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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1.07.22
제 목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본 문 :사무엘상 16 : 6 ∼ 13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 그 옛날에 여러분 잘 아시는 진시황이라고 있었습니다. 그 진시황의 아버지 되는 ‘여불위’라고 하는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에 대해서 ‘6험론’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폈습니다. 이 방법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까지도 오랫동안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을 등용하고, 사람을 배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그의 재능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의 외모나, 그의 재능, 현대식으로 말하면 그의 지식, 그의 경험, 그의 기술, 그의 재력, 이것 가지고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다같이 겪는 대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됨입니다. 사람됨이 기본입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재능이라던가, 지식이라던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이 사람됨이란, 지식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의 재능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 사람됨이 바로 되어야 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사람이 즐거울 때 그 즐거움에 얼마나 빠져드는가 하는 것이에요. 즐거운 일이 있을 때 만족하게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즐거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남 다 즐거워하는 있을 때, 혼자서 울고 앉아 있어요. 그 뿐 아니라 남 다 기뻐하는 일에 옆에서 이상한 말을 해가지고 초 치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 구제불능입니다. 즐거운 일을 만족할 줄 알고요 선물을 받았으면 선물, 그것을 놓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선물이 어떻고, 얼마 짜리고 뭘하고, 또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즐겁지 않았던 일, 그 자리에서 생각해내면서 그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은 사람됨에 기본이 잘못된 것이에요. 둘째는 기쁠 때에 얼마나 그것을 자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쁘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이 기쁜 마음을 억제하기도 합니다. 우리 학생들 입학 때 보면 그렇더만요. 우리 아들은 입학을 했는데 이웃집 아들은 떨어졌어요. 그러고 나면은 우리 아들 입학했다는 말을 못해요. 기뻐도 기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저 집 아들은 삼수 했는데 또 떨어졌으니 이거 어떡하면 좋은가? 그래서 내 기쁜 마음을 내가 억제하는 것이에요. 그 기쁜 마음을 억제할 줄도 아는 그것이 바로 바로 된 사람이에요. 자기만 기쁘다고 남이야 어떻든 말았든 촐랑거리면 그거 가벼운 사람이에요. 또 세 번째는 괴로울 때 얼마나 참아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괴롭고 아프고 할 때,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하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병원을 방문해 보면 거 좀 아플 때가 있지요. 뭐 수술하기도 하고, 또 혹은 실밥을 빼기도 하고 아무튼 편할 리가 없지요. 하지만 거기서 두가지 사람을 봐요. 어떤 분은 꽤 아프겠는데도 불구하고 잘 참아요. 그래 여러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이거 분명히 아프겠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참는가. 그 인격을 높이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좌우간 뭐 생사람 다 잡아요. 얼마나 아프다고 야단하는지 뭐 그런다고 자기가 안아파집니까? 이런 정도의 인간의 그게 저질이라 이말이예요. 그래서 괴로울 때 이걸 스스로 잘 참을 줄 아는 사람, 그런 게 필요하구요 또, 두려울 때에 얼마나 나타내지 아니하는가? 깜짝 놀라는 일이 있어도 호들갑을 떨지 않아요. 신중히 생각을 하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이렇게 잘 견딘다는 말이에요. 이런 사람. 또, 사람이 슬플 때에 얼마나 스스로 삭일 수 있느냐? 이 슬픈 마음을 스스로 삭여야 되요. 내가 스스로 삭여야지, 누가 도아줄 수 있습니까? 내 슬픈 마음은 내 것입니다. 누가 옆에서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나 하나만 잘 삭이면 모든 사람이 평안할 수 있겠어요. 슬픈 마음을 삼키고 잘 삭일 수 있는 사람, 그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섯번째는, 성 났을 때나 화가 났을 때 얼마나 개의치 않을 수 있는가? 불같은 화가 나지만은 잘 다스려요. 이 후유증을 생각하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고로 마음을 다스리고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 쓸만한 사람이에요. 화가 났을 때 이것을 억제하고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 그 사람은 더 볼 필요가 없어요. 큰 일 낼 사람이니까요. 몸이 큰 사람을 거인이라고 합니다. 거인. 마음이 큰 사람을 거물이라고 합니다. 거물급이라고. 글쎄올시다. 왜 물건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몸이 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이 커야 바로 큰 사람이 되겠습니다.
