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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의 항변

누가복음 15: 25~32

김경진 목사

2023.02.12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 모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잘 아시는 대로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의 뒷부분에 해당합니다. 교부 시대부터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전해져 내려온 말씀입니다. 아마도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 성경에 붙여진 소제목에서 유래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후반부에는 첫째 아들도 등장하기 때문에 둘째 아들에게만 집중해서 탕자의 비유라고 명명한다면, 첫째 아들이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비유의 핵심이 첫째 아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 말씀을 배경으로 볼 때에 첫째 아들이 비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1~2)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중에 하나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하시듯 첫째 아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이들은 ‘불평하는 형의 비유’ 혹은 ‘기뻐하지 않는 형의 비유’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은 본문에 두 아들이 등장하므로 ‘두 아들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누가복음 15장 11절 말씀을 근거 삼아 주장합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1)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들은 성경을 보다 풍요롭게 해석하도록 도왔고, 다양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전달하여 왔습니다. 타락하고 방탕한 삶을 살던 사람에게는 ‘탕자의 비유’로 다가와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고, 때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충성된 사람에게 ‘첫째 아들의 비유’ 혹은 ‘불평하는 형의 비유’를 통하여 보다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을 다짐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불평하는 형의 입장에서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둘째 아들 탕자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 볼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은 재산 분배 과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재산을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찾아가서 재산 분배를 요청하죠. “돈을 달라. 재산을 내놓아라.” 말합니다.

둘째로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몫을 받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으로부터 속히 자유로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받자마자 아버지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외국 땅으로 가서 재산을 처분합니다. 13절의 ‘며칠 후’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일이 급하게 일어난 것 같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재산을 급히 매각한 셈이죠. 오늘날도 이런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 일이 가능하려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만큼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빨리 떠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는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 계시는 동안에 자식이 유산을 분배해 달라고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것과 같은 엄청난 불경이었습니다. 설사 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재산을 넘겨주었다고 할지라도 아버지 생전에 받은 재산을 처분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그것을 임의로 팔고 가족을 떠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완전한 이별을 결단한 것 같습니다. 다시는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둘째 아들은 또 다른 죄를 짓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게 된 아들은 부모를 봉양할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부모를 떠나고, 설상가상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함으로써 부모를 봉양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상실합니다. 마음도 없었겠지만 재산도 없어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돼지 치는 일을 한 것은 또 다른 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돼지를 먹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접촉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돼지를 치며 짐승의 우리에서 머물게 됩니다. 이제 그의 마음에는 율법도 없어지고, 아버지의 종교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만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하나님과도 멀어짐으로써 신앙적으로도 멀어진 셈입니다.

자,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꼽아보면 둘째 아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비유 속에 나타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탕자,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그를 측은히 여기며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21~24)

 

여기까지가 둘째 아들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첫째 아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였을 때 함께 재산을 분배받았을 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밭에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첫째 아들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성대히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며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둘째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돼지를 키우던 이방의 땅에서 돌아왔다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옵니다. 확연히 구분되는 장면이죠. 첫째는 가문의 기업인 밭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였습니다. 그가 법적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할지라도 둘째 아들과는 달리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않고, 관할권도 주장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서는 종들을 거느리고 밖에서 매일 열심히 일하다가 돌아오곤 합니다. 이것이 첫째 아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참으로 성실한 아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집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뀝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소식을 듣고 화를 냅니다.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하기조차 합니다. 이렇게 첫째 아들은 아버지께 불효하는 아들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가 마련한 잔치를 거부함으로써 동네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에 흠집을 내고 만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18절 이후의 말씀을 토대로 판단해 보면,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효자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그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첫째 아들도 아버지에게 큰 죄를 지었고, 얼마든지 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탕자를 맞아들일 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를 향한 아버지의 행동이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떠나 친히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맏아들에게 “아들아”라는 말보다도 다정한 호칭으로 “얘야” 하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첫째 아들을 향하여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하며 큰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변한 것은 하나 없고 여전히 돈독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여기에 더하여 재산상의 피해가 없다고 말하여 줍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동생이 돌아온 잔치에 큰 아들이 참여하도록 요청하며 가족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려는 아버지의 간곡한 심정이 표현됩니다.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저는 맏아들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얼마나 억울한 마음일까요? 자신은 뼈 빠지게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는 사이,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달아나듯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돌아옵니다. 부양의 의무도 지키지 않고, 아버지에게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효자이고, 불효자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환영해 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첫째 아들 편에서는 이것이 공정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첫째 아들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매처’의 모습을 봅니다. 말 그대로 탕자가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잔치를 벌이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입을 맞추고, 온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돌아온 아들을 자랑합니다. 그저 종으로 써주면 모를까, 사실 그마저도 큰 은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반항하거나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을 여럿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이 드신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이른 아침 포도원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품꾼을 고용합니다. 그런데 다시 삼시, 즉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에 나가 보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서 그들을 품꾼으로 또 고용합니다. 육시, 구시, 다시 말해 12시와 오후 3시에도 그렇게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품꾼으로 채용합니다.

