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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짖지 말라

누가복음 18: 15~17

김경진 목사

2023.05.07

<우리는 어떤 말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습니까?>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제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추어 섰습니다. 멈춰 선 택시에서 세 사람이 내렸는데 젊은 엄마와 네다섯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 아이였습니다. 그 뒤에 할머니처럼 보이는 분도 함께 내렸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어린 아들이 엄마 손을 놓고는 열심히 언덕 위를 향해 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안돼!”하고 말합니다. 아이가 엄마를 힐끗 보더니 이번에는 언덕 아래로 다시 힘차게 내려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합니다. “안돼!”

그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엄마와 할머니가 “안돼!”라는 말을 열 번 이상은 연발한 것 같습니다. 물이 있는 구덩이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와 결국 아이를 붙잡고 올라가는 엄마와 할머니의 모습이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안돼”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살까?’ 여러분은 몇 번쯤 하신 것 같습니까? 대부분 셀 수 없이 많이 하지 않으셨을까요? 저 역시 아이들에게 ‘안돼’라는 말을 왜 그렇게 많이 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은 아이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행복해지기를 원했는데, 정작 ‘안돼’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합니다.

아이가 뛰어오르면 다칠까 걱정이고, 떨어질까 걱정됩니다. 놀면 공부를 못할까 걱정되고, 친구를 만나면 못된 친구를 만날까 또 걱정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계속해서 꾸짖고 야단을 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생겨나죠. 잘 살게 해 주고 싶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한 말인데 도리어 아이들에게는 큰 상처로 남는 경우들을 참 많이 경험합니다. 부모를 향해서 마음의 문을 닫거나,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서 힘겹게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우리 아이는 그렇지 않아.’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번은 돌아볼 일입니다.

2020년 1월 15일, 한국경제 사회면에 한 기사 제목이 올라왔습니다. ‘신창원, “선생님 때문에… 악마가 태어났다.”’라는 기사였습니다. 신창원씨의 이야기는 훨씬 이전의 이야기인데 새삼 주목을 받는 듯 보였습니다. 바로 전날 방송 채널에서 그의 사건을 재조명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창원은 강도 치사 혐의로 무기 징역을 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하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그가 8년 만에 통풍구를 통해서 탈옥하게 됩니다. 그 소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시기가 1997년이었으니까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이죠.

신창원은 아주 치밀하게 탈출을 구상했습니다. 화장실에 매일 20분씩 들어가서 쇠창살을 조금씩, 조금씩 그었다고 합니다. 결국 쇠창살 2개를 절단하게 됩니다. 게다가 그 좁은 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15kg 감량했다고 하네요. 교도관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모범수 생활까지 하고요. 탈출 후에는 무려 2년 6개월간 15만 명의 경찰을 따돌리며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99년 경찰에 검거됩니다.

그와 관련해서 『신창원 907일의 고백』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입니다. 책에는 어린 시절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했던 신창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문학 소년이었고, 그림을 잘 그리는 소년이었답니다. 글짓기를 하면 상도 받을 정도였다네요. 그런데 학교에만 가면 늘 납입금을 독촉하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선생님을 보기가 참 힘들었다고 합니다. 책을 쓴 엄상익 변호사는 신창원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누군가에게 칭찬받는다는 것은 확실히 행복한 일이다. 신창원에겐 그런 기억이 많지 않았다.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 사소한 선행을 부추기는 그 아름다운 친절의 말 한마디를 좀 더 여러 번 들을 기회가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는 교도소에 가는 일도, 지금처럼 초라한 도망자가 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배고픔보다는 인정에 굶주린 삶의 낙오자였다.”_신창원 907일의 고백, 181.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은 납입금을 가져오지 못하는 신창원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돈 안 가져왔는데 뭣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기사는 ‘그때 그의 마음속에 악마가 태어났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2022년 11월, 컬럼니스트 이한규 씨는 ‘무서운 말 고운 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선생님의 모욕적인 말 한마디에 반항심이 생겨서 나쁜 길로 가게 된 신창원과 달리, 말 한마디에 힘을 얻고 훌륭한 인물이 된 이국종 교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국종 교수의 가족은 지독한 가난에 허덕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지뢰를 밟아서 한쪽 눈을 잃었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등급의 국가유공자였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린 시절 이국종에게는 그리 자랑스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를 향해서 아이들이 “병신의 아들”이라고 놀렸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귀한 일을 하다가 국가유공자가 된 아버지이지만 아이들은 도리어 이국종의 아버지를 “병신”이라고 놀린 것입니다.

