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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남지 않은 생을 사는 법

데살로니가전서 5: 1 ~ 11

김경진 목사

2020.11.29

< 그리스도인에게는 건강한 종말 신앙이 필요합니다. >

2020년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초대교회에서 특별하게 인식되고 지켜진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신앙이 초대교회를 강력하게 응집시켰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바로 세워 주었습니다.
종말 사상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기독교의 종말 사상이 바르게 인식되고 작동되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 종말 사상과 신앙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교회와 세상의 구별이 사라지고 기독교의 독특성과 복음의 능력마저 상실될 수 있습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가 세상의 종말을 예언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미혹되고 현혹되었습니다. “10월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이 많은 사람을 선동하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가정이 무너졌고, 무작정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사회가 큰 혼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에 있었는데, ‘왜 이런 잘못된 믿음이 성행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을 찾아 ‘doomsday’라는 코너를 찾아 ‘종말의 날’과 관련된 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거의 절반 이상이 한국과 관련된 책들임을 발견하게 되었고, 한국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종말 사상이 퍼져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참 많은 이단이 있습니다. 이단이 주로 이용하는 신학적인 출발점은 ‘종말론’입니다. 세상에 곧 종말이 올 것이라는 예언으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사회의 혼란을 야기합니다. 잘못된 종말관을 형성시켜 교회와 사회를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바르게 정립되지 않은 종말 신앙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많은 문제를 양산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앙인에게는 바른 종말 신앙이 필요합니다. 바른 종말 사상을 통해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종말 사상은 어땠을까요? 오늘은 초대교회의 종말 사상을 살펴보며,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종말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종말’과 예수님의 ‘강림’ 사이의 구별과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언뜻 다른 말처럼 들리지만, 이 두 단어는 기독교 신앙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끝난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이르면,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세계의 종말’과 잇대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임박한 종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님의 강림을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당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관련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길 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예수님의 강림’이란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우선 1장 8절 이후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본이 되는 신앙의 모습이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 나갔다고 증언합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며 부러워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먼저는 사도들이 어떻게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는지를 전하고, 두 번째로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상을 버릴 수 있었는지를 증언합니다. 나아가 세 번째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를 조명하며, 그들의 종말 신앙을 드러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 (데살로니가전서 1:10 중)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종말 신앙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습니다. 이어 2~4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관련된 말씀이 등장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강림하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19, 새번역)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3:13 중)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데살로니가전서 4:16 중)

그밖에도 4장 15절, 5장 24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와 관련된 말씀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전서에는 ‘강림’에 관한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신앙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 신앙을 잘 전수받았는가?’ 사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 신앙은 ‘임박한 종말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천사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직접 본 그대로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만큼 강력한 종말 신앙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입니다.

< ‘우리의 죽음’과 ‘주님의 강림’은 맞닿아 있습니다. >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도 이천 년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종말 신앙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임박한 종말 사상 역시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어쩌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버린 분들도 꽤 있으실 것입니다. 종말 신앙 없이 현실에만 천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초대교회의 종말 신앙을 오늘 우리의 믿음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요? 강력한 힘을 가졌던 초대교회의 종말 신앙을 어떻게 전수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관련해 여러분께 한 가지 관점을 제공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강림을 기다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분명한 진리 하나를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나의 죽음’, ‘나의 종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죽음은 이미 가까이에 있습니다. 죽음은 이미 나에게 주어진 진리입니다. 내게 주어진 순간이 소멸하면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 시간이 100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50년도 남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10년도, 1년도 남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임한 임박한 종말입니다. 바로 이 개인의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서를 통해 말씀합니다. 4장 13절 이후에서 그는 ‘자는 자들’ 곧 ‘죽은 자들’에 관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모르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날에 죽은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후 1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새번역)