오후 5시, 십일시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9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줍니다. 그러자 그들보다 앞서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먼저 온 사람들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그리고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 20:11~12)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공정하지 않아!” “이것은 정의롭지 않아!” 사실 주인은 약속한 그대로 모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들이 주인에게 원망을 합니다.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만일에 주인이 조금 지혜롭게 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먼저 온 사람들에게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고, 그들이 돌아간 후에 삼시에 들어와 일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고, 또 육시, 구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면 아마도 나중에 온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돌아갔을 것이고, 문제가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반대로 합니다.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줍니다. 그것이 주인이 품꾼과 약속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져본다면 문제는 받는 사람들이 갖게 된 상실감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과 비교하여서 드는 상대적인 상실감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맏아들도 그렇고,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도 그렇고, 한결같이 손해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 품삯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일꾼들이었고, 아침부터 밭에 나가서 일하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긴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계산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보다 대우받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갑자기 매처의 본능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손해 본 것 아닌가? 공정하지 않은 처사가 아닌가?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성경은 공평의 잣대를 내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로 확장시키길 권면합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요나는 이방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간파합니다. 그러자 매처의 본능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니야. 하나님! 이방 민족을 우리와 동일하게 대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가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니느웨 성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는 하소연까지 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2~3)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제가 죽는 게 낫겠습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보다 자신이 죽는 게 낫겠다는 처사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매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매처가 가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버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게 된 매처는, 자신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기버로서 변화될 가능성을 갖는 것이죠. 반면에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는 매처라면 그는 다시 찾고자 다른 누군가의 것을 뺏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평범해 보이는 매처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가질 수 있는 것을 도리어 못 받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매처 요나가, 매처 품꾼이, 매처 맏아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이방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상실감을 느끼고, 나중에 온 사람이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는 걸 보면서 상실감을 느낍니다. 탕자가 돌아왔다는 이유로 벌여진 잔치에 상실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매처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 비교하면서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의 관점에서 본다면 큰 아들은 이미 아버지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이 모두 그의 것입니다. 오히려 큰 아들은 감사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작은 아들을 위해 열린 잔치가 못마땅합니다. 이른 아침에 들어온 포도원 품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품삯에 달하는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행복하지 않습니까? 일당을 받아서 아이들 먹을 것을 사 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이들도 자신보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자 마음이 그만 달라집니다. 불행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공평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매처적인 성품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공평함의 잣대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아 누리는 것만을 보면서 공평을 논하면 한없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나는 하루에 10만원을 버는데 다른 사람은 100만원을 법니다. 공평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건강한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우는데, 나는 약하고 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웁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늘 손해 보는 것 같고 저주받은 인생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정직한 매처라면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받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생각하면 온통 받은 것뿐입니다. 생명도, 가족도, 작든 크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가족이라는 관점을 심어 주고자 노력한 듯 보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야. 그러니 누군가 조금 더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아버지의 기쁨이다. 우리 모두의 기쁨이다.” 누군가 가짐으로써 모두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른 아침 포도원에 나온 일꾼들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시이든, 육시이든, 구시이든 상관없이 일거리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다가 밭에 들어와 일을 하고 하루 품삯을 얻게 되었으니, 그가 나의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처럼 나와 너를 분리하고 산다면 우리는 더욱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나와 너가 하나가 되고 가족이 된다면, 우리는 더욱더 행복해지고 서로를 더 가깝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처도 좋습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보면서 매칭을 하려고 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이끌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것 세어 보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매처라면 우리는 더 큰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은 또 다른 기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매처가 될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보며 다른 사람이 가진 것 보면서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매처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받은 것 하나씩 세어 보며 ‘이것도 과분해’, ‘이것도 감사해’ 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닮는 진정한 매처가 되겠습니까? 매처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진정한 매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he Older Brother’s Protest

