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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이사야 5:18~23

김경진 목사

2026.03.22

<공의와 정의가 아닌 들포도를 맺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경책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사야 5장의 말씀은 ‘포도원의 노래’라는 슬픈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포도원을 잘 가꾸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은 한 농부. 그러나 그 농부가 거두어야 했던 열매는 안타깝게도 최고의 포도가 아닌 들포도였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사 5:1~2)

 

그리고 이야기는 이러한 해설로 마무리됩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 5:7)

 

하나님이 유대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바라신 것은 극상품의 포도, 즉 공의와 정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어놓은 열매는 들포도 같은 포학과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 표현에서 히브리어의 언어유희가 흥미롭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신 극상품의 포도는 미쉬파트(מִשְׁפָט[mishpat], 정의)였지만, 이스라엘이 맺은 들 포도는 미스파스(מִשְׂפָח[mispach], 포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체다카(צְדָקָה[tsdaqah], 공의)였지만 유다가 맺은 들포도는 체아카(צַעֲקָה[tsa`aqah], 부르짖음)입니다. 발음상으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열매가 맺혔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그 포악과 부르짖음으로 표현되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맺은 들포도의 구체적인 사례들입니다. 그 사례가 여섯 가지로 나열됩니다. 그 항목마다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이 함께 나타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허다한 가옥들과 포도원들에 황폐함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여섯 가지 “화 있을진저” 중 첫 번째를 살펴봅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8)

 

이 모습은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의 집과 전토를 빼앗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가는 모습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잇는다는 표현은 이웃의 집을 사들여 대저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땅도 그렇습니다. 전토에 전토를 더하며 주변의 모든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어 갑니다. 타인이 들어설 자리를 아예 없애 버리는 철저한 독점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사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큰 집과 더 많은 땅을 소유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책망하실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8b)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악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것을 빼앗고 경계를 넘어서며, 자신만을 위한 경계를 다시 만드는 사람들을 향한 경책의 말씀입니다. 그 과정에서 포악과 폭력이 일어납니다. 그것 때문에 어디에선가는 부르짖음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이 땅에서 이어지며, 오늘도 국가 간의 전쟁과 강대국들의 횡포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업 간, 개인 간에도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려 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는 단순히 부자가 되는 것을 비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존권을 위협하면서까지 나의 성벽, 나만의 울타리를 높이 쌓으려는 행위를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어떤 심판을 내리실까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사 5:9~10)

 

아름답고 더 큰 가옥을 만들었을지라도, 그것이 파괴되고 사람이 사라지는 비극이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자신만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이러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계량으로 말한다면, 대략 10에이커 정도의 땅, 12,000여 평의 땅에서 나오는 포도주의 양이 22리터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5리터 생수병으로 15평 정도의 양입니다. 12,000여 평의 포도원에서 이 정도 양만 생산된다면, 과연 제대로 된 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산을 내지 못하는 효용성이 없는 땅을 크게 넓히는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한 들어갈 사람이 없는데 큰 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무분별하게 취해 있는 자들에게 죽음이 입을 벌리고, 오만함으로 스스로 죄를 끌고 다니는 자들에게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두 번째 “화 있을진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사 5:11~12)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각의 즐거움에 중독된 영혼들입니다. 아침부터 독주를 찾고 밤늦게까지 연회에 빠져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술의 즐거움은 알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길의 즐거움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 감각이 아예 없기도 합니다. 육체의 감각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영혼의 감각은 사라져서 무디어 있습니다. 그것이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땅에만 꽂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만이 모든 것입니다. 육체의 즐거움을 채우느라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말라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스올이 욕심을 크게 내어 한량 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거기에 빠질 것이라 (사 5:14)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쾌락의 음료를 들이마시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스올이 와서 그들을 삼킬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스올은 음부의 세력, 죽음의 세력을 말합니다. 죽음이 입을 벌리고 그들을 삼킬 때, 이 세상이 모든 것인 줄 알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들의 호화로움과 떠드는 소리는 모두 스올에게 잠식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다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세 번째 경책의 말씀입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사 5:18)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거짓으로 끈을 만들어 악을 잡아당기며, 수레의 줄을 당기듯이 죄를 끌어당기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사 5:18, 새번역)

 

이 내용을 조금 더 실감 나게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짓말을 끈 삼아서 죄를 끌어당기고, 결국 수레 밧줄 같은 중죄에 꽁꽁 묶어 끌고 다니는 자여, 화 있을진저”

 

“그들이 죄를 끌어당긴다”라는 말은 그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끌어당긴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끌어당기는 죄는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거짓말은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이 이러합니다.

