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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새롭게

마태복음 13: 16 ~ 23

곽선희 목사

2002.02.03

날 짜 :2002.02.03
제 목 :귀를 새롭게
본 문 :마태복음 13장 16절 ∼ 23절

어느 날 아메리칸 인디언청년이 뉴욕시내 한 가운데에 살고있는 백인 미국친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이는 오랫동안 친한 사이였습니다.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시내의 시가를 둘이서 걷고 있었는데 이 인디언 친구가 느닷없이 발을 멈추더니 “이 시내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누만”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음 속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은 겁니다. 그때에 미국친구는 말하기를 “아! 이 뉴욕 한가운데에 무슨 놈의 귀뚜라미 소리란 말인가?” 라고 거부를 했더니 이리 와 보라고. 귀뚜라미 소리나는 쪽으로 계속 둘이 걸어가보니깐 길 모퉁이에 넝쿨나무로 된 집에 벽 틈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그때에 미국 백인친구는 말하기를 “자네는 시골에서 살아서 청각이 아주 뛰어나게 좋은가 보구만”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메리칸 인디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50전짜리 동전 하나를 아스팔트 땅에다가 떨어뜨렸습니다. 데구르르 굴러가더니 저만큼 가서 던져졌는데 길 가던 사람이 모두 발을 멈추고 그걸 바라봅니다. 그 중에 꼬마하나가 빨리 가서 50전짜리를 손에 들고 돈 주웠다고 좋아하면서 돌아오는 겁니다. 그때에 아메리칸 인디언 친구가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귀가 밝은 게 아니라 당신들의 귀가 어두워진 거요. 문제는 관심사가 문제라구요.” 귀뚜라미 소리는 안들려도 돈 소리는 들리지 않느냐, 이렇게 비웃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아니 무슨 소리로 들립니까? 바로 거기에 여러분의 사람됨에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의 I and Thou 라고 하는 아주 참 세계적인 명저가 있습니다. ‘나와 너’ 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책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나 외에 어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는 두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인격적 관계요 대화적 관계요. 또 하나는 비인격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와 너’라고 하는 관계여야 하는데 잘못되면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I and Thou 냐 I and It 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에 있을 때는 내 존재가 인간적으로 살아납니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는 순간 나라는 존재도 자꾸 비인격화 되어버리고 만다 하는 이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화적 관계, 듣는 관계에 있을 때에 인간존재가 성립되고, 대상을 수단으로 하여 버릴 때는, 들을 필요도 없고 듣지도 않는 그런 관계가 되면 인간의 인간됨은 무너지고 만다 하는 유명한 이론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런 때가 오겠다는 겁니다. 진리는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 참말은 듣지 않고 거짓말 듣기를 좋아하겠다. 들어서는 안될 말들을 듣는 그런 세대가 오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듣는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고 들려진다고 다 깨닫는 게 아니지 않습디까? 중요한 것은 듣는 일에 선택적 청각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선택적 청각이 있다, 가려서 듣는 거예요. 많은 소리 중에도 내가 들을 수 있는 것만 듣는 거예요. 가장 큰 소리가 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랍니다. 그건 우리가 못 듣습니다. 아주 높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이 과학적으로도 아주 우리가 꼭 필요한 소리만 딱 듣습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많은 소리 중에 내가 듣는 소리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입맛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입맛의 성향이 있습니다. 그건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음식이 있지마는 내가 먹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만 내가 좋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것은 어디서 오느냐. 내가 먹던 대로 내가 익숙한 대로 이미 형성된 입맛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기숙사에 한 5년을 살았는데 제일 걱정이 뭔고 하니 주말입니다. 토요일과 주일은 식사를 안줍니다. 