 

Luke 15:25-32

 

Today’s text is taken from a well-knownparable in the Bible. From the age of the Church Fathers, this parable was dubbed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with a focus on the younger son. Thisname likely originated from the story’s subtitle in the Vulgate Latin Bible.

 

But upon a closer study, we will find thatthe spotlight is on the older son in the latter part of the story. Therefore, if we call this story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focusing solely on the younger son, the older son will lose his place in it.

 

This is why some commentators have argued that the main character is the older son, not the younger one. That is, if we consider the contextin which Jesus spoke this parable as described in Luke 15:1-2—“Now the tax collectors and sinners were all gathering around to hear Jesus. But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muttered, ‘This man welcomes sinners and eats with them.’”—the protagonist becomes the older son. According to this interpretation, the message of the parable was primarily aimed at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From this viewpoint, the main character becomes the older son. Accordingly, some scholars have suggestedalternative titles such as “The Parable of the Complaining Son” or “The Parable of the Un-rejoicing Son.”

 

Yet others argue that “The Parable of the Two Sons” would be better suited, since the story is about two sons, with the focus on not just one of them but on both. They point to the importance of Luke 15:11 where it says, “Jesus continued: ‘There was a man who had two sons.’”

 

Such diverse interpretations have enriched our understanding of the Bible and have helped readers throughout the ages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parable in the most appropriate way depending on their age and culture. Today’s passage has at times invited men and women living in sin and debauchery to return to God; it has at times helped faithful Christians grow in spiritual maturity as they identified themselves with the complaining older son.

 

Today, as I unpack the messag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grumbling older brother, I want to share with you what our attitude must be toward God and our neighbors.

 

Let’s take a closer look at the parable. First, let’s take a look at the prodigal younger son.

 

We must pay attention to several aspects of the story as we examine it. First, how was the inheritance distributed? In the story, the inheritance was not divided by the father. Nor did he take the initiative of calling his sons to divide it. It was the younger son who came to the father first, demanding that the inheritance be divided and given to him.

 

Second, the younger son, after receiving his lot, sells it to free himself of anyinterference from his father. Then he goes off to a foreign land out of his father’s reach.

 

As we can tell from a phrase in verse 13, “not long after that,” the younger son seems to have sold his inheritance in a hurry. Even today selling all your wealth is not easy. But in order to gainfreedom, the younger son hurriedly sells his inheritance, committing the sin of dishonoring one’s parents.

 

In Jesus’ time it was unimaginable for a son to ask his father to divide his wealth and give it to his children while his fatherwas still alive and well. Demanding such a thing was a serious disrespect; it was almost like wishing your parents would die.

 

Even if the father were to give away his wealth to his children voluntarily, selling the inheritance before his death was unfathomable. Yetthis is what the younger son did; then he left his family altogether.

 

This meant a complete farewell. It was like declaring, “Father, I won’t ever come back.”

 

By doing this, the younger son commits yet another sin. In Jewish tradition, when a son received his father’s inheritance, it was his duty to care for his parents. But now the younger son leaves his parents. To make matters worse, he squanders his entire wealth, losing all chance of ever caring for them. He would not have wanted to provide for them in the first place, but now penniless, he is unable to.

