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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2.03.31
제 목 :그리하여 주와 함께 있으리라
본 문 :데살로니가전서 4 : 13 ∼ 18
이번 달 가이드 포스트지에는 특별한 보고서가 실려 있습니다. 현재 터키에 이스탄불이라고 하는 수도가 있고, 그 수도는 본래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이 콘스탄티노플 그 옛 도성 안에 성 소피아 사원이라고 있습니다. 아마 중동지구를 여행했던 분들은 한번씩 다 다녀왔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1700년 된 엄청난 성전입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1700년 전에 어찌 이렇게 큰 성전이 지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세 차례나 지진을 만났습니다마는 이 집은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서 있어서 기독교문화의 그 화려했던 옛날을 우리에게 증거해 줍니다. 거기에 소장되어 있는 비밀한, 아주 소중한 보고서가 있어서 이것을 이번 가이드 포스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제목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라고 하는 문건입니다.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빌라도 총독의 보고서로서 대단히 중요한 증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나라의 운명까지도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각하께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시작이 되고 그 다음 내용은 대체로 성경에 있는 기록과 비슷하게 그 내용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는 ‘원치 않았지만 폭동이 무서워서 희생양으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비었고 제자들은 용기를 내서 예수 부활했다고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하나님에 아들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각하,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 본디오 빌라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부활절을 당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될 문제는 부활의 역사성입니다. 부활을 철학적으로 추상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문제가 아닙니다. 혹은 도덕적으로 설명할 문제도 아닙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철저한 사건으로부터 기독교는 시작이 됩니다. 이 역사적 사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 될 것입니다. 사실로 인간의 인간 됨은 바로 그의 생각에 있는 것이올시다. 생명은 바로 생각입니다. 믿음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영생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생각하라. 메멘토 도미니, 주님을 생각하라. 복잡한 일이 많겠습니다마는 이 두 가지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기에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각하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은 동물입니다. 알고 사는 것이 인간이요 아는 만큼의 인간은 존재합니다. 믿는 만큼에 우리의 생명의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요. 거기에 영생이 있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예수의 부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부활은 예수의 부활만이 부활이요 그것만이 부활입니다. 말로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비사로도 어떤 논리로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본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실일 뿐이지 우리가 알고 모르고 믿고 안 믿고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사실대로 실재할 뿐입니다. 부활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만이 부활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Immortality, 소위 영혼불멸같이 그런 이론도 아닙니다. 물론 옛 생명의 회생도 아닙니다. 특별히 윤회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며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설명해주는 또 증거해 주는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요 우리에 대한 약속이요 우리의 생명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그 어느 때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구속사적인 사건입니다. 첫 열매가 되십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우주적인 사건이며 구속 사건이며 동시에 부활에 대한, 부활 생명에 대한 증거며 우리에게 향하신 예표요 우리 생명에 향하신 약속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죽음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은 동물성인 죽음이요 하나의 자연현상이올시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은 절대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일 뿐이지 그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요. 오히려 자유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출생의 신비입니다. 성장의 신비입니다. 요새 뭐 DNA니 혹은 유전학이니 유전공학이니 해서 많은 연구를 합니다마는 뭐 그 ‘유전자를 읽었다. 해득했다’ 뭐 이런 얘기들이 신문에 납니다. 굉장한 것처럼. 문자 그대로 해득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의 세계를 요만큼 해득 좀 해놓고 뭘 다 알고 문제의 해결이라도 난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요. 여러분, 여러분 생전에 죽지 않을 약이 나오리라고 착각하진 마세요. 죽어요, 그러니까 그런지 아세요. 그거는 아닙니다. 늙지 않는다고 해서, 안 늙어도 걱정이죠 사실은. 안 죽어도 걱정이죠. 