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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믿음으로 살리라

하박국 2: 1 ~ 4

곽선희 목사

2002.12.15

날 짜 :2002.12.15
제 목 :그 믿음으로 살리라
본 문 :하박국 2 : 1 ∼ 4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행사에는 꼭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이 노래의 제목인 아니마밈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믿는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작사 작곡된 그리고 불리워진 노래입니다. 인간 역사의 가장 험악했던 사건, 600만명의 유대인을 무참히 죽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고생을 하던 유대사람들이 거기에서 작사 작곡해서 계속 많은 유대인들이 부르며 위로를 받았던 그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 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 간단한 가사를 계속 반복해서 부르는 그런 찬송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자신의 동료들이 그대로 끌려서 가스실로 나가는 것을 봅니다. 죽음을 향해서 끌려가는 그 모습을 볼 때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들은 이 찬송 뒤에 한 절을 더 넣어서 불렀다고 합니다. 추가된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한 외과의사는 절대로 그 마지막 가사를 부르지 않았답니다. 그는 확실히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늘 단정히 행하고 죽음을 앞둔 시간이지만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가면서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끝까지 버티고 견디고 믿음으로 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죽지 아니하고 수용소 문을 나오게 됩니다. 나오면서 그는 마지막 절을 고쳐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너무 서둘러서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그래서 믿음을 포기하는 자가 많다’라고 불렀답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물질로 삽니까? 물질 주도적으로 사는 그 수준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건만 떡으로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돈이 좀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어쩌다가 돈이 좀 작아지고 가난하고 어려워지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슬퍼합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 철학까지도 완전히 물질의 소유에 의해서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물질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배우고 깨닫고 공부하고 그것을 큰 기쁨으로 알고 그리고 무엇을 좀 더 알았을 때 그는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뻐할 뿐 아니라 지식적으로 자기만 못한 사람을 멸시하는 취미로 삽니다. “저것도 모르고, 무식한 것” 뭐 이래가면서. 유식해 보았자 별 것도 아니건만 그렇게 그 지식, 그것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분으로 삽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feel로 삽니다. 감정이 가는대로 삽니다. 언젠가 한 번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 드라마를 들어보았더니 어떤 점이 잘못되어 가지고 실연이 된 것 같은데 두 사람이 포장마차에 들어가면서 하는 소리가 “오늘 아예 끝을 내자” 그럽니다. 어쩌자는 것입니까? 기분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이런 기분파, 이것을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낭만파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집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기로 사는 것입니다. 죽을만한 일이 있어도 억울해서 못죽습니다. 오기로, ‘내가 두고보자, 내가 반드시 이길 거다’ 그런 집념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수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죽을 때 자신도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눈으로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 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의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 상황을 훌쩍 넘어서서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이제는 말씀드립니다. 우리 소망교회가 세워진 동기에 소위 behind story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사실은 막연했습니다. 어떤 직장이나 일터가 보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돌아올 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그저 비행장에 내릴 때부터 시작해서 누구든지 맨 처음 오라, 하는 곳이 있거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로 가서 제 일평생을 살 것입니다. 그렇게 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5개월 지내는 동안에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아, 이거 큰일 났더라고요. 먹고 사는게 어려웠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제 친구들이 만나자고 해서 차 한 잔 마시고는 금일봉을 주더라구요. 그래서 그것을 얻어가지고 살면서 제가 받을 때 한마디 했습니다. “내가 거지냐?” “내 친구가 하는 말이 거지가 따로 있냐? 얻어 먹으면 거지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그러더라구요. 그러던 중에 어느날 한경직 목사님께서 어떻게 알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어찌 소식 없이 그렇게 불쑥 나타났나?” 그래서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간다 온다 하겠습니까” 했더니 “그 사람 참 믿음이 좋으네” 그러더니 며칠 있다가 다시오라고. 그 다음에 갔더니 세가지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러이러한 세가지가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겠나? 그래서 저는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제가 어짜피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왔는데요 나보다 나를 목사님께서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선택권을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이 선택해 주는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받겠습니다. 말씀하세요” 했더니 어느 대학의 학장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학대학교에서 교수일을 했고 그리고 목회 생활을 했습니다. 대학 행정이라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4년동안만 가서 하라고 그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학장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놉니다. 이 교회 저 교회 방문을 하게 되는 중에 여기서 몇 사람이 모여서 수요일 저녁에 기도회를 한다고 해서 제가 압구정이 북에 있는지 동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밤에 차를 타고 이리로 같이 왔습니다. 이것이 소망교회를 세우는 일이 되었고 저는 그 학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3년 반동안 이 학교 일과 교회일을 겸직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위해 전념하면서 오늘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작은 일이던 큰 일이던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합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권을 그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산다. 그 믿음으로. 이 믿음은 내 욕망이 아니고 내 소원이 아니고 내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대나라와 이스라엘이 다 타락했습니다. 종교, 정치, 문화 할 것 없이 전부가 타락을 하고 죄악으로 가득 찼기에 선지자의 신령한 눈으로 볼 때에는 기가막힙니다. 이 멸망할 수밖에 없고 멸망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박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성문에 올라가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찌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망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정해놓으신 것입니까?” 그렇게 울부짖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기다려라. 정한 때가 있나니,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무서운 심판이 있다. 있을 것이다.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심판을 넘어서 구원의 역사가 있고 밝은 아침이 있고 메시아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말씀하시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미래지향적입니다. 현실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상황을 넘어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밝은 미래를 저 높은 곳을 지향합니다. 그 소망 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또한 그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봅니다. 