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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지기의 무화과나무

누가복음 13: 6 ~ 9

김경진 목사

2019.06.02

< 포도원지기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기다립니다. >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열매 얻기를 원했습니다. 첫해에도 열매가 없었고, 둘째 해에도 열매가 나지 않았습니다. 3년째가 되었으나 여전히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주인이 포도원지기를 불러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내가 3년 동안이나 무화과나무에서 실과를 구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으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인이여,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사이에 제가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는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전통적으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성부 하나님을, 포도원지기는 성자 예수님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 혹은 오늘 우리를 가리킵니다.
먼저 포도원 주인은 성부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공의의 법칙으로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며, 동시에 열매 없는 나무는 언제든 찍어 버릴 준비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성부 하나님, 바로 포도원 주인입니다.
한편 이 비유에서 가장 너그러운 사람은 포도원지기입니다. 3년간이나 아무 소출도 없이 땅만 허비하며 무용하게 서 있던 무화과나무, 이제는 마땅히 없어져도 될 것 같은 가치 없는 이 무화과나무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자비하고 인자한 포도원지기의 요청 덕분이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가 여러 가지 죄악과 실수를 함에도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바로 우리의 포도원지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부족함과 열매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우리를 여전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무화과나무는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며,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열매가 없어서 찍혀 버려질 위기에 처한 우리가 바로 무화과나무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

<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

이 물음에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 비유가 나오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에는 예수님의 긴 강론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여러 말씀을 전하셨는데, 이때 두어 명이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피를 섞어서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마 이 소식을 전하며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지요?’라는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불행이 그들의 죄가 많아서가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곤 뒤이어 이런 예를 더하셨습니다.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은 건,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 많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풀이될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아직 심판이 임하지 않은 건, 하나님이 참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계시기 때문이지 결코 너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내하시고 참고 계시는 까닭이다. 그러니 어서 회개하라.”
더불어 이 말씀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 뒤 이어지는 비유가 바로 오늘 본문인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바로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동시에 회개 없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까지 심판을 면하게 된 이유는,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그들의 심판이 미뤄지도록 중재하셨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도끼가 나무 아래 놓여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미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가 시간을 법니다. 나무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면서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다립니다. 즉 무화과나무가 찍혀 버려지지 않은 이유는, 포도원지기가 나무에게 또다시 기회를 허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또 한 번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오늘 본문을 전통적인 해석의 틀로 풀이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대부분 알고 계셨을 내용이며, 또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런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셨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회개의 열매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라는 사실을 알고 회개해야 함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어놓으셨습니다. >