유명한 성공학자인 지그지글러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트레이닝 비즈니스에 있어서 대가인데, 그분의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고도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재능이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이다” 그랬어요. 많은 재능이 그 사람의 값을 높여주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값은 그 사람의 삶의 자세에 있는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학자적 평가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이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이름을 가진 다윗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사무엘 선지가 이새의 집을 찾아갑니다. “내가 사울왕 겸손할 때 왕으로 세웠지만, 교만해서 내가 저를 버렸노라. 그런고로 다음 왕이 될 사람을 네가 찾아가서 기름을 부어라.” 그런데 이름을 대주지 않고 다만 “이새의 아들 중에 있느니라. 가보라.” 그래서 이새의 집을 찾아옵니다. 와서 아들들을 다 내 놓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기름을 붓게 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제 성령이 감동을 해서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인 것을 말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라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14대 후손이요 유다지파의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여덟번째 아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내용은 자세히 보면은 굉장히 드라마틱한 장면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집 아들 중에 하나님이 택한 다음 대의 왕위를 이을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기름을 준비해 가지고 가노라. 너의 아들들을 내게 보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새는 생각하기를 ‘아, 이거 굉장한 일이다’ 생각하면서도 이제 아들들을 죽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다윗은 차안(此岸)에 부재함입니다. 생각지 않았어요. 설사 우리 아들 중에 왕이 될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건 아니라고 아버지가 평가했어요. 그래서 일부 아들만 다 보여주었어요. 아무리 봐도 이중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이 “가만있자, 아들이 이것 뿐이냐?” “하나 더 있는데요.” 저는 거기에 괄호하고 한마디 써넣었으면 좋겠어요. “하나 더 있기는 한데 신통치 않구요, 그거는 아닙니다. 그거는 아니예요. 그래서 양을 치라고 해놓았습니다” 그런 얘기요 이게 지금 얘기가. 그러나 사무엘 선지는 “불러오라.” 다윗을 불러와 놓고 보니 바로 그것이 다윗왕이요.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난 이 다윗에 대해서 바로 이 어린 다윗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자 우리 집에 왕이 될 사람이 있어서 사무엘 선지가 온다더라. 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중요한 시간인데, 형들이 “야! 넌 양이나 치고 있어” 그런다고 순종하겠습니까? “여보시오, 나도 얼굴 좀 봅시다. 아니 사무엘 선지 얼굴이라도 좀 봅시다” 그럴 것 같은데, 이걸 형님들이 “너는 양이나 쳐라” 한다고 해서 그대로 앉아서 양을 치고 있는 이 다윗 소년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주 어질고 훌륭한 데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됨이 거기서부터 벌써 특별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은 다윗이라는 이름이 995회 나옵니다. 제가 보통 800회라고 늘 얘기해 왔는데 오늘 취소합니다. 자세히 컴퓨터로 조사해 보니까 아니요. 995회, 그만큼 다윗이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사람의 이름 중에는 최고로 많이 나옵니다. 다윗.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라고 그를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 보니까 “그 신장과 외모를 보지마라. 내가 이를 버렸노라.” 신장과 외모, 사울왕은 컸거든요. 그거 필요없다. 얼굴 잘난 거 필요없다 이거예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 중심을 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이요 그렇게 외모가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여러분 아십니까? 거 이상합니다. 저는 이 결혼주례하면서 늘 봅니다. 어떤 때 보면 특별히 예쁜 아가씨가 있더라구요. 그렇지요? 제가 이 결혼주례자로서 제일 먼저 감상을 합니다 이렇게. 신랑도 옆에 있잖아요. 나만 정면으로 보는 거라고. 이게 특권이에요. 난 그래서 결혼주례를 좋아해요 제가. 얼마나 재밌습니까? 일생에 제일 예쁜 시간이거든. 그걸 내가 감상을 합니다 30분 동안. 그런데 재미있는 게 하나 있어요. 얼굴이 대체로 예쁜 여자는요 음성이 안예뻐요. 인정하세요? 그 다음에 보니까 “사랑합니까?” 그랬더니 “네”하는데 보니까 남자음성이에요. 그러면 내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아 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나씩 주었어요 전부다. 대개 얼굴이 예쁜 사람이 음성이 안 예뻐요. 또 그런가 하면 얼굴이 ‘이건 신부지만 왜 이런가’ 싶어요. 그런데 거 음성이 아주 예뻐요. 잠깐 그 사이에서 둘이서 서로 눈짓으로 얘기하는 걸 봐도 아주 예뻐요. 사랑스러운 데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루고루 주었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거 분명한 것은 말이에요. “신장을 보지 마라. 나는 중심을 본다.” 그 속사람을 보시겠다는 것이지요.
