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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1.12.02
제 목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본 문 :디모데후서 4 : 9 ∼ 18
이러한 사람은 늘 불행합니다. 겨울에는 빨리 ‘여름이 왔으면’하는 사람, 또 여름이 되면 빨리 ‘겨울이 왔으면’ 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반대로 이러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겨울에는 겨울대로 좋고 여름은 여름이어서 좋은 바로 그런 사람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더욱더 지혜롭습니다. 겨울에 여름 준비를 하고, 여름에 겨울 준비를 해서 유비무환입니다. 겨울이 올 때 조금도 걱정이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딸이 선물로 여름에 사다준 밍크오버를 걸어놓고 ‘빨리 겨울이 되어서 저걸 입어봤으면 좋겠다’ 하고 기다리는 어머니는 행복합니다. 그는 간절하게 겨울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동물들의 겨울나기를 연구해 보면 세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아주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철새가 있습니다. 또 동물 중에도 이렇게 사슴같은 것은 때를 지어서 이동, 대이동을 합니다. 자기 체질에 맞는 기후에 고장을 찾아서 말입니다. 또 하나는 동면을 해버리고 맙니다. 이 동면이라고 하는 사건은 현대과학으로도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땅속에 들어가서 한겨울동안 먹지도 않고 어떤 동물은 심장 맥박도 없이 한겨울을 잡니다. 그리고 봄에 툭툭 털고 일어납니다. 세 번째 유형은 털갈이를 합니다. 여름에는 털이 다 빠져나갔다가 겨울이 되면 털이 다 생겨나서 두툼하게 이렇게 털이 생겨가지고 넉넉하게 그 겨울을 나게 되는 그러한 동물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느 쪽 입니까?
시간이라는 것은 두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말은 ‘시간’ 이렇게 말합니다만은 헬라어로서는 ‘크로노스’라는 말과 ‘카이로스’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래 여러분 고급 시계를 차고 보세요. 자세히 보면 거기에 ‘크로노미터’라고 되어 있습니다. ‘크로노미터’ 크로노스를 가르쳐 주는 기계라 그말입니다. 크로노스라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변경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움직일 수 없는 절대시간입니다. 그런 우주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시간이 있습니다. ‘카이로스’라고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얼마되지 않지만은 그러나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요리할 수 있고 요령껏 사용할 수 있는 얼마간의 주어진 시간, 이 ‘카이로스’입니다. 라인홀트 니버의 기도문을 좋아해서 아침마다 외워보곤 합니다.
‘하나님이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여러분, 고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절대로 지체할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고 변형하지도 못하고 연기하지도 못하는 것이 있어요. 절대, 그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한세기 동안 많은 분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다섯가지 생활지침을 세워놓고 살았다고 합니다. 평범한 얘기지만 다시 한 번 듣고 생각을 가다듬어 보세요. 첫째는 살아있는 한 최대의 노력을 할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 최대, 극대화해서 살아갈 것이다. 능력을 극대화해서 살 것이다. 두 번째는 한 순간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셋째는 타인을 경멸하지 말자. 넷째는 결코 복수심이나 질투하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말자. 다섯째는 지금 곧 죽는다해도 마음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말자. 이 얼마나, 얼마나 실제적인 교훈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모습은 그 어느 다른 모습과는 다릅니다. 그는 모름지기 두 번째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 당시 정황으로 보아서 그는 이제 머지않아 순교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나이도 칠십이 넘어서 노인이지만,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정황이 ‘내년 봄에 어느 시간에는 내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 라고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4장 6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 세상 떠날 때가 가까이 왔음을, 죽음이 바로 앞에 있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오랜 동안에 경기, long race, 긴 경기를 끝내고 앞에 골인시점이 눈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왔습니다. 오랜 순례자의 생활에 목적했던 종착지가 눈앞에 보입니다. 결승점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감회가 깊었습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말합니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라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21절에 보면 그렇습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말합니다. 그는 세상에 떠날 길이 가까웠다고 할 때 바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 그리워집니다. 한번 더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겨울전에 속히 오라.’ 