이제 저는 오늘 본문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포도원 주인을 성부 하나님으로, 포도원지기를 성자 예수님으로, 무화과나무를 우리 혹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했다면, 이제는 그 틀을 조금 바꿔 보기를 원합니다. 포도원 주인인 성부 하나님은 그대로 두고, 포도원지기를 예수님에서 ‘우리’로 바꿔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화과나무는 우리 주변의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혹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본질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사람들, 가치 없어 보이는 사람들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비유에서 또 다른 의미와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어야 합니까? 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가 심겨야만 하는 것입니까? 먼저 이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사람은 분명 포도원 주인임에 틀림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사람이 하필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을까요?
물론 무화과나무는 좋은 나무입니다. 좋은 열매를 내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가 포도나무보다 귀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무화과나무는 길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고, 가꾸지 않아도 열매를 내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다릅니다. 정성껏 가꾸고 가지를 만져주며, 나무와 나무를 연결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어느 날 갑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주인의 권리입니다. 주인이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포도원에 포도나무만 있어야 관리도 잘 될 것이고, 문제도 없을 것이며, 신경 쓸 일도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 사이에 무화과나무가 심기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포도원은 포도원답지 못하게 될 테고, 그 나무가 포도나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없습니다. 포도원조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 해서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할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원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었으니, 자신은 할 말은 없습니다. 불평할 이유도 없습니다. 주인의 땅에 주인이 마음대로 그 나무를 심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훌쩍 여행을 떠나버렸습니다. 포도원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때때로 포도원을 돌아보았겠지만, 주인이 항상 그곳에서 일했던 건 아닙니다. 포도원을 지키며 포도나무와 함께 무화과나무를 돌보는 일은 포도원지기의 몫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 입장에서 포도를 기르는 건 전문가일 수 있지만, 무화과나무를 돌보는 건 전문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무화과나무를 돌보았겠지만 3년이 지나도록 그 나무가 열매를 내지 못합니다. 그때 주인이 포도원을 찾아왔고, 포도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어찌 땅만 버리겠냐며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말입니다.
주인은 참 편한 사람입니다. 심으랄 땐 언제고, 다시 뽑아버리라고 할 때는 언제입니까? 찍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릴 때는 또 언제입니까? 물론 주인의 권리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심을 수도 있고, 빼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권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지기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누가복음 13:8~9 중)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넓은 초원에 포도나무 농장이 있습니다. 그 농장은 포도나무로 번성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들이 아름답게 이어져 있고, 그 농장을 바라보면 마치 지평선을 보는 것처럼 평온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중간에 덩치도 크고 모양도 아름답지 않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가지만 무성하고 자리만 차지할 뿐입니다.
주인이 그 나무를 심지만 않았더라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요? 포도나무들로 가지런했을 것입니다. 멋진 포도 농장으로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 하나 때문에 보기에도 흉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하나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 나무를 심고 훌쩍 떠나버리면 그만이었지만, 포도원지기는 그 나무를 매일같이 보아야 했습니다. 매일매일 일어날 때마다 그 나무가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잘 펼쳐져 있는 포도나무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볼품없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 그 나무가 그의 눈에 들어올 때마다 그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골치 아팠을 것입니다. 매일같이 그 나무가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포도원지기의 현실입니다.

< 내 삶의 무화과나무는 누구입니까? >

이 비유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 봅니다. 내가 멋지게 가꾸고 있는 농장이 있습니다. 내 농장에는 내가 잘 알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무들이 정렬돼 있습니다. 그 나무들에서 열매도 가지런히 맺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답고 멋진 농장에 하나님이 하필 다른 나무 하나를 심어놓으셨습니다. 덩그러니 무화과나무를 심어놓으셨습니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무인데, 하나님이 그 나무를 심어놓으셨습니다.
게다가 수년간 열매도 맺히지 못하고,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 봐도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의 이 질서정연한 포도 농장에 무화과나무를 심어놓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모양도 좋지 않고, 효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화과나무가 큰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경제적인 것도 아닙니다. 한결같이 포도나무에만 신경을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무화과나무가 계속 거슬리고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그런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그 무화과나무는 무엇입니까? 열매 없는 나무, 가지런한 나의 농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나무,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나무, 여러분의 농장에 그 나무는 무엇입니까? 주인마저 “이제는 그만 찍어 버리자.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라고 말하는 그 나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혹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친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참 좋은 포도원인데, 저 사람만 없으면 참 좋은 포도원인데….’라고 생각되는 무화과나무 같은 사람이 혹시 주변에 있습니까? 내 직장에 혹시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저 사람만 없으면 직장 생활하기 참 좋을 텐데, 왜 하필 저 사람을 내 관계 안에 넣으셔서 나의 직장 생활이 이렇게 고달프고 힘들게 하셨을까?’라고 생각되는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사실 이 무화과나무는 내가 만든 무화과나무가 아닙니다. 내가 심은 나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농장에 하나님의 의지로 심어놓으신 나무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를 베어 버리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도 즉각 그 나무를 베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베고 싶었을까요? 저 같으면 그 말이 나오자마자 달려가 베었을 것입니다. 혹시 주인의 마음이 바뀔까 봐 빨리 베었을 것 같습니다. 매일 볼 때마다 ‘저 나무만 없었으면 멋진 농장인데, 왜 저 하나가 있어서 이 농장이 망가졌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견뎌왔을 테니, 주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베어 버리는 게 상책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지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를 베지 않습니다. 저는 그의 모습에서 참으로 위대한 사랑과 관용을 마주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누가복음 13:8~9 중, 새번역성경)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무에 어떤 결격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나무를 도리어 두둔했습니다. 그리곤 열매가 없는 건 나무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조금 더 거름을 주려 한다고, 노력해 보겠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곧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건 나의 잘못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거름을 더 주겠습니다. 조금 더 가꿔 보겠습니다. 1년만 더 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도 버리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정당성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찍어 버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포도원지기는 한 해만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포도원지기가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