성경에도 그렇겠지만 일반적으로 봐도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얼굴이 울퉁불퉁하고 눈이 작고 눈이 툭 튀어나와 가지고 키는 작고, 아주 볼품 없었대요. 이게 철학자 소크라테스입니다. 칼빈이라는 사람, 이 종교개혁자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몸과 얼굴이 아주 빼빼 말랐어요. 그리고 눈에는 항상 진물이 흐르는, 볼품없는 사람이었대요. 깡마른 사람이요. 또 아브라함 링컨은 몸과 얼굴이 아주 깡마르고 다리가 너무 길고, 그래서 고릴라라고 하는 별명이 있어요. 볼품없는 사람이었어요. 외모로서는 말입니다. 사도바울도 키는 작고 시력도 나쁘고 전설대로 보면 간질병까지 있는 사람이었어요. 사도바울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당신의 사람들을 쓰셨어요. 어떤 사람인가 한번 봅시다. 다윗이라는 사람은 믿음이 있고 신앙적 용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확실하고 그것을 생활 속에 옮겨갑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그런 말씀도 있어요. 내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곰과 사자가 왔더라구요. 이놈을 몽둥이로 가지고 나가서 때리고 수염을 잡아뜯어서 내가 죽인 바가 있습니다. 왜요? 용기요. 신앙과 용기가 있었어요. 그런가 하면 물맷돌로 골리앗 대장을 때려눕히는 그 용기. 이건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연구해보면 이건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왜요? 다윗은 실수가 너무 많아요. 허물이 너무 많아요. 저는 그저 몇 곳 보았는데, 전문가가 연구를 하고 책에 써놓기를 성경에만도 스무곳에, 스무곳 이상의 씻을수 없는 실수와 죄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겸손하여 즉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정직함이 있구요 특별히 그의 회개에 중요한 점은 절대로 변명이 없습니다.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를 않습니다. 책임을 환경에 돌리지도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인간인고로” 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밧세바와의 관계를 보세요. 이 간음이라는 것은 두사람이 하는 거 아닙니까? 더구나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죄를 회개할 때에 그는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의 실수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 내가 책임을 집니다. 그건 내 잘못입니다. 아무 변명도 없고, 책임전가 의식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이요.
그 뿐 아니라 그는 감정을 억제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그가 밧세바의 아들, 그 아들을 낳았을 때, 이놈이 죽어갑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간절히 기도하고 사흘동안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저렇게 아들을 사랑하고 저 아들이 죽을까봐 걱정하고 기도하고 금식을 하는데, 이거 죽었으니 어떻게 왕에게 이거 죽었다는 말을 할까? 걱정들을 했습니다, 신하들이. 그러나 죽은 다음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다윗은 벌떡 일어나서 온몸을 씻고 여전히 나가서 왕의 집무를 봅니다. 신하들이 깜짝 놀라서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아들을 위해서 그렇게 슬퍼하더니 죽었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일어설 수 있습니까?” “그가 죽기 전에는 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혹시나 용서하실까 함이요, 죽었으면 하나님이 데려간 것이고, 그는 내게로 올 수 없고 나는 그에게로 가리라.” 아주 깨끗하게 과거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고 명랑하게 그가 할 일을 다 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여가지고 헤매지 않았어요. 그는 아주 감정억제를 잘 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구요.