 

기껏 한다는 말이 “하나님더러 서두르시라고 하여라.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빨리 하시라고 하여라. 그래야 우리가 볼 게 아니냐. 계획을 빨리 이루시라고 하여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세우신 계획이 빨리 이루어져야 우리가 그것을 알 게 아니냐!” 하는구나. (사 5:19, 새번역)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그럼 서두르시라고 해라! 그 계획이 진짜라면, 내 눈앞에서 보이게 해 봐라! 그리해야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할 것 아니냐?” 그들은 불신앙의 말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말로 죄를 끌어당깁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능동적으로 그 거짓을 말합니다. 왜 그들이 하는 말이 거짓이라고 성경은 말씀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정녕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시며, 알고 계시며,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그들의 말은 거짓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비웃는 냉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앞선 시대의 유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보다는 통계와 과학, 자본의 힘을 더 신뢰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보기에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조롱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질주하는 오만의 끝은 낭떠러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절대적인 가치를 왜곡하는 이들과 지적 교만에 찬 사람들에게 비참함이 있을 것입니다.>

 

네 번째로 가장 무서운 죄가 나타납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20)

 

이 말씀은 기준이 사라진 시대, 바르고 옳은 것을 구분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들의 생각 구조 안에 올바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기에게 이로운 것이 곧 옳은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아전인수, 내로남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들어맞으면 진리로 보고, 손해가 되면 거짓으로 보는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적인 가치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알려 주시고 살길을 열어 주셨는데도, 그 빛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소견대로 판단하는 것을 최고의 지성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공의와 정의는 이미 사라져 있습니다. 때로는 포악이 의가 되고, 폭력이 도리어 정의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사 5:20, 공동번역 개정판)

 

하나님께서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시는데도,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화 있을진저.”

하나님의 다섯 번째 경책의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21)

 

지혜와 명철이 왜 죄가 됩니까? 이 구절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단어는 ‘스스로’입니다. 이 말은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절대적인 기준의 가치로 평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과 경험을 더 신뢰합니다. 타인의 조언이나 훈계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적인 교만은 앞선 20절의 가치 전도의 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확신에 찬 교만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명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도리어 칭찬합니다. 독립적이고 뚜렷한 가치관과 소신 있는 모습을 추켜세웁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식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길 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 안에도 확증 편향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어떤 생각에 고정되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그 생각이 더 우선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스스로 지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생각 안에 갇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 3:17)

 

그들은 “나는 다 가졌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나는 다 알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한다.” 지적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 자신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자신의 역량을 불의한 일에 쏟는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22)

 

이미 포도주를 마시는 내용이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왜 다시 나올까요? 자세히 살펴보면 중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표현은 포도주가 아니라 ‘용감’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용맹’이라는 단어는 기보르(ּגִּבּוֹר[gibbowr])입니다. ‘힘이 있다’, ‘건강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주로 전쟁에서 ‘영웅’, ‘용맹한 전사’를 일컫는 의미입니다.

이 용맹함은 원래 어디에서 사용되어야 할까요? 전쟁에서 민족과 가족들을 돌보고 구하기 위해 칼과 창을 든 이의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될 것입니다. 이것이 멋진 영웅들의 용맹스러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웅적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전쟁에서 용맹함을 떨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마시는 데 용맹을 떨치는 사람입니다. 과연 이것이 용감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독주를 빚는 자들도 그렇습니다. 독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는 자’라는 표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빚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하일(חַיִל[chayil])은 ‘능력’, ‘실력’ 또는 ‘역량’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독주를 잘 빚는 사람이라는 말은 독주를 잘 빚어내는 능력을 가진 전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능력을 가진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독주를 만드는 능력이라면 어떡하겠습니까? 독주를 만들어 내는 전문가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용맹함을 술을 먹는 데 사용하는 사람, 재능과 전문성을 독주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사람은 “화가 있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 만한 일이 될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사 5:22~23)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이라는 말씀 뒤에 그들의 삶의 모습이 표현됩니다. 이들은 용맹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뇌물을 받는 데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죄를 저지르는 데 용사 같은 용맹함을 사용합니다. 전쟁에 나가서 용맹함을 떨쳐야 하는데, 술을 마시는 데 용맹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뇌물을 받는 데 용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용맹함,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재능도 그러합니다. 전문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은 매우 귀하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교한 기술로 위조지폐를 만드는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말하듯이, 자신의 재능으로 독한 술을 만드는 사람은 당연히 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재능을 정말 악한 곳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악인을 의롭게 만들고 의인을 악인으로 만드는 데 전문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의인에게서 공을 빼앗고 도리어 의인을 악인으로 몰아가는 데 능숙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뇌물을 받고 공의를 굽게 만드는 사람, 악인을 의롭게 포장해 주는 사람, 강자의 손을 잡고 힘없는 이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며,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데 기술과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 이들의 모습에는 가옥에 가옥을 잇고 전토에 전토를 더해 가는 부자들의 모습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펼쳐진 심판의 손에는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화를 자초하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사 5:25)

 