축농증을 심하게 앓던 이국종이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가서 국가유공자 의료복지 카드를 내밀면, 다른 병원에 가 보라면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도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결국 다른 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곳의 의사선생님이 의료복지 카드를 내미는 이국종을 보고는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그리고는 진료비도 받지 않고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열심히 공부하라며 용돈까지 주었는데 그 병원의 이름이 ‘김학산 외과’라고 합니다. 이한규씨는 의사의 말 한마디가 이국종의 삶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컬럼에서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나무위키에도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녀에게, 다음 세대에게 어떤 말을 전하며 살고 있나요? “안돼!”를 연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자녀들 앞에서 긍정의 말을 전하며 살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둘러선 무리 가운데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주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 18:15~17)

 

이 말씀은 어린이주일 때마다 자주 읽고 묵상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른의 입장에서 읽어오곤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나오는 아이들을 제자들이 막아섰을 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말씀에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환영하시고, 기쁘게 맞아주시는구나.’ 그런가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도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겠구나.’라는 마음의 결단을 하곤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어린아이와 같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답을 찾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순전하게 되는 것, 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삶을 결단하곤 합니다. 어른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해석은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유아세례를 베풉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신 구절도 없고요. 그래서 어떤 교파는 유아세례를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교단에서는 유아세례를 오랜 세월 거행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기쁘게 맞아 주시며 만져 주셨으니 ‘우리가 유아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믿고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부모를 따라서 사람들 틈에 끼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터라 아이는 예수님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강론하시는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 이야기조차도 제대로 이해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엄마, 아빠 손에 붙들려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뿐입니다. 엄마, 아빠 주위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딴짓하는 이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번은 아빠가 목마를 태워서 멀리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쩌면 그때 신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있다니!’

그러다 뒤에 있는 사람이 목마를 탄 아이 때문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치자 아이가 다시 내려옵니다. 이제 아이에게 보이는 것은 어른들의 뒷모습뿐입니다. 아버지가 차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가기 시작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도 예수님을 향하여 다가갑니다. 어느 정도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을 때,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살짝 밀면서 주님께로 나아가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혹시나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을 쓰다듬어 주시고 안수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내심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되돌아보며 머뭇머뭇합니다. ‘예수님께 나가도 될까요?’ 그렇게 아버지를 보고, 다시 예수님을 보고, 아버지를 보고, 예수님을 보는 일이 되풀이됩니다. 그 순간, 제자들이 막아섭니다. “안돼!”라는 소리가 들렸겠지요. “어린아이들은 가라!”, “네가 올 자리가 아니야!”, “예수님이 피곤하신데 너희들까지 귀찮게 하지 마라!”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멋진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분께 달려가 보고 싶었는데… 그분에게 안기고 싶었는데…’ 아이는 그만 제자들에 의해서 제지를 당하고 맙니다.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럼 그렇지. 나는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무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멋쩍은 마음도 생겨났겠고요.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상실감이 아이를 사로잡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마는 제가 길을 가다가 성도님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를 보신 성도님이 아이에게 말하면서 “야, 목사님이다! 가서 인사드려” 하고 이야기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님 손에 떠밀리면 저를 보다가 다시 엄마를 봅니다. 그러다가 다시 저를 보고 또 엄마를 봅니다. 그때 제가 아이를 안아 주거나 손을 잡아 주면, 그때서야 마음이 환하게 열리는 듯 아이의 얼굴이 풀리고 인사를 나누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그때 저와 함께 가는 사람이 “안돼!”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가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되겠죠.