이것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임박한 강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죽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주님께 나아갈 것이며, 그다음에 살아 있는 자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연결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죽는 그 날,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죽음의 영원한 시간 속에서 예수님의 강림을 곧바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종말의 신앙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가 가졌던 건강한 종말 신앙을 오늘 우리도 충분히 전수받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떤 종말의 신앙을 가졌습니까? 당시 로마 문화가 번성했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신앙인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화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 나라를 대망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한 기쁨을 맛보기를 소망했습니다. 바로 그들 안에 건강한 종말 신앙, 임박한 재림 신앙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재림하십니다. >

초대교회의 능력 있는 종말 신앙의 중심에는 어떤 믿음이 내재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 새번역)

예수님이 강림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판하기 위해서입니까?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구원의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바른 종말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7 중)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런데 잘못된 종말론이 있습니다. 왜곡된 종말론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심판’에 집중하도록 유도합니다. 더 잘 믿어야 한다고, 아직 부족하다고 채찍질합니다. 모든 재물을 바쳐야 한다고, 모든 소유를 버리고 정결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외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더 많은 선행이 필요하다고 요구합니다. 밤새 기도하며, 금식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종말론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말의 신앙을 가진 게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앞으로 있을 위대한 일을 기대했습니다.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고대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고통에 빠진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사실 것이란 신앙을 가졌습니다. 바로 그 희망이 초대교회의 희망이자 종말의 신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종말은 심판이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도리어 구원으로 연결되는 문입니다. 우리가 병상에서 죽어가든지, 박해 중에 순교하든지, 전염병으로 죽어가든지, 가난한 모습으로 살다 죽든지, 부한 자의 모습으로 살다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구원’이며, 예수님의 강림은 ‘복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종말 신앙입니다.

<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사랑의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됩시다. >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8~9 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정신을 차려라. 이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깨어 있으라.”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종말의 신앙은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 세상 속에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안심하며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선물로 줍니다. 그래서 바울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1)

권면하는 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종말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견딜 수 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도 침착하게 덕을 세우며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3:12~13)

다시 오실 주님의 강림을 믿으며, 사도 바울은 사랑의 삶을 요청합니다. 임박한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구원이며 복음이기에, 우리는 담대히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림절의 신앙은 가난한 이들을 살피며 자선을 베푸는 것이자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코로나19 상황에서 대림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생입니다. 죽음은 이미 내 길에 서 있습니다. 죽음에 들어서는 그 날이 바로 주님의 강림을 경험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고 계십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를 살리기 위해 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How To Live This Short Life

1Thessalonians 5:1-11

Advent has begun. Advent is a time of meditating on and waiting for Jesus’ second coming. Waiting for the return of Jesus is an important part of our faith. Christianity emphasizes the following four: first, the incarnation of Jesus, that is, the Nativity; second, the passion and death of Christ; third, the resurrection and ascension of Jesus; and, finally, the return of Jesus.

Among these pillars of faith, the early churchcherished and clung to the fourth the most: the return of Jesus. In particular, the early Christians believed that Jesus would come soon, that is, during their lifetime. Such a faith strengthened them in a most powerful way, transforming them into people completely set apart from the world.

This eschatology, or a consciousness that the coming of Jesus is near, has always been a distinguishing hallmark of Christians. When their eschatological faithwas strong and healthy, Christians served as the light and salt of this world. When it was weak, they compromised with the world, losing the very essence of Christianity and the power of the gospel. And, interestingly, when eschatological thoughts becameexcessive or distorted, many heresies emerged and created chaos.

When Dami Mission falsely prophesized the end in 1992, I was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This heretic sect falsely prophesized that Jesus would return in October of 1992. Thousands of Koreans sold their houses, went to live in prayer houses, abandoned their family, and caused tremendous social chaos. As many of you may remember, even the media heavily reported on this sect and its absurd prophecies.

I was so upset by these false and mistaken notions of eschatology that I went to the school library to do research on this subject.I was surprised to find that much of the literature on false doomsday beliefs mentioned Korea. I learned that Korea’s religions and churches were exposed and extremely vulnerable to false doomsday beliefs.