시체가 거리에 뒹굴고 그것이 분토처럼 여겨질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짓는 죄악 때문에 내가 진노하며 너희를 분토처럼 만들어 버릴 것이다. 시체들이 뒹구는 참혹한 재앙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되더라도 나의 노가 풀리지 않을 것이며 나의 저주의 손, 심판의 손은 계속 열려 있어 너희를 끊임없이 심판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여섯 가지 죄악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칠 것이다. 너희는 저주와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조금 전에 읽은 이사야서 5장 25절의 말씀입니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사 5:25b)

 

이 말씀은 확정된 심판처럼 더욱 강렬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사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후렴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9장 12절, 17절, 21절, 그리고 10장 4절에서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진노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라는 참혹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들어 있을까요? 얼마 전 새벽 기도회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절대로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아파트가 없던 시절의 집에는 대부분 대문이 있었습니다. 종종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돌아오면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다시 잘못하면 내가 너를 쫓아낼 것이다.” 아이가 또 잘못하면, “내가 너를 내 자식으로 안 여기겠다. 또다시 잘못하면 내가 너를 대문 밖으로 내던져 절대로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 그때는 절대로 집에 들어올 수 없을 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아이는 다시 잘못을 합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말 안 듣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 문밖으로 내동댕이칩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이렇게 외쳐지고 문이 닫힙니다.

여러분, 문을 닫으면서 절대로 열어 주지 않겠다고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제 완전히 끝났으니 포기하고 네 갈 길을 가라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앞에서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어머니는 문 앞에서 아이의 말을 듣기 위해 더 가까이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사 5:25b)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말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매를 맞을 때, “화 있을진저”라는 책망의 말씀을 들을 때가 바로 주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이미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이 혹독한 책망의 다른 표현은 “속히 돌아오라. 빨리 돌아와라. 제발 돌아오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의 말씀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Woe to Those

 

Isaiah 5:18–23

 

The passage from Isaiah chapter 5 we read today begins with a sad story called “The Song of the Vineyard.” A farmer had carefully tended a vineyard and planted the choicest vines, yet the fruit he reaped was, regrettably, wild grapes rather than the finest produce:

 

“I will sing for the one I love a song about his vineyard: My loved one had a vineyard on a fertile hillside. He dug it up and cleared it of stones and planted it with the choicest vines. He built a watchtower in it and cut out a winepress as well. Then he looked for a crop of good grapes, but it yielded only bad fruit.” (Isaiah 5:1–2 NIV)

 

The story closes with the following interpretation:

 

“The vineyard of the Lord Almighty is the nation of Israel, and the people of Judah are the vines he delighted in. And he looked for justice, but saw bloodshed; for righteousness, but heard cries of distress.” (Isaiah 5:7 NIV)

 

The Bible says that God chose Judah and Israel expecting the choicest fruit — justice and righteousness — but the fruit they produced was like wild grapes: bloodshed and cries of distress.

 

In this expression an interesting Hebrew wordplay appears.

 

God desired the choicest fruit “justice (מִשְׁפָט, mishpat),” but Israel produced “violence (מִשְׂפָח, mispach)”; while God desired “righteousness (צְדָקָה, tsedaqah),” Judah produced “cries (צַעֲקָה, tsa‛aqah).” You can see that the contrasted Hebrew words have similar sounds, but the fruits are completely different.

 

What follows are concrete examples of the bad fruits (or wild grapes) produced by Israel and Judah described as “bloodshed” and “cries of distress.” They appear in largely six items, each introduced by the phrase “Woe to those/you.”

 

As we observe Lent today, I want to consider through today’s passage what grieves God. Let us reflect on the six areas that God laments and for which He rebukes us.

 

Verse 8 is the first example and begins like this:

 

“Woe to you who add house to house and join field to field till no space is left and you live alone in the land.” (Isaiah 5:8 NIV)

 

This image depicts the powerful of that time taking the homes and fields of the poor and making them their own. The expression “add house to house” means buying up neighbors’ homes, tearing down dividing fences, and building a great mansion for oneself. The surrounding fields are likewise acquired. This shows how the powerful of that time made all the land around them theirs, leaving no space for others to live in and creating a complete monopoly.

 

God harshly rebukes such people: “Woe to you.”

 

What is wrong with living a prosperous life? Is it really wrong to work hard, buy a big house, and own more land? Why does God rebuke this?

 

God says, “Woe to you who […] live alone in the land.” (Isaiah 5:8) He speaks of extreme selfishness that thinks only of oneself. He condemns taking others’ possessions by evil means, overstepping boundaries and erasing borders. Such violence and evil produce cries of distress and lamentation elsewhere.

 

This pattern continues in our world today. Powerful nations violate other countries’ borders and wage war for national interest and hegemony.

 

This happens not only between nations, but also in the corporate world, in organizations, and within families and individuals. People think only of their own prosperity and wellbeing, not caring what becomes of others. Countries pursue their own prosperity, regardless of other nations. Companies believe they should monopolize the market, regardless of what happens to other firms and their employees.

 

Isaiah’s warning is not a blanket condemnation of becoming rich but a rebuke of building walls and fences for oneself at the cost of others’ right to survival.

