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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3.02.23
제 목 :그치지 않는 고통
본 문 :로마서 9 : 1 ∼ 5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라고 하는 분을 여러분이 압니다. 그는 인생을 종종 올림픽 경기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올림픽 경기에 나가 본 일이 있습니까? 만약, 경기장에 나가보면 거기에 네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어쩌면,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경기장은 꼭 같습니다. 첫째, 많은 날 동안 훈련을 쌓았고 절제하고 수고하고, 노력을 해서 경기장에 나아와서 최선을 다해서 뛰고 면류관을 받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 사람은 오로지 관중을 상대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장사꾼이 있다. 누가 경기를 하는지 이기는지 지는지 상관없습니다. 그저, 관중을 상대로 물건을 팝니다.” 요즘은 주로 오징어를 많이 팔더군요. 이렇게 물건 파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 장사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선수들에게 갈채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 자기편 사람이 이기면 정신없이 미친 듯이 갈채를 하고, 또 옆 사람들과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긴 사람들과 자기와 감정을 동일시 하면서 그렇게 미친 듯이 떠드는 사람이 있더라― 네 번째 사람은 그냥 구경하는 사람이 있다. 누가 이기든 말든 잘했든 못했든 상관없고 그냥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피타고라스는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느쪽입니까?” 인생 네가지 종류 중에 당신은 어느쪽이냐구요.
생각이 없는 동물보다 생각하는 인간이 아름답습니다. 때때로 보면, 동물의 세계가 평화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없습니다. 고민하는 동물 없습니다. 인간은 고민하므로 인간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가만히 텔레비전에서 보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자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자가 더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더욱이 숫사자는 팔자가 좋은 녀석입니다. 사냥은 모두 암사자가 하고 숫사자는 다가가서 으르릉 하고 뺏어먹고…… 그런데 숫사자는 24시간 중에 20시간을 잔다고 합니다. 잠꾸러기라고 합니다. 먹고자고, 먹고자고…… 그래, 그 동물이 행복한 것입니까? 여러분, 고민이 없는 동물이기 보다는 많은 고민이 있는 인간, 그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고민이라고 하면, 자기 중심적인 고민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먹고 내가 어떻게 되고, 내 명예가 어떻고, 내 체면이 어떻고…… 그저 나, Egocentric, 자기중심적인 고민에 빠져요.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을 아름답게 봅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음식을 먹일 때, 아이는 안먹겠다고 도망 다니는 것을 붙들어서 좀더 먹이려고 한 수저만 더 먹으라고, 이래저래 더 잘 먹이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마음, 역시 어머니의 마음은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먹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행복이 아닙니다. 아이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자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항상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정성을 기울이는 고민하는 그러한 고민 말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는 과거에 속한 고민이 있습니다. 옛날에 ……잘못된 일도 있고, 잘된 일도 있고, 원한이 있고, 억울함이 있고, 분하고…… 여러분, 이제쯤은 잊어버려도 되는데, 아직도 과거일을 생각하며 그 마음이 민해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래지향적 고민을 합니다. 이대로 하면 안되는데…… 이대로 가면 파국인데,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불안해하는 그런 보다 더 인간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오로지 물질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글쎄요, 좋은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텔레비젼에 비쳐지는데, 증권 회사의 보드가 비쳐집니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쭉 앉아 있는데, 의자는 비교적 좋더군요. 앉아 있는 사람들 얼굴이 하나같이 썪었습니다. 제대로 된 얼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되었다 싶습니다. 증권이 올라가면, 조금 웃었다가 내려가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물질에 목숨을 거는…… 확실히 잘못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 신령한 세계를 위해서 고민해 보셨습니까? 내 영혼이 왜이렇게 어둡지? 내 생각이 왜 이렇게 잘못 가고 있지? 내가 왜 이렇게 심령이 점점 나약해지고 허무해질까? 내 영혼이 왜 이 모양이 되어가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며 고민하는 그런 실존적인 고민,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민,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민이란 곧 아픔을 말합니다. 마음의 아픔인데, 민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고민합니다. 여기에 한차원 높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분석하십시오. 이것이 선택적이냐 불가피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일, 또한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어찌 할 수 없이 당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오늘도 선택하며 내가 스스로 취하는 고통이냐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환경에 밀려가는 존재는 홍수에 떠내려가는 물건과 같습니다. 아무 생명력이 없습니다. 같은 고민을 해도, 사랑에서 진실에서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내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선택하는 고민, 그것만이 그리스도인적인 고민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 마음에 아픔이 있다고…… 지울래도 지울 수 없고,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계속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치지 않는 고통. 