Even today, Korea has more heresies than other countries. Heretic sectstend to recruit new followers by luring them with false eschatological beliefs. As I mentioned, however, eschatology was a powerful and distinguishingbelief that set the early Christians apart from the world. The problem is that false ormisguided eschatology can destroy people’s lives and the society, instead of serving as a hallmark that sets Christians apart from the world. In fact, even Christians have wrong or mistaken notions about the end, which is one of the reasons they fall prey to heresies. In sum, mistaken notions of the end can destroy one’s life, one’s family, and the society.

Then, is there a right and healthy eschatology?Don’tall eschatological thoughts force us to separate ourselves from the world? If we believe in eschatology, isn’t it inevitable for us to stay away from the world? Some of you may be thinking this. Well, the answer is that, according to the Bible, the early church had a healthy eschatology. Today, I want to speak to you about what that was and how it was different from today’s eschatology. Through my message, I pray that we will hear God’s voice together.

Some of you may feel uncomfortable about saying“Jesus’ return” and “the end” in the same breath.The two seem different, but from a Christian perspective they actually may be referring to the same thing—because on the day Jesus comes again, everything will come to an end. On that day, we will all stand before Jesus and face His judgement. In other words, the second coming of Jesus signifies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 of all the time.

First Thessalonians tells us that the early Christians desperately wanted Jesus to return, describing how they lived expectantly. Throughout 1 Thessalonians, the expressions “coming” and “come” are used repeatedly. From 1 Thessalonians 1:8 onwards, as Paul writes aboutthe faith of the Thessalonians that has become known everywhere, he mentions three things that people envy about them.

First, Paul talks about how the disciples reached them, that is, how the gospel came to the church in Thessalonica. Second, he talks about how the Thessalonians turned to God from idols. Third, the Thessalonians waited for “his Son from heaven, whom he raised from the dead.” (1 Thessalonians 1:10) Thus, the church at Thessalonica was envied for its eschatology, which explains why the words “coming” and “comes” come up many times in Paul’s epistle to the Thessalonians.

Let’s look at 1 Thessalonians 2:19, 3:13, and 4:16:

“For what is our hope, our joy, or the crown in which we will glory in the presence of our Lord Jesus when he comes? Is it not you?”(1 Thessalonians 2: 19)

“May he strengthen your hearts so that you will be blameless and holy in the presence of our God and Father when our Lord Jesus comes with all his holy ones.” (1 Thessalonians 3: 12)

“For the Lord himself will come down from heaven, with a loud command, with the voice of the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call of God, and 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1 Thessalonians 4: 16)

Jesus’ coming is mentioned in many other places in 1 Thessalonians, including 4:15 and 5:23. In other words, at the very core of the Thessalonians’ faith was the coming of Jesus, which Paul emphasizes.

Truth be told, the eschatology of the Thessalonians was based on a faith that the end was imminent. They thought Jesus would come in their lifetime—or, at least, in the near future. But 2000 years have passed since then.

This is why it is hard for us today to relate to the end as something tangible and imminent. ‘Jesus is already 2000 years late. So, what are the chances of Him coming in my lifetime?’ There is no urgency. Accordingly, we compromise with the world, live as if the worldwilllast forever, fail to set ourselves apart, and fail to serve as the light and salt of the earth.

But what if we thought about eschatology this way? This kind of eschatology makes us even more alert than expectantly waiting for Jesus’ coming: it is being conscious of one’s certain death. For any individual, death means the end of all time. After death, we allfaceour Creator.

Our Lord already introduced this perspective to us in 1 Thessalonians. From 4:13 onwards, Paul talks about how he does not want the Thessalonians to be “uninformed about those who sleep in death,” saying that God will bring with Jesus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in Him.

