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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죽음의 운명 아래 있습니다. >
제가 예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무거운 목소리로 한 성도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아버님이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으니 임종 예배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임종 예배를 준비하며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병원에 들어섰을 때, 병상에 누워 계신 분의 모습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물론 힘은 없어 보였지만 의식은 또렷했습니다. 병실에 들어서자 저를 알아보시고는 인사까지 건네셨습니다. 저는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분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제가 이번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괜찮으시냐고 물었더니, 괜찮다는 대답까지 해 주셨습니다. 임종 예배를 준비해 온 저는 차마 마지막 준비에 대한 말씀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심방 기도만 드린 후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20여 분 달리고 있는데, 다시 성도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님이 조금 전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습이구나. 죽음이 코앞에 있으면서도, 그 죽음을 외면하고 싶은 게 우리, 그리고 내 모습이구나. 아마 나도 언젠가는 이런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며, 현실입니다.
분명한 건 언젠가 죽음이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란 사실입니다. 죽음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우리가 늘 죽음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온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다 도리어 삶의 시간을 허비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는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오늘의 삶’에 집중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리스도인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죽음은 반드시 오고 있고, 우리에게 현실이 될 것이란 사실, 그것만큼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고 오는 세대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수천 년이 지났지만, 죽음의 운명을 거스른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났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두가 땅속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운명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
그러나 역사의 한 지점에 놀랍고 신비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사렛의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천 년 전 어느 날,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난 것을 목격했고, 증언했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부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3~8)
그동안 역사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이도 없었습니다. 물론 죽은 자가 잠시 살아나는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또다시 죽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실 때도, 자신이 죽은 후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즉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무덤으로 찾아온 여인들을 향해 천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28:6)
도무지 이 땅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역사에서 오직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리라 말씀하신 그분께서,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 수많은 사람에게 부활을 증거하고 또 증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고 알고 있는 ‘예수의 부활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 역시 모일 때마다 이렇게 외치곤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들은 예배로 모일 때마다 부활의 인사를 나누며 격려했습니다. 지금도 고대 교회 전통을 간직하는 동방정교회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이와 같은 외침으로 예배를 시작하곤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부활, 이 사건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게 했고, 예수 부활을 기억하는 이들에 의해 지금까지 주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때 그들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Catacomb)’이라 불리는 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드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장소를 구별해 예배를 드린 건 아니지만,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카타콤만큼 좋은 예배 장소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엔 주검이 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신들이 썩어가고 말라가는 현장에서, 뼈들이 앙상히 드러난 그 자리 곧 죽음의 세력이 가장 왕성히 활동하는 그 무덤에서 주님께 예배드리며 그들은 외쳤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호세아를 인용하며 선포한 내용과 같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호13:14)라고, 죽음의 권세를 조롱하며 부활 승리를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증언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줄기차게 외쳐 온, 고백하고 증언해 온 믿음의 핵심이요, 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활하지 못했으나,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요, 실재입니다.
< 주님의 부활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
그렇다면 부활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과 유익을 줍니까? 무엇보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희망의 빛줄기입니다. 이미 죽은 자들, 죽게 될 사람들, 또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도 주님의 부활은 희망의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늘 죽음의 문제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죽음 후에 우리는 과연 살아날 수 있을지, 이 문제는 인류의 고민이었고, 해결하고 싶은 난제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문제를 풀 수도, 해결할 수도 없었습니다. 무덤을 조금 더 크게 짓거나 장례를 화려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사망을 해결했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망의 원리를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지만, 죽음을 해결했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뚫고 승리하셨습니다. 약속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에게서 희망을 얻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요, 산 자들의 소망임을 확신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부활을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부활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인간이 고안하거나 만들어 낸 해결책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의 문제를 풀기 위해 부활이란 방법을 고안한 게 아닙니다. 부활은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활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도 아닙니다. 윤회의 마지막 종착점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달래거나 잊어버리거나 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과 화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부활 생명은 오직 우리 주님께서만 허락해 주시는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부활 소망을 품고 죽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죽음은 여전히 풀지 못하는 난제였을 것입니다. 두려운 존재요, 인생의 가장 큰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로 부활이 주어진 순간, 우리는 죽음을 달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초대 교회 교인들 역시 당당히 죽음을 향해 외칠 수 있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나는 부활을 알고 있다. 나는 부활을 가지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보이셨습니다. 성경은 종종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독특한 동사를 사용합니다. ‘나타나셨다’라는 표현 대신 ‘나타나 보여지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예수님이 눈을 열어 주시는 이들에게만 주님의 부활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눈으로 식별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눈이 떠짐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처음에는 육안으로 그분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분과 떡을 먹고 성경 말씀을 나눌 때, 그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 순간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보여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이전에 육체로 보이셨던 몸과는 다른,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의 몸과 연속선상에 있는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제자들의 눈을 열어 주셨을 때, 비로소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재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부활 생명은 이 세상의 생명과 전적으로 다른 생명입니다. >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져 봅니다. “부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아니, 보다 궁극적으로 생명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심장이 뛰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겠습니까? 뇌파가 움직이는 게 생명입니까, 산소를 섭취하는 게 생명입니까?