그것은 바로 그 민족을 향한 애국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의 속국입니다. 당시의 정부는 없습니다. 헤롯정부라는 것은 허깨비이고, 로마정부가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영광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다윗의 왕국은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메시아는 언제 오실 것입니까? 간절한 민족을 향한 정열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그는 이 애국심을 선교열로 이렇게 승화시킨 것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때에나 그러하지만, 민족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 애국심이 몇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이 약소 국가들 어느 나라든지 그렇습니다. 첫째는 항거입니다.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들과 싸워보겠다는 것입니다. 반항을 합니다. 또 하나는 타락입니다. 단식과 절망입니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애국적 타락입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젊은이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이 풍지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어라 마셔라합니다. 이것이 바로 망국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공부한다면,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공부를 하느냐? 농사를 한다면, 너의 나라가 없는데, 무슨 농사를 짓느냐? 그리고 먹고 마시고 술집에서 유곽으로… 이 민족이 한 때 그렇게 타락을 하더니 망국적인 풍속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까짓거― 이것이 무슨 짓입니까? 딴에는 애국심이라고 합니다. 이 행동이…… 애국적인 타락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반항입니다. 그래서 반 사회적인 행동을 불사합니다. 폭도가 됩니다. 독립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모든 것은 정당화 될 수 있다는 폭도가 되고 강도가 되고 도적이 되고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만주벌판에서 많이 있었습니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잘못된 일들을 많이 했는지 몰릅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목적만 남고 방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당시에는 가장 온건파로 인정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제라도 다시 시작하자.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가르쳐라 배워라. 성실과 근면이다. 애국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라. 애국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라. 애국하는 마음으로 정직하라. 안창호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런 방법으로 교육을 하였습니다. 사회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애국운동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선교열입니다. 애국은 곧 전도다. 이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산다. 그러므로 전도하라. 그저 어떤 목사님들은 일생에 교회 백개를 세웠다고 자랑합니다. 정말입니다.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이것이 애국심이었습니다. 나라를 살리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 그래서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삼일운동이 바로 교회 부흥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애국심은 신앙적이요 복음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 바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 언제나 어떤 때나 어떤 사건에서도 잊을래도 잊을 수 없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고통. 민족을 향한 뜨거운 정열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딴 나라에 가서 열심히 전도하고 다니지만, 자기 민족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이방사람들도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데, 어찌하여 유대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가…… 그뿐입니까? 율법주의니 뭐니 해서 계속 괴롭히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 까지도 괴롭히는 유대 사람들을 보며, 그는 통탄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말합니다. 원하는 바라고…… 내 골육 친척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을 원하는 바라고. 어디까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자세히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얼마나 희생하면 되겠습니까? 물질을 희생할까요. 시간을 희생할까요. 지식을 바칠까요. 생명을 바칠까요. 바울은 말합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은 오늘 로마서 8장에서 봅시다. 38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리스도와 나와의 사랑의 관계는 그 어느 것으로도 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저주를 받아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단적으로 다시 말씀을 드리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내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내가 지옥가서 이 백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언제라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뜨거운 정열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애국심입니다. 사도바울의 그 민족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저주를 받을 지라도. 