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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루는 제사

레위기 7: 11 ~ 18

김경진 목사

202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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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7: 11 ~ 18

11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12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14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

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

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오늘 우리는 구약의 제사 중 화목제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방에 일이 있어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머물러야 하는 일정이어서 호텔에서 잠을 자고 아침을 먹었습니다. 조식을 하려고 식당에 내려갔는데 사람들로 많이 붐볐습니다. 휴가 기간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아빠들이 참 많았죠. 식사를 하려는데 한 젊은 여인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애기 엄마였습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어찌나 얼굴이 힘들어 보이는지 제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살기 싫어하는 듯한 표정, 한숨 섞인 표정이 번갈아서 드러났습니다. 아이에게 밥을 줄 때만 방긋 웃고는 다시 어두운 얼굴로 바뀌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 분은 왜 저렇게 힘들어할까? 무슨 일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아빠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내려와서 식사를 같이 합니다. 자세히 보니까 아빠 얼굴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두 사람 얼굴에 그야말로 ‘전쟁 중’이라는 느낌이 묻어났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왜 전쟁 중일까 생각하며 인생이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 가정 안에서 일어나게 되고, 회사에서도 그렇고, 사회나 교회 할 것 없습니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분쟁 속에서 상처받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가정과 교회에, 우리 사회 속에, 나아가 전 세계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 주제를 가지고 특히 구약의 제사 중 화목제사와 관련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동안 여러 번에 걸쳐서 구약에 나타난 다섯 가지 제사를 말씀드렸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었죠. 하나도 생각나지 않으신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미 그 말씀이 여러분의 몸과 마음속에 배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다섯 번째 제사인 화목제사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평화라는 주제와 연결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화목제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사용된 제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표현을 익히 읽으시고 들으셨을 겁니다. 이처럼 성경은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평케 되었다고 끊임없이 증언합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이 말하는 화목제사의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는 제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히브리어로 ‘화목제사’라는 말은 ‘세라밈’(šə·lā·mîm, שְׁלָמִ֖ים)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샤람’(shalam, שָׁלַם)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데요. ‘샤람’이라는 단어는 ‘완전하게 된다’는 뜻을 가집니다. 또 좋은 상태, 쾌적한 상태가 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주 좋은 상태가 유지되기 위하여서 화목제사를 드린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화목제사는 굉장히 중요한 제사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을 읽어 가다 보면 화목제사가 정말 우월한 제사인지, 다른 제사와는 차별되는 높은 차원의 제사가 맞는지 의심을 갖게 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화목제사는 몇 가지 점에서 구약의 다른 제사와 크게 구별됩니다.>

우월하기보다는 열등한 제사가 아닐지 의심하게 만드는 첫 번째 요소는 바로 제물을 잡는 위치입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모두 성막 ‘안’에서 제물을 잡도록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장 11절입니다.

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레 1:11)

즉 일반적으로 제사를 드릴 때 제단 앞에서 제물을 잡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화목제물은 회막 ‘앞’에서 잡도록 합니다. 레위기 3장 말씀입니다.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레 3:8)

회막 안이 아니고 회막 ‘앞’입니다. 그러니까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회막 앞에서 화목제사를 위한 제물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출된 장소에서,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제물을 잡게 됩니다.
두 번째로 제물의 종류에 있어서도 화목제물은 다른 제사와 구별됩니다. 흥미롭게도 화목제사는 제물에 있어서 다른 제사보다 훨씬 더 다양한 종류를 열어 둡니다. 예를 들어서 번제의 경우에는 수소, 숫양, 숫염소로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만 효력이 발생하죠. 반면에 화목제사의 경우 드려지는 제물의 종류가 다양합니다. 수소뿐만 아니라 암소도 가능하고, 숫양이지만 암양도 가능합니다. 숫염소도 필요하지만 암염소도 가능하죠. 한마디로 번제에 사용되는 제물의 종류보다 훨씬 더 다양한 제물을 드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제가 제사를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면 화목제사를 드릴 때에는 조금 더 특별한 제물을 바치도록 했을 텐데, 예를 들어서 반드시 수소여야만 된다든가 하는 부분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다양한 제물을 열어 놓으시며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화목을 열어 가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제물로 바치도록 한 부위와, 제물을 드리고 남은 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구별됩니다. 번제단에 피를 뿌리고 일부의 부위를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여기에는 물론 남은 부위가 있겠죠. 그 부위 중에서 일부는 성문 밖으로 가져다가 태워 버립니다. 내장이라든가 머리 부분이라든가, 다리 부분, 똥과 같은 배설물이 그렇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경우에는 남겨진 부위를 성막 안에 머무는 제사장이 먹거나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번제는 다 태워서 바치도록 하죠. 가죽만 남길 뿐입니다. 그런데 화목제사는 조금 다릅니다. 남은 고기 부위를 제사장이 먹을 수 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물을 바친 그 사람도 일부를 가지고 가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가족이나 다른 사람도 먹을 수 있도록 열어 두셨습니다. 최고의 제사라고 한다면 아무도 먹지 못하게 하거나, 완전히 다 태워서 드리게 하는 방식이 그 가치를 높일 수 있을 듯 보입니다. 번제가 모든 것을 태우되 가죽만 남겨 두도록 했다면 화목제사는 가죽마저도 다 태워 버리게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화목제사를 최고의 제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레위기에서 제사와 관련된 내용을 읽다 보면 종종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표현이 모든 제사에서 사용되는구나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테고, 제물을 불에 태우며 나는 기름 냄새 때문에 이런 표현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다 보면 이 표현이 사용된 곳은 다섯 제사 중 세 개에 해당합니다. 번제, 소제, 그리고 화목제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경우에는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두 제사에는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이 없을까?’ 아마도 죄를 지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람,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직 유익한 존재는 되지 못합니다. 겨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을 뿐이지요. 그런 제사를 두고 하나님은 향기롭다고 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헌신하여 드리는 제사를 두고는 향기롭다고 하십니다. 감사하는 제사인 소제를 드리는 자에게 향기롭다 하시고, 하나님과 일치를 경험하며 평화를 누리기 원하는 자에게 향기롭다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종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단번에 화목케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화목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말씀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목제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때 하나님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셨겠습니까?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길 원하셨을까요? 이 부분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화목제사에 관해서 제물의 부위와 남은 부위를 처리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화목제사에서 드려지는 제물의 부위를 자세하게 살펴보십니다.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사의 경우 하나님께 바치는 부위는 기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헬레브(cheleb, חֶלֶב)라는 단어죠.