왜 겨울 전이냐? 이것은 지중해 연안이라는 것은 겨울이 되면 업니다. 추울 때는 얼어버려서 그 당시 2000년 전에는 접안 시설이 좋지 않아서 배가 항구에 접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겨울에는 배가 운행하지 못합니다. 항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비활동기가 온다는 말이죠. ‘활동할 수 없는 겨울이 온다. 그런고로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라고 아주 측은하게, 간절하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의 겨울을 맞았습니다. 여러분, 나이가 많으면 시린 것도 많고 추운 것도 많습니다. 그런 말 기억하십니까? 문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 보니까 모르는가 본데 그런 줄이나 아세요. 옛날에는 문구멍이 있었거든. 그 문구멍을 막지 못하면 그리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 이말이에요. 춥다, 이 말이죠. 나이 들면 추워요. 무릎이 시려요. 마디가 쑤셔요. 더욱이 감옥은 춥습니다. 바울이 머물렀던 그 로마 감옥은 지하실입니다. 지하실은 음산합니다. 한마디의 말을 여러분 다시 한 번 새겨보세요. 13절에 보면은 ‘아무 집에 맡겨놓은 옷이 있는데 그 겉옷을 갖고 오라. 나는 춥다. 여행할 때에 거추장스러워서 그 집에 맡겨놓은 것 있는데 그 옷을 가져오라.’ 그 말 속에 ‘나는 지금 춥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외로움의 겨울을 맞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자세히 몇 번이고 읽어보세요. 아주 처량합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야 나를 버리고 갔고. 데마라고 하는 사람, 본래 제자였지만은 너무 핍박이 어렵고 힘들어서 바울과 같이 동행하지 못하고, 그는 세상을 사랑해서 그만 바울을 버리고 가버렸어요. 배신이에요. 배신당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또한 ‘디도는 갔다’ 그랬어요. 자기 할 일이 있으니까, 바울만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저 할 일을 위해서 갔고. ‘두기고는 예배소로 보냈노라’ 그래요. 심부름 할 일이 있어서 그는 보냈어요. 결국은 떠난 사람, 간 사람, 보낸 사람. 다 갔어요. 다 떠났어요. 그런고로 외롭고 ‘지금은 누가만이 나와 함께 있느니라.’ 누가는 의사입니다. 누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아는 나이 많은 목사님, 90세가 넘었어요. 아주 강건하십니다. “그래 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러면 “괜찮아.” “그래 요새 지내기가 어떠세요?” 물어보면 “외로워” 그러더라고요. “몸은 괜찮은데, 외로워.” “왜요?” “전에 알던 친구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 갔거든. 누구도, 가고, 누구도 가고, 며칠 전에 가고. 지금 내 나이는 하나밖에 없어. 동창도 나 하나밖에 없고, 이젠 만나서 얘기할 사람이 없어. 그래서 더 사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네.” 어떻습니까? 고독이라고 하는 거요. 산다고 사는 것입니까? 알던 사람 하나 하나 다 떠나는데, 이래서 가고, 저래서 가고, 다 떠나버리는데 고독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겨울입니다. 7절에 보면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 경기장에서 뛰는 사람은 홀로 뛰는 겁니다. 같이 출발하지만 골인장에 들어갈 때는 혼자 들어가는 거예요. 믿음의 생활에, 믿음의 경주에, 마지막 절실하게 고독한 시간이 왔습니다. 이것은 실존적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마가를 데려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함이니라.” 참 궁금한 얘기입니다. 왜 마가를 데려오라고 했을까? 왜 유익하다고 했을까?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고 우리가 흔히 말할 때 “마가의 다락방, 마가의 다락방” 그 다락방의 주인입니다. 부잣집 아들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그가 따라나섰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가고 이렇게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만 전설대로는 잠깐 병에 걸렸던 일이 있어요. 그리고 나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간다고 그러니까 “나, 안가겠습니다” 도중하차해서 집으로 가버렸어요.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 나서 예루살렘에 가서 보고를 할 때 마가가 ‘아∼, 내가 끝까지 따라갔으면 귀한 경험을 하는 건데……’ 후회스러웠지요. 다시 준비해가지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마가가 따라나서겠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박절하게 거절했습니다. 물론 ‘내가 다시는 도중하차해서 돌아오는 일이 없겠습니다’ 라고 맹세했겠지만 아니요, 너같은 부잣집 아들은 안된다고 딱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이 나누어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이쪽으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이쪽으로 가고,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이런 사건이 있었어요. 그 후에 마가는 열심을 내고, 더 열심을 하고 충성을 다해서 베드로를 위해서 일하고 우리가 보는 마가복음의 저자도 됩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때 섭섭해하던 마가의 얼굴이 떠오르는 거예요. 자기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이지만 ‘그 때 마가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내가 만나서 저를 위로해 줘야지.’ “그때 마음이 많이 아팠지?” 그 말을 꼭 하고 싶은 거예요. 이 말을 하고 가야되겠어요. 용서하고 화목하고. 이게 마음에 걸리거든요. ‘꼭 이 말을 해야 되겠다’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마가를 데려오라.”
