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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에 버려진 자

누가복음 8: 43 ~ 48

곽선희 목사

2003.03.23

날 짜 : 2003.03.23
제 목 : 군중 속에 버려진 자
본 문 : 누가복음 8 : 43 ∼ 48

1940년, 발명가인 체스터 칼슨은 청년 나이에 오랫동안 연구해오던 결실로 한 기계를 발명하였습니다. 이것을 설계해서 특허도 얻었습니다. 이것을 20개 회사에 제출해보았지마는 모두가 한결같이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상품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이제 더 밀고 나갈만한 경제력도 없고 힘듭니다. 몹시 고독했습니다. 나는 쓸모가 없는가보다, 아무래도 내 기술은 한계에 왔나보다… 여러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무척이나 고독하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무려 7년동안을.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확신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끈질기게 7년 동안이나 여러 회사를 찾아다니며 설명을 했습니다. 모두가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7년 후, 뉴욕의 할로이드 컴퍼니라고 하는 작은 회사에서 회답이 왔습니다. ‘당신의 특허를 우리가 사겠소.’ 합작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후로 그는 돈방석에 올라앉았습니다. 그 회사는 이름없는 작은 회사였던 것이 일약 대회사로 발전했습니다. 그 상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쓰고 있는 복사기입니다. 복사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것을 발명해서 7년 동안이나 애썼지마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7년 후에 한 회사가 인정함으로 복사기가 이렇게 발전을 해서 우리가 흔하게 쓸 수 있는 이런 복사기가 됐습니다.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십시오. 그 7년 동안 이 칼슨 청년이 얼마나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겠습니까? 루멜 하우스라고 하는 분은 ‘Man’s Need and God’s Actions’라고 하는 책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그 고독을 먼저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고독하게 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오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나를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우리는 자기사랑에 충실해야 됩니다. 내가 내 생, 내 얼굴, 내 지식, 내 능력을 소중하게 여겨야 됩니다. 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먼저 인정하여야 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이웃을 사랑해야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웃을 사랑하고야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부간에도 이걸 잊지 마십시오. 죄송하지만 잘났건 못났건 저 여자를 사랑하고야 내가 살아갈수 있습니다. 저 남편을 사랑하고야 내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버리고는 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이웃을 버리고 다른 데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야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고독이라고 하는 무서운 죄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자신에 대하여 긍정적 자아현상을 이루기까지는 세 개의 절대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소속감입니다. belongingness,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치감입니다. worthiness,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인가, 나를 저들이 요구하고 잇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신뢰감입니다. competence, 나는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나는 필요한 존재인가, 나는 할 수 있는가 – 이 세 질문에서 self-acceptance, 자아 응답이 있어야 됩니다. 여기에 바른 대답을 하지 못하면 소외감에 빠집니다. 열등의식에 빠집니다. 피해망상증에 빠집니다. 끝없는 고독에 빠집니다. 절망합니다. 절망은정신적인 자살입니다. 몸은 움직이고 잇으나 정신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시체와 같은 그 몸뚱이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고독이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참으로 고독한 사람이, 제 생각에는 현대인을 대표하는 사람 같은 불쌍한 여자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많습니다. 그 많은 사람, 많은 병자가 만났지만 그 만난 모든 사람 중에 제일로 동정이 가는 불쌍한 사람이 바로 이 여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장 절박한 고독에 지친 한 여자를 예수님께서 만나 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병든 여자입니다. 여러분, 건강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병들면 친구가 없습니다. 병들면 몸이 아픈게 아니라 마음이 아픕니다. 병들면 슬퍼집니다. 아무도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습니다. 미안합니다마는 제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차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채로 한 20년 살았습니다. 한 10년 지났을 때 제가 그 사모님을 한번 만났습니다. 서로 알고지내는 터입니다. 만났을 때 ‘목사님 요새 어떻습니까?’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떠올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저 “사모님. 