 

Furthermore, the fact that he fed pigs indicates another sin. Jews regarded pigs unclean and did not raise them. Yes, he was broke and starving; still, it must be noted that he had lost all respect for the law and his father’s faith. He had not just physically distanced himself from his father, but had sinned by abandoning his father and God spiritually.

 

In the parable, the father waits for this son who has sinned and left him. When the prodigal son returns home, the father spots him from afar, has compassion on him, runs to him, embraces him, and kisses him:

 

“The son said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I am no longer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But the father said to his servants, ‘Quick! Bring the best robe and put it on him.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Bring the fattened calf and kill it. Let’s have a feast and celebrate. For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So they began to celebrate.” (Luke 15:21-24)

 

But the story does not end here but continues on to the second paragraph. The scene shifts to the older son who is returning home from the field. He would have been allotted his share of the inheritance when his younger brother demanded his lot. Today’s passage describes the older son returning home from the field as he hears that his brother has returned.

 

While the younger son returns home from a life of debauchery in a foreign land tending to pigs, the older son returns home from his father’s field where he had been working. This tells us that the older son had been sweating in the field, the family’s property. Although he had legally inherited his father’s wealth, it seems he had not claimedownership or management rights while his father was still alive—unlike his brother. He was returning home from a hard day’s work in the field where he toiled for his father and managed the slaves.

 

His return pours cold water on the warm celebrations in the household. When he hears that his father is holding a great feast in celebration of his brother’s return, he gets angry and refuses to come in.

 

By doing so, the older son disrespects his father. By refusing to attend a feast hosted by his father in front of all the people, he undermines his father’s authority.

 

According to the laws and regulations in Deuteronomy 21:18 and onwards, a father could punish—even put to death—a son who disrespected him by hurting his feelings or challenging his authority. So the older son sins greatly against his father too.

 

This is when the father starts to act on behalf the older son. Leaving the party and all the guests, he comes outside. And he starts talking to his older son. In the New Living Translation, the father does not just call him, “Son,” but says, “Look, dear son.” Furthermore, he says that the older son has always been with him and nothing in their relationship has changed, reassuring him that nothing in this world could ever change their father-son relationship.

 

The father also confirms that his brother’s return will not affect or undermine his inheritance. He says, “Everything I have is yours.” Then he invites him to join the celebration, expressing his earnest desire to maintain loving family relations.

 

Whenever I read this parable, I can understand how the older brother felt. How unfair it seemed to him! While he was working tirelessly for his father, his brother ran off with his money. Then he returned home after squandering it all. He didn’t do any of his duties to care for their parents; he did nothing for his father. Who then is the filial son, and who is the unfilial one?

 

But how could Father greet his brother in such a manner?

 

The older brother would have thought it entirely unfair. In the older son, I see the characteristics of today’s “matchers.” Let’s say a prodigal son returned. Even if the father were to hire him as a worker—which was what the prodigal son wished—that would be too kind. Let’s say the father allowed him to live at home. In this case,it would suffice to give him second-hand clothing, make him work in the field, and give him just enough to eat. No, even this would be not fair. But to hold a party for him?Put a ring on his finger, kiss him, and brag to the whole village about his return? It was simply unacceptable.

 

In the Bible, I was able to find many other figures who rebelled and raised questionsconcerningsimilar issues.

 

Such figures also appear in the Parable of the Workers in the Vineyard told by Jesus in Matthew 20. In this story, a landowner decides to hire some workers early in the morning, agreeing to pay them one denarius for a day’s wage. Then at about the third hour, which is about nine in the morning, he sees others doing nothing and hires them too. Then at about the sixth hour and the ninth, twelve and three in the afternoon respectively, he sees more people standing idle and hires them too.