 

It seems our world today, where countless missiles fly over skies and countless people live in fear of death, is full of that bloodshed and cries of distress.

 

What judgment will God bring on such sins?

 

“The Lord Almighty has declared in my hearing: ‘Surely the great houses will become desolate, the fine mansions left without occupants. A ten-acre vineyard will produce only a bath of wine; a homer of seed will yield only an ephah of grain.’” (Isaiah 5:9–10 NIV)

 

God depicts a tragedy, saying beautiful houses will become desolate with no one left to live in them. Isn’t that what is happening in today’s wars? Mansions and well-built structures are being destroyed. Even if a house remains standing, there is no one left to live there.

 

This is the end of extreme selfishness — living only for oneself. From ten acres of vineyard you will get barely one bath of wine.

 

If one acre is the daily plowing capacity of two oxen, then ten acres is a plot of land that two oxen would have to plow for ten days. The Bible is saying that this ten-acre land (about 12,000 pyeong) will produce only one bath — about 22 liters, roughly fifteen 1.5-liter bottles of water. From such a vast land, that is an extremely small yield.

 

What will you do with such a large land? What use is it if it yields nothing? What’s the point of owning a big house? What use is it if no one lives in it?

 

God warns us that such extreme selfishness will not escape judgment. “Woe to those.”

 

The second “woe” is directed at the following:

 

“Woe to those who rise early in the morning to run after their drinks, who stay up late at night till they are inflamed with wine. They have harps and lyres at their banquets, pipes and timbrels and wine, but they have no regard for the deeds of the Lord, no respect for the work of his hands.” (Isaiah 5:11–12 NIV)

 

These are people living in hedonistic indulgence, souls addicted to sensual pleasure. They seek strong drink from morning and revel late into the night, yet their hearts have no concern for what the Lord is doing.

 

They know the pleasures of alcohol but do not know the joy of following God. They react sensitively to bodily sensations but their spiritual senses are dulled.

 

Their interest is only in this world. All they are interested in is the pleasures they can enjoy here. Their only care is worldly delight and sensual satisfaction. So busy quenching their bodily thirst, they fail to see what God is doing in our age and how parched their souls have become.

 

God warns such people: Is this world all there is? No! You are truly ignorant!

 

“Therefore Death expands its jaws, opening wide its mouth; into it will descend their nobles and masses with all their brawlers and revelers.” (Isaiah 5:14 NIV)

 

God says Death will come and swallow up those who lived for worldly pleasures. When the gates of hell open and swallow them, what will happen?

 

The Bible says their pomp and noisy revelry will be swallowed up by Death.

 

The third rebuke is this:

 

“Woe to those who draw sin along with cords of deceit, and wickedness as with cart ropes,” (Isaiah 5:18 NIV). This NIV translation may be a bit difficult to understand.

 

The New Living Translation translates it as follows:

 

“What sorrow for those who drag their sins behind them with ropes made of lies, who drag wickedness behind them like a cart!” (Isaiah 5:18 NLT)

 

Let me paraphrase this in a more vivid way: “Woe to you who use mere lies as a rope to haul in sin, binding yourselves with the heavy cord of grave sins as one would bind a cart!”

 

What are the lies by which they drag in sin? The following verse makes it clear:

 

“They even mock God and say, ‘Hurry up and do something! We want to see what you can do. Let the Holy One of Israel carry out his plan, for we want to know what it is.’” (Isaiah 5:19 NLT)

 

They are saying, “God will judge? Then let Him hurry up and show it! If His plan is real, make it visible to my eyes — then I’ll acknowledge it!” Those who draw sin along with cords of deceit challenge and test God with unbelieving words.

 

Why are such words lies? Because God indeed lives, knows, and sees.

 

There are cynics who mock God. There are those who treat God as an antiquated relic. Some trust in the power of statistics, science, or capital more than the value of Scripture. Others, who call themselves Christians, consider compromise wisdom, thinking living by Scripture is a loss. But mocking God’s work and charging forward in pride leads only to a cliff’s edge.

 

The fourth item God reproves is the most terrifying sin:

 

“Woe to those who call evil good and good evil, who put darkness for light and light for darkness, who put bitter for sweet and sweet for bitter.” (Isaiah 5:20 NIV)

 

An age without standards — an era where people cannot distinguish right from wrong — is being described. In their framework of thinking, righteousness does not exist. They live in a world where the self is central and whatever benefits oneself is deemed right.

 

Such people live with a self-serving, interpretive bias, thinking, “If I do it, it’s romance; if someone else does it, it’s adultery.” They have distorted values, believing whatever suits their interest becomes truth and whatever damages them is false.

 

They refuse the light of absolute truth and act and judge according to their own opinions and what they think is right. To such people God warns, “Woe to you.”