여러분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에요. 그 성장이 신비롭고 유전인자가 신비롭고 죽음이라는 그 자체가 뭐냐? 점점 더 신비로워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과학자들이 더 신앙이 좋아요. 연구해갈수록 점점 더 깊은 세계를 발견해요. 놀라운 것이에요. 더욱 부활이라는 것은 더더욱 신비로운 것입니다. 참 생명이 육체라는 옷을 잠깐 입었다가 그 어느 순간에 벗어버린다고 생각하세요. 이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인간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을 “잔다.” 잔다고 세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잔다. 예수님도 멀쩡하게 죽은 사람 지금 죽었다고 모두가 울고 있고 장례식까지 하고 있는데 “잔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관은 휴식이올시다. ‘잔다.’ 잔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쉰다는 말이에요. 피곤해서 좀 쉬는 겁니다. 우리가 힘써 일하고 밤에 피곤해서 잡니다. 그 잠자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쉬는 것이요. 그리고 잔다는 말은 그 속에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잠자는 것 가만히 보면 애들 자는 건 예쁩니다. 어른 자는 건 영 아니에요. 게다가 코를 드렁드렁 골다가 숨넘어갈 것같이 꿀꺽거리면은 아이구 이거 참 힘들어요. 그래서 내가 잠드니 말이지 깨서 그거 계속 들으라고 그러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그 안에 있으니까. 죽은 것 같으나 생명이 그 안에 있어요. 그게 자는 것이에요. ‘잔다’는 말은 ‘생명이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혹 여러분이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아프고 답답하면 죽었을까? 아이고 얼마나 숨이 답답할까?’ 그리 생각하십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죽음은 자는 것과 꼭같습니다. 생명은 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잠들어서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과 꼭같은 현상으로 죽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지옥 갈까 걱정하세요. 그거나 걱정하세요. 또 주님 앞에 가서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까 그런 걱정을 하더라도 죽는 자체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고 숨막힐텐데 그거 어떡하지?’ 그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러분 잠들 때 그 걱정했습니까? 잠자는 것은 죽는 연습입니다, 그게. 매일매일 우리는 죽는 연습을 하고 죽었다 살았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잠이라는 것은 현상이야 어떻게 전개되든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 속에 생명 있다’ 그 말이요. 또 하나는 잠이라는 말은 잠에서 깰 때가 있다. ‘깬다’ 그 말이요. 지금은 자지만은 깨어날 때가 있어요. 그것을 내다보기 때문에 “잔다” 그랬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죽어서 장례식을 하는 사람을 보고도 “잠들었다.” 예수님의 능력이 플러스알파로 역사할 때 그건 깨어나게 되는 거죠. 그 깨어날 아침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잔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평화롭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게 잔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잠이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잔다. 이게 문제올시다. 그리스도 안에 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잔다. 여기에 죽음을 넘어서는 엄청난 신비가 있는 것이올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를 믿고 그의 능력 안에 사는 거요. 그리고 자유한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 산다, 그리고 잠들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잔다고 말했습니다.
스텐버그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The Psychology of Love 라고 하는 책에서 사랑의 3요소를 말합니다. 우리가 인격과 인격관계에서 서로 믿고 사랑한다는 게 뭘 의미하느냐? 그것은 바로 Intimacy – 친밀감을 말한다는 것이죠. 가깝게 느낍니다. 상대방의 행복을 증진시키고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찹니다. 지시를 받으려는 마음, 지시하려는 마음으로 꽉 찹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거요. 여러분,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그 철없는 어린 아이들, 부모님의 사랑을 가까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잠깐만 떠나도 못삽니다. 그런데 따로 떨어져 노는 것 같이 장난감 가지고 놀고 친구와 같이 노는 것 같아도 지금 부모님이 여기 계시고 부모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고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친밀감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를 떠나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어요. 그러한 그러한 느낌이 실제적으로 육체의 생활 속에도 나타나고 있어요. 이 친밀감, 마치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그러면서 어머니의 눈을 쳐다보고 있는 거와 같이 바로 그러한 관계 친밀함이 있어요. 이것은 두 생명의 연합을 말하는 거죠. 또한 둘째는 정열이올시다. Passion 입니다. 관심이 있고 사랑과 사랑의 대상에 몰두합니다. 그의 사랑을 담뿍 받으면서 아무 구속이 없습니다. 자유하며 행복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Total Commitment 올시다. 전적으로 위탁을 하고 헌신합니다. 독립되게 별도로 걱정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에게 다 맡기었어요. 내 생명을 그에게 다 위탁해 버렸어요. 그리고 그의 뜻을 그대로 나의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자,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고 그리고 죽었어요. 이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자는 사람이다. 