무화과나무가 왜 포도원에 심겨야 했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인만이 그 용도를 알 뿐입니다. 주인만이 그 씀씀이를 알 것입니다. 또한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기 전까지, 그 나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분명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너그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이 말씀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석해 온 것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포도원지기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포도원지기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맞다면,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 무화과나무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열매를 맺었겠습니까? 아니면 찍혀 버려졌을까요? 어떻게 상상하십니까? 아무도 알 수 없는 결론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의 말씀에서 한 가지 단서를 발견합니다.
주인이 3년 동안이나 와서 열매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일반적으로 3~4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나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나름대로 생각해서 3년 동안 기다렸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늦은 나무라면 4년 혹은 5년째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합니다. 열매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다음 해, 이 무화과나무가 수많은 열매를 맺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 포도원지기의 성실한 돌봄과 사랑으로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포도원지기가 되어 보지 않겠냐고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그러하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포도원지기가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 또한 참고 인내하며,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고, 사랑을 나눠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 소망교회는 참으로 귀한 교회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주위 사람들, 또 그와 같은 교회들을 품에 안으며, 오늘도 주님 앞에 “제가 잘 돌보지 못해서입니다.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한 해만 더 주십시오.”라고 탄원하는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또 직장과 사회에서 오늘도 다시 한 번 내 곁에 심긴 무화과나무를 돌아보고 돌보는 귀한 섬김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리에 무화과나무 하나를 심겨주셨습니다.