 

This is precisely the wild grapes that God did not want. Justice and righteousness have long disappeared. Evil is dressed up as virtue; violence passes itself off as justice. Therefore the Lord says:

 

“What sorrow for those who say that evil is good and good is evil, that dark is light and light is dark, that bitter is sweet and sweet is bitter.” (Isaiah 5:20 NLT)

 

The fifth rebuke is this:

 

“Woe 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clever in their own sight.” (Isaiah 5:21 NIV)

 

How can being wise be a sin? Why would cleverness be a problem? Why does God rebuke such people?

 

The key word here is “in their own eyes/sight.” “To be wise/clever in one’s own eyes/sight” is to rely on oneself as the ultimate standard, apart from God who is the source of wisdom. Such people make themselves the criteria of good and evil. They trust their own judgment and experience more than God’s word. Advice or reproof from others is useless to them. They live convinced that their view is right.

 

This intellectual pride is directly tied to the moral inversion of verse 20. Those who call evil good and good evil do so from arrogant self-certainty.

 

Naturally, they fail to acknowledge God, exalt their own wisdom and knowledge, and judge everything by their own standards.

 

Modern culture often praises such people as independent, principled, and confident. But knowledge that ignores God is only self-declared wisdom.

 

Today we also see confirmation bias in society. There are people fixed on an ideology or a view. They see only what they want to see and believe only what they want to believe, convinced of their own wisdom. They can sometimes become trapped within themselves.

 

How does God regard those who do not see Him, who do not know Him, yet presume to know everything? How grieved He must be!

 

The Lord’s word to the church in Laodicea is this:

 

“You say, ‘I am rich; I have acquired wealth and do not need a thing.’ But you do not realize that you are wretched, pitiful, poor, blind and naked.” (Revelation 3:17 NIV)

 

These are people filled with intellectual pride, who live thinking they lack nothing and are never wrong. Yet they do not see that they are blind and naked. God says to such people, “Woe to you!”

 

Now the final rebuke from God:

 

“Woe to those who are heroes at drinking wine and champions at mixing drinks,” (Isaiah 5:22 NIV)

 

Drinking wine was already mentioned earlier, so why restate it? Is it mere repetition? On a closer look, we will find it is not.

 

The key word here is “heroes (gibbor, גִּבּוֹר)”—a word for might, often used for warriors or heroes in battle.

 

Where are such heroes needed? They are needed at war, for wielding sword and spear. But these people “are heroes at” drinking wine not fighting in battles. Is that true bravery?

 

This also goes for the expression “champions at mixing drinks.” It emphasizes not the drink but the makers. “Chayil (חַיִל),” translated as “champions at mixing drinks,” denotes ability, skill, or competence.

 

So “champions in mixing drinks” refers to people who are competent in producing strong drinks. To have competence is an amazing thing. But these people are using that skill to make deadly drinks.

 

Wouldn’t it mean something like this? Imagine someone with excellent craftsmanship who uses it to print counterfeit money. He would be using his great talent for crime.

 

This goes for the drinks mentioned in Isaiah 5:22. These people use their talents and competence to make strong liquor.

 

They use their bravery for drinking and use their skills and competence for making strong drinks. God pronounces woe on them. Why? Why do such acts anger God?

 

“Woe to those who are heroes at drinking wine and champions at mixing drinks, who acquit the guilty for a bribe, but deny justice to the innocent.” (Isaiah 5:22–23 NIV)

 

Where do they use their bravery? They use it to take bribes. They behave like brave warriors in committing sin.

 

Courage is something to be shown in battlefields, but these people show it when they are drinking and taking bribes.

 

This goes for talent too. People with talent or a professional skill are highly valuable and precious.

 

But just as the man who uses his skill to make counterfeit money is an evil man, the one who makes drinks with his talent is a wicked man too. Yet there are those who use their talents for evil purposes. They use their talents to make the wicked appear righteous. They rob the righteous of justice and use their skills to make the righteous look wicked.

 

God says to such people, “Woe to you!” They take bribes and distort justice; they make the wicked appear good. Siding with the powerful, they make the powerless shed tears and use the talents and skills to frame good people as wicked. Woe to them!

 

Now God speaks to them:

 

“Therefore the Lord’s anger burns against his people; his hand is raised and he strikes them down. The mountains shake, and the dead bodies are like refuse in the streets. Yet for all this, his anger is not turned away, his hand is still upraised.” (Isaiah 5:25 NIV)

 

God’s judgment will come. It will come to those who fence land for greed, who live only to save themselves and destroy others, who are addicted to sensual pleasures and revel only in this world, indifferent to God and the afterlife.

 

Judgement will come against those who mock God in pride, who call evil good and good evil, who worship the idol of self; against those who use valor to take bribes and use skill and craft to harm and sin. Woe to them! God’s wrath will be poured out. He says he will lift his hand and strike them.

 

God says their corpses will lie in the streets and become like dung; yet His anger will not turn back, and His hand remains stretched out.

 

His anger will never stop, and His wrath and judgement will not cease.