안녕하세요”라고만 말을 했는데 사모님이 내게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아직 안죽었어” 그러더라고요. 지겨워서요. 물론 남편 바라지는 하지요. 그러나 이제는 지겨운 것입니다. 병든다는 것은 고독한 것입니다. 슬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내게서 떠납니다. 그걸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기서 가치관도 없어지지요, 신뢰감도 없어지지요, 소속감도 없어지지요, 다 없어집니다. 그리고 절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자, 12년 동안, 여자나이에 소중한 젊은 12년 동안을 혈루증 환자로 살아버렸습니다.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가정도 없습니다. 당시의 문화로 볼 때 이런 사람은 이혼조건이 됩니다. 별수없이 가정을 떠나야 했고 자녀도 없습니다. 사랑받지 못합니다.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또한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도움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왜요? 의사도 그를 괴롭히기만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치료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위로를 얻지 못했습니다. 누가 위로한다고 해도 위로가 조소로 들리는 것입니다. 누가 위로하겠다고 찾아와도 꼭 비웃으러 온 것만 같습니다. 이제는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위로할 자가 없는 게 아니라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의 위로도 다 쓸데없는 소리로, 다 빈말로, 다 비웃는 소리로 들립니다. 절박하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병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기자 누가는 의사이므로 확실하게 병명을 밝혔습니다. 혈루증, 의학적 용어입니다. 다시말하면 여자로서 하혈을 하는 병입니다. 남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그래서 현대학자들은 아마도 이게 요샛말로 자궁암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니면 옛날에 유행하던 무서운 성병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생식기능이 썩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병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여자입니다. 부끄러운 병입니다.
옛날 신학대학 다닐 때 동급반이지마는 나이는 좀 많아서 나보다 많이 위인 학생이 어느날부터 갑자기 아픈 기색을 보이더니 시름시름 앓는 것입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말이 없습니다. 병원에 가느냐, 했더니 가나마나라고 대답합니다. 안가는 것입니다. 어느날 아침에 같이 서서 이를 닦다가 그를 보니 한꺼번에 어금니 몇 개가 맥없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걸 손바닥에 들고 울더라고요. 어금니 빠진 걸 손에 들고 우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뒤에 조용한 시간에 고백삼아 이야기를 하는데 젊었을 때 실수해서 부끄러운 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치료가 안되는 병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재발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주의 종이 되겠다고 몸을 바쳤지만 이 몸 가지고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나, 하면서 우는데,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여러분, 부끄러운 병이 있습니다. 병도 여러 가지 아닙니까?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 문둥병 환자도 내 병을 깨끗케 해주세요, 하고 장님도 내 눈을 뜨게 해주세요, 합니다. 모두가 이렇게 병명을 얘기하는데 자, 이 여자는 만약 에수님께서 물으신다면 뭐라고 밝히겠습니까? 너 어디 아프냐? 어디다 손을 대고 기도하랴?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운 것입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죄는 숨은 죄가 많다는 것입니다. 말못할 사정, 냉가슴 앓는 사정… 어느 부인은 남편의 비밀을 알고나서 이렇게 말합디다. “나는 마음대로 울지도 못합니다.” 왜요? ‘우리 아버지가 하는 아래 제일 훌륭한 분이다.’ 자식들은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 나는 마음대로 울지도 못합니다. – 그러고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깊이깊이 숨겨진 병 – 오늘 이 여자는 이런 것을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에수님 앞에 와서도 내놓고 ‘내 병을 고쳐주세요’ 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군중 속에 있지마는 고독합니다. 숨어숨어 비집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만나서는 안됩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이런 사람을 가리켜 ‘부정하다’하였습니다. 왜요? 나를 만나고 가까이 한번 대하고나면 냄새로 전위되니까요. 그뿐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종교적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유도 없는 사람입니다. 왜요? 민수기19장이나 신명기 23장에서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성전에 나가지 말라고요. 옛날은 위생적으로 어려운 때였으니까요. 이런 여자가 만일 교회당에 왔다든가 회당에 한번 왔다하면 우선 냄새가 진동을 할 것 아닙니까? 예배분위기 아주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냄새라는 것은 참 이상해서 적응성이 좋습니다. 자꾸 맡으면 본인은 의식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제가 심방을 못하는 지 오래됐습니다마는 옛날에는 심방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루 평균 27집 심방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집, 더욱이 환자가 있는 집, 긴 병 환자가 있는 방에 들어갔다 하면 막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 집 사람들은 그 속에 사니까 모르지요. 