잠깐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장차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다. 지금도 영원히. 생명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요 그것은 헌신이요 그것은 행복이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엄청난 자유와 용기입니다. 그것으로 영원한 세계까지 이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활 생명 속에 사는 오늘의 생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마더 테레사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선물’ 이라는 책에서 한평생 인도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생을 바친 이 수녀 테레사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선교적으로 사는 모습이다. 선교적으로 산다, 선교사적으로 산다. 다시 말하면 사명을 지니고 사는 거예요. 이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거요. 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요.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거예요. 증인으로 살고 선교사적으로 사는 것이요. 엄청난 사명을 지니고 삽니다. 두 번째는 명상가로 산다 그랬어요. Meditation,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명상이란 한가지만 생각하는 거요. 거기다가 사랑과 정열을 쏟는 거예요. 그 외에는 전혀 생각지 않는 거예요. 이게 명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쳐다보고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아요. 명상가적으로 사는 것이다. 셋째는 보편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의인이면서도 죄인 속에 삽니다. 선하면서도 악한 사람들 속에 보편적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마는 죄악 세상에 아무 불평 없이 그대로 흡수되어 살아갑니다. 철저한 보편성, 여기는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부하건 가난하건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철저한 보편성을 지니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순성을 말합니다. Simplicity. 그렇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말합니다. 심령의학에서도 말합니다. 병이 왜 생기느냐고요? 복잡성 때문에 생깁니다. 딱 한가지만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은 엄청난, 병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생각하고 저 생각하고 생각이 분열 분산되기 시작하면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니 병균을 이기지 못합니다. 단순성, 사랑에 대하여 단순하고 믿음에 대하여 단순하고 생의 목적에 대해서 단순하고 사명감에 대해 철저하게 Simple mind, Simplicity, 집중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생애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독일의 젊은 신학자였던 본 회퍼, 순교자입니다. 그는 기독교 윤리라는 책에서 에케 호모(ECCE Homo)라고 하는 유명한 말의 논문을 씁니다. 에케 호모라는 말은 Behold this man, 이 사람을 보라, 하는 말이요. 예수를 빌라도 앞에선 예수를 지칭한 말입니다. 그런 예수를 이런 각도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우상화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우상화하지 않았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직도 뭘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잘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처럼 깨끗이 지워버리세요. 자기가 우상화되는 것처럼 맹랑한 게 없어요. 별것도 아닌 것이 대단한 거처럼 착각을 하고 있어요. 잊어버리세요. 예수는 자기를 철저하게 우상화하지 않았다. 두번째는 성공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실적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내가 뭘 했노라. 예수님 병 고치고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랬어요. 그 많은 역사를 하고도 오히려 피했어요. 실적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했다면 뭐 했다는 얘기입니까? 여러분 자기 공적을 성공을 절대로 우상화해서는 안됩니다. 셋째는 죽음을 우상화하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 앞에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그늘이 전혀 없이 살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근심이나 공포가 전혀 없이 깨끗하게 정말 영원을 지향하며 가장 임시적인 세상을 아주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 부활사건 역사적인 부활사건이 이 제자들을 통해서 부활 신앙으로 화합니다. 부활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부활 신앙이 되고, 부활 신앙이 될 때 부활 생명이 됩니다. 이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빌라도가 이것을 긍정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막을 길이 없다고요. 부활생명은 가장 위대한 능력이요 지혜요 삶의 힘인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의 보장을 받고 그 믿음에 살고 그 사랑으로 살고 그 감격에 살고 그 능력에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가장 중요한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때때로 외면하고 스스로 자기를 우상화하면서 허망한 일에 끌려들며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며 부활 사건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부활 신앙을 새롭게 함으로써 순전하고 단순하고 보편적이고 거룩한 영생으로 이어지는 귀한 생을 오늘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할 그날의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 승리 생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