내 민족이 돌아와 주면, 그 엄청난 정열로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어느 마을에 가나 유대사람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는 곳 마다 유대사람들은 그를 핍박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그를 핍박한 사람은 전부 유대사람입니다. 때로는 신학적으로 때로는 성서적으로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디모데서를 보면 한평생 나를 괴롭힌 자가 있느니라. 그만큼 그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울을 버렸으나. 바울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간혹 북한에 가게되면, 똑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오셨습니까? 동무 아버지가 공산당원에게 살해될 때에 동무가 그 옆에 있었다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돕기위해 왔습니까?” “그럼요. 그래도 나는 사랑합니다. 나는 북한을 사랑합니다. 내 민족 내 형제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를 죽였지만, 나는 공산당을 사랑합니다.” 왜요? 몰라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어떤 희생을 치뤄서라도 저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었습니다. 롤로 메이의 The Courage to Create란 책이 있습니다. 사람의 용기는 몇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신체적 용기, 도덕적 용기, 사회적 용기…… 마지막 창조적 용기 그것은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에서 유로 향하는 것입니다. 용기는 용기일 뿐이요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없고 결과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창조적 용기 바울은 그렇게 그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며 가장 잔인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대로 그대로 사랑했습니다. 특별히 그의 애국심을 신학적인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자세히 알게 됩니다. 저는 로마서를 책을 두 번 썼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자세히 읽어나가보면, 9장 10장 11장. 로마서 16장 중에 세장을 이스라엘에 대한 산앙고백을 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앙간증이 바로 로마서 9, 10, 11장에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여기 시작이 됩니다. 여기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심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의 것이고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에게서 낫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저 앞에 있는 종말론적 이스라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입니다. 여러분, 가끔 저는 서운한 말을 듣습니다. 요즘 경제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어렵다고 하니, 이민이나 갔으면……말조심 하세요. 꿈에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를 간다는 말이십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어려울수록 내가 필요합니다. 망막할수록 우리가 여기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절대 소망을 읽지 않았습니다. 선민의 자부심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영광을 항상 가슴에 지니고 성경을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그의 간증이 여기 있습니다.
1919년 4월 31일 미국 기독교 연합회 동양 문제 연구 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예수교인만이 참혹한 식민 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 민족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식민지 정책에서 절대로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신앙이었습니다. 1905년에 편찬된 우리 옛날 찬송가에 보면, 1장이 황제폐하 찬송이고 이 14장이 애국가고, 10장이 애국송입니다. 구라파에 가보면, 많은 교회들이 찬송가에 애국가가 들어있습니다. 당연히 그러합니다. 나라 사랑하는 노래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지금 우리 찬송가에 애국가를 넣으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오늘도 우리 애국가를 찬송가로 부를 것입니다. 본래 찬송가 14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합시다. 우리 조상들은 애국과 신앙을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순국이 곧 순교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민족의 살 길을 신앙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기도하며 죽었습니다. 3.1.운동을 신앙운동으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젊은 이상재 선생이 감옥에 갇혀서 모진 고통을 치룰 때에 누가 이 일을 시켰냐고, 누가 만세운동을 시켰냐고 매질을 할 때에 그는 시종일관 같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시켰소. 하나님이 시켰소. 이 신앙고백이 한국 교회의 부흥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다.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3.1.운동이 없었다면, 2차대전이 끝났다 하더라도, 우리는 일본에 편입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아셨습니까? 우리는 3.1.운동이 있었기에, 이것을 살아있는 민족이다. 이것은 독립된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나라도 교회도 3.1.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거룩한 귀하고 자랑스러운 백성. 자랑스러운 조상의 후예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치지 않는 고통을 말하던 사도바울의 신앙으로 오늘도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고, 분명 우리 나라를 사랑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3.1.만세를 부르며 죽어가고, 나라를 위해 기도했던 우리 조상들을 생각합니다. 그 조상들을 생각하며 그 후예로써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민족의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의 할 도리를 다 할 수 있도록, 선교적으로 우리의 모든 정력과 진실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