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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 11 ~ 19

곽선희 목사

2001.11.18

날 짜 :2001.11.18
제 목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본 문 :누가복음 17 : 11 ∼ 19

몇 년전에 브라질에 있는 유명한 아마존 숲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40m나 되는 아주 큰 나무, 꼭대기 나뭇가지 사이에다가 꼭 까치집처럼 지은 방이 있습니다. 그 호텔에서 그 방이 제일 비싼 방입니다. 어쨌든 사다리를 타고 한참 올라가야 되는 그런 방에 또 역사적인 일이었기에 그 방에 들어가서 며칠을 유숙한 일이 있었습니다. 밤에 자는 동안에 지붕 위에 원숭이들이 모여가지고 얼마나 시끄럽게 하는지 정신이 없고요,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 문 앞에 원숭이들이 있다가 막 달려듭니다, 뭐,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뭐, 그런 아주 짐승들 속에서 며칠을 지내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 사장님 되시는 분하고 제가 좀 사귀었는데 이 분하고 같이 숲을 지나갈 때 그 사장님이 누군가를 다 아니까, 이 짐승들이, 그래서 바나나를 한바구니 이렇게 들고 가면서 특별히 어린 원숭이들이 올 때 하나씩 주는 거예요, 이렇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을 받아갈 때 탁 잡아가지고 가로채가지고 도망을 가요. 빼앗듯이. 매일같이 그렇게 준다는데도 그렇게 좀 공손하게 받지를 않고 받고 탁 잡아채고는 막 도망을 가요. ‘저것이 왜 저럴까?’ 그래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했더니 그 사장님은 전문가거든요. “이것이 동물과 사람이 다른 겁니다.” 아주 인생 철학을 말씀하시더라고요. 동물은 내가 한평생 바나나를 이렇게 주어도 고마운 줄 모릅니다. 이게 특징입니다. 저 ‘왜 저렇게 도망가느냐?’ 그것은 불신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을 주고 자기를 붙잡을까봐 그저 이것만 받아가지고는 도망을 가요. 참 귀중한 진리를 들었습니다.
공산권을 방문해 보면, 하나같이 못삽니다. 그 못사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간단합니다. 공산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공산세계에서 많이 듣는 말이 혁명입니다. 혁명, 투쟁, 쟁취. 지금 북한에 식량이 모자라서 요새 남새 채취 작전을 합니다. 혁명입니다. 그것도 혁명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들판이고, 산이고 먹을만한 풀은 다 뜯어오라 이거야. 온 시민이 다 나서서 지금 풀뜯기 작전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얘기지요. 여러분, 혁명, 파업, 쟁취 이런 말을 듣는데 쟁취를 통해 얻은 것은 감사가 없습니다. 그건 빼앗은 거니까요. 그래서 이 붉은 띠를 두르고 뭐 ‘결사투쟁’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참 마음이 서글픕니다. 저렇게 얻는 것도 없지만은 얻어도 불행합니다. 왜요? 감사가 없잖아요. 이건 빼앗은 것이지 얻은 게 아니거든요. 그 세계에는 감사가 없어요. 감사하지 않는다고 벌하는 형법은 이 세상 어디도 없습니다. 그러나 탈무드에 아주 명언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아니한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를 때 벌써 그는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다시 벌할 것도 없어요. 감사하지 않는다고 감옥에 보내는 법은 없어요. 그러나 그는 벌써 불행이라고 하는 심판을 받고 있더라 그 말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문둥병자를 만났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문둥병이라는 것이 언제 걸리는 지도 모르게 걸려가지고 서서히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참 비참한 병입니다. 손발이 떨어지고, 코가 떨어지고, 눈알이 빠지고 이러면서 마지막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문둥병인데, 이 당시 이것은 난치병이요,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병에 걸렸다 하면 가정에서 격리됩니다. 사회에서도 버림받습니다. 심지어는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어느 동굴같은데서 모여 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얼마의 식량을 보내주면 그걸 먹고 살고요, 만일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때를 지어 동리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질렀지요. 그래서 얻어먹는 그런 집단입니다. 여기 오늘 열명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 저주받은 인간들을, 저주받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와요.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라” 그랬습니다. 제사장은 당시에 의사입니다. 그런고로 문둥병이 나았는지 문둥병이 아직 있는지는 제사장이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너는 나았다” 라고 인정을 하면 그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뭐 안수한 것도 아니고 안찰한 것도 아니고 깨끗케한 것도 아니에요. 그저 “제사장에게 보여라.” 이 말을 듣고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 만큼의 믿음이 있었고 이 만큼의 순종이 있었어요. 그 제사장에게 보이려고 가는 길에 보니 나았어요. 얼마나 희한합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그 순간 사마리아 사람 하나는 길을 돌려서 예수님께로 와서 발 앞에 꿇어 엎드리고 사례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가 조건은 아닙니다. 감사가 그들의 준 강한 의무가 아니더란 말이에요.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렇게 와서 감사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고 예수님 돌아오라고 말씀한 바 없어요. 돌아와서 감사해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섭섭해하시는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는 의무가 아니더라고요. 감사가 조건도 아니에요. 