예수님이 아이를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6 중)

 

<주님은 천대받던 어린아이를 생명의 언어로 맞아 주시며 그의 미래를 축복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구절을 어른의 입장에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입장에서 이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 생각해 봅니다. “얘야, 잘 왔다. 너 같은 아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거야.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멋진 사람이야. 멋지지 않니?”라는 음성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어른들을 향해서는 “아이들이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아이들에게는 그 말씀이 “하나님 나라가 너의 것이다!”라는 멋진 말로 들렸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요? 말씀을 들은 아이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나 같은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라고?” 아마도 아이는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에 이 아이가 어떤 인물이 되었는지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저는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귀한 역할을 감당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막지 아니하셨고, 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부르시며 긍정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혹시 “안돼!”라는 말, 책망의 말, 걱정의 말, 저주의 말로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도록 하셨습니다. 사랑받는 자녀로, 거부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너 그렇게 살아서 밥 벌어먹기나 하겠니?” “뛰면 다쳐!” 이런 말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 한 번 뛰어라! 그래서 하늘까지 닿아봐라!” 왜 우리는 이런 말로 아이들을 격려해 주지 못할까요?

오늘 우리는 유아세례 예식을 거행합니다. 아이들에게 세례가 베풀어질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다. 마음껏 살아보렴. 행복하게 살아보렴. 너는 잘 될 거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드러나면 부끄러운 일들이 참 많습니다. 부끄러워서 감히 주님 앞에 설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보지 않기로 결정하십니다. 순전한 아이들처럼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야!”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부정의 언어, 절망의 언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보시면서 “얘야, 참 안 좋은 때에 태어났구나. 주택 문제가 심각할 것이고, 실업률이 높아질 거야.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말씀하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언어와 달리 긍정의 언어, 희망의 언어로 아이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말로 자녀들을 길러내야 할까요? 에베소서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읽어보길 원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Do Not Rebuke Them

 

 

Luke 18:15-17

 

Once,when I was out on a walk,I saw a taxi let out a young mother, a little boy who appeared to be about four or five years old, and a grandmother. After getting off the taxi, the three started walking up aslope. But the boy was so fast that the women couldn’t catch up. When he got to the top of the slope, hismom shouted, “No!”Glancing back at his mom, the boy racedback down the slope. Then his grandmother shouted, “No!” After the two women finally got hold his hand, they started up the slope again. But this time the boy started jumping up and down in big puddle on the way, to which the mother againshouted, “No!”

 

The boy was cute to watch, of course, but the two struggling women were also a fascinating sight. In that brief moment of my observation, the only word repeatedly spoken was “No.” This made me think: how many times do parents shout“No!”to their children during their lifetime?Think about it. How many times did you say “No!” to your child or grandchild? If you can’t remember, count how many times you say it today.

 

The more I think about it, the more I realize that our language toward our children tends to be negative, not positive. Why is this? We want our children to be safe, to not fail, to not get sick, to not be lonely, and to be happy. This is perhaps why we say “No” so much. We worry about our children getting hurt when they run, falling when they climb, getting bad grades when they have fun, making bad friends when they make friends, and so on. That is why parents can’t keep themselves from scoldingthem, preventing them from doing things, and rebuking them.

 

Meanwhile, however,the wounds in our children’s hearts only fester. Oftenour words intended to help them live a happier and better life only make them unhappier. Many children close their hearts against their parents who constantly intervene, control, oppress, and fail to understand them. Countless teenagers struggle because they are hurt by their parents. Yetmanyparents don’t have a clue about it.

 

A column of the Korea Economic Daily published on January 15, 2020 was titled, “Sin Chang-won says, ‘Because of a teacher, a devil was born.’ The piece wrote about Sin whom Channel A had reviewed in a new light the day before. The column analyzed Sin, an infamous criminal who escaped Busan Prison in the late 1990s through a bathroom ventilator after being sentenced to life imprisonment on charges of robbery and homicide:

 

“He broke out of prison in 1997. He succeeded by sawing through the steel bars of a bathroom ventilator for twenty minutes every day. He shed 15 kilograms in order to slide out of the narrow ventilator and even behaved like a model inmate to keep the guards from watching him closely. During his two and a half years on the run, he evaded Korea’s entire police force of 150,000 men and women desperately trying to hunt him down; stole a total of about 980 million won;and stayed in the homes of women working in bars and nightclubs. In 1999 he was finally caught by the police.”  ”

 

A book on Sinentitled “Sin Chang-won’s Confession on 907 Days” was published.It describes how Sin was always hungry for people’s praise and approval since he was a child. He was,in fact, a boy who loved to read. He was proud of the awards he won for drawing and writing. But he dreaded facing his teachers at school who always pressed him for his school tuition.