미래를 향하여 가는 오늘의 process도 그 깊은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압니다. 매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진노 속에 긍휼이 있습니다. 혼미함 속에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저 앞에 있는 약속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약속을 믿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 이것은 소중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선물입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이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분이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 선교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리빙스턴이 이렇게 무려 16년 동안을 모진 고생을 하고 잠시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그를 맞으러 나왔던 고향사람들은 리빙스턴을 보고 모두가 목을 놓고 울었습니다. 너무너무 초라해졌습니다. 스물일곱번이다 열병을 앓아서 죽을 뻔 했기 때문에 뼈만 남았습니다.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그의 허약해진 몸을 보면서 모두가 울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자에게 물려서 오른쪽 팔 하나는 간신히 붙어있을 뿐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모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를 위로했습니다. 글래스코우 대학에 가서 젊은이들에게 강연을 했을 때에 대학생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선교사님, 그 어려운 고통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그 아프리카 오지에서, 외롭고 무서운 곳에서 어떻게 그 많은 시련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까? 그는 담담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끝날가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말씀을 딱 부여잡고 그 말씀을 믿고 살고 힘들얻고 용기를 얻어서 오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이, 그 믿음이올시다.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삽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헬라 원문이나 히브리어를 놓고 문법적으로 보면 여러분, 문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하는 말씀이 되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는 말이 됩니다. ‘믿음으로’라고 하는 에크테우스 에크피스토스라고 하는 말을, 이 부사구를 주어에 붙이느냐 동사에 붙이느냐에 따라서 뜻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그것은 교리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것은 윤리입니다. 기독교 교리와 윤리가 통합된 대단히 중요한 딱 한마디의 복음입니다. 자,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는 기다립니다. 믿기 때문에 기다립니다. 아무 불평없이 기다립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믿으니까. 반드시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니까 여유도 있고 평안함도 있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러나 믿습니다.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평안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말합니다. 정한 때가 있나니,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얘들이 무엇을 달라고 하고 그럴 때도 그냥 선뜻 내줄 수가 없습니다. 줄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기다려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에 가서야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있는 것이지 아무때나 달란다고 아무거나 줄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이든 때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요. 믿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기다린다고 하는 믿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경륜을 간절히 믿고 온유 겸손하게 기다립니다.
또 하나는 먼저 가 본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 시점에 있지만 먼저 가봅니다. 내가 지금 젊지만 늙은 상태를 생각해봅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저 길을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그는 편지마다 그날에, 그날에, 그리스도의 날에를 계속 강조합니다. 그 날이 반드시 있을 일이요. 그 날을 생각하며 거기서부터 오늘을 생각합니다. 먼저 가 보고 그 미래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듣는 말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보는 것을 봅니다. 믿음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죽을 지경으로 매를 맞고도 정신을 차리면서 찬송을 불렸습니다. 그 신비한 기쁨은 누구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만의 지식이 있습니다. 그만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들으며 삽니다. 들려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현실 사건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습니다. 버려진 사건이 없습니다. 내가 실수했던 성공했던 잘했던 못했던 누구를 만났던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을 위해서 있는 일입니다. 다음을 위해서 있는 일입니다. 에스더가 유명한 말을 하지 않습니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하는 말입니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여러분, 순간순간이 다 소중한 의미를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체험하게 되고 약속이 분할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증하면서 살아갑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 하나가. 어느날 한가한 시간에 손자 손녀를 앞에 쭉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보니까 어린아이들의 마음 속에도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늑대 두 마리가 있단다. 그런데 늑대 한 마리는 아주 악한 늑대로서 화를 잘내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거만하고 거짓말하고 교만하고 아주 못된 그런 늑대 한 마리가 있고, 또 한 마리의 늑대는 기뻐하고 평안하고 사랑하고 소망을 주고 인내하고 아주 온유 겸손한 그런 복스러운 늑대 두 마리가 있단다. 이 두 마리가 항상 싸운다.” 항상 싸운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가만히 있다가 “그래요 내 마음에도 늑대 두 마리가 있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한 아이가 묻기를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마음 속에도 늑대가 있나요?” “그럼, 두 마리가 있지”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런데 어느 늑대가 이겼나요? 두 마리가 싸워서 누가 이겼나요?”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겼지.”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십니까?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못된 것에다가 관심을 두고 거기에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내가 먹이를 주는 대로 그 늑대가 이긴다고 아주 지혜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잊지 말아야합니다. 의심은 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심은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의심이 마음 속에 좀 지나가는 것인데 무슨 죄가 되겠나까 해서 죄인줄 몰라서 회개도 안합니다. 의심이 쌓이고 쌓여서 모든 악의 근본이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지은 죄가 바로 의심이라고 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원죄의 속성입니다. Original Sin, 원죄의 속성이 의심입니다. 의심 불신이 씨가 되어서 모든 죄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믿음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진노를 믿고 그리고, 보십시오. 저 앞에 있는 구원을 믿고 약속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아는 것이 있습니까? 아는대로 진실하십니다. 모르는 것이 있습니까? 믿고 따라가십시오.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 거기에 충성을 다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이거든 믿고 순종하십시오. 의인은 오직 그 믿음으로 살리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이만큼의 믿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때로 휘청휘청할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일어나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기도하는 것은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하옵소서. 오직 믿음의 사람이 되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느끼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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