 

What does this mean? Does it mean they can never be forgiven by God? In fact, these words appear repeatedly in Isaiah (9:12, 9:17, 9:21, 10:4). As I have said before, these words reflect God’s yearning and desperate heart. They contain His plea: do not live this way.

 

In the past, most houses had gates. When a child returned home after doing something wrong, his mother would say, “If you do this again, I’ll kick you out and never let you in!” What happened when the child did something wrong again? The mother would take him to the gate and shut him out. Then what must the child do? Should he just give up since his mother told him she would never open the door? No. He must beg for her forgiveness. This is what his mother would be waiting for too. She would often be standing right behind the gate, ready to open it for him upon his return. Although the boy cannot see her because of the gate, she is actually right there, close to him.

 

“Yet for all this, his anger is not turned away, his hand is still upraised.” These words, therefore, are words of hope. They are God’s desperate invitation, urging His people to repent.

 

Let us return to the Lord. The time for receiving lashes is the time to return. When we hear the rebuke “Woe to you,” it is the time to come back to the Lord. God is already prepared to forgive us. This is the very message God desired to convey to Judah and Israel through Isaiah, and it is the very message that the Lord is urgently sending us today.

 

“Woe to those” — this harsh rebuke is another way of saying, “Return quickly.” May we respond to the Lord’s loving 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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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18~23

18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19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공의와 정의가 아닌 들포도를 맺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경책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사야 5장의 말씀은 ‘포도원의 노래’라는 슬픈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포도원을 잘 가꾸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은 한 농부. 그러나 그 농부가 거두어야 했던 열매는 안타깝게도 최고의 포도가 아닌 들포도였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사 5:1~2)

 

그리고 이야기는 이러한 해설로 마무리됩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 5:7)

 

하나님이 유대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바라신 것은 극상품의 포도, 즉 공의와 정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어놓은 열매는 들포도 같은 포학과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 표현에서 히브리어의 언어유희가 흥미롭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신 극상품의 포도는 미쉬파트(מִשְׁפָט[mishpat], 정의)였지만, 이스라엘이 맺은 들 포도는 미스파스(מִשְׂפָח[mispach], 포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체다카(צְדָקָה[tsdaqah], 공의)였지만 유다가 맺은 들포도는 체아카(צַעֲקָה[tsa`aqah], 부르짖음)입니다. 발음상으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열매가 맺혔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그 포악과 부르짖음으로 표현되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맺은 들포도의 구체적인 사례들입니다. 그 사례가 여섯 가지로 나열됩니다. 그 항목마다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이 함께 나타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허다한 가옥들과 포도원들에 황폐함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여섯 가지 “화 있을진저” 중 첫 번째를 살펴봅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8)

 

이 모습은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의 집과 전토를 빼앗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가는 모습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잇는다는 표현은 이웃의 집을 사들여 대저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땅도 그렇습니다. 전토에 전토를 더하며 주변의 모든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어 갑니다. 타인이 들어설 자리를 아예 없애 버리는 철저한 독점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사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큰 집과 더 많은 땅을 소유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책망하실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8b)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악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것을 빼앗고 경계를 넘어서며, 자신만을 위한 경계를 다시 만드는 사람들을 향한 경책의 말씀입니다. 그 과정에서 포악과 폭력이 일어납니다. 그것 때문에 어디에선가는 부르짖음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이 땅에서 이어지며, 오늘도 국가 간의 전쟁과 강대국들의 횡포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업 간, 개인 간에도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려 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는 단순히 부자가 되는 것을 비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존권을 위협하면서까지 나의 성벽, 나만의 울타리를 높이 쌓으려는 행위를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어떤 심판을 내리실까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사 5:9~10)

 

아름답고 더 큰 가옥을 만들었을지라도, 그것이 파괴되고 사람이 사라지는 비극이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자신만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이러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계량으로 말한다면, 대략 10에이커 정도의 땅, 12,000여 평의 땅에서 나오는 포도주의 양이 22리터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5리터 생수병으로 15평 정도의 양입니다. 12,000여 평의 포도원에서 이 정도 양만 생산된다면, 과연 제대로 된 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산을 내지 못하는 효용성이 없는 땅을 크게 넓히는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한 들어갈 사람이 없는데 큰 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무분별하게 취해 있는 자들에게 죽음이 입을 벌리고, 오만함으로 스스로 죄를 끌고 다니는 자들에게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두 번째 “화 있을진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사 5:11~12)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각의 즐거움에 중독된 영혼들입니다. 아침부터 독주를 찾고 밤늦게까지 연회에 빠져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술의 즐거움은 알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길의 즐거움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 감각이 아예 없기도 합니다. 육체의 감각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영혼의 감각은 사라져서 무디어 있습니다. 그것이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땅에만 꽂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만이 모든 것입니다. 육체의 즐거움을 채우느라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말라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스올이 욕심을 크게 내어 한량 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거기에 빠질 것이라 (사 5:14)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쾌락의 음료를 들이마시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스올이 와서 그들을 삼킬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스올은 음부의 세력, 죽음의 세력을 말합니다. 죽음이 입을 벌리고 그들을 삼킬 때, 이 세상이 모든 것인 줄 알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들의 호화로움과 떠드는 소리는 모두 스올에게 잠식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다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세 번째 경책의 말씀입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사 5:18)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거짓으로 끈을 만들어 악을 잡아당기며, 수레의 줄을 당기듯이 죄를 끌어당기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사 5:18, 새번역)