 

The book’s author Um Sang-ik, also a lawyer, writes the following about Sin’s life:

 

“Getting praise from peoplecertainly makes us happy. But Sin did not have many such memories. If he had had more opportunities to hear warm, encouraging, and comforting wordsand kind words that encouraged him to do small butgood deeds, he may not have ended up in prison or have become the miserable fugitive that he is now. He was a failure in life who was hungry for approval than for food.” (p. 181, “Sin Chang-won’s Confession on 907 Days”)

 

When Sin failed to pay his tuition, his 5th grade teacher said to him, “Why come to school when you didn’t even bring your money? Get lost.” And Sin confesses that from that day on a devil was born in his heart.

 

In a column titled “Fierce Words, Beautiful Words” published in November 2022, Lee Han-gyu contrasted Sin withProfessor Lee Guk-jong, Korea’s leading surgeon. While one insulting remark by his teacher sparked a rebelliousness in Sin, one encouraging remark encouraged Professor Lee to become the doctor that he is today.

 

Lee’s family was bitterly poor when he was young, and his father, a Korean war veteran, was disabled in the second degree because he had lost vision in one eye and injured his arms and legs in a landmine. Lee was not proud of his father because mean friends would call him a “son of a cripple.”

 

Lee as a boy suffered fromserious sinus infection, but most hospitals would treat him coldly or tell him to go elsewhere when he submitted his healthcare card showing he was eligible for free healthcare as the son of a veteran. But one hospital in his neighborhood, “Kim Hak-san Surgical Clinic,” did not cast him off. Instead the doctor kindly said, “You must be so proud of your dad!” He treated Lee with care and didn’t even receive payment. He even gave him pocket money, telling him to study hard. The columnist writes that this one kind word determined Lee’s life. In fact, Namuwiki, a Korean language wiki, includes this episode in its entry on Lee.

 

The above are real cases that attest to the power of a word.

 

I have a similar experience too. As I mentioned before, my father would give money and things away to people in need, which often left just a meager sum for my mother. But I cannot forget what she said when I complained about it. She said, “Isn’t your father just marvelous?” This one word changed all the hard feelings I had toward my father. And I developed a respect for him just like my mother.

 

What words are we speaking to our children? What are we saying to our children and our future generation? Are we shouting, “No! No! No!” to them? My question here is whether you are speaking positive words to your children or not.

 

Let’s look at today’s passage:

 

“People were also bringing babies to Jesus for him to place his hands on them. When the disciples saw this, they rebuked them. But Jesus called the children to him and said, ‘Let the littl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hinder them, for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Truly I tell you, anyone who wi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like a little child will never enter it.’” (Luke 18:15-17)

 

Whenever we read this text, we tend to read it from the adult’s perspective. That is, we interpret Jesus’ words spoken to the adults who blocked children from coming to Him (“Let the littl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hinder them”) as a teaching to adults on how Jesus welcomes and embraces even little children. Furthermore, as we meditate on Jesus’next words, “anyone who wi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like a little child will never enter it,” we ask ourselves,“What does it mean to become ‘like a little child’”?

 

If we read today’s passage from such a grown-up’s point of view, these two topics indeed become important. In fact, we have almost always interpreted this text from such a perspective.

 

Infant baptisms are given based on this Scripture. Actually the Bible does not record anything about Jesus baptizing children Himself. Neither does the Bible say anything about Jesus teaching people to baptize children. For this reason,somechurch denominations oppose infant baptisms. But most Christian denominations and churches give them. One biblical basis for infant baptisms is today’s passage from Luke.Since Jesus welcomed and embraced children first, we perform infant baptisms today with a faith that He rejoices in them.

 

Furthermore, whenever we read this passage, we always remember Jesus’ words that we must become like little children. And we ask ourselves, “What is a child-like faith?” Our conclusion is this: a child-like faith is to depend on God as little children rely completely on their parents with a pure and humble trust, and we must resolve to live in this manner. From an adult’s perspective, a sermon that preaches such a message is critical in that it teaches us what our faith must look like.