 

Then it becomes the fifth hour, five in the afternoon. The landowner gives one denarius to the workers who came at three in the afternoon. Seeing this, the other workers who came early think they will be paid more. But everyone, including those who came early, gets one denarius. The workers grumble and feel bitter toward the landowner:

 

“When they received it, they began to grumble against the landowner. ‘These who were hired last worked only one hour,’ they said, ‘and you have made them equal to us who have borne the burden of the work and the heat of the day.’” (Matthew 20:11-12)

 

All the master did was to give everyone the wage that he had agreed on. But the workers who came early grumbled against him. They cried, “This is not fair!”

 

Wouldn’t it have been better if the landowner had acted more wisely? There would have been no problems if he had given one denarius as promised to the workers who came early, then waited until they had gone to give the other workers who came at nine one denarius, and then did the same for all the other workers who came at twelve, at three, and so on.

 

The master gave everyone the wage that he had agreed on. The problem was that sone recipients felt deprived. They thought that they had gotten less than they ought to—compared with the others, that is, the workers who came later.

 

Like the older son in today’s Scripture and the workers who felt deprived in Matthew 20, there are those who think they have received less than they deserve, who think it unfair.

 

They are just ordinary men. They are workers who started out the day looking forward to a day’s wage; and, as we see in the older son, they are just ordinary men who work hard,believing that working in the field from dawn to dusk is what they ought to do.

 

But at some point, they start to do the math. When they were just living their lives, they did not know it. But when they see others—people who seem inferior to them, people who they believe ought not to get more than what they get—receive much and have parties thrown for them, suddenly their “matcher instinct” kicks in. They start to feel, ‘I have been deprived! It’s not fair! This should not be!’

 

God’s message comes to Jonah. He must go to Nineveh. When Jonah hears the message, however, he knows instinctively. He knows that God’s will is to save the people of Nineveh. And he thinks, ‘This should not be! How can God treat Gentiles the same way He does His people?’ So he runs away to Tarshish. As he witnesses God deliver the people of Nineveh, he even begs God to take his life:

 

“He prayed to the Lord, ‘Isn’t this what I said, Lord, when I was still at home? That is what I tried to forestall by fleeing to Tarshish. I knew that you are a gracious and compassionate God,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love, a God who relents from sending calamity. Now, Lord, take away my life, for it is better for me to die than to live.’” (Jonah 4:2-3)

 

Many figures in the Bible are like matchers. In their relationship with God, in particular, there is a chance they may take the wrong direction.

 

Like Jonah, who was a matcher, such people feel deprived when God decides to save a Gentile people. Like the workers who came early and grumbled, they feel deprived when someone who comes later gets the same one denarius. Like the older brother, they feel deprived when the father holds a feast in celebration of the prodigal son.

 

But let’s think deeper. What is the problem with these matchers? They have one thing in common: they feel deprived in comparison to what others have, what they received.

 

If the older son had thought of how much he himself had received and had, he would have realized that he was a son infinitely loved and trusted by his father and that all of his father’s possessions were his. If he had calculated all that he had received from his father, the only proper response would be gratitude. Yet he got upset over the feast his father held for his brother.

 

This was the same for the workers in the vineyard. A denarius is a day’s wage.The workers should be grateful for being able to work, to provide for their children. The landowner did not lie to them or rip them off. If they had thought of all this, the workers who came early should have been thankful. Yet they got angry over the fact that others who came late got the same one denarius.

 

Dear Church, our hearts have been wired to think like a matcher who tries to make all things “fair.” With the exception of a special few, everyone has this rule of equity inscribed in their hearts. But what is important is how we apply it.

 

If we insist on fairness when we see others enjoying certain things, we become unhappy. The world becomes unfair. Let’s say you make 100,000 won a day, but the person next to youmakes 1 million. If we compare ourselves with him, it doesn’t seem right. Let’s say all the families around you have healthy children, but your baby is weak and disabled. If we compare our situation with others, we cannot be thankful. If we compare ourselves with other people, the world is never fair. If we compare what we have with what others have, we feel deprived and cursed.

 

If we are truly honest matchers, we must consider what we have received from God. What has God given me? When we consider this, we realize that everything has been given to us. He gave us life. He gave us our family. All things, great or small, have been given to us by God. Since all that we have have been given to us by God, we are already His beneficiaries.