방학 때도 안주고. 이건 다 가버리면 갈 데 없는 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만 몇 사람 남아서 어쨌든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이 돈은 많지 않고 하니까 늘 나가 사먹을 수만은 없고, 그래서 뭘 좀 사다가 이렇게, 그치만 불법입니다, 그러나 양해를 구하면서 방안에서 좀 해 먹었어요. 그런데 이 인도학생들은 양고기를 사다가 이걸 이렇게 카레라이스를 방안에서 만들어 먹습니다. 우리는 양고기를 먹어도 가능하면 냄새 덜 나는걸 좋아합니다. 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 냄새 때문에 먹는 건데요. 냄새 지독한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카레라이스 끓이는 냄새가 좌우간 온 기숙사에 진동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냄새가 싫은데 그렇다고 문화관계니까 남보고 나무랄 수도 없구요, 뭐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나가다 보면 문을 열어 놓고 먹으면서 들어와서 같이 먹자 그래요. 카레라이스 만들어서 손가락으로 먹으면서 쪽쪽 빨아먹는데, 아주 맛있게 먹는데 같이 앉아서 먹어보니깐 도저히 저는 넘길 수가 없어요. 웬만하면 제가 가리지 않는데 도저히 못 먹겠어요.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이렇게 맛있게 먹는걸 보았어요. 자, 여러분 이것이 입맛이라는 겁니다. 먹던 음식 좋아하는 거죠. 그래서 인류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40세가 넘으면 네살 때 먹던 음식을 좋아한답니다. 옛날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재벌 댁에 가서 무슨 얘기를 좀 하다가 점심시간이 돼서 같이 점심을 해봤는데 아주 돈 많은 재벌이요. 그런데 누릉밥을 만들어서 된장찌개 해서 먹더라고요. 도대체 그렇게 많이 돈 벌어서 이게 뭐냐 그러니까 내가 이거밖에 좋은 게 없는데 어떡하냐 이거예요. 그 입맛이죠. 그 입맛, 그 입맛의 성향이 있듯이 귀도 듣는 성향이 있어요. 그래서 길들여진 대로 듣는 것입니다. 악한 습관에 빠지게 되면 귀가 이상해집니다. 욕을 많이 듣고 쓰는 사람은 욕이 아니면 말이 아닙니다. 그것도 알아야 됩니다. 욕으로 해야만 듣지 조용하게 하는 말은 안 들어요. 들려지지도 않아요 그거는요.
난 아주 슬픈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대한 수도원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무슨 강연이 좀 있어서 강사로 갔었는데 거기서 들은 이야기인데요 창녀생활을 오래했어요. 십여년동안 하고 그리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전도사가 됐어요. 그분이 간증하는 이야기인데요 자기는 전도할 때 길에 다니면 창녀에게 전도한데요. 창녀라고 써붙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느냐 그랬더니 “내 눈은 못 속입니다. 요조숙녀처럼 차리고 지나가더라도 딱 보면 너는 창녀다” 내가 안대요. 접대부다, 그러면 그를 따라가서 어떻게 전도하느냐고요? 어깨를 꽝! 하고 때린답니다. 딱! 하고 때리면 홱 돌리면 “야, 예수 믿어! 지옥 간다” 그런대요.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전도 하냐, 친절한 말로 전도해야지 했더니 아, 가슴이 아픈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네 세계에서 친절한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남자들이 와서 ‘아가씨 예쁩니다, 상냥합니다, 늘씬합니다’ 다 거짓말이라 이거야. 그러니까 “야! 너!” 고것만 진짜라 이거야. “너 죽어!” 그것만 진짜로 들린다는 거예요. 이 얼마나 기막힌 이야기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떤 아주머니가 부부간에 너무 싸움이 심해서 만날 때마다 싸우니 이거 이럴 수 있나 해서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런데 방송을 들으니까 방송에서 하는 말이 그저 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그래야 그 가정이 행복해질 거라고. 마음으로만 그러지말고 말로 사랑한다고 하라고 그래야 좋다 그래요. 저녁에 들어오고 술 취하고 들어온 남편을 놓고 사랑한다고 한 마디 했답니다. “여보, 당신을 사랑해요” 했더니 “미쳤냐!” 하고 딱! 하고 때리더랍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말이라는 것도 늘 듣던 말이라야지 생전 처음 들으면 조롱거리로 들리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누구 칭찬해보세요. 칭찬 들을 수 있는 사람 있고 안 들을 사람이 있어요. 칭찬하면 비웃는다 그래요. 사람 무시한다 그래요. 가지고 노느냐 그래요. 꽝! 하고 터집니다. 칭찬도 아무한테 하는 게 아니에요. 안 그렇습니까? 또 여러분 자신도 그렇죠. 이 마음이 비틀어지고 괴로울 때 누가 칭찬한다고 하면 그게 바로 들려집니까? 오히려 화가 나지. ‘이거 누구를 조롱하는 거요 이거?’ 안 그렇습니까? 그런 고로 이 듣는 귀가 문제예요. 바로 듣지를 못해요. 순진하게 듣지를 못해요.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굳어졌고 비틀어졌고 병들어지고 오염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소중한 친절한 말도 혹은 칭찬하는 말까지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오히려 역겹게 이렇게 반작용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파커 J 팔머 라고 하는 분이 The Courage to Teach 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문화를 단절된 문화라고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먼저는 다른 사람과 만나는 걸 싫어한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마음 문을 여는 것을 싫어해요. 