The Caretaker’s Fig Tree

Luke 13:6-9

In today’s passage, a man plants a fig tree in his vineyard. He looks for fruit on it but finds none. He goes again and again, but there is no fruit for three years. Frustrated and angry, he calls the caretakerand orders the fig tree to be cut down. However, the caretaker implores, “Sir, 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and I’ll dig around it and fertilize it. If it bears fruit next year, fine! If not, then cut it down.”How should we interpret the message of this parable spoken by Jesus?
Conventionally, the owner of the vineyard represents God, the Father, the vineyard caretaker Jesus, and the barren fig tree the Israelites and us. Governing man’s history with justice, God is ready to cut down any tree that bears no fruit. The caretaker – the most merciful figure in this parable – represents Jesus. Ultimately, this parable is saying that despite our fruitlessness, weakness, and repeated sins we live only through the grace of Jesus Christ. It is our merciful Lord that gives us a second chance. The barren fig tree that God is prepared to cut down signifies the Israelite people and us.
From this perspective, thisscripture challenges us to bear much good fruit. How can this be done? The answer is found by looking at the context of today’s passage.
Before Jesus tells the parable of the fig tree, some people come to him with news that Pilate massacred some Galileans and mixed their blood with sacrifices. They were probably wondering why such a thing happened to the Galileans. Jesus replies,“Do you think that these Galileans were worse sinners than all the other Galileans because they suffered this way?” He goes on to add that the eighteen who died when the tower in Siloam fell on them were not more guilty than all the others living in Jerusalem. Jesus is emphasizing that the reason why we have not received judgement isonly because of God’s patience. Because God gave us another chance, we have not perished. Jesus concludes,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perish.”(Luke 13:5)
Then comes the parable of the fig tree. Accordingly, seen from this context, the parable can be understood to convey a message of repentance. Jesus is saying that the unrepentant Israelite people is the barren fig tree. The reason why such an unrepentant people has not perished yet is because of Jesus’delayed judgement. Even though the owner already ordered it to be cut down, the fig tree lives because of Jesus, the merciful caretaker, who waits and gives it a second chance.
Thus, Jesus is telling us to repent.He longs for us to repent. We must respond to this call of repentance. We must bear the fruit of repentance. This is the message of the conventional interpretation of today’s parable.
However, I propose we interpret this parable from a fresh and different perspective. Why don’t we think of ourselves as the caretaker? The vineyard owner would still be God, our Father, but the caretaker would be us. And the fruitless fig tree the people around us that seem useless, unrepentant, or have gone astray. From this perspective, we will be able to think about what we can do for the barren fig trees around us.
Let’s look at this passage in this new light. A man plants a fig tree in a vineyard. He is definitely the owner because, if he weren’t, how dare he plant a fig tree in a vineyard?
When studying this passage, I often wondered why this man planted a fig tree in the middle of a vineyard. Yes, a fig tree has value. But a grapevine has a greater one. A fig tree can be planted anywhere, even on the roadside, but a grapevine must be cultivated with great care.But what does the owner do? He plants fig tree. He can do this because, as the owner, he has the right to do whatever he wants.
But what about the caretaker? From the caretaker’s point of view, this is not welcome at all. Cultivating a fig tree among grapevines is not an easy job.Yet, he can’t oppose the owner’s decision. The owner visits the vineyard from time to time, but still it’shis job to grow the grapevines and the fig tree. While the caretaker is an expert on grapes, he may not be one on fig trees. He tries his best, but there is no fruit even after three years.
This is when the owner visits. Seeing the fruitless fig tree, he orders the caretaker to cut it down: “For three years now I’ve been coming to look for fruit on this fig tree and haven’t found any. Cut it down! Why should it use up the soil?” (Luke 13:7) Easy for him to say. But, of course, he has the right to plant or to cut down. But, not so, for the caretaker. Hehas a different stance: “Sir, 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and I’ll dig around it and fertilize it. If it bears fruit next year, fine! If not, then cut it down.” (Luke 13:8-9)
When I picture this scene in my heart, I see a vineyard in a vast, green plain full of beautiful, well-cultivated grapevines planted in rows that stretch all the way to the horizon. But in the middle of this perfect harmony, there is an unseemly fig tree, big and barren. How beautiful and harmoniousthis vineyard would have been without the fig tree? To the caretaker, the fig tree is a headache, a burden. But he has to live with it. That is the reality of this vineyard.