 

It is pivotal that we live with a grateful heart as beneficiaries. When we have such a mindset, we are happy. However, when we think of what we are lacking in comparison with others, we will never be happy or grateful.

 

In today’s passage from Luke, we see that the father tries to instill in the older son the concept of family. We are one loving family. Therefore, even when one member has more than another, this will make the father and all whole family happy.

 

It’s okay to have a little less than that person. Because that person is my brother. Because my whole family has peace through it.

 

This applies to the workers in the vineyard too. What would your response be if that idle person who finally got hired at the third, sixth, or ninth hour were your brother, your son, or a member of your family? We would be grateful and happy that he received a little bit more than myself.

 

Dear Church, it is fine to be a matcher. But don’t be a matcher who grumbles at what others get. Be a matcher who counts the blessings God has given you. And then become a “transformed matcher,” that is, a giver who resembles God, a giver who gives others the grace you have received from God.

 

Matchers who compare themselves with others can never become givers but can only become takers. The matcher who counts his/her blessings can become a grateful giver.Let us thank God and look to Him alone who is with us even today and helps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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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 25~32

25~32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 모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잘 아시는 대로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의 뒷부분에 해당합니다. 교부 시대부터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전해져 내려온 말씀입니다. 아마도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 성경에 붙여진 소제목에서 유래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후반부에는 첫째 아들도 등장하기 때문에 둘째 아들에게만 집중해서 탕자의 비유라고 명명한다면, 첫째 아들이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비유의 핵심이 첫째 아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 말씀을 배경으로 볼 때에 첫째 아들이 비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1~2)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중에 하나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하시듯 첫째 아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이들은 ‘불평하는 형의 비유’ 혹은 ‘기뻐하지 않는 형의 비유’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은 본문에 두 아들이 등장하므로 ‘두 아들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누가복음 15장 11절 말씀을 근거 삼아 주장합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1)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들은 성경을 보다 풍요롭게 해석하도록 도왔고, 다양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전달하여 왔습니다. 타락하고 방탕한 삶을 살던 사람에게는 ‘탕자의 비유’로 다가와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고, 때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충성된 사람에게 ‘첫째 아들의 비유’ 혹은 ‘불평하는 형의 비유’를 통하여 보다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을 다짐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불평하는 형의 입장에서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둘째 아들 탕자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 볼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은 재산 분배 과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재산을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찾아가서 재산 분배를 요청하죠. “돈을 달라. 재산을 내놓아라.” 말합니다.

둘째로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몫을 받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으로부터 속히 자유로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받자마자 아버지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외국 땅으로 가서 재산을 처분합니다. 13절의 ‘며칠 후’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일이 급하게 일어난 것 같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재산을 급히 매각한 셈이죠. 오늘날도 이런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 일이 가능하려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만큼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빨리 떠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는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 계시는 동안에 자식이 유산을 분배해 달라고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것과 같은 엄청난 불경이었습니다. 설사 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재산을 넘겨주었다고 할지라도 아버지 생전에 받은 재산을 처분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그것을 임의로 팔고 가족을 떠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완전한 이별을 결단한 것 같습니다. 다시는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둘째 아들은 또 다른 죄를 짓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게 된 아들은 부모를 봉양할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부모를 떠나고, 설상가상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함으로써 부모를 봉양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상실합니다. 마음도 없었겠지만 재산도 없어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돼지 치는 일을 한 것은 또 다른 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돼지를 먹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접촉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돼지를 치며 짐승의 우리에서 머물게 됩니다. 이제 그의 마음에는 율법도 없어지고, 아버지의 종교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만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하나님과도 멀어짐으로써 신앙적으로도 멀어진 셈입니다.

