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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은혜적 차원

고린도전서 1: 4 ~ 9

곽선희 목사

2002.11.17

날 짜 :2002.11.17
제 목 :감사의 은혜적 차원
본 문 :고린도전서 1장 4절 ∼ 9절

아주 특별한 상이 있습니다. Master of Influence라고 하는 상입니다. 그것이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영향을 끼친 그분에게 드리는 그런 특별한 상입니다. 전 미국 강연가 협회가 유명한 대중연설가로 인정해서 주는 상입니다. 그 내용은 최고의 동기부여가, 또 자기개발과 성공학의 대가에게 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성공적으로 살았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생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삶의 동기를 격려해준 그런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상입니다. Master of Influence. 여기 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매우 알려진 인물입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정상에서 만납시다’라고 하는 책을 쓴 저자입니다. 이름이 좀 특별합니다. 지그 지글러(Zig Zigler)입니다. 그가 75세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 자서전의 마지막 결론 부분만 말씀드립니다. 그 결론에서 그는 딱 한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감사뿐이었다. 감사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는 그러한 일생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은 혼자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천사가 나를 늘 지켜주셨다’ 하는 것을 거듭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한 가족들에게 특별히 감사했습니다. 그 딸과 그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서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준 귀한 동반자였다’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고 그 다음에는 그 이웃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내게 고마운 분들이다. 감사하고, 감사외에 다른 말이 없다’ 그렇게 그의 인생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성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많이 가졌다고 많이 배웠다고? 권세를 누렸다고?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충만한 감사 속에 살고 있느냐, 또 감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성공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메타라고 생각합니다. John J. English라고 하는 분이 Spiritual Freedom 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경험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공부를 많이한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진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좀 잘살게 되었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까?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의 경험입니다. 아주 뜨거운 사랑, 아주 확실한 사랑, 아주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이대로 죽어도 좋다. 이런 사랑을 한 번 해보고 한 번 받아보았으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 그만큼 화끈한 경험을 해야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랑의 경험 뿐입니다. 그 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그 속에 행복이 있고 삶의 의미와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문화, 우리의 사회생활 속에서 우리 민족들이 좀 무언가 잘못된 문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감사하다고 하든지 고맙다고 하면 내가 낮아지는 줄로 생각하는 잘못된 생활 철학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안하려고 듭니다. 더욱이 자기 식구들에게 자신의 부인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말 안해도 안다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애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다 벌어서 먹여 살리는데 고마울게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럴까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고맙다고 하는 순간, 그는 높아지고 나는 낮아진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무래도 DNA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유전적입니다. 공자로부터 온 것입니다. 유교사상에서 온 것입니다. 문화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식민지 문화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체질이 감사를 모르는 체질이 되었습니다. 아주 문제입니다. 그 고맙다는 말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생전 해봤어야 알죠. 어느 순간이라도 고맙다고 하는 순간, 내가 없어지는 것처럼 내가 비하되는 것처럼 내가 망가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고맙다고 하면 그 순간 자신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이 높이 높이 올라가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아주 뿌리깊은 병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의 경험이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인간이 성숙되면서 그 순간 감사 앞에 내가 겸손하게 됩니다. 감사로 인해서 내가 자유해집니다. 감사로 인해서 미래가 보입니다. 감사해 보십시오. 행복할 뿐더러 앞이 환하게 보입니다.
어떤 유대 어머니가 별로 배운 바가 없는 무식한 어머니었습니다만은 자식은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어머니는 늘 딱 세가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나는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저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 두 번째는 원망하는 사람하고 놀지 말아라. 여러분, 주변에 친구든 누구든 딱 만났을 때에 뭐 어쩌고 어쩌고 원망하거든 다시는 만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전이됩니다. 원망하는 사람과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가 감사하는 사람과 친하라.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과 함께하라. 이 세마디로 훌륭한 유명한 자녀들을 양육했다는 이야기이 있습니다. 일본에 우찌무라 간죠라고 하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저주가 있다면 세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 아무리 믿어보려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심령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을 읽어도 요절을 외워도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지식적인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됩니다. 설교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려와야 합니다. 이것이 안들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원망과 불평뿐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1장 4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한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반대로 뒤집어 봅니다. 우리는 어떠냐? 생각할 때마다 분하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고, 이것이 망조입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자, 보십시오. 생각할 때마다. 이런 일을 생각하고 저런 일을 생각하고 이 분을 생각하고 저 분을 생각하고 다 고맙습니다. 다 고마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심령이고 생각하면 원망하고 분하고 한이 맺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우찌무라 간죠는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입니다.” Right Response, 마땅한 응답이 감사입니다.