This is how I apply this scene to my life. I am taking care of my own vineyard. And in it there are trees that I know well and like and bear good fruit. But in the middle of such nice trees God has given me an ugly fig tree that I don’t know much about. It doesn’t even bear fruit. It seems worthless. Why has God given me this problem that doesn’t seem to go away?
So, let’s think of this fig tree as a problem that we wish would go away. What is this fig tree in your life? What is that fruitless tree in your life? What is that barren tree that even the vineyard owner wants to cut down?
It may be one of your family members or a friend. Or someone at church. You may be thinking, ‘How great our church would be if it weren’t for that one person, that fruitless fig tree…!’ What about at work? You might love everything about your workplace except for that one person. Is there someone at work who makes you think, ‘Why did God have to put that person here and torture me?’
Interestingly, however, the caretaker doesn’t cut down the fig tree immediately, even after the owner orders him to. How frustrated the caretaker must have been by that fig tree! Oh, how he wanted to get rid of it!It would relieve him of a big headache.
Yet, he doesn’t cut it down. He is full of love and mercy. He says, “Let’s give it another year. I’ll dig around it and fertilize, and maybe it will produce next year; if it doesn’t, then chop it down.” (Luke 13:8-9 MSG)He doesn’t blame the fig tree for not bearing fruit. He doesn’t say that it is the tree’s fault. He thinks that it is his fault: he didn’t fertilize it and give it enough care. So, he implores the owner to give him one more year to care for it. The owner has good reason to cut it down. He has given it enough time. However, the caretaker begs the owner to give him just one more year.
No one knows why a fig tree must be planted in the middle of a vineyard. Only the owner knows. Only he knows the plans he has for that fig tree. But the caretaker’s attitude is amazing. He says he will not give up on that fig tree until it bears fruit. This is exactly what Jesus has done toward us. He is forever patient, forever waiting.
If this is what Jesus has done to us, how should we, followers of Christ, live?
We don’t know if the fig tree eventually produced fruit or not, but I believe there is a clue as to what may have happened. The passage says the owner sought fruit for three years. Typically, fig trees are known to bear fruit in their third or fourth year. So, if this tree was a “late bloomer,” it may have produced fruit in its fourth year. At least, that is what I imagine. Also, I imagine it would have been impossible for it not tobear fruit with all the love and care from the faithful caretaker.
Dear Church,I want to challenge you to be that caretaker. I want to challenge you to love others as Jesus, our caretaker, loved us and as God patiently waited for us. I want to challenge you to wait just one more year for those people and problems around us that seem hopeless. Be that caretaker to themthat seem like fig trees that must be cut down. Dig around them and fertilize them. Have more patience. Give them more love and care.
Somang Church is a precious church. I hope that our church will be able toembrace the people and churches around us that seem like barren fig trees. I hope this will be our earnest prayer:“Father, it’s because I failed to take care of that fig tree. Give me more time to dig around it and fertilize it.” God will answer this plea of a faithful caret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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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 6 ~ 9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 포도원지기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기다립니다. >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열매 얻기를 원했습니다. 첫해에도 열매가 없었고, 둘째 해에도 열매가 나지 않았습니다. 3년째가 되었으나 여전히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주인이 포도원지기를 불러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내가 3년 동안이나 무화과나무에서 실과를 구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으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인이여,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사이에 제가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는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전통적으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성부 하나님을, 포도원지기는 성자 예수님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 혹은 오늘 우리를 가리킵니다.
먼저 포도원 주인은 성부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공의의 법칙으로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며, 동시에 열매 없는 나무는 언제든 찍어 버릴 준비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성부 하나님, 바로 포도원 주인입니다.
한편 이 비유에서 가장 너그러운 사람은 포도원지기입니다. 3년간이나 아무 소출도 없이 땅만 허비하며 무용하게 서 있던 무화과나무, 이제는 마땅히 없어져도 될 것 같은 가치 없는 이 무화과나무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자비하고 인자한 포도원지기의 요청 덕분이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가 여러 가지 죄악과 실수를 함에도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바로 우리의 포도원지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부족함과 열매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우리를 여전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무화과나무는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며,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열매가 없어서 찍혀 버려질 위기에 처한 우리가 바로 무화과나무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