 

Well, but what if we read this passage from a child’s perspective?

 

There is a little boy. He has followed his parents who have come to see Jesus. He is being is crushed in the crowd. So many people have flocked to Jesus that the boy cannot see Him. He can hear Jesus speaking but cannot understand what He is saying. Imagine a little boy tagging behind his mom and dad.

 

His dad lifts him up on his shoulders so he can see better. From his dad’s shoulders he can see Jesus afar. Jesus looks marvelous. But people behind them complain that he is blocking their view. So his dad puts him down. All that the boy can see is grown-ups and their backs and behinds.

 

Slowly his dad makes his way nearer to Jesus. The boy gets near too. Now he can see Jesus well. His dad nudges him, telling him to go to Jesus. Dad wishes that maybe, just maybe, Jesus will pat his son and place His hand on him.

 

As the boy hesitates, thinking, ‘Is it okay for me to go forward?’ the disciples stop him. “No! No! Children are not allowed. This place is not for you! Our teacher is tired; so don’t bother Him! It’s so hectic here thatwe don’t have room for children!”

 

The disciples’ would have had a lot to say. I imagine they would have lashed out against the boy and his parents. The Bible says that the disciples “rebuked them.” All that the boy wanted was to see Jesus from a close distance and to go to Him. But he was immediately stopped by the disciples. How would this little boy have felt?

 

‘Of course. What did I expect? I can’t go near Jesus…’ Wouldn’t he have thought such things? Wouldn’t he have felt awkward and embarrassed? Wouldn’t he have felt rejected?

 

But at that very moment Jesus calls him, most likely in a kind voice. He tells him to come near and says:“Let the littl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hinder them, for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Luke 18:16)

 

From the boy’s point of view, what did these words mean to him? It probably meant, “Good boy! Come here. Little children like you will enter the kingdom of God! You will enter it! Isn’t it wonderful?”

 

While our Lord told grown-ups not to hinder the little ones from coming to Him, He told the children that the kingdom of God is theirs. How amazing this is! How would the boy have felt? ‘The kingdom of God? I am the one who possess it? Me? Even a little boy like me can enter it?’ He would never have forgotten this day for the rest of his life. Jesus welcomed this little boy with open arms and spoke amazing blessings over him.

 

Dear brothers and sisters, what kind of man do you think this boy became? Although the Bible does not tell us what happened to him after this incident, I am confident that he would have become a great man of faith who expanded the kingdom of God.

 

Jesus did not prevent such a little boy from coming to Him. He did not avoid him but called him. He spoke positive words to himand blessed him. And He planted the hope of the kingdom of God within him.

 

Dear Church, how are we treating our children? Aren’t we constantly shouting, “No!” to them? Aren’t we constantly rebuking them, cursing them, and speaking words of worry to them? Aren’t we by any chance hurting them with such words and planting a devil in their hearts?

 

Jesus encouraged children to dream dreams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led them to grow as beloved men and women who are not rejected. He told them, “The kingdom of God is yours. You are its owners.”

 

But what are we telling our children? “You won’t even be able to makea living by living like that. Don’t run! You’ll get hurt.” We say such things out of worry. Why can’t we say, “Run with all your might and reach the sky!” Why can’t we encourage them with such words—when our Lord told them that they will be the ones to possess the kingdom of God?

 

Today we will give infant baptisms. When we baptize these children, our Lord will place His hand on them and say, “The kingdom of God is yours! Live to your heart’s content! Live happily! You will prosper!”

 

Dear brothers and sisters, even today our Lord does not rebuke but welcomes us.

 

We have committed many sins. We have done things we would be deeply ashamed of if they were to be known. We dare not go to Jesus because of our shame. But He who shed His precious blood for us does not see our sins or weaknesses. He sees us as innocent children, welcoming us and telling us that the kingdom of God is ours.

 

The world we live in is full of negative, despairing, and condemning language. We are surrounded by things that are forbidden, things that cannot be.

 

What if Jesus had spoken the following words to the childwho came to Him? “Child, you are living in such adverse times! The housing crisis will only become worse in the future and unemployment rates will soar! How on earth are you going to live?”