또한, 제일 제가 사랑하고 싶은 점은 이 점입니다. 이 엄청난 죄를 회개한 후에 그가 왕위를 내려놓고 하야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같아서는 왕관 내던지고 ‘아이고 부끄러워라’ 그리고 베들레헴에가서 양이나 치다가 말년을 살겠다고 하겠지요. 꼭 그랬을 것 같아요. 나도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어요. 밧세바와의 관계가 그렇고 그 남편을 죽인 죄가 그렇고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은 다 회개하고 그대로 왕위에 앉아서 삼권을 한 손에 쥐고 재판도 하고, 행정도 하고 왕의 일을 감당해 나갑니다. 그 부끄러운 모습으로 말입니다. 어째서 그랬을 것 같습니까?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가 만일에 왕위를 버렸다면 그는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그의 회개는 진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는 순간, 회개로부터 이제 오는 모든 결과는 다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애당초 내가 왕이 된 것은 내 의로 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의가 있고 내가 잘나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처음부터 하나님이 불러 쓰시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내가 이 일을 할 뿐이지, 내 의가 내 진실이 내 충성이 내 능력이 왕위에 있게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겸손이요 이것이 진실한 믿음이었어요.
그래서 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만 순종을 해나갑니다. 특별히 십여년 동안 다윗을 죽이려고 사울이 쫓아다닙니다. 장인이 사위를 죽이려고, 왕이 신하를 죽이려고 쫓아 다녔지만은 그는 얼마든지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굴에 있을 때나 들에 있을때나. 그래도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장인되는 사울이 다웃을 향하여 창을 두 번이나 내 던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대항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끝까지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으로 섬겼습니다. 그의 신앙이요 그의 겸손입니다.
특별히 시므이 사건은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왕위를 내놓고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이것도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그를 만나서, 베냐민 지파올시다. 사무엘하 16장 5절 이하에 보면은 그가 다윗왕을 가로막고 돌을 던지며 저주했습니다. 돌을 던지며 저주했어요. 아비새라고 하는 장군이 옆에서 칼을 빼고 저놈을, 이 죽은 개 같은 놈을 내가 가서 목을 베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말 한마디면 끝납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입니다.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보세요.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버려두라.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잘 견딥니다. 잘 참습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이것이 그의 겸손이요 그의 진실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을 믿고 친구를 믿고 많은 일을 그대로 맡길 줄 아는 사람이요.
또한 그의 시편에서 보면 믿음의 조상들을 잘 연구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경력과 역사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시편131편은 유명합니다. 다윗의 진실한 고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는 겸손합니다. 나는 이적을 바라지 않습니다. 큰일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의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아주 진실하고 정직한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중심을 보십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십니다. 그리고 세관에 앉아있는 세리 마태를 부르십니다. 18년 된 귀신들린 여자도 예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고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또 미래를 보십니다. 나다나엘의 미래를 보고, 베드로의 미래를 보고, 바울의 그 미래를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디모데서에 보면 부잣집에서는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깨끗한 그릇만은 하나님이 쓰신다 그랬습니다. 지도력이란 게 어디 있습니까? 진정한 지도력은 믿음과 겸손과 진실이 있는 것이에요. 이것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어요. 결코 의인이 아니에요. 깨끗한 사람도 아니었어요. 믿음의 사람, 아주 겸손한 사람, 그리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의롭지도 깨끗하지도 못합니다만은 또 다시 겸손하지도 못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윗의 믿음과 정직함을 보시고 그를 귀히 여기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함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며 하나님이 늘 함께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주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