<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

이 물음에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 비유가 나오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에는 예수님의 긴 강론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여러 말씀을 전하셨는데, 이때 두어 명이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피를 섞어서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마 이 소식을 전하며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지요?’라는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불행이 그들의 죄가 많아서가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곤 뒤이어 이런 예를 더하셨습니다.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은 건,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 많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풀이될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아직 심판이 임하지 않은 건, 하나님이 참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계시기 때문이지 결코 너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내하시고 참고 계시는 까닭이다. 그러니 어서 회개하라.”
더불어 이 말씀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 뒤 이어지는 비유가 바로 오늘 본문인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바로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동시에 회개 없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까지 심판을 면하게 된 이유는,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그들의 심판이 미뤄지도록 중재하셨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도끼가 나무 아래 놓여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미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가 시간을 법니다. 나무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면서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다립니다. 즉 무화과나무가 찍혀 버려지지 않은 이유는, 포도원지기가 나무에게 또다시 기회를 허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또 한 번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오늘 본문을 전통적인 해석의 틀로 풀이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대부분 알고 계셨을 내용이며, 또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런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셨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회개의 열매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라는 사실을 알고 회개해야 함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어놓으셨습니다. >

이제 저는 오늘 본문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포도원 주인을 성부 하나님으로, 포도원지기를 성자 예수님으로, 무화과나무를 우리 혹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했다면, 이제는 그 틀을 조금 바꿔 보기를 원합니다. 포도원 주인인 성부 하나님은 그대로 두고, 포도원지기를 예수님에서 ‘우리’로 바꿔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화과나무는 우리 주변의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혹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본질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사람들, 가치 없어 보이는 사람들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비유에서 또 다른 의미와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어야 합니까? 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가 심겨야만 하는 것입니까? 먼저 이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사람은 분명 포도원 주인임에 틀림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사람이 하필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을까요?
물론 무화과나무는 좋은 나무입니다. 좋은 열매를 내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가 포도나무보다 귀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무화과나무는 길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고, 가꾸지 않아도 열매를 내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다릅니다. 정성껏 가꾸고 가지를 만져주며, 나무와 나무를 연결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어느 날 갑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주인의 권리입니다. 주인이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포도원에 포도나무만 있어야 관리도 잘 될 것이고, 문제도 없을 것이며, 신경 쓸 일도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 사이에 무화과나무가 심기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포도원은 포도원답지 못하게 될 테고, 그 나무가 포도나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없습니다. 포도원조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 해서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할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원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었으니, 자신은 할 말은 없습니다. 불평할 이유도 없습니다. 주인의 땅에 주인이 마음대로 그 나무를 심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훌쩍 여행을 떠나버렸습니다. 포도원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때때로 포도원을 돌아보았겠지만, 주인이 항상 그곳에서 일했던 건 아닙니다. 포도원을 지키며 포도나무와 함께 무화과나무를 돌보는 일은 포도원지기의 몫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 입장에서 포도를 기르는 건 전문가일 수 있지만, 무화과나무를 돌보는 건 전문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무화과나무를 돌보았겠지만 3년이 지나도록 그 나무가 열매를 내지 못합니다. 그때 주인이 포도원을 찾아왔고, 포도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어찌 땅만 버리겠냐며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말입니다.
주인은 참 편한 사람입니다. 심으랄 땐 언제고, 다시 뽑아버리라고 할 때는 언제입니까? 찍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릴 때는 또 언제입니까? 물론 주인의 권리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심을 수도 있고, 빼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권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지기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누가복음 13:8~9 중)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넓은 초원에 포도나무 농장이 있습니다. 그 농장은 포도나무로 번성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들이 아름답게 이어져 있고, 그 농장을 바라보면 마치 지평선을 보는 것처럼 평온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중간에 덩치도 크고 모양도 아름답지 않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가지만 무성하고 자리만 차지할 뿐입니다.
주인이 그 나무를 심지만 않았더라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요? 포도나무들로 가지런했을 것입니다. 멋진 포도 농장으로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 하나 때문에 보기에도 흉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하나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 나무를 심고 훌쩍 떠나버리면 그만이었지만, 포도원지기는 그 나무를 매일같이 보아야 했습니다. 매일매일 일어날 때마다 그 나무가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잘 펼쳐져 있는 포도나무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볼품없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 그 나무가 그의 눈에 들어올 때마다 그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골치 아팠을 것입니다. 매일같이 그 나무가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포도원지기의 현실입니다.

< 내 삶의 무화과나무는 누구입니까? >

이 비유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 봅니다. 내가 멋지게 가꾸고 있는 농장이 있습니다. 내 농장에는 내가 잘 알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무들이 정렬돼 있습니다. 그 나무들에서 열매도 가지런히 맺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답고 멋진 농장에 하나님이 하필 다른 나무 하나를 심어놓으셨습니다. 덩그러니 무화과나무를 심어놓으셨습니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무인데, 하나님이 그 나무를 심어놓으셨습니다.
게다가 수년간 열매도 맺히지 못하고,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 봐도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의 이 질서정연한 포도 농장에 무화과나무를 심어놓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모양도 좋지 않고, 효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화과나무가 큰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경제적인 것도 아닙니다. 한결같이 포도나무에만 신경을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무화과나무가 계속 거슬리고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그런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그 무화과나무는 무엇입니까? 열매 없는 나무, 가지런한 나의 농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나무,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나무, 여러분의 농장에 그 나무는 무엇입니까? 주인마저 “이제는 그만 찍어 버리자.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라고 말하는 그 나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혹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친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참 좋은 포도원인데, 저 사람만 없으면 참 좋은 포도원인데….’라고 생각되는 무화과나무 같은 사람이 혹시 주변에 있습니까? 내 직장에 혹시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저 사람만 없으면 직장 생활하기 참 좋을 텐데, 왜 하필 저 사람을 내 관계 안에 넣으셔서 나의 직장 생활이 이렇게 고달프고 힘들게 하셨을까?’라고 생각되는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사실 이 무화과나무는 내가 만든 무화과나무가 아닙니다. 내가 심은 나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농장에 하나님의 의지로 심어놓으신 나무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를 베어 버리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도 즉각 그 나무를 베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베고 싶었을까요? 저 같으면 그 말이 나오자마자 달려가 베었을 것입니다. 혹시 주인의 마음이 바뀔까 봐 빨리 베었을 것 같습니다. 매일 볼 때마다 ‘저 나무만 없었으면 멋진 농장인데, 왜 저 하나가 있어서 이 농장이 망가졌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견뎌왔을 테니, 주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베어 버리는 게 상책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지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를 베지 않습니다. 저는 그의 모습에서 참으로 위대한 사랑과 관용을 마주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누가복음 13:8~9 중, 새번역성경)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무에 어떤 결격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나무를 도리어 두둔했습니다. 그리곤 열매가 없는 건 나무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조금 더 거름을 주려 한다고, 노력해 보겠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곧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건 나의 잘못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거름을 더 주겠습니다. 조금 더 가꿔 보겠습니다. 1년만 더 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도 버리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정당성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찍어 버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포도원지기는 한 해만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포도원지기가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