도대체가 만나는 걸 싫어하는 그런 세상이 된 거예요. 또 하나는 다양성을 싫어해요. 나는 내가 이것이 제일 좋은 줄 아는데 이거 외에 또 있다는 것 용납할 수가 없어요. 내가 제일 잘난 줄 알았는데 또다시 잘난 사람이 있다는 건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어. 바로 그런 마음이요. 그래서 거부하는 거요. 다양성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거예요. 자기 집착에 빠져서 자기 외의 세계를 전혀 용납할 수가 없는 거죠. 또 하나는 정체성의 상실이요. 자기 자신이 빈곤해지고 나니까 피해의식에 매여서 누가 나를 헤칠까, 누가 나를 업신여기나 누가 나를 형편없다고 하나 겁이 나서 만사를 도전적으로 대하고 투쟁적으로 대하고 경쟁적으로 대하고 그리고 피상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말을 하지도 않지만 듣지도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슬픔이 있습니다. 모처럼 듣는 중요한 복음까지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누가 나를 사랑한다, 사랑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라고요. 그래서 아주 닳고 닳아서 거기 어떤 종자가 떨어져도 그 땅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 씨앗이 그냥 길가 그 길 위에 맴도니까 새가 와서 주어먹고 말았다 이것입니다. 돌짝밭과 같은 곳이 있다. 그 소위 작은 그 틈 사이로 씨앗이 들어가기는 해서 자라기는 자라는 거 같으나 깊이가 없어서 피상적으로 받고 건성으로 듣기 때문에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없고, 가시 떨기와 같다. 세상 염려와 재리 같은 그 많은 복잡한 근심걱정에 함께 있으니까 이 복음이 복음성을 바랄 수가 없고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질 못하고 시들고 만다. 그러면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 모든 잡초를 다 제거하고 모든 돌도 다 제거하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옥토같은 그런 마음 귀를 가져야 복음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고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렇게 받을 때만이 구원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가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꽤 오래 전에 했습니다. 맨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 때만 해도 지하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법이 서서 말하면 설교고 앉아서 말하면 좌담이거든요? 그래서 설교를 앉아서 하면 괜찮고 서서하면 안되는 거예요. 그런 때에 좌담식으로 앉아서 설교를 이렇게 했는데 다하고 나니깐 좀 더하라 그래요. 또 했죠. 좀 더하라 그래요. 그래 설교를 몇 개 했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집사님 한 분이 벌떡 일어서더니 하는 말이 “오늘의 교양 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더라구요. 오늘의 교양, 설교라는 말은 몰라요. 오늘의 교양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그렇게 하는 이야기를 듣고 참 제 마음이 흐뭇한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전폭적으로 지지한 거요. 전적으로, Total Acceptance, 그 마음만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 예수님은 설교 때마다 말씀 하셨던 거 같아요. 마지막 끝에 가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나는 너에게 말을 했어요. 씨를 뿌렸어요. 그러나 옥토 같은 마음이 있는 자, 옥토 같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에게만 말씀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거예요. 악으로 찌들고 불의로 찌들고 강퍅함으로 찌들고 의심으로 병든 그 귀로써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소용없고 그 많은 날 들어도 은혜를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사도행전 7장 51절에 보면 귀에 할례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귀가 할례를 받아야 되요. 귀가 중생을 해야 되요. 귀가 치료되어야 됩니다. 그리고야 복음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말씀합니다. 듣는 자세가 중요하고 듣는 마음이 중요하고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듣는 인격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들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인격 속에 역사하고 구원의 역사를 중생의 역사를 온전케 하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란 말이죠.