비교적 모르는 편입니다. 그러나 밖에서 들어간 사람에게는 참 배겨나기 힘든 냄새입니다. 오늘의 이 여자는 그런 여자입니다. 성전에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서도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도 못드리는 버림받은 여자입니다. 특별히 그가 젊었을 떄 어떤 죄를 범했다든가 한다면 그때 있었던 사건 하나로 인해서 일생을 망칩니다. 얼마나 후회되겠습니까? 얼마나 깊은 가책의식이 있겠습니까? 그 부끄러움과 가책과 죄책속에서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버렸습니다. 이제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지요. ‘사람이 돈을 잃어버렸으면 부분을 잃어버린 것이고, 건강을 잃어버렸으면 행복을 잃어버린 것이고, 명예를 잃어버렸으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고, 소망을 잃어버렸으면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요, 자기신뢰를 잃어버렸으면 다 잃어버린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다 잃어버린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귀중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의 한가닥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뵈어야겠다. 세상사람은 만날 필요도 없고 만나주지도 않고 만나서도 안되지만 예수님은 뵈어야 한다.’ 이 마음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뵈어야 한다. 하고 궁중 속에 비집고 들어와 예수님 앞에 가까이 왔지마는 ‘예수님’ 하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내 병을 고쳐주세요’라고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령누 가운데서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댑니다. 조심스럽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믿음으로, 아주 단순한 믿음으로 그 옷가에 손을 댑니다. 아니, 종말론적으로 일생에 오직 한 번 잇을 기회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것입니다. 마침내 이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가는 순간 이 여자는 몸이 시원하게 낫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감격합니다.
여러분, 교회 나오십니까? 수없이 나오지요. 많이 나오셨습니다. 어떤 분은 몇천 번 나왔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믿음으로 나왔느냐입니다. 난생처음 나오는 것처럼, 오늘이 내 마지막날이다, 하는 마음으로 나오십니까? 이시간 내가 주를 만나뵙지 못한다면 나는 없다 – 여인은 그런 절박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에게 주께서 나타나십니다. 오늘 본문에 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찾으십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잇느니라.” 이렇게 찾으실 때 베드로가 성급하게 한마디 합니다.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아니, 예수님이 인기좋아서 그런거지요. 사람이 몰려들다보니 몸이 닿을 수도 있고 옷자락 스칠 수도 잇지 않습니까? 그런 걸 왜 별나게 여기십니까, 예수님. 그런 일은 짜증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미나이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가면서 오면서 옷자락 스치는 정도를 일러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지금 그 많은 사람 몰려 붐비는 거, 그거 얘기하시는게 아닙니다. 딱 한번, 에수님을 만나야겠다고 하는 단순한 이 믿음, 나 자신은 내가 못믿어도 예수님은 믿습니다. 세상 사람 다 날 버려도 나는 예수님을 뵈어야 돼 – 바로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은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찾으십니다. 그 믿음 가진 자를 찾아주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멸시하고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내 옷을 만진 자가 있다, 나를 찾는 사람이 잇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잇다 – 마침내 이 여자는 더 숨기지 못할 줄 알고 예수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내가 손을 댔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나는 이런 여자입니다 – 다 발표하고 말았습니다. 시원하기. 정신도 몸도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잃었던 나 자신을 예수 안에서 찾았습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두려움에 떨고 부끄러움에 쫓기고 죄책에 매여서 더는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절망적이었으나 오직 한가닥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리하심으로 여인은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자유인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 하시는 말씀을 다시한번 들어보십시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는 사람으로 여인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참으로 주님 앞에 나오지만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나올 때마다 큰 은혜를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예수님 앞에 있던 이 이름없는 여인, 그가 가졌던 깨끗한 믿음, 우리에게도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주를 만나뵈려고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찾아주시는 소중한 존재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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