 관점으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요한복음 12:1)

이 짧은 문장에는 두 가지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는 유월절 엿새 전 예수께서 십자가 지기 얼마 전에 벌어진 사건이란 점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기적을 일으킨 동네였다는 점입니다. 한편 본 사건은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도 공통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각 복음서 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당시 베다니 지역의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곳에 나사로가 있었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합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수많은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고, 시몬도 치유되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잔치가 벌어졌으니, 얼마나 큰 감사와 기쁨이 넘쳤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조금은 과도한 모습이 포착됩니다.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향유를 부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당황했는데, 그녀가 부은 향유의 가치가 300데나리온은 족히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당시 가룟 유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꾸짖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요한복음 12:5, 새번역)

300데나리온은 상당한 금액입니다. 당시 하루 일당이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300일 동안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소득, 곧 오늘날로 말하면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이렇게 소비해도 되는가? 아무리 고귀한 분께 드리는 것이라지만 이렇게 허비해도 되는 것인가?’
당시 사용된 나드 향유는 킹 제임스 번역 성경에 따르면, ‘스파이크 나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말라야 지방에서 나는 식물에서 얻어지는 향유로, 고대 아로마 가운데 가장 고귀한 향이라고 합니다. 또한 향유는 오늘날의 향수와 비슷합니다. 한두 방울만 사용해도 향이 충분합니다. 즉 아주 소량만 발라도 향이 가득 퍼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한꺼번에 부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렇게까지 부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효율적인 행동이었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 오늘 사건의 배경과 관련해 질문이 생깁니다. 당시 사건이 벌어진 곳은 ‘베다니’였습니다. 수도가 있는 도시거나 중심적인 도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골의 한 동네로, 서민들이 모여 살던 지역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들어서신 곳은 나병 환자였던 시몬이 살던 집입니다. 서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예수님이 단출하게 식사를 나누고 계십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부어 버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녀의 행동이 당시의 상황과 배경에 어울릴 법한 행동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 마리아의 행동은 사랑에 근거한 헌신이었습니다. >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향유 중 일부를 팔아 예수님에게 멋진 옷을 마련해 드렸을 것 같습니다. 새 신발도 신겨 드리고, 좋은 것들을 준비해 예수님을 치장해 드렸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양의 향유를 뿌려드렸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온 방에 향기가 퍼질 테니 말입니다. 그런 후 남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써 달라고 예수님 앞에 내어 드렸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까요? 이 정도는 해야 보다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헌신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우리가 가진 나름의 삶의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경제 법칙, 곧 효용의 법칙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또 무엇을 사든지 ‘과연 이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효용성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집니다. 경제적인 가치를 따져 묻고, 그 가치에 따라 삶을 택해 나갑니다. 경제적 효용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마리아의 행동에 주님은 도리어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6 중)

게다가 이런 말씀도 덧붙이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6:13, 새번역)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치 그녀의 행동이 모범 사례임을 확증해 주듯이, 이 사건이 오랫동안 기억되고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이유로 마리아를 칭찬하셨을까요? 먼저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하셨다는 것은 적어도 마리아가 행한 일을 효용의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효용, 소비, 경제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은 접근부터 잘못된 방식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관점에서 마리아의 행위에 손을 들어 주셨을까요? 또 마리아는 어떤 관점과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향유 전부를 쏟아부었을까요?
만약 마리아의 행위를 사랑에 의한 헌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과 어떤 거래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경제적인 목적에서 향유를 부은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예수님이 자신의 오라비를 살려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분께 무엇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 전부라도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인 향유를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바침’ 곧 ‘온전한 헌신’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고귀한 낭비를 행하셨습니다. >

우리도 살면서 이와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원리와는 전혀 다른 삶의 원리입니다. 여러분도 살아오면서 한두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어서라도 잡고 싶은 사람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현재 여러분의 남편이자 아내일 줄 믿습니다. 너무 고귀해 잃고 싶지 않은 사람, 어떤 것을 주고서라도 내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헌신’입니다.
자녀에게 병이 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더는 가망이 없다고 판정까지 했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수천만 원, 아니 수억 원의 비용이 든다고 해도 자녀를 포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물론 맹목적인 투자입니다. 거룩한 낭비입니다. 비타산적인 헌신입니다. 때로는 미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절대적으로 헌신합니다. 자녀를 향한 깊은 사랑이 있는 까닭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의 행위를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사랑에 근거한 고귀한 낭비를 귀중히 여겨 주신 것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가 이 거룩한 낭비를 기억할 수 있도록 명령까지 하시면서 말입니다.
사실 이 거룩한 낭비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찌감치 인간을 포기하고 다른 존재를 만드시는 게 훨씬 경제적이었을 것입니다. 그 방법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경제적으로 대우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비의 관점이나 효용성의 관점에서 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못난 우리를 더더욱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내어놓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가장 거룩한 낭비를 몸소 행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중)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왜입니까? ‘사랑’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바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고귀한 낭비의 의미를 압니다. 경제적 원리를 따지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삶의 한 면만 알 뿐입니다. 삶의 또 다른 차원인 ‘거룩’의 영역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고귀한 낭비를 모른 채 인생의 허비할 뿐입니다. 이 거룩한 낭비의 차원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매우 불행한 삶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어머니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머니들이야말로 거룩한 낭비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비타산적으로 투자합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경제의 원리나 소비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할 뿐입니다.
종교의 영역 역시 거룩한 낭비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열병을 앓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삶을 바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진 것들 바치며 헌신합니다. 오지로 선교를 떠나기도 합니다. 거룩한 순교로 생명을 내어 드리기까지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고귀한 낭비, 거룩한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마리아는 고귀한 낭비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아름답게 비추었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내어 줄 만큼 우리를 위해 고귀한 낭비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고귀한 낭비를 해 보았습니까? 어떤 이는 일평생 향유를 모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저 더 큰 향유 옥합으로 바꾸는 데 일생을 바치기도 합니다. 일생 한 번도 제대로 향유 옥합을 깨뜨려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큰 옥합을 가졌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향유를 모았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느냐’, ‘깨뜨릴 수 있다면 언제 깨뜨릴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소비, 거룩한 낭비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이 옥합을 깨뜨려야 하겠습니까? 또 향유를 붓는다는 것은 오늘 내 삶에서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당시 본 사건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벌어졌다고 보도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이 곧 벌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직전인 요한복음 11장 57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요한복음 11:57)