When Jesus comes from heaven, the dead will rise first, and then the living will meet the Lord: “For the Lord himself will come down from heaven, with a loud command, with the voice of the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call of God, and 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After that, we who are still alive and are left wi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we will be with the Lord forever.” (1 Thessalonians 4:16-17)

Thus, our death is connected to Jesus’ coming. So as we anticipate death, we also anticipate Jesus’ coming. On the day of His coming, we will rise and stand before Him. This is our faith. In this sense, the coming of Jesus and the end are not far off but near and imminent. The end is near. In this sense, Jesus’ coming is extremely near.

Then how can we better describe the eschatology of the early church that was so full of life and hope? I believe that the early church’s eschatology was the driving force behind its growth and spread, even in the face of extreme persecutions from the Roman Empire. It was the very force that set the early Christians apart from the world, empowering them to speak out about a better world—even when they lived in an extremely prosperous secular culture. This verse tells us something about the power of their eschatological faith: “For God did not appoint us to suffer wrath but to receive salvation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1 Thessalonians 5: 9)

What is the reason for His coming at the end? Will Jesus come to judge mankind? For some, this may be true. But for Christians—for those of us who are in Christ—this is not true. Jesus will come to save us. Therefore, His coming means our salvation. Jesus will come because He wants to rule over us and live with us forever. At His coming, we will welcome Him.

“And so we will be with the Lord forever.” (1 Thessalonians 4:17)

Mistaken notions of eschatology tend to excessively emphasize “judgement” to believers. They tell us to become better believers, to give more offerings, to give up all our possessions, to abandon everything, to become more pure, to memorize more verses, and to do more good. They wrongly teach us that our current state will not suffice. They say we must pray in the mountains, pray all night, and be awake by fasting.

However,the eschatology of the early church was not so. It was full of joyful expectation. ‘Jesus will come and save us! He will deliver us from this pain. He will finally come and raise us up and be with us forever.’ This was their hope. This was the eschatological faith of the early church.

Therefore, for believers, the end is salvation, not judgement. Death means deliverance for us, not destruction. Whether we die in hospital beds, are persecuted and martyred, die of infectious diseases, or die a poor or rich man, death is salvation to everyone who believes in Christ. And this is what we are waiting for.

It is important that we have such an eschatology. Therefore, our Lord teaches us through Paul, “But since we belong to the day, let us be sober, putting on faith and love as a breastplate, and the hope of salvation as a helmet. For God did not appoint us to suffer wrath but to receive salvation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1 Thessalonians 5: 8-9)

God wants to save us through Jesus Christ. Let’s be sober, take this faith to heart, and always remember this saving faith. Such an eschatology does not separate us from the world. Instead, it makes us joyful in this world. It comforts and strengthens us.

That is why the Lord says through Paul: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and build each other up, just as in fact you are doing.”(1 Thessalonians 5:11)

If we have faith in Jesus who will come to save, we will be able to bear all circumstances. Furthermore, we will be able to do good and be virtuous in any circumstance. Because we believe that He will come soon to save us, we can serve our neighbors with joy.

Therefore, our Lord says through Paul: “May the Lord make your love increase and overflow for each other and for everyone else, just as ours does for you. May he strengthen your hearts so that you will be blameless and holy in the presence of our God and Father when our Lord Jesus comes with all his holy ones.”(1 Thessalonians 3:12-13)

The end and Jesus’ coming are near. Yet, we can boldly share our love in this world because they signify God’s salvation and the good news. Our love can increase. That is why, as we celebrate Advent, we must look after the poor and provide for our neighbors in need.

Dear Church, this year’s Advent is all the more special. Our life is short. Death is just around the corner. When we die, that will be the day we experience the coming of the Lord. The risen Lord will come for us. He will come to save us, to deliver us, and to live with us forever.