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레 3:14~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돌려져야 한다.” 여기 이 ‘헬레브’라는 단어는 크게 네 가지 부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장에 덮인 기름이고, 두 번째는 내장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입니다. 세 번째로는 두 콩팥과 허리 쪽에 있는 기름입니다. 네 번째는 간에 덮인 꺼풀입니다. 화목제사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들을 모두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제물이 송아지든지, 소든지, 양이든지, 염소든지 해당하는 부위의 기름을 찾아서 바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기름을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물론 기름 타는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속죄제, 속건제의 경우 기름을 태우도록 하셨지만 향기로운 냄새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50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시 50:9~13)

하나님께는 부족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께는 수소의 피, 수소의 살코기가 필요하지 않으시죠.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소를 잡으라고 명하시고, 암소를 잡으라고 말씀하시고, 이들의 모든 기름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이 부위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부위인가?’ 먹을 수야 있겠지만 건강에는 그리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이 부위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을까요? 기름 덩어리야말로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물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부위를 꼭 집어 지정하시면서 ‘이것을 내가 받고 싶다.’고 하십니다. 마치 이렇게요. “화목하게 되는 제물을 나에게 가져와라. 그중에서 너희가 먹어서는 안 될 것들만 가져와라. 내가 그것을 받으마. 내가 대신 받고 너희에게 복을 내려주마.”
그렇다면 남겨진 고기는 어떻게 사용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레위기 7장 30~33절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화제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그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며 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아론의 자손 중에서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는 그 오른쪽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니라 (레 7:30~33)

하나님께서 남겨진 고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당시 제사장 그룹인 아론의 자손들은 땅을 분깃으로 받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가꿀 만한 땅이 없었습니다. 스스로는 먹고 살 수가 없었죠. 그들에게 하나님은 가슴 부위를 흔들어서 요제를 행한 후에 제사장과 그 자손에게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들고 하나님께 바친 다음에 제사장에게 주라고도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땅이 없던 레위 사람들을 먹이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제사장은 분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생존이 불가능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남은 일부분을 나누라고 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들을 가난 속에서 앞날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어려운 이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들이죠. 그런 면에서 성도 중에서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화목제물의 남은 부위 전부를 정해진 기간에 먹게 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평화로운 이스라엘을 세워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더 파격적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레 7:15~18)