감사는 차원적인 문제입니다. 첫째 차원이 무엇인가 하면 받은 바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받았다. ‘모든 것은 받은 것이다’ 할 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신 은혜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받았다. 여러분, 내가 준 것과 받은 것, 어느 쪽이 많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받을 때 감사합니다. 받은 바에 대한 감사입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받았을 때에 감사한 것입니다. 받은 바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감사로 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쟁취한 것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가끔 파업도 하고 대모도 하면서 빨간 띠를 두르고 ‘결사반대! 쟁취!’ 이런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할 때마다 저렇게 해서 얼마를 얻어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서글픕니다. 그로 인해서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그 심정이 망가집니다. 이렇게 소리지르다보니까 그 다음에 얻은 데 대해서 고마움이 없습니다. 쟁취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가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자본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왜? 쟁취한 것이니까. 혁명, 쟁취. 그래서 북쪽에 가서 다니며 보면 모내기 할 때에 다니면서 보면 ‘모내기 혁명’이라고 했습니다. 모내기가 왜 혁명입니까? 그것도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싸워서 이기고 이렇게 살다보면 감사가 없습니다. 여러분, 빼앗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쟁취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행복이 없습니다. 그것은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 뿐입니까. 자기 의를 내세울 때에도 감사가 없습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율법적 관계로 사는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소유란 소유하는 순간 약간의 기쁨이 있는 것 같아도 소유하자마자 또 다른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걱정이 많습니다. 성취감이라는 기쁨이 있습니다만은 성취되는 순간 불안합니다. 지속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로지 감사만이 그 사람의 마음을 자유하게 합니다. 참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운명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팔자요 운명인데 누구에게 감사를 하겠습니까? 이래서 감사가 없는 생활이 그 민족이든 그 문화든 그 나라든 다 망가지고 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차원은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많이 은혜 받았다고 많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부분 만큼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의식이요 의식과 감성이 합쳐지는, 그래서 지성과 감성이 통합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습니다. 얼마나 깨닫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아주 옛날 젊었을 때 보니까 헬라사람들 가운데 감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 비를 맞으면서 가다가 손을 들고 “오 신이여” 그러며 감사를 하더랍니다. 왜 감사하냐고 물어보니까 이 눈썹이 있어서 비가 이렇게 밑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또 감사합니다.” 무엇이 감사하냐 하니 콧구멍이 밑으로 뚫린 것을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위로 뚫렸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지요?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깊이에서 감사하는 것은 사실인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때에 깊이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남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지각을 가질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역경입니다. 사람은 평안하게 되면 둔해집니다. 배부른 사람은 코가 둔해집니다. 배고픈 사람이 코가 예민합니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 남다른 어려움을 치를 때에 그는 은혜에 대해서 민감해집니다.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 옛날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빌립보 1장 12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는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2년동안 재판도 없이 처박혀서 고생을 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동안 배가 파손이 되었습니다. 죽을 고생을 3년 동안 했지만 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생각해보니 이 모든 과정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통해 큰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알았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남다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어려움과 같은 것은 웃음으로 감사하기보다 눈물로 감사할 때에, 다른 사람이 미처 상상도 못하는 세계를 생각하게 될 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1년동안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은혜를 오늘 이시간에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그런 감사절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은사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신앙을 지켜갈수 있도록 은사를 공급해 주었어요. 계속적으로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이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좋은 여건에서도 미래가 없는 일에는 감사할 수가 없어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으면 감사할 수가 없어요. 미래에 대한 불확실, 그 속에는 감사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감사하는 순간, 미래가 열립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현재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그것이 바로 감사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이 감사 생활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주님이 견고케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 고로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향할때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많은 능력 가운데 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침내 저주를 받아 광야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왜 원망했겠습니까? 아니 성경대로 보세요. 물이 없습니까? 농사를 지으랍니까? 하늘에서 주는 떡가루를 가지고 밥 먹고 편안히 지내는데 왜 원망하는거요. 왜 원망하다 죽었습니까?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확실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 조그마한 어려움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향한 믿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야 감사하게 되고 놀라운 것은 감사하는 순간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을 가지게 되면 소망이 보입니다. 그런 고로 또 다시 감사하게 되는 것이요 또 나아가서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올시다. 여러분 감사하면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 받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해보세요. 모든 주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깊이 깨닫게 됩니다.
또 감사하면 고독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혹 여러분 고독한 사람 있습니까? 그 사람은 감사할 줄 몰라서 그럽니다. 내가 “감사합니다” 하는 순간에 마음이 열리면서 고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감사하게 될 때에 약속의 땅 미래가 환하게 보입니다. 감사하게 될 때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창의력을 가지게 됩니다. 밝은 지혜가 생깁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하게 되면 생각이 둔해집니다. 점점 고집에 빠집니다. 아주 영영 절망에 빠지고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이제 감사로 모든 원망을 물리치는 순간 가슴이 열리게 됩니다. 교만해서 받은 바를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오로지 겸손한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베푸는 자의 것입니다. 감사를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베풀게 될 때에 내가 받는 은혜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가지게 되고 더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감사하게 될 때에 믿음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막막하고 답답하고 절망적인 것 같으나 미래가 환하게 보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허물없이 견고케 하시리라. 이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모든 환란 어려움을 다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감사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많은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은혜를 모르고 당연히 한평생 감사를 해도 끝이 없을 것이건만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참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시고 또한 그 거룩한 사랑에 감격할 수 있는 그런 확실한 겸손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감사로 원망을 물리치고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면서 감사로 충만한 그런 승리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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