여러분 잘 아시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날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마르다는 음식을 만들고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가서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마르다가 화가 났어요. ‘이 바쁜데 예수님은 어째서 마리아를 불러 이야기만 하고 저거 마리아를 나를 도와서 이 일을 좀 도와주도록 하지 않는가’ 불평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이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정말 이것은 목회하면서 늘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때 교인가정에 심방을 가보면요 심방 가서 음식을 부엌에서 장만하고 있어요.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려야겠는데 이렇게 쭈욱 앉아가지고 이제 주위에 들어와 앉아야 예배를 드리지 않겠어요? 자꾸 분주하게 하니까 “어서 빨리 들어오세요, 예배드립시다” 그러면 하는 소리가 “먼저 드리세요. 음식 가지고 갈께요.” 도대체가……. 이럴 때마다 마리아를 생각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대접입니까? 정말로 귀한 대접은 듣는 거예요. 듣는 마음이에요. 잘 들어드리는 거예요. 그 최고의 효도요 최고의 충성이요 최고의 접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사무엘상 3장 9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스물한살에 왕이 됩니다. 이 많은 백성을 어떻게 다 살릴 수 있을까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일천번제를 드리고 밤을 지내는데 밤중에 솔로몬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게 구하라. 나는 네게 무엇을 줄까?” 그때 솔로몬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히브리말로 “레브 쉐미드”입니다. ‘레브’라는 말은 마음이라는 말이고 ‘쉐미드’라는 것은 듣는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할 때에 이것을 Wisdom 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레브 쉐미드입니다, Understanding Mind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옛날 구약에는 Hearing Heart 직역을 했습니다. 듣는 마음이요. ‘하나님이여 듣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역사의 소리를 듣고 양심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듣는 마음이 있어요. 듣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들을 수 있어요. 언제나 들려옵니다. 가깝게 들려옵니다. 여러분, 마음을 비우고 믿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극구 칭찬한 백부장이라는 로마 군인이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와서 자기의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그러면 내가 네 집에 가자.” “아뇨, 오시지 마세요” 그리고 백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으로만 하세요. 제가 순종하겠나이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데려오라면 데려오고. 말씀으로만 하소서.” 이렇게 말할 때에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온 이스라엘 중에도 이같은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노라.” 아주 최고의 믿음으로 칭찬을 했어요. 어떤 믿음? 듣는 믿음. 듣고 순종하는 게 아니라 순종하고 듣는 거예요. 순종을 맹세하고 듣는 거예요. “말씀만 하세요 순종하겠나이다” 이 믿음이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믿음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경청하고 집중하고 청종하고 순종할 때 말씀의 위대한 역사가 바로 그 심령 속에서 그 인격 안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이 강하게 주는 말씀하시건만 우리 마음 귀가 어두워진지 오래서 듣지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들을 수 있는 귀, 들려지는 귀, 복된 귀를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은혜요 듣는 마음도 은혜요 듣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신 줄 압니다. 주여 이 시간에 크고 위대한 역사를 나타내 주셔서 참으로 들을 귀를 가진 복된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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