물론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세상에 다양한 생명의 형태가 존재함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생명이 있습니다. 단세포로 움직이는 생명이 있고, 식물처럼 한곳에 자리 잡고 계절에 따라 자신의 몸을 바꿔가며 물과 빛, 이산화탄소를 섭취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생명체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산소가 생명의 배설물입니다. 물속에 사는 고기들은 물에서 산소를 찾아내 호흡합니다. 그리곤 이산화탄소를 뿜으며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심장의 움직임입니까? 뇌의 활동입니까? 과연 어떤 것이 생명입니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생명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생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새에게도 생명이 있고, 바다의 물고기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초원의 동물들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다만 그 생명이 발현되는 모습이 매우 다양하고 다차원적입니다. 심장이 뛰는 것을 생명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초원에 핀 들풀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생명입니다. 다만 생명의 차원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차원의 생명을 발현하며,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이 모든 생명체의 생명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모든 들풀, 동식물, 인간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영원하지 못하며,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소멸되어 갑니다. 결국엔 그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생명으로 부활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생명은 세상이 갖지 못한 생명입니다. 세상에 속하지도 않은 생명입니다. 인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부활 생명이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생명입니다. 들풀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다르듯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명과 주님의 부활 생명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생명을 ‘영생’이라고 일컫습니다. 영생은 부활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며, 이 세상이 갖지 못한 생명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이 그 생명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이 부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주님의 새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부활 생명은 사망 권세를 역전하는 능력입니다. >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힘과 질서에 대한 도전이요, 응징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상이자 그의 질서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죽음이 위용을 자랑하는 터전이자 언제나 단편적이고 끝이 존재하는 유한의 나라입니다.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모든 것이 낡아지고 소멸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 세상의 질서를 역행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물합니다. 한 마디로 부활이란 죽음의 세력을 삼키는 역전의 능력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죽음이 주님의 부활로 극복되었으며,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죽음의 세력을 넘어섰습니다. 새 창조의 역전이 부활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 나라의 질서가 이 땅에 세워졌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권력의 남용, 군중의 무지, 종교인들의 이기심과 편견이 응집된 처형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 질서도, 마치 이런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세상의 거짓된 질서와 악의 세력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사망의 세력을 삼킨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이기려고 노력합니다. 인내하며, 나름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부활 신앙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도덕적인 삶도, 고난을 이기려는 마음 자세도, 인내하려는 태도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일이 있기에,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있기에, 또 다른 차원의 생명이 있기에, 우리의 신앙과 삶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아벨 이후, 하나님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호소를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때문에 부활 신앙은 역경을 감수하는 신앙이자 역전의 신앙입니다. 은퇴하신 김지철 목사님이 종종 사용하신 역전시키시는 하나님, 역전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고통의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억울한 순간에도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부활을 소망하며, 마침내 승리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부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역사입니다. >
마지막으로 부활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보내며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결코 예수님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게 아니란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2:32)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부활, 이 부활 소망은 결코 진화적인 발달 단계로 얻어진 게 아닙니다. 진화의 발달 단계에서 한 번 발생한 우연의 결과가 아닙니다. 생명 적응의 최적화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결코 진화적인 생명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부활 생명이란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만들어 내신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일의 증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이란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부활’, ‘운동선수의 부활’ 등 다양한 곳에서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서 다시 새 출발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리셋(reset)’ 기능 정도도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탈사회적인 자의적 개념도 아닙니다. 내가 극복해서 일어서는 개념이 아닙니다.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역사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활 사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이후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은 데까지 올리신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셨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입니다.