 

이 내용을 조금 더 실감 나게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짓말을 끈 삼아서 죄를 끌어당기고, 결국 수레 밧줄 같은 중죄에 꽁꽁 묶어 끌고 다니는 자여, 화 있을진저”

 

“그들이 죄를 끌어당긴다”라는 말은 그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끌어당긴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끌어당기는 죄는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거짓말은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이 이러합니다.

 

기껏 한다는 말이 “하나님더러 서두르시라고 하여라.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빨리 하시라고 하여라. 그래야 우리가 볼 게 아니냐. 계획을 빨리 이루시라고 하여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세우신 계획이 빨리 이루어져야 우리가 그것을 알 게 아니냐!” 하는구나. (사 5:19, 새번역)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그럼 서두르시라고 해라! 그 계획이 진짜라면, 내 눈앞에서 보이게 해 봐라! 그리해야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할 것 아니냐?” 그들은 불신앙의 말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말로 죄를 끌어당깁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능동적으로 그 거짓을 말합니다. 왜 그들이 하는 말이 거짓이라고 성경은 말씀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정녕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시며, 알고 계시며,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그들의 말은 거짓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비웃는 냉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앞선 시대의 유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보다는 통계와 과학, 자본의 힘을 더 신뢰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보기에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조롱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질주하는 오만의 끝은 낭떠러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절대적인 가치를 왜곡하는 이들과 지적 교만에 찬 사람들에게 비참함이 있을 것입니다.>

 

네 번째로 가장 무서운 죄가 나타납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20)

 

이 말씀은 기준이 사라진 시대, 바르고 옳은 것을 구분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들의 생각 구조 안에 올바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기에게 이로운 것이 곧 옳은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아전인수, 내로남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들어맞으면 진리로 보고, 손해가 되면 거짓으로 보는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적인 가치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알려 주시고 살길을 열어 주셨는데도, 그 빛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소견대로 판단하는 것을 최고의 지성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공의와 정의는 이미 사라져 있습니다. 때로는 포악이 의가 되고, 폭력이 도리어 정의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사 5:20, 공동번역 개정판)

 

하나님께서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시는데도,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화 있을진저.”

하나님의 다섯 번째 경책의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21)

 

지혜와 명철이 왜 죄가 됩니까? 이 구절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단어는 ‘스스로’입니다. 이 말은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절대적인 기준의 가치로 평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과 경험을 더 신뢰합니다. 타인의 조언이나 훈계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적인 교만은 앞선 20절의 가치 전도의 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확신에 찬 교만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명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도리어 칭찬합니다. 독립적이고 뚜렷한 가치관과 소신 있는 모습을 추켜세웁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식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길 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 안에도 확증 편향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어떤 생각에 고정되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그 생각이 더 우선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스스로 지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생각 안에 갇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 3:17)

 

그들은 “나는 다 가졌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나는 다 알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한다.” 지적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 자신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자신의 역량을 불의한 일에 쏟는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 5:22)

 

이미 포도주를 마시는 내용이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왜 다시 나올까요? 자세히 살펴보면 중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표현은 포도주가 아니라 ‘용감’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용맹’이라는 단어는 기보르(ּגִּבּוֹר[gibbowr])입니다. ‘힘이 있다’, ‘건강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주로 전쟁에서 ‘영웅’, ‘용맹한 전사’를 일컫는 의미입니다.

이 용맹함은 원래 어디에서 사용되어야 할까요? 전쟁에서 민족과 가족들을 돌보고 구하기 위해 칼과 창을 든 이의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될 것입니다. 이것이 멋진 영웅들의 용맹스러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웅적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전쟁에서 용맹함을 떨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마시는 데 용맹을 떨치는 사람입니다. 과연 이것이 용감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독주를 빚는 자들도 그렇습니다. 독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는 자’라는 표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빚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하일(חַיִל[chayil])은 ‘능력’, ‘실력’ 또는 ‘역량’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독주를 잘 빚는 사람이라는 말은 독주를 잘 빚어내는 능력을 가진 전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능력을 가진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독주를 만드는 능력이라면 어떡하겠습니까? 독주를 만들어 내는 전문가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용맹함을 술을 먹는 데 사용하는 사람, 재능과 전문성을 독주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사람은 “화가 있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 만한 일이 될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사 5:22~23)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이라는 말씀 뒤에 그들의 삶의 모습이 표현됩니다. 이들은 용맹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뇌물을 받는 데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죄를 저지르는 데 용사 같은 용맹함을 사용합니다. 전쟁에 나가서 용맹함을 떨쳐야 하는데, 술을 마시는 데 용맹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뇌물을 받는 데 용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용맹함,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재능도 그러합니다. 전문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은 매우 귀하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교한 기술로 위조지폐를 만드는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말하듯이, 자신의 재능으로 독한 술을 만드는 사람은 당연히 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재능을 정말 악한 곳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악인을 의롭게 만들고 의인을 악인으로 만드는 데 전문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의인에게서 공을 빼앗고 도리어 의인을 악인으로 몰아가는 데 능숙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뇌물을 받고 공의를 굽게 만드는 사람, 악인을 의롭게 포장해 주는 사람, 강자의 손을 잡고 힘없는 이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며,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데 기술과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 이들의 모습에는 가옥에 가옥을 잇고 전토에 전토를 더해 가는 부자들의 모습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펼쳐진 심판의 손에는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화를 자초하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사 5:25)