본문은 화목제사의 세 가지 형태를 소개합니다. 먼저는 ‘토다’(todah, תּוֹדָה)라는 감사의 화목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제사를 바치는 사람들이 나머지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반드시 그날에 다 먹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반면에 ‘서원제’(네데르, neder, נֶדֶר)혹은 ‘자원제’(네다바, nedabah, נְדָבָה)의 경우에는 하루 더 지난 이틀까지 먹을 수 있지만 삼일 째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알려 주십니다. 만일에 삼일 째 되는 날 먹게 되면 그 제물을 먹은 자에게 죄가 있게 된다고 말씀하시죠.
여러분, 소의 경우 대략 700~800kg 정도의 무게를 가진다고 합니다. 뼈, 내장 부분들을 제외하고 나면 살코기로 얻을 수 있는 무게는 300~400kg 정도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가슴살과 오른쪽 다리를 제사장의 가족에게 돌렸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양이 남았겠습니까? 과연 하루 안에 다 먹을 수 있었을까요? 이틀 안에는요? 성경은 남은 부위를 ‘나누라’고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나눌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화목제사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제사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제물을 먹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과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먹게 하신 하나님의 배려이자 뜻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많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아침 인사가 ‘밥 먹었니?’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고대 근동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잘 먹으며 살 수 있었겠습니까?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이 많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목제사를 통하여 그들에게 고기가 나누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제사의 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배려이자 섭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 화목제사의 규정을 다른 제사와 다르게 만드신 이유가 조금은 이해됩니다. 첫째로 화목제사의 제물은 회막문 ‘앞’에서 잡습니다. 다른 제사의 제물은 성막 안에서 비밀스럽게 잡지만 화목제사의 경우는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잡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어느 집에서 화목제사를 드리게 될지를 알게 되는 셈이죠. 둘째로 하나님은 다른 제사와 달리 수소와 암소, 숫양과 암양, 숫염소와 암염소 등으로 제물의 종류를 다양하게 하셨고 그 수량도 자율적으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제물이 부족해서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하신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빈번한 화목제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먹도록 하신 의도처럼 읽힙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기름만을 드시겠다고 하시며 제물의 일부 가슴살과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의 가족에게 돌리고 나머지는 하루, 혹은 이틀 동안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고 살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평화를 만드는 제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평화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도 여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입니다. 미국과 중국은 첨예한 대립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싸움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게 있고 잘못한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시야를 조금 더 넓혀서 바라보면 결국은 밥그릇 싸움입니다. 동물이 고기를 차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과 싸움을 하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듯 보입니다. 문명사회 속에서 그럴 듯한 모양새는 갖추고 있지만 먹고 싶은 고기, 차지하고 싶은 밥그릇을 두고 싸울 뿐입니다.
그러나 싸움이 지속되는 중에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평화를 만드는 제사를 알려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누군가 자발적으로 내어 놓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어 놓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평화를 만들어 냅니다. 내어 놓은 고기를 서로 나눌 수 있을 때에 그곳에 전쟁이 그치고 비로소 평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평화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케 되었고, 나아가 우리로 화목케 하는 직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주위의 어렵고 힘든 가난한 성도, 가난한 이웃을 어떻게 섬길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한 화목의 제사가 이어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바라십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8월 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평화를 이루는 제사” (레 7:11-18)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0장, 32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레 7:11-1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8월 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사막교부의 금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스케티스에 “이번 주는 금식하면서 부활절을 지내시오”라는 계명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한 수도사에게 외부의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수도사는 그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요리를 해서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다른 수도사들이 압바(스승)인 모세에게 알렸습니다. “저것 보세요 스승님! 저 자가 우리의 계명을 어기고 집에서 음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들은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수도사는 사람의 계명을 어겼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이루었네.”

 

설교의 요약

화목제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화목케 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좋은 관계를 이루는 제사가 바로 화목제사입니다. 최고의 제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화목제의 규례를 보면 다른 제사들에 비해 독특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제물을 잡는 방법이나 종류 그리고 제물을 드리고 남은 것을 처리하는 규정과 제물을 바치는 부위도 독특합니다. 화목제에서 하나님께 태워서 바쳐야 하는 제물은 내장을 덮거나 두른 기름입니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고 난 뒤 제물을 제사장과 바친 사람, 그리고 가족과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됩니다. 속죄제나 속건제에서도 기름을 태우지만, 이때는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화목제에서 기름을 태운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십니다.

고기의 내장을 두른 기름은 인간의 몸에 해로운 부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부위를 자신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시고, 남은 부위들 즉 고기를 사람들이 반드시 그 날에 모두 먹어 나누게 하십니다. 보통 소 한 마리가 대략 700kg 정도 하는데, 이중에 내장이나 뼈 등을 빼고 나면 고기는 거의 300-400kg 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몇 사람이 단 하루 만에 다 먹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결국 화목제에서 드려진 제물은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제사를 드리는 자나,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과 제사장들이나,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화목제의 규정이 독특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일단 화목제의 제물은 회막 문 앞에서 잡습니다. 다른 제물은 성막 안이지만, 화목제물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잡습니다. 둘째로 화목제물은 암수의 구분이나 수량의 제한도 없었습니다. 즉 빈번한 화목제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먹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기름만 받으시고 더 좋은 것들은 사람들이 나누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화목제, 즉 평화를 만드는 제사입니다.

 

나누기

1. 내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2. 나의 나눔을 통해 가정이나 이웃, 직장과 교회 등에서 화평을 이루게 된 사례를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모든 성도들이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것을 내어 놓을 때에만 참된 평화가 있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전쟁과 싸움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평화를 만드는 주님의 제자들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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