이 부활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부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부활을 얻기 위해 제자의 삶을 삽니다. 부활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몸을 드리는 사람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립보서 3:10~11, 새번역)
그러므로 진정한 부활 소망은, 내가 예수님처럼 고난에 참여하며 그분의 죽으심을 따를 때 비로소 도우시며 높이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희망을 움켜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새 창조와 부활 생명을 이 땅에서도 추구해 나가는 삶이 부활 생명을 얻은 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감히 죽음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하고 기쁜 부활절에 부활 신앙으로 죽음과도 당당하게 맞서는, 나아가 고난과 십자가까지도 짊어지려는 은혜로운 결단이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 1 ~ 20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인간은 죽음의 운명 아래 있습니다. >
제가 예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무거운 목소리로 한 성도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아버님이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으니 임종 예배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임종 예배를 준비하며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병원에 들어섰을 때, 병상에 누워 계신 분의 모습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물론 힘은 없어 보였지만 의식은 또렷했습니다. 병실에 들어서자 저를 알아보시고는 인사까지 건네셨습니다. 저는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분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제가 이번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괜찮으시냐고 물었더니, 괜찮다는 대답까지 해 주셨습니다. 임종 예배를 준비해 온 저는 차마 마지막 준비에 대한 말씀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심방 기도만 드린 후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20여 분 달리고 있는데, 다시 성도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님이 조금 전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습이구나. 죽음이 코앞에 있으면서도, 그 죽음을 외면하고 싶은 게 우리, 그리고 내 모습이구나. 아마 나도 언젠가는 이런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며, 현실입니다.
분명한 건 언젠가 죽음이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란 사실입니다. 죽음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우리가 늘 죽음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온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다 도리어 삶의 시간을 허비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는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오늘의 삶’에 집중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리스도인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죽음은 반드시 오고 있고, 우리에게 현실이 될 것이란 사실, 그것만큼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고 오는 세대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수천 년이 지났지만, 죽음의 운명을 거스른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났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두가 땅속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운명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
그러나 역사의 한 지점에 놀랍고 신비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사렛의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천 년 전 어느 날,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난 것을 목격했고, 증언했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부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3~8)
그동안 역사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이도 없었습니다. 물론 죽은 자가 잠시 살아나는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또다시 죽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실 때도, 자신이 죽은 후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즉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무덤으로 찾아온 여인들을 향해 천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28:6)
도무지 이 땅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역사에서 오직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리라 말씀하신 그분께서,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 수많은 사람에게 부활을 증거하고 또 증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고 알고 있는 ‘예수의 부활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 역시 모일 때마다 이렇게 외치곤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들은 예배로 모일 때마다 부활의 인사를 나누며 격려했습니다. 지금도 고대 교회 전통을 간직하는 동방정교회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이와 같은 외침으로 예배를 시작하곤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부활, 이 사건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게 했고, 예수 부활을 기억하는 이들에 의해 지금까지 주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때 그들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Catacomb)’이라 불리는 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드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장소를 구별해 예배를 드린 건 아니지만,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카타콤만큼 좋은 예배 장소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엔 주검이 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신들이 썩어가고 말라가는 현장에서, 뼈들이 앙상히 드러난 그 자리 곧 죽음의 세력이 가장 왕성히 활동하는 그 무덤에서 주님께 예배드리며 그들은 외쳤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호세아를 인용하며 선포한 내용과 같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호13:14)라고, 죽음의 권세를 조롱하며 부활 승리를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증언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줄기차게 외쳐 온, 고백하고 증언해 온 믿음의 핵심이요, 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활하지 못했으나,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요, 실재입니다.