 

But Jesus did not say such a thing. What we need is a positive language of hope and blessing like that of Jesus.

 

Today we are celebrating Children’s Sunday. What must we say to our children?

 

The Korean word “eorini (어린이)” refers to children aged between 6 and 12. Eorini is a combination of “eorin (어린),” which means “of little age,” and “ui (의),” a dependent noun. It was coined by Bang Jeong-hwan in 1920 with the intent to treat children as independent human beings. Before this term was coined, children were called by derogative names such as “aenom (애놈),” “adeullom (아들놈),” and “ttalyeon (딸년).”

 

In closing let’s read God’s Word given to us in Ephesians:

 

“Fathers, do not exasperate your children; instead, bring them up in the training and instruction of the Lord.” (Ephesians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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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 15~17

15~17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어떤 말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습니까?>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제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추어 섰습니다. 멈춰 선 택시에서 세 사람이 내렸는데 젊은 엄마와 네다섯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 아이였습니다. 그 뒤에 할머니처럼 보이는 분도 함께 내렸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어린 아들이 엄마 손을 놓고는 열심히 언덕 위를 향해 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안돼!”하고 말합니다. 아이가 엄마를 힐끗 보더니 이번에는 언덕 아래로 다시 힘차게 내려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합니다. “안돼!”

그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엄마와 할머니가 “안돼!”라는 말을 열 번 이상은 연발한 것 같습니다. 물이 있는 구덩이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와 결국 아이를 붙잡고 올라가는 엄마와 할머니의 모습이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안돼”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살까?’ 여러분은 몇 번쯤 하신 것 같습니까? 대부분 셀 수 없이 많이 하지 않으셨을까요? 저 역시 아이들에게 ‘안돼’라는 말을 왜 그렇게 많이 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은 아이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행복해지기를 원했는데, 정작 ‘안돼’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합니다.

아이가 뛰어오르면 다칠까 걱정이고, 떨어질까 걱정됩니다. 놀면 공부를 못할까 걱정되고, 친구를 만나면 못된 친구를 만날까 또 걱정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계속해서 꾸짖고 야단을 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생겨나죠. 잘 살게 해 주고 싶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한 말인데 도리어 아이들에게는 큰 상처로 남는 경우들을 참 많이 경험합니다. 부모를 향해서 마음의 문을 닫거나,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서 힘겹게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우리 아이는 그렇지 않아.’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번은 돌아볼 일입니다.

2020년 1월 15일, 한국경제 사회면에 한 기사 제목이 올라왔습니다. ‘신창원, “선생님 때문에… 악마가 태어났다.”’라는 기사였습니다. 신창원씨의 이야기는 훨씬 이전의 이야기인데 새삼 주목을 받는 듯 보였습니다. 바로 전날 방송 채널에서 그의 사건을 재조명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창원은 강도 치사 혐의로 무기 징역을 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하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그가 8년 만에 통풍구를 통해서 탈옥하게 됩니다. 그 소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시기가 1997년이었으니까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이죠.

신창원은 아주 치밀하게 탈출을 구상했습니다. 화장실에 매일 20분씩 들어가서 쇠창살을 조금씩, 조금씩 그었다고 합니다. 결국 쇠창살 2개를 절단하게 됩니다. 게다가 그 좁은 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15kg 감량했다고 하네요. 교도관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모범수 생활까지 하고요. 탈출 후에는 무려 2년 6개월간 15만 명의 경찰을 따돌리며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99년 경찰에 검거됩니다.