 

시체가 거리에 뒹굴고 그것이 분토처럼 여겨질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짓는 죄악 때문에 내가 진노하며 너희를 분토처럼 만들어 버릴 것이다. 시체들이 뒹구는 참혹한 재앙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되더라도 나의 노가 풀리지 않을 것이며 나의 저주의 손, 심판의 손은 계속 열려 있어 너희를 끊임없이 심판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여섯 가지 죄악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칠 것이다. 너희는 저주와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조금 전에 읽은 이사야서 5장 25절의 말씀입니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사 5:25b)

 

이 말씀은 확정된 심판처럼 더욱 강렬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사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후렴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9장 12절, 17절, 21절, 그리고 10장 4절에서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진노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라는 참혹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들어 있을까요? 얼마 전 새벽 기도회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절대로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아파트가 없던 시절의 집에는 대부분 대문이 있었습니다. 종종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돌아오면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다시 잘못하면 내가 너를 쫓아낼 것이다.” 아이가 또 잘못하면, “내가 너를 내 자식으로 안 여기겠다. 또다시 잘못하면 내가 너를 대문 밖으로 내던져 절대로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 그때는 절대로 집에 들어올 수 없을 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아이는 다시 잘못을 합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말 안 듣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 문밖으로 내동댕이칩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이렇게 외쳐지고 문이 닫힙니다.

여러분, 문을 닫으면서 절대로 열어 주지 않겠다고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제 완전히 끝났으니 포기하고 네 갈 길을 가라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앞에서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어머니는 문 앞에서 아이의 말을 듣기 위해 더 가까이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사 5:25b)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말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매를 맞을 때, “화 있을진저”라는 책망의 말씀을 들을 때가 바로 주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이미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이 혹독한 책망의 다른 표현은 “속히 돌아오라. 빨리 돌아와라. 제발 돌아오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의 말씀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사 5:18~23)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80, 279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자녀를 훈육하다가 가슴 아파하며 눈물 흘렸던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이사야 5장은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으나 안타깝게도 ‘들포도’를 맺은 포도원 이야기를 통해 유다와 이스라엘의 타락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열매는 정의와 공의였으나, 그들이 내놓은 것은 포학과 부르짖음뿐이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6가지 죄의 실상을 ‘화 있을진저’라는 엄중한 경고로 드러냅니다.
첫째는 탐욕과 이기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인의 생존권을 위협하면서까지 자기 울타리를 넓히는 독점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둘째는 쾌락과 방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즐거움에 중독되어 정작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는 무관심한 영적 무디심을 경고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비웃는 냉소적인 불신앙이며, 넷째는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며 자기 이익에 맞으면 진리라 우기는 가치관의 왜곡을 지적하십니다.
다섯째는 지적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으며, 자신의 판단과 경험을 말씀보다 더 신뢰하는 오만함을 짚으십니다.
여섯째는 재능의 오용과 불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용맹함과 탁월한 실력을 정작 술 마시는 데 허비하고,
뇌물을 받아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의 공의를 빼앗는 데 사용하는 기술적인 악함을 강력히 책망하십니다.

이 혹독한 심판의 메시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진심은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회개를 향한 간절한 초청’입니다.
매를 맞을 때가 바로 돌아갈 때입니다. 징계의 손이 펼쳐져 있다는 것은 아직 돌아올 자리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 삶에 맺힌 들포도를 잘라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와 공의의 열매를 맺는 참된 포도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누기>

1. 본문이 지적하는 6가지 죄 중에서 내 삶에 가장 경계해야 할 ‘들포도’는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2.“화 있을진저”라는 책망이 사실은 “속히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이번 한 주간 구체적으로 돌이키고 싶은 영역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어주셨음에도 우리 삶에 포학과 부르짖음의 들포도만 가득했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타인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즐거움보다 하나님의 뜻에 더 민감한 영성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을 버리고, 주신 재능을 의를 위해 사용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사순절 기간, 책망의 음성을 사랑의 초청으로 듣고 속히 주님께로 돌이키는 결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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