< 주님의 부활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
그렇다면 부활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과 유익을 줍니까? 무엇보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희망의 빛줄기입니다. 이미 죽은 자들, 죽게 될 사람들, 또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도 주님의 부활은 희망의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늘 죽음의 문제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죽음 후에 우리는 과연 살아날 수 있을지, 이 문제는 인류의 고민이었고, 해결하고 싶은 난제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문제를 풀 수도, 해결할 수도 없었습니다. 무덤을 조금 더 크게 짓거나 장례를 화려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사망을 해결했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망의 원리를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지만, 죽음을 해결했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뚫고 승리하셨습니다. 약속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에게서 희망을 얻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요, 산 자들의 소망임을 확신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부활을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부활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인간이 고안하거나 만들어 낸 해결책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의 문제를 풀기 위해 부활이란 방법을 고안한 게 아닙니다. 부활은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활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도 아닙니다. 윤회의 마지막 종착점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달래거나 잊어버리거나 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과 화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부활 생명은 오직 우리 주님께서만 허락해 주시는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부활 소망을 품고 죽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죽음은 여전히 풀지 못하는 난제였을 것입니다. 두려운 존재요, 인생의 가장 큰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로 부활이 주어진 순간, 우리는 죽음을 달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초대 교회 교인들 역시 당당히 죽음을 향해 외칠 수 있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나는 부활을 알고 있다. 나는 부활을 가지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보이셨습니다. 성경은 종종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독특한 동사를 사용합니다. ‘나타나셨다’라는 표현 대신 ‘나타나 보여지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예수님이 눈을 열어 주시는 이들에게만 주님의 부활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눈으로 식별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눈이 떠짐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처음에는 육안으로 그분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분과 떡을 먹고 성경 말씀을 나눌 때, 그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 순간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보여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이전에 육체로 보이셨던 몸과는 다른,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의 몸과 연속선상에 있는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제자들의 눈을 열어 주셨을 때, 비로소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재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부활 생명은 이 세상의 생명과 전적으로 다른 생명입니다. >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져 봅니다. “부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아니, 보다 궁극적으로 생명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심장이 뛰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겠습니까? 뇌파가 움직이는 게 생명입니까, 산소를 섭취하는 게 생명입니까?
물론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세상에 다양한 생명의 형태가 존재함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생명이 있습니다. 단세포로 움직이는 생명이 있고, 식물처럼 한곳에 자리 잡고 계절에 따라 자신의 몸을 바꿔가며 물과 빛, 이산화탄소를 섭취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생명체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산소가 생명의 배설물입니다. 물속에 사는 고기들은 물에서 산소를 찾아내 호흡합니다. 그리곤 이산화탄소를 뿜으며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심장의 움직임입니까? 뇌의 활동입니까? 과연 어떤 것이 생명입니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생명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생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새에게도 생명이 있고, 바다의 물고기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초원의 동물들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다만 그 생명이 발현되는 모습이 매우 다양하고 다차원적입니다. 심장이 뛰는 것을 생명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초원에 핀 들풀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생명입니다. 다만 생명의 차원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차원의 생명을 발현하며,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이 모든 생명체의 생명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모든 들풀, 동식물, 인간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영원하지 못하며,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소멸되어 갑니다. 결국엔 그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생명으로 부활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생명은 세상이 갖지 못한 생명입니다. 세상에 속하지도 않은 생명입니다. 인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부활 생명이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생명입니다. 들풀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다르듯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명과 주님의 부활 생명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생명을 ‘영생’이라고 일컫습니다. 영생은 부활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며, 이 세상이 갖지 못한 생명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이 그 생명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이 부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주님의 새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부활 생명은 사망 권세를 역전하는 능력입니다. >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힘과 질서에 대한 도전이요, 응징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상이자 그의 질서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죽음이 위용을 자랑하는 터전이자 언제나 단편적이고 끝이 존재하는 유한의 나라입니다.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모든 것이 낡아지고 소멸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 세상의 질서를 역행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물합니다. 한 마디로 부활이란 죽음의 세력을 삼키는 역전의 능력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죽음이 주님의 부활로 극복되었으며,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죽음의 세력을 넘어섰습니다. 