그러나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와서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야 마땅하지 않느냐? 그것이 오늘 성경에 나타난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뭐 그 사람들 감사 안했다고 해서 병이 다시 재발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너 감사하지 않았으니 영원히 너는 문둥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예수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슬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아홉에 대한 이야기가 늘 궁금해요. ‘그 아홉의 변명’ 이라고 하는 작자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한 사람은 ‘의사와 제사장에게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겠다’ 해서 갔다는 겁니다. ‘이게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는지.’ 아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지’ 그래서 가버렸어요. 두 번째 사람은 혹, ‘재발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고로 며칠 두고 봐야겠다.’ 이거, 신중론이요. 이거 나았다고 하는데 꿈같은 얘기라서 정말 나았는지 좀 기다려 봐야겠다는 거예요. 세 번째 사람은 ‘내 병은 본래 문둥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던가보다.’ 이건 회의론자올시다. 또 그 다음 사람은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았을 거야.’ 이건 자연현상으로 보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일들이 많잖아요. 어떤 병 걸렸다가 나았을 때, “어떻게 나았어?” “그저 뭐, 약도 좀 쓰고 병원에도 가긴 했지만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나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또 하나는 병 걸리기 전에 가졌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이게 궁금해요, 이제 먹고 살아야겠으니까. 그래서 그걸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어요. 또 한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요. 그래서 가버렸다. 또 한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해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도 아니고, 안찰을 한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아, 그저 “가서 보여라” 한 말씀 밖에 안했는데 아, 뭐 예수님이 별로 해준것도 없는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란 말이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 예수님의 능력을 상대화 해버렸단 말이죠. 또 한사람은 ‘이 모습대로 갈 수는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께 가야지.’ 그래서 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 한사람은 이 모습 이대로. 이게 중요한 거예요. 문둥병자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요. 그 더러워진 거, 그 붕대감고 있는 거, 이 모습 이대로, 그거라면 어떠냐? ‘예수님이 벌써 우리를 환영해주시고 사랑해 주셨는데 이 모습 이 추한 모습이면 어떠냐?’ 이거예요. 이 모습 이대로 예수님 앞에 나왔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사례하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그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한사람은 우선 감사했어요. 최우선적으로 감사했어요. 예수님이 감사를 조건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것이 조건이 될 때는 율법이요. 오직 은혜로 쓰시고, 은혜로 받고, 은혜로 말씀하시고, 은혜로 순종하고, 오직 은혜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고 있어요. 의무적인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이렇게 참 그 추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감사의 사례를 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R. A. Toray 라고 하는 목사님께서 쓰신 책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미시간 주에 풍랑이 일어나서 배 한 척이 파손이 되었어요. 그때 한 수영선수가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가서 무려 스물세명이나 구조를 했어요. 그것이 신문에 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몇 년 후에, 아주 오랜 후에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미시간호에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 청년 하나가 23명의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습니다’ 하는 그런 설교를 했더니 설교가 끝났을 때쯤 해서 한 노인이 하는 말이 “제가 바로 그 청년입니다” 그랬어요. 예배 후에 내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와서 차를 나누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그때 겪었던 일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했더니 이 노인이 하는 말이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도 온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상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어려워지는 것입니까? 직선적이고 바로 그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 못하게 됩니다. 하루만 지나도 몇시간만 지나도 생각이 바뀝니다. 오늘 이 아홉사람의 변명처럼 말이에요. 감사 못할 이야기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요. 못하게 되어버리고 말아요. 바로 이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영영 못합니다.
