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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 39 ~ 41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시며 우리에게 눈을 열어 보기를 요청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사건을 다룹니다. 그런데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이 보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실 때에 땅에 침을 뱉어서 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발라 주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낫게 하지 아니하시고 특별한 행위를 보여 주신 점이 독특하면서도 다른 치유와 구별됩니다. 둘째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은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도,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6~7절에 기록된 반면에 정작 그가 한 믿음의 고백은 한참 후인 38절에 나옵니다. 이 고백 사이에 여러 이야기들이 첨가되어 있다는 점 또한 다른 치유 사건과 구별됩니다.
또 다른 독특한 점은 이 사건이 죄의 문제와 연관되어 시작되었고 마지막까지도 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눈먼 사람을 보았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죠.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 9:2 중)
이야기는 보지 못하는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는 신학적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 9:41)
보지 못하는 게 누구의 죄인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했다면, 마지막은 “본다고 말하는 너희가 도리어 죄인이다.”는 예수님의 선포로 정리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는 전체적으로 ‘죄’와 ‘본다’는 주제어가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요한복음 9장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던 중에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여기에서 보셨다는 말이 상당히 의미 있게 들립니다. 눈먼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주님은 눈먼 사람을 보셨기 때문이죠.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아마도 당시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속에는 신학적인 큰 주제가 담겨 있고 무서운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이 누군가의 죄로부터 기인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왜’ 이렇게 된 것이냐고 묻는 게 아니라 누구의 ‘죄’의 결과인지를 물은 셈입니다. 눈먼 사람뿐만 아니라 운명적으로 불행한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은 ‘누구의 죄 때문일까? 문제가 있었을 거야. 누군가에게 문제가 있었겠지…’ 하고 나름의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도 담겨 있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도 묻어납니다. 이러한 우리의 관점 안에는 사실 과거 지향적인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과거가 오늘을 만들어 냈다는, 그의 죄가 오늘의 불행을 만들어 냈다는 운명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는 것이죠. ‘과거의 내 죄가, 내 부모의 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는 태도를 갖게 합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단호하면서도 분명하게 정리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 9:3)
예수님은 한 사람의 불행을 그 사람에게서 찾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에게서 찾으셨습니다. 과거에서 찾은 게 아니라 미래에서 찾으셨습니다. 누구의 과거, 누구의 죄 때문이라는 과거 지향적인 사고가 아니라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큰일을 이루신다는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미래를 보라는 주님의 말씀은 과거의 문제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라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으로 열리기를 요청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미래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맹인의 현실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여 주는 출발점이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미래를 본다면 오늘의 불행은 희망이 됩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출발점이 됩니다.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불행을 경험할 때면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후에는 자책하는 경우들이 많죠. 힘든 시간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분들을 향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불행한 현실을 딛고 이제는 미래를 향하여, 주님과 함께 새 출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르게 보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인간의 죄를 아셨습니다.>
눈먼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이렇게 해서 귀중한 가르침과 더불어 끝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새로운 이야기가 따르며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한 맹인이 보게 된 장면을 보고 바리새인이 반응합니다. 그들은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요 9:8 중)고 말하며 놀랍니다. 또 다른 재미있는 반응도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요 9:9~10)
눈먼 소경이었던 자가 바로 자신이었다고 말하는데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상황입니까! 사람들의 눈이 이토록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으로 보지만 다른 사람은 그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눈은 한계를 가집니다. 자,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소경이었던 맹인이 말합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요 9:11)
그러자 사람들이 바리새파인에게 그를 데리고 갑니다. 13절 이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사람이 눈을 뜨게 된 경위를 재차 묻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자세히 이야기하죠. 여기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인 반응 또한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들은 트집 잡으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안식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반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안식을 범하는 일이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 자체를 부정하려 듭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요 9:16)
그들은 여전히 누가 죄인인가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죄를 찾는 데만 온통 관심을 기울이는 바리새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종교 집단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합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죠. 종교 지도자들은 죄목을 찾기에 늘 열심입니다. 누구의 죄인가? 무엇이 죄인가?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죄목은 점점 늘어나고 그에 따라 죄인도 늘어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기 원하시지만 어떤 종교 집단은 끊임없이 죄인을 양성하고 만들어 내곤 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례를 만듭니다. 이 율례에 따라서 안식일에 병 고친 것은 죄가 된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죄를 저지른 죄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눈을 뜨는 모습을 보면서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주시하지 않습니다. 사건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책만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죄의 결과라고 항변합니다. 빤히 눈을 뜨게 된 사람을 옆에서 보면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외면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혹시나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가 싶어서 맹인이었던 부모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가 아들인지를 물으며 속임수는 없는지 알아내려 합니다. 그러자 부모는 이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지만 지금은 보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당황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24절 이후에 눈 뜨게 된 그 사람을 다시 데려와 묻습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요 9:24 중, 새번역)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낙인찍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정작 눈을 어떻게 뜨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죠. 그때 맹인이었던 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 9:25 중, 새번역)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요 9:27 중, 새번역)