자,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꼽아보면 둘째 아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비유 속에 나타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탕자,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그를 측은히 여기며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21~24)

 

여기까지가 둘째 아들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첫째 아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였을 때 함께 재산을 분배받았을 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밭에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첫째 아들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성대히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며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둘째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돼지를 키우던 이방의 땅에서 돌아왔다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옵니다. 확연히 구분되는 장면이죠. 첫째는 가문의 기업인 밭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였습니다. 그가 법적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할지라도 둘째 아들과는 달리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않고, 관할권도 주장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서는 종들을 거느리고 밖에서 매일 열심히 일하다가 돌아오곤 합니다. 이것이 첫째 아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참으로 성실한 아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집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뀝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소식을 듣고 화를 냅니다.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하기조차 합니다. 이렇게 첫째 아들은 아버지께 불효하는 아들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가 마련한 잔치를 거부함으로써 동네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에 흠집을 내고 만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18절 이후의 말씀을 토대로 판단해 보면,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효자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그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첫째 아들도 아버지에게 큰 죄를 지었고, 얼마든지 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탕자를 맞아들일 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를 향한 아버지의 행동이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떠나 친히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맏아들에게 “아들아”라는 말보다도 다정한 호칭으로 “얘야” 하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첫째 아들을 향하여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하며 큰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변한 것은 하나 없고 여전히 돈독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여기에 더하여 재산상의 피해가 없다고 말하여 줍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동생이 돌아온 잔치에 큰 아들이 참여하도록 요청하며 가족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려는 아버지의 간곡한 심정이 표현됩니다.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저는 맏아들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얼마나 억울한 마음일까요? 자신은 뼈 빠지게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는 사이,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달아나듯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돌아옵니다. 부양의 의무도 지키지 않고, 아버지에게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효자이고, 불효자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환영해 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첫째 아들 편에서는 이것이 공정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첫째 아들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매처’의 모습을 봅니다. 말 그대로 탕자가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잔치를 벌이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입을 맞추고, 온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돌아온 아들을 자랑합니다. 그저 종으로 써주면 모를까, 사실 그마저도 큰 은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반항하거나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을 여럿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이 드신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이른 아침 포도원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품꾼을 고용합니다. 그런데 다시 삼시, 즉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에 나가 보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서 그들을 품꾼으로 또 고용합니다. 육시, 구시, 다시 말해 12시와 오후 3시에도 그렇게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품꾼으로 채용합니다.