그와 관련해서 『신창원 907일의 고백』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입니다. 책에는 어린 시절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했던 신창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문학 소년이었고, 그림을 잘 그리는 소년이었답니다. 글짓기를 하면 상도 받을 정도였다네요. 그런데 학교에만 가면 늘 납입금을 독촉하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선생님을 보기가 참 힘들었다고 합니다. 책을 쓴 엄상익 변호사는 신창원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누군가에게 칭찬받는다는 것은 확실히 행복한 일이다. 신창원에겐 그런 기억이 많지 않았다.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 사소한 선행을 부추기는 그 아름다운 친절의 말 한마디를 좀 더 여러 번 들을 기회가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는 교도소에 가는 일도, 지금처럼 초라한 도망자가 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배고픔보다는 인정에 굶주린 삶의 낙오자였다.”_신창원 907일의 고백, 181.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은 납입금을 가져오지 못하는 신창원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돈 안 가져왔는데 뭣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기사는 ‘그때 그의 마음속에 악마가 태어났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2022년 11월, 컬럼니스트 이한규 씨는 ‘무서운 말 고운 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선생님의 모욕적인 말 한마디에 반항심이 생겨서 나쁜 길로 가게 된 신창원과 달리, 말 한마디에 힘을 얻고 훌륭한 인물이 된 이국종 교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국종 교수의 가족은 지독한 가난에 허덕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지뢰를 밟아서 한쪽 눈을 잃었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등급의 국가유공자였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린 시절 이국종에게는 그리 자랑스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를 향해서 아이들이 “병신의 아들”이라고 놀렸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귀한 일을 하다가 국가유공자가 된 아버지이지만 아이들은 도리어 이국종의 아버지를 “병신”이라고 놀린 것입니다.

축농증을 심하게 앓던 이국종이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가서 국가유공자 의료복지 카드를 내밀면, 다른 병원에 가 보라면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도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결국 다른 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곳의 의사선생님이 의료복지 카드를 내미는 이국종을 보고는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그리고는 진료비도 받지 않고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열심히 공부하라며 용돈까지 주었는데 그 병원의 이름이 ‘김학산 외과’라고 합니다. 이한규씨는 의사의 말 한마디가 이국종의 삶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컬럼에서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나무위키에도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녀에게, 다음 세대에게 어떤 말을 전하며 살고 있나요? “안돼!”를 연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자녀들 앞에서 긍정의 말을 전하며 살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둘러선 무리 가운데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주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 18:15~17)

 

이 말씀은 어린이주일 때마다 자주 읽고 묵상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른의 입장에서 읽어오곤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나오는 아이들을 제자들이 막아섰을 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말씀에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환영하시고, 기쁘게 맞아주시는구나.’ 그런가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도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겠구나.’라는 마음의 결단을 하곤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어린아이와 같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답을 찾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순전하게 되는 것, 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삶을 결단하곤 합니다. 어른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해석은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유아세례를 베풉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신 구절도 없고요. 그래서 어떤 교파는 유아세례를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교단에서는 유아세례를 오랜 세월 거행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기쁘게 맞아 주시며 만져 주셨으니 ‘우리가 유아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믿고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부모를 따라서 사람들 틈에 끼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터라 아이는 예수님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강론하시는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 이야기조차도 제대로 이해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엄마, 아빠 손에 붙들려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뿐입니다. 엄마, 아빠 주위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딴짓하는 이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번은 아빠가 목마를 태워서 멀리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쩌면 그때 신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있다니!’

그러다 뒤에 있는 사람이 목마를 탄 아이 때문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치자 아이가 다시 내려옵니다. 이제 아이에게 보이는 것은 어른들의 뒷모습뿐입니다. 아버지가 차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가기 시작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도 예수님을 향하여 다가갑니다. 어느 정도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을 때,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살짝 밀면서 주님께로 나아가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혹시나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을 쓰다듬어 주시고 안수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내심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되돌아보며 머뭇머뭇합니다. ‘예수님께 나가도 될까요?’ 그렇게 아버지를 보고, 다시 예수님을 보고, 아버지를 보고, 예수님을 보는 일이 되풀이됩니다. 그 순간, 제자들이 막아섭니다. “안돼!”라는 소리가 들렸겠지요. “어린아이들은 가라!”, “네가 올 자리가 아니야!”, “예수님이 피곤하신데 너희들까지 귀찮게 하지 마라!”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멋진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분께 달려가 보고 싶었는데… 그분에게 안기고 싶었는데…’ 아이는 그만 제자들에 의해서 제지를 당하고 맙니다.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럼 그렇지. 나는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무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멋쩍은 마음도 생겨났겠고요.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상실감이 아이를 사로잡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마는 제가 길을 가다가 성도님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를 보신 성도님이 아이에게 말하면서 “야, 목사님이다! 가서 인사드려” 하고 이야기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님 손에 떠밀리면 저를 보다가 다시 엄마를 봅니다. 그러다가 다시 저를 보고 또 엄마를 봅니다. 그때 제가 아이를 안아 주거나 손을 잡아 주면, 그때서야 마음이 환하게 열리는 듯 아이의 얼굴이 풀리고 인사를 나누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그때 저와 함께 가는 사람이 “안돼!”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가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되겠죠.