이렇게 묻자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모세의 제자들이다.” 말하면서 도리어 책망합니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요 9:34 중, 새번역)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눈 뜬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죄인이라는 이야기만을 계속해서 할 뿐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누가 죄인인가”, “누구를 죄인으로 만들 것인가”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눈을 뜨게 된 사람을 보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따르는 지식, 전통, 선입관에 사로잡혀 예수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건 속에 ‘죄’라는 단어는 계속해서 나열되고 있습니다. 16절 중간 부분입니다.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요 9:16 중)
24절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요 9:24 중)
자신을 낫게 해 준 예수님을 변호하는 소경에게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요 9:34 중)
이렇듯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죄만을 찾습니다. 그들은 남을 정죄하고, 잘못을 찾고, 죄를 고발하는 태도로 인생의 시간을 채워 갑니다. 아집에 사로잡혀 자신만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 전통에 사로잡혀 본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 남의 허점과 죄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눈먼 자가 보게 되는 놀라운 사건을 옆에서 보면서도 율법의 조문을 따라 죄목만을 찾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향해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요 9:41 중, 새번역)
진정한 죄는 본다고 말하면서도 비뚤어지게 보는 것, 남의 죄만을 보는 태도입니다. 전통에 사로잡혀서, 때로는 선입관에 사로잡혀서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남을 정죄하는 태도입니다. 정작 본다고는 말하지만 법조문만을 보며 다른 사람의 죄를 찾고 정죄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만지심으로부터 시작되는 진정한 ‘봄’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 보고 있습니까?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바르게 보고 있습니까? 남의 죄만을 바라보며 내 속에 있는 죄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잘못 보고 있고 착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편견과 아집을 깨트리고 계십니다. 자,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진정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눈을 뜨게 된 소경의 모습에서 진정 ‘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날 때부터 소경된 맹인에게 진흙을 발라 주셨을까요? 어쩌면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함이 아니셨겠습니까? 충분히 말씀으로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예수님은 친히 진흙을 발라 눈에 발라 주십니다. 사람들은 실로암 못가에서 눈을 씻는 맹인의 모습을 봅니다. 이 일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신 건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너에게 보여 준다. 믿어라. 내가 치유한다는 사실을 믿어라. 너희가 이것을 보고 믿으라.”는 배려이셨습니다. 참으로 보게 하시는 주님입니다.
맹인을 만나시는 장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인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로 보게 하실까요? 모든 생물들이 다 보니까 고등동물인 우리도 보는 기능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로 무엇을 보길 원하시는 겁니까? 못 생긴 사람, 잘 생긴 사람을 구별하라고 눈을 주셨을까요? 주식 차트를 잘 보고 분석하라고 주셨을까요? 좋은 땅 고르는 안목으로 눈을 주셨을까요? 법조문 읽으며 누가 죄인인지를 찾아내라고 눈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주신 이유는, 우리로 보게 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하시는 위대한 일을 보고 믿게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대 자연 속에서,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보고 깨달으며 주님께로 나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요 9:39 중)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누구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멋지신 역사입니다. 오늘도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솜씨를 만물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눈을 뜨고 보게 하십니다. 그 주님을 믿으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눈으로 자연을 보고, 말씀을 보고, 하나님을 보며 그분의 일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로 보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5월 2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요 9:39-41)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20장, 383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9:39-41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5월 2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보면서 제자들, 말씀을 대하는 우리 또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인간에게 불행이 오는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는 전제의 질문입니다. 과거의 나의 죄, 부모의 죄가 영향을 줘서 불행을 만들어 내었다는 운명론적 사고이기도 합니다. 그럼 예수님은 이 질문에 뭐라고 답하실까요? 예수님은 날 때부터 눈 먼 사람 안에서 무엇을 보고 계셨을까요?
설교의 요약
우리는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불행을 경험할 때면, 누군가의 잘못을 따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가?” 묻고 있던 제자들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향한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불행의 기원을 사람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찾으셨습니다.(요 9:3)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시려고 이런 일이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 지향적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희망적 미래를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진흙을 이겨 눈 먼 자의 눈에 이것을 바르고 나서 실로암에 가서 씻게 하셨습니다. 그 말대로 했을 때 이 사람은 눈을 뜨는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된 그를 바라본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에 축하하며 함께 기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만 합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이 예수님이라 말했지만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 안에서 죄를 찾는 데에만 혈연이 되어 있습니다. 눈을 뜬 이 사람이 정말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인가도 믿지 못하여 그 부모를 대동하여 확인하기도 합니다. 왜 이토록 믿지 않느냐고, 자신을 낫게 해준 예수님을 변호하는 이 사람을 결국은 바깥으로 내 쫓아버립니다. 바리새인들은 죽이는 율법만을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이 사람이 눈을 뜬 것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던 전통, 지식, 선입관 때문에 놀라운 일을 목도하고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눈으로 남의 허점과 죄만 보고 있었습니다. 율법에서 죄를 찾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그토록 말하지만 결국 남의 죄만 보고, 전통에 사로 잡혀 진정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못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눈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일하심을 보고, 깨달으며, 인간의 나약한 현실을 보게 하셔서 주님께로 나아가도록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것은 전통에 선입관에 묶인 과거가 아닌 하나님과 함께 이룰 미래입니다. 누구의 허물과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멋진 역사하심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보게 하시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나누기
1. 과거 지향적 사고나 운명주의에 붙들려서 내게 보고 행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오늘 나는 본다고 말하면서 진정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보길 원하실까요?
마무리기도
주님, 비뚤어진 눈, 정죄하는 마음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진정 눈을 들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을 보게 하옵소서. 주신 말씀 안에서 주님을 온전히 알고 믿음으로 나가는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