오후 5시, 십일시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9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줍니다. 그러자 그들보다 앞서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먼저 온 사람들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그리고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 20:11~12)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공정하지 않아!” “이것은 정의롭지 않아!” 사실 주인은 약속한 그대로 모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들이 주인에게 원망을 합니다.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만일에 주인이 조금 지혜롭게 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먼저 온 사람들에게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고, 그들이 돌아간 후에 삼시에 들어와 일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고, 또 육시, 구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면 아마도 나중에 온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돌아갔을 것이고, 문제가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반대로 합니다.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줍니다. 그것이 주인이 품꾼과 약속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져본다면 문제는 받는 사람들이 갖게 된 상실감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과 비교하여서 드는 상대적인 상실감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맏아들도 그렇고,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도 그렇고, 한결같이 손해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 품삯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일꾼들이었고, 아침부터 밭에 나가서 일하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긴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계산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보다 대우받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갑자기 매처의 본능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손해 본 것 아닌가? 공정하지 않은 처사가 아닌가?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성경은 공평의 잣대를 내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로 확장시키길 권면합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요나는 이방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간파합니다. 그러자 매처의 본능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니야. 하나님! 이방 민족을 우리와 동일하게 대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가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니느웨 성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는 하소연까지 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2~3)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제가 죽는 게 낫겠습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보다 자신이 죽는 게 낫겠다는 처사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매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매처가 가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버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게 된 매처는, 자신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기버로서 변화될 가능성을 갖는 것이죠. 반면에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는 매처라면 그는 다시 찾고자 다른 누군가의 것을 뺏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평범해 보이는 매처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가질 수 있는 것을 도리어 못 받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매처 요나가, 매처 품꾼이, 매처 맏아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이방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상실감을 느끼고, 나중에 온 사람이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는 걸 보면서 상실감을 느낍니다. 탕자가 돌아왔다는 이유로 벌여진 잔치에 상실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매처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 비교하면서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의 관점에서 본다면 큰 아들은 이미 아버지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이 모두 그의 것입니다. 오히려 큰 아들은 감사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작은 아들을 위해 열린 잔치가 못마땅합니다. 이른 아침에 들어온 포도원 품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품삯에 달하는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행복하지 않습니까? 일당을 받아서 아이들 먹을 것을 사 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이들도 자신보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자 마음이 그만 달라집니다. 불행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공평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매처적인 성품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공평함의 잣대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아 누리는 것만을 보면서 공평을 논하면 한없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나는 하루에 10만원을 버는데 다른 사람은 100만원을 법니다. 공평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건강한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우는데, 나는 약하고 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웁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늘 손해 보는 것 같고 저주받은 인생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정직한 매처라면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받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생각하면 온통 받은 것뿐입니다. 생명도, 가족도, 작든 크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가족이라는 관점을 심어 주고자 노력한 듯 보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야. 그러니 누군가 조금 더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아버지의 기쁨이다. 우리 모두의 기쁨이다.” 누군가 가짐으로써 모두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른 아침 포도원에 나온 일꾼들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시이든, 육시이든, 구시이든 상관없이 일거리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다가 밭에 들어와 일을 하고 하루 품삯을 얻게 되었으니, 그가 나의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처럼 나와 너를 분리하고 산다면 우리는 더욱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나와 너가 하나가 되고 가족이 된다면, 우리는 더욱더 행복해지고 서로를 더 가깝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처도 좋습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보면서 매칭을 하려고 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이끌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것 세어 보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매처라면 우리는 더 큰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은 또 다른 기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매처가 될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보며 다른 사람이 가진 것 보면서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매처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받은 것 하나씩 세어 보며 ‘이것도 과분해’, ‘이것도 감사해’ 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닮는 진정한 매처가 되겠습니까? 매처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진정한 매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3년 2월 1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맏아들의 항변” (눅 15:25-32)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70장, 293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눅 15장 25-32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1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탕자의 비유는 전통적으로 둘째 아들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첫째 아들의 이야기는 아닐까요? 불평하는 형의 비유 말입니다. 아니면 두 아들 전체의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탕자 비유를 어떻게 보시나요?

 

설교의 요약

 

매처(Matcher)라는 관점에서 탕자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둘째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돼지를 키우던 이방의 땅에서 돌아왔는데, 형은 동생을 위한 아버지의 잔치를 보고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억울했기 때문입니다. 억울하다는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공평하지 않고, 공정한 처사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 이야기를 보면, 하루 한 데나리온의 몫을 약속받아 일을 한 품꾼들이 나옵니다. 일찍 와서 종일 수고한 사람들이 나중에 와서 적게 일하고 같은 몫을 받은 사람들을 보며 계산을 합니다.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공정하게 일꾼들을 대하면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합니다. 주인은 품꾼들과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행한 것인데, 문제는 품꾼들이 상실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나는 손해보았다, 나는 억울하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임하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이 때, 요나는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이건 아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을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하게 대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이해할 수 없어서,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째 아들과 포도원 품꾼, 그리고 요나는 잘못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매처들입니다. 매처는 주는 대로 받고, 또 받는 대로 주는 공평의 원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로 인해 기버도 될 수 있고 테이커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테이커가 되어 갑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빼앗겼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 비교하여 상실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받았으며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 감사해야 마땅한데, 다른 사람들을 보며 불행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비교하니 모든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남의 것과 비교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받은 자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가 좀 더 받게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테이커가 아니라, 기버가 되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요?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매처는 누가 있을까요? 정의와 공평을 이야기한 사람들을 찾아보며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2. 다른 이가 받은 것을 인정하며 좋은 일이라 여기며 살아갈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주는 대로 받고 받는 대로 주는 원칙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공평과 정의로 세상과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감사함으로 세어보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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