Maranatha. Come, Lord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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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 1 ~ 11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 그리스도인에게는 건강한 종말 신앙이 필요합니다. >

2020년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초대교회에서 특별하게 인식되고 지켜진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신앙이 초대교회를 강력하게 응집시켰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바로 세워 주었습니다.
종말 사상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기독교의 종말 사상이 바르게 인식되고 작동되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 종말 사상과 신앙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교회와 세상의 구별이 사라지고 기독교의 독특성과 복음의 능력마저 상실될 수 있습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가 세상의 종말을 예언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미혹되고 현혹되었습니다. “10월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이 많은 사람을 선동하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가정이 무너졌고, 무작정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사회가 큰 혼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에 있었는데, ‘왜 이런 잘못된 믿음이 성행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을 찾아 ‘doomsday’라는 코너를 찾아 ‘종말의 날’과 관련된 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거의 절반 이상이 한국과 관련된 책들임을 발견하게 되었고, 한국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종말 사상이 퍼져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참 많은 이단이 있습니다. 이단이 주로 이용하는 신학적인 출발점은 ‘종말론’입니다. 세상에 곧 종말이 올 것이라는 예언으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사회의 혼란을 야기합니다. 잘못된 종말관을 형성시켜 교회와 사회를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바르게 정립되지 않은 종말 신앙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많은 문제를 양산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앙인에게는 바른 종말 신앙이 필요합니다. 바른 종말 사상을 통해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종말 사상은 어땠을까요? 오늘은 초대교회의 종말 사상을 살펴보며,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종말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종말’과 예수님의 ‘강림’ 사이의 구별과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언뜻 다른 말처럼 들리지만, 이 두 단어는 기독교 신앙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끝난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이르면,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세계의 종말’과 잇대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임박한 종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님의 강림을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당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관련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길 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예수님의 강림’이란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우선 1장 8절 이후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본이 되는 신앙의 모습이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 나갔다고 증언합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며 부러워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먼저는 사도들이 어떻게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는지를 전하고, 두 번째로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상을 버릴 수 있었는지를 증언합니다. 나아가 세 번째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를 조명하며, 그들의 종말 신앙을 드러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 (데살로니가전서 1:10 중)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종말 신앙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습니다. 이어 2~4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관련된 말씀이 등장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강림하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19, 새번역)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3:13 중)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데살로니가전서 4:16 중)

그밖에도 4장 15절, 5장 24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와 관련된 말씀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전서에는 ‘강림’에 관한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신앙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 신앙을 잘 전수받았는가?’ 사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 신앙은 ‘임박한 종말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천사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직접 본 그대로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만큼 강력한 종말 신앙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입니다.

< ‘우리의 죽음’과 ‘주님의 강림’은 맞닿아 있습니다. >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도 이천 년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종말 신앙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임박한 종말 사상 역시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어쩌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버린 분들도 꽤 있으실 것입니다. 종말 신앙 없이 현실에만 천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초대교회의 종말 신앙을 오늘 우리의 믿음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요? 강력한 힘을 가졌던 초대교회의 종말 신앙을 어떻게 전수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관련해 여러분께 한 가지 관점을 제공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강림을 기다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분명한 진리 하나를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나의 죽음’, ‘나의 종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죽음은 이미 가까이에 있습니다. 죽음은 이미 나에게 주어진 진리입니다. 내게 주어진 순간이 소멸하면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 시간이 100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50년도 남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10년도, 1년도 남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임한 임박한 종말입니다. 바로 이 개인의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서를 통해 말씀합니다. 4장 13절 이후에서 그는 ‘자는 자들’ 곧 ‘죽은 자들’에 관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모르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날에 죽은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후 1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새번역)

이것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임박한 강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죽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주님께 나아갈 것이며, 그다음에 살아 있는 자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연결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죽는 그 날,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죽음의 영원한 시간 속에서 예수님의 강림을 곧바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종말의 신앙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가 가졌던 건강한 종말 신앙을 오늘 우리도 충분히 전수받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떤 종말의 신앙을 가졌습니까? 당시 로마 문화가 번성했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신앙인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화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 나라를 대망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한 기쁨을 맛보기를 소망했습니다. 바로 그들 안에 건강한 종말 신앙, 임박한 재림 신앙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재림하십니다. >