이제 곧 예수님이 붙잡힐 정황이었습니다. 외부적으로도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쓸쓸했을까요?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되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 목요일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셨다고 하는데, 베다니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어땠을까요? 그 자리에는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와 시몬 등 예수께 은혜를 입은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곳을 떠나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은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이 식사는 마지막 식사, 최후의 만찬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순간이 될 그 순간 예수께 향유를 쏟아붓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고 묘사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너무나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놀랍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왕을 향한 복종과도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보인 모습은 당시 황제 앞에서 신하들이 취했던 행동입니다. 온전한 헌신을 드러낼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당시는 황제의 발에 머리를 조아림으로 완전한 헌신과 복종을 표하곤 했습니다. 곁에는 향이 놓여 있었고, 신하들이 복종의 제사를 드리곤 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를 알고 한 행동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이미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왕이신 예수께 쏟아붓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께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그분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합니다. 왕께 경배합니다. 이런 마리아의 헌신이 고귀한 헌신일 수 있었던 것은 ‘시간적인 적절성’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2:7~8)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 마리아는 고귀한 헌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녀에게 “너는 나의 장례를 준비하였다.”라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 이웃을 위해 고귀한 낭비를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언제 옥합을 깨뜨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셔서 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에 우리가 옥합을 깨뜨릴 만한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는데,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누구를 향하여 옥합을 깨뜨릴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소비와 경제의 관점에서, 정치와 사회의 관점에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평가절하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고, 마치 더는 희망이 없는 곳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상태로 교회가 내몰리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 주님께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을지 생각해 봅니다. 마리아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께 옥합을 깨뜨렸던 것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병으로 옥합을 깨뜨렸던 것처럼, 우리도 교회를 위해, 주님의 일을 위해 고귀한 낭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가복음 14:7)

이 말씀은 마리아와 함께 있던 이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당시에 옥합을 깨뜨릴 때 예수님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 주십니다. 가난한 자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바로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도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예수님이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중)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 어려움을 당한 자들, 배고픈 사람들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옥합을 깨뜨려야 할 작은 예수입니다. 그저 단순히 구제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드리듯이 그들에게 고귀한 헌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듯이 가난한 자들에게 옥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귀한 낭비가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6 중)

2020년 12월 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고귀한 낭비” (요 12:1-8)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04장, 21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12:1-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2월 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 본문,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뿐 아니라 사복음서에 공통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기술된 표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전후해서 일어난 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이런 행동을 “낭비”(새번역, 요 12:5)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평소 이웃사랑에 대해 많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가룟 유다의 주장처럼 이것을 팔아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사실 우리가 이런 판단을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효용의 법칙, 경제적인 소비의 원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산다는 지, 무슨 행동을 할 때, 과연 이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 것인가, 이런 관점이 강력한 기준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소비적 관점, 효용성의 법칙을 무시한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막 14:6, 마 26:13). 그것은 마리아의 ‘사랑에 근거한 바침(헌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바침’은 우리가 자녀에게 보내는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낭비요 비타산적 투자입니다. 때로 조금은 사치스러워 보일지는 모르지만, 맹목적인 몰두요, 어떠한 고려도 보류도 없는 전적인 헌신입니다. 

    이 거룩한 낭비는 사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경제적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비의 철학으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효과의 면으로 보았다면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 더 빨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인간을 사랑했습니다. 인간을 향하여 열병을 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위하여서 너무나도 큰 것을 낭비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거룩한 낭비의 근저에는 항상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우리의 것을 바칠 것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자신의 가진 것을 모두 드렸고, 어떤 이는 선교사로 나섰습니다. 어떤 이는 거룩한 순교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분량의 향유만을 모으느냐, 지금 가진 것 보다 더 큰 옥합에만 신경 쓰느냐 깨트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여러분의 옥합을 깨트리실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귀한 낭비가 요구되는 바로 오늘, 이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 14:6).

     

 나누기

 1. 마리아는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향유를 깨트려 드렸을까요? 

 2. 내가 소중히 여기는 향유 옥합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깨트려 주께 드릴 수 있는 옥합은 무엇일까요?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주님의 아들을 이 땅에 내어 주신 고귀한 낭비로 아무 쓸모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의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룩한 낭비, 고귀한 낭비를 우리들도 우리의 삶 속에서 배우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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