여러분, 슬픈 얘기입니다만은 1980년 아웅산 묘역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들, 무려 방문단 17명이 살해되는 테러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참가했던 분이 마침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지만은 길이 막혀서 조금 늦게 간 것 때문에 그 끔찍한 사건에서 면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부랴부랴 대통령과 같이 비상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시간이라서 비행장에 새벽 4시에 내렸는데 다 그냥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뭐 서로 인사도 안하고 흩어졌는데, 이 분도 내리긴 했는데 깜깜한 밤에 이거 어떡하나? 그래서 우선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기사가 물어봅니다. “어디로 갈까요?” 그때 그는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꼭 죽어야 할 사람이 지금 살았는데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소망교회로 갑시다.” 도저히 집으로 먼저 갈 수가 없었더라는 거예요. 그는 새벽기도회에 한번도 안나온 사람입니다. “우선 교회로 갑시다.” 교회 마당에 왔는데 글쎄 대통령 따라간 분이라서 돈을 한푼도 안가지고 갔어요. 택시비를 줄 돈이 없어요.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제 새벽기도 나오는 분이 있을테니까 아무나 붙들고 부탁을 해서 돈을 꾸어가지고 택시비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잠깐 기다리니까 아니나 다를까 교인이 오더래요. 그래서 부탁해서 돈을 꾸어서 택시비를 주었대요. 그리고 들어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노라고. 여러분, 가끔 제가 길에 나가면 대낮에, weekday에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을 만나요. 서로 인사하면서 “어떻게 이시간에 교회에 나오십니까?” 여러 번 같은 얘기를 듣습니다. “제가 지금 중한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퇴원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생명을 다시 찾았는데 내가 집으로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 기도하고 가려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잘한 일이올시다. 바로 이 시간, 바로 직설적으로 즉각적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전화 받아보셨어요? “가스가 나왔습니다” 그러대요. 저도 한번 맹장 수술을 급히 받아본 적이 있는데 이런 수술을 받은 다음에 의사와 환자가 같이 기다리는 것이 가스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만일 안나오면은 재수술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가스가 나오면 아, 살았다고, 서로 고맙다고 전화를 겁니다. 가스가 뭡니까? 방귀예요, 방귀. 여러분 허구헛날 방귀뀌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죠? 이 시간에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이게요. 여러분 환난과 고통, 역경, 그것이 사람의 생각을 깊게 만들고 깨달음을 만듭니다.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있을 때, 행복이 따라오는 것이올시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형통할 때, 평안할 때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원망하고요 가장 절박한 어려움에 있을 때 감사할 뿐 아니라 미처 감사하지 못한 것까지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한번 방문에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준 세계가 갈채를 보내는 감동적인 인간승리의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것은 천상의 목소리로 가스펠 송을 부르시고 있는 그런 가스펠 싱어의 수기입니다. 레나 마리아 라고 하는 분의 수기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장애자로 두 발이 없습니다. 다리도 한 다리가 짧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장애를 오늘이 있게 한 본질적 요소였지 이것은 장애가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받을 때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자체가 레나 마리아의 삶을 태양보다도 더 밝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잘되고 평안한데서 감사가 우러나오는 줄 알지만은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형편에서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깨달음이 없이는 감사가 없습니다. 고통이 없이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깊은 세계에서 감사하고 감사할 때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절대적인 관계에 감사가 있고요 직선적 이해에 감사가 있고요 절대적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신앙적 이해 속에서만이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사건의 결과가 아닙니다. 감사는 생의 동기입니다. 행복이 어디 있느냐고요? 행복해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행복이 되는 것이올시다. 감사함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종은 울려서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감사가 없는 곳은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네 믿는 대로 되리라. 너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이 축복이 이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감사하는 은혜, 그리하여 은혜로 은혜되게 하는 은혜, 그리고 범사에 형통한 은혜,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당연히 감사할 일이 있건만,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것을 용서하옵소서. 이제서 뉘우치며 감사드립니다. 주여 깊은 세계에서 감사하게 하시고 감사로 우리의 생의 의미를 바꾸어 행복하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기도응답을 받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늘 승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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