초대교회의 능력 있는 종말 신앙의 중심에는 어떤 믿음이 내재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 새번역)

예수님이 강림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판하기 위해서입니까?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구원의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바른 종말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7 중)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런데 잘못된 종말론이 있습니다. 왜곡된 종말론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심판’에 집중하도록 유도합니다. 더 잘 믿어야 한다고, 아직 부족하다고 채찍질합니다. 모든 재물을 바쳐야 한다고, 모든 소유를 버리고 정결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외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더 많은 선행이 필요하다고 요구합니다. 밤새 기도하며, 금식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종말론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말의 신앙을 가진 게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앞으로 있을 위대한 일을 기대했습니다.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고대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고통에 빠진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사실 것이란 신앙을 가졌습니다. 바로 그 희망이 초대교회의 희망이자 종말의 신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종말은 심판이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도리어 구원으로 연결되는 문입니다. 우리가 병상에서 죽어가든지, 박해 중에 순교하든지, 전염병으로 죽어가든지, 가난한 모습으로 살다 죽든지, 부한 자의 모습으로 살다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구원’이며, 예수님의 강림은 ‘복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종말 신앙입니다.

<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사랑의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됩시다. >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8~9 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정신을 차려라. 이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깨어 있으라.”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종말의 신앙은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 세상 속에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안심하며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선물로 줍니다. 그래서 바울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1)

권면하는 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종말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견딜 수 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도 침착하게 덕을 세우며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3:12~13)

다시 오실 주님의 강림을 믿으며, 사도 바울은 사랑의 삶을 요청합니다. 임박한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구원이며 복음이기에, 우리는 담대히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림절의 신앙은 가난한 이들을 살피며 자선을 베푸는 것이자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코로나19 상황에서 대림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생입니다. 죽음은 이미 내 길에 서 있습니다. 죽음에 들어서는 그 날이 바로 주님의 강림을 경험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고 계십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를 살리기 위해 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2020년 11월 2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사는 법” (살전 5:1-11)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79장, 32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살전 5:1-11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1월 2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2020년 대림절의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강림을 생각하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기독교가 믿고 있는 중요한 신앙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예수님의 재림과 강림을 기다리는 ‘임박한 종말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2000년이 지난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종말 신앙이 잘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 타협을 하고 마치 평생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긴장감 없이 살아갑니다.  

 설교의 요약

    바울은 예수님의 강림(재림)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개인의 종말’(죽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전 4:13).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강림, 종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까이에 있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종말은 임박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러한 개인의 종말을 희망의 메시지로 바꾸어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복음이 번져나갈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가지 있었던 능력의 종말신앙은 바로 이 말씀에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살전 5:9).

    예수님이 강림(재림)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강림(재림)이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요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초대교회의 종말론은 기대로 가득 찬 기쁨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이 고통에서 건져 주실 것이다. 마침내 주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나를 일으키시고, 나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종말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종말의 신앙은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며, 안심하며 위로를 받으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견디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살전 5:11).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견딜 수 있습니다. 도리어 어떠한 환경에서도 선을 베풀며,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곧 오실 것을 믿기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기에 우리는 기쁨으로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임박한 종말, 주님의 재림,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며, 복음이기에 우리는 담대하게 피차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림절의 신앙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자선을 베푸는 것이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나누기

 1. 오늘 말씀을 듣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강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요? 

 2. 예수님의 재림이 믿는 우리에겐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 하셨는데, 그럼 구원을 얻은 ‘나’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시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마무리 기도

    은혜의 하나님, 주님의 강림을 생각하는 이 대림절에 나의 앞에 놓인 죽음을 다시 생각하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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