“그리고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그것은 성경책입니다. ‘이제 마지막 시간에 또 성경만을 읽어야겠다.’ “가죽종이에 쓴 구약 성경, 가져오라.” ‘그것을 읽고 생을 마쳐야겠다’ 생각을 합니다.
또다시 그는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에 대해서 말합니다. 마치 원수와 같은 비난자들입니다. “알렉산더가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느니라. 저를 주의하라” 하고 말합니다. “처음에 나와 같이 일하던 사람 가운데 나를 괴롭힌 사람들 많이 있다.” 바울의 마지막 말을 들어봅시다. “그러나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마라.”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나는 이미 용서했노라.’ “일방적으로 저들은 나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나는 저를 용서하고, 저들은 나를 끝까지 괴롭혔지만 나는 이미 다 용서했노라.” 일방적으로 화해해버렸어요. 유명한 공자의 제자 “자장”이라고 하는 분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인, 의, 예, 지를 말할 때 ‘인’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때 말하기를 “‘인’이란 공손과 관대와 신의와 민첩과 은혜니라.” 다섯가지를 말합니다. “사람이 공손하면 남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을 것이요. 사람이 관대하면 많은 사람이 저를 따르게 될 것이요. 신의를 지키면 이 많은 사람이 그를 믿어줄 것이요. 민첩하면 공적을 세울 것이요. 은혜를 베풀면 언젠가 많은 사람이 저를 도와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겨울이 가까웠다면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봄과 같이 희망에 찬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뜨거운 여름 속 많은 시련 속에서 성장, 성장일로로 성장하는 그런 성장기가 있고, 또 한여름동안 성장한 대로 거두어야 하는 심은대로 거두는 가을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 활동할 수 없게 얼어붙고 마는 동결되는 겨울이 있습니다. 겨울이 눈앞에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입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전 로마에 방문했을 때 제일 크게 인상받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 성당은 많이 봅니다만은 바울 성당들은 잘 안봐요. 작은데 한 쪽에 있어요. 거 바울 성당을 가보니까 그 바울성당 한 가운데 사도 바울의 시체가 있다고 합니다. 그 시체 바로 밑에 디모데의 시체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디모데는 끝까지 바울을 위해 살았고 죽어서도 바울 밑에 묻혔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십시다. 사도바울은 가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아들들이 많습니다. 그로 인하여 구원받은 사람, 그로 인하여 예수 믿게 된 사람, 그로 인해서 생명의 길을 찾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중에도 특별히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생각을 합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이 겨울이라고 한다면 겨울을 앞두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의 아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여러분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 여러분으로 인해서 새사람이 된 사람, 여러분을 믿음의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람. 믿음의 아들 딸이 몇이나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기억 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아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종결승점에 왔습니다. 앞에 있는 상급을 바라보며 행복했습니다. 그는 용서와 화목을 했습니다. 화평을 이룸으로써 그 영혼이 자유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읽어서 이제 소망의 세계를 환하게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생각을 하면서 기쁨과 감사로, 환희로 충만한 그러한 순간을 맞았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가 맞는 겨울 전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용서하시고, 앞으로도 기회가 많을 것처럼만 생각하고 미루며 살아오는 것도 용서하옵소서.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생각하며 순교 직전에 사랑하는 편지를 쓴 것 같은 그 심정을 우리가 이 시간에 헤아리면서 우리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해야할 일을 하게 하시고 서둘러 마쳐야 할 일을 마칠 수 있는 저희들에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반갑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