무화과나무가 왜 포도원에 심겨야 했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인만이 그 용도를 알 뿐입니다. 주인만이 그 씀씀이를 알 것입니다. 또한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기 전까지, 그 나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분명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너그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이 말씀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석해 온 것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포도원지기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포도원지기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맞다면,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 무화과나무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열매를 맺었겠습니까? 아니면 찍혀 버려졌을까요? 어떻게 상상하십니까? 아무도 알 수 없는 결론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의 말씀에서 한 가지 단서를 발견합니다.
주인이 3년 동안이나 와서 열매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일반적으로 3~4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나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나름대로 생각해서 3년 동안 기다렸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늦은 나무라면 4년 혹은 5년째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합니다. 열매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다음 해, 이 무화과나무가 수많은 열매를 맺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 포도원지기의 성실한 돌봄과 사랑으로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포도원지기가 되어 보지 않겠냐고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그러하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포도원지기가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 또한 참고 인내하며,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고, 사랑을 나눠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 소망교회는 참으로 귀한 교회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주위 사람들, 또 그와 같은 교회들을 품에 안으며, 오늘도 주님 앞에 “제가 잘 돌보지 못해서입니다.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한 해만 더 주십시오.”라고 탄원하는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또 직장과 사회에서 오늘도 다시 한 번 내 곁에 심긴 무화과나무를 돌아보고 돌보는 귀한 섬김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리에 무화과나무 하나를 심겨주셨습니다.

2019년 6월 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포도원지기의 무화과나무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87장, 33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눅13:6-9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해도 열매를 얻지 못하자 화가 난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포도원 지기는 주인에게 “무화과나무를 한 해만 더 두시라”고 한 번 더 간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설교의 요약

전통적으로 포도원 주인은 성부 하나님, 포도원 지기는 예수님, 그리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 혹은 우리들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이스라엘을 예수님을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회개가 없는 무화과나무인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까지 심판을 받지 않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심판을 미루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며, 주님의 기다리심과 부르심에 부응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조금 더 다른 관점에서 본문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성부 하나님, 포도원 지기를 바로 우리들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우리 주위에 있는 쓸모없는 사람들 혹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본질에서 벗어나 변질 된 사람들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 열매가 없는 다른 무화과나무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 지기에게 “이젠 그만 찍어 버려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에게 열매가 없는 그 나무는 무엇입니까? 가족이나 친구들 혹은 교회 성도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베어 버린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 같은데, 포도원 지기는 그렇게 행동하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좀 더 거름을 주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눅13:8-9). 한 해만 더 그 나무를 위해 수고할 시간을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위해 기다리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모습일진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포도원 지기가 되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향하여 그렇게 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오래 참으셨듯이,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찍어 버려도 될 것 같은 존재들 그리고 일들에 대하여서 한 해를 더 참으면서 더 돌아보고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며 사랑을 나누어 주는 과원지기가 되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나누기

1. 나는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어느 정도 기다려줄 수 있습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내 주변에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같은 인생이 있습니까? 그들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도록 나는 어떻게 돕고 있습니까?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주위의 사람들, 교회들을 품에 안고 그들의 열매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오늘도 주님 앞에 “제가 잘 돌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줄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탄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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