예수님이 아이를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6 중)

 

<주님은 천대받던 어린아이를 생명의 언어로 맞아 주시며 그의 미래를 축복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구절을 어른의 입장에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입장에서 이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 생각해 봅니다. “얘야, 잘 왔다. 너 같은 아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거야.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멋진 사람이야. 멋지지 않니?”라는 음성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어른들을 향해서는 “아이들이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아이들에게는 그 말씀이 “하나님 나라가 너의 것이다!”라는 멋진 말로 들렸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요? 말씀을 들은 아이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나 같은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라고?” 아마도 아이는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에 이 아이가 어떤 인물이 되었는지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저는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귀한 역할을 감당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막지 아니하셨고, 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부르시며 긍정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혹시 “안돼!”라는 말, 책망의 말, 걱정의 말, 저주의 말로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도록 하셨습니다. 사랑받는 자녀로, 거부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너 그렇게 살아서 밥 벌어먹기나 하겠니?” “뛰면 다쳐!” 이런 말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 한 번 뛰어라! 그래서 하늘까지 닿아봐라!” 왜 우리는 이런 말로 아이들을 격려해 주지 못할까요?

오늘 우리는 유아세례 예식을 거행합니다. 아이들에게 세례가 베풀어질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다. 마음껏 살아보렴. 행복하게 살아보렴. 너는 잘 될 거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드러나면 부끄러운 일들이 참 많습니다. 부끄러워서 감히 주님 앞에 설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보지 않기로 결정하십니다. 순전한 아이들처럼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야!”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부정의 언어, 절망의 언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보시면서 “얘야, 참 안 좋은 때에 태어났구나. 주택 문제가 심각할 것이고, 실업률이 높아질 거야.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말씀하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언어와 달리 긍정의 언어, 희망의 언어로 아이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말로 자녀들을 길러내야 할까요? 에베소서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읽어보길 원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02357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꾸짖지 말라 (1815~17)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38장, 564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눅 18:15-17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5월 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어느 날 길을 가는데 한 젊은 엄마와 네다섯살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 그리고 할머니로 보이는 분, 이렇게 세 사람이 택시에서 내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엄마와 할머니가 아이를 놓고 쩔쩔매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이가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엄마와 할머니는 계속해서 “안 돼! 안 돼!”하며 아이를 말렸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안 돼!”라고 말을 할까요?

 

설교의 요약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잘되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긍정의 말보다는 부정의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 사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쌓여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은 아이들을 기쁘게 맞아 주시고 만져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한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지금 부모를 따라 사람들 틈에 끼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어서 이 아이는 예수님이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아빠가 목마도 태워주고 점차 예수님이 계신 곳 가까이로 나아갑니다. 아이도 점점 예수님을 잘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엉덩이를 밀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보라고 재촉합니다. 아이는 더 가까이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이 막아섭니다. “안 돼! 안 돼! 애들은 가라! 여긴 너같은 꼬맹이가 올 자리가 아니야!” 아이는 그저 예수님을 한번 가까이서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만 제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시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가까이 오라고 부르시며 자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아이에게 이 말씀은 이렇게 들렸을 것입니다. “얘야, 정말 잘 왔다. 너같은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꺼야!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야! 정말 멋지지 않니?”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너 그렇게 살아서 밥벌어 먹기나 하겠니? 안 돼! 다쳐!‘ 늘 우리는 걱정스럽게 자녀들에게 이런 부정과 절망의 언어를 주입합니다. 주님은 어린이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긍정과 희망 그리고 축복의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아이들에게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의 말을 전하기 바랍니다.

 

나누기

  1. 자녀들에게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했던 부정적인 말들은 무엇입니까?
  2. 자녀들에게 긍정과 희망 그리고 축복의 언어로 편지를 써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귀한 가족과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양육하고 주님 말씀으로 훈계하되, 주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의 언어로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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