새 창조의 역전이 부활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 나라의 질서가 이 땅에 세워졌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권력의 남용, 군중의 무지, 종교인들의 이기심과 편견이 응집된 처형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 질서도, 마치 이런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세상의 거짓된 질서와 악의 세력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사망의 세력을 삼킨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이기려고 노력합니다. 인내하며, 나름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부활 신앙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도덕적인 삶도, 고난을 이기려는 마음 자세도, 인내하려는 태도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일이 있기에,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있기에, 또 다른 차원의 생명이 있기에, 우리의 신앙과 삶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아벨 이후, 하나님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호소를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때문에 부활 신앙은 역경을 감수하는 신앙이자 역전의 신앙입니다. 은퇴하신 김지철 목사님이 종종 사용하신 역전시키시는 하나님, 역전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고통의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억울한 순간에도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부활을 소망하며, 마침내 승리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부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역사입니다. >
마지막으로 부활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보내며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결코 예수님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게 아니란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2:32)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부활, 이 부활 소망은 결코 진화적인 발달 단계로 얻어진 게 아닙니다. 진화의 발달 단계에서 한 번 발생한 우연의 결과가 아닙니다. 생명 적응의 최적화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결코 진화적인 생명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부활 생명이란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만들어 내신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일의 증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이란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부활’, ‘운동선수의 부활’ 등 다양한 곳에서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서 다시 새 출발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리셋(reset)’ 기능 정도도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탈사회적인 자의적 개념도 아닙니다. 내가 극복해서 일어서는 개념이 아닙니다.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역사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활 사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이후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은 데까지 올리신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셨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입니다.
이 부활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부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부활을 얻기 위해 제자의 삶을 삽니다. 부활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몸을 드리는 사람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립보서 3:10~11, 새번역)
그러므로 진정한 부활 소망은, 내가 예수님처럼 고난에 참여하며 그분의 죽으심을 따를 때 비로소 도우시며 높이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희망을 움켜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새 창조와 부활 생명을 이 땅에서도 추구해 나가는 삶이 부활 생명을 얻은 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감히 죽음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하고 기쁜 부활절에 부활 신앙으로 죽음과도 당당하게 맞서는, 나아가 고난과 십자가까지도 짊어지려는 은혜로운 결단이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년 4월 2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다시 사신 주님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60장, 16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고전15:1-7; 17-2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2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늘 생각하고 해결하기 위해 인생의 모든 시간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늘이라는 값비싼 시간을 모두 사용한다면 그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놀라운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나사렛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설교의 요약
죽었던 자가 잠시 살아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죽음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달랐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외침이 바로 우리들의 고백이며 증언이고, 믿음의 핵심이요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복음은 어떤 소망과 유익을 줍니까?
첫째, 부활의 복음은 죽은 사람들, 죽을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한 가닥의 희망의 빛줄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기에 더욱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나타나셨다가 아니라, 나타나 보여 지셨다”고 표현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는 사람들만 부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나 보여 지신 것입니다.
둘째, 부활은 세상의 힘과 질서에 대한 도전이요 응징입니다. 부활은 세상의 질서를 역행하며 새로운 희망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음이 하나님의 생명에게 삼키는 세상 질서의 역전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창조, 새로운 나라의 질서가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괴멸되었음을 그리고 다시 살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은 역경을 감수하는 신앙이고, 역전의 신앙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부활은 결코 진화적 발전의 단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새로운 생명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내시며 만들어 내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세상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부활, 운동선수의 부활 등 다양한 곳에서 부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기쁜 부활절에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까지도 당당하게 맞서는, 그리고 고난과 십자가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로운 결단이 있기를 원합니다.
나누기
1. 나는 부활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까? 나의 삶은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2. 내 곁에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가족, 이웃들이 있습니까?
담대하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주님께 능력을 구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때로는 온전하고 바른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하여서 험한 세상 속에서 근심하며 낙심하며,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부활의 생명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임하게 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