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냉수 한 그릇의 의미
날 짜 :2001.02.25
제 목 :냉수 한 그릇의 의미
본 문 :마태복음 10:40~42
요 근자에 뉴욕타임스에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아주 작은 또 그리고 많은 감동을 주고있는 책이 있습니다. A 6th Bowl of Chicken Soup for the Soul 이라고 하는 그런 책인데요, 거기에 나오는 짤막한 이야기 한 토막, 아주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있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주 임종이 가까운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지금 병원에 입원되어 있으면서 아주 순간순간 점점 어려운 시간을 맡고 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심장마비와 또 이에 따르는 강한 진통제로 인해서 정신이 몽롱해진 가운데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다 희미하게, 감각이 희미해진 그런 상태입니다. 이제 간호원이 큰 소리로 이분에게 외쳤습니다. “할아버지, 아드님이 오셨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했지만은 간신히 눈을 돌릴 정도입니다. 간호원은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드님이 왔습니다.” 그때 건강하게 생긴 해병대 복장을 한 청년 하나가 문에 들어섰습니다. 윤곽을 알아볼 정도밖에는 분명하게 사람을 볼 수가 없는 상태고 말을 하고 싶지만은 말이 안 되는 그런 시간입니다. 아주 쇠약해진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청년은 그 손을 두손으로 꽉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말은 없습니다. 이렇게 한밤을 꼬박 지내게 됩니다. 의사와 간호원이 간간이 들어와서 지금 상태를 체크했습니다. 간호원은 정성스럽게 앉아있는 그 청년을 보고 이렇게 너무 피곤하게 지내지 말고 잠깐 눈이라도 좀 붙여야되겠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은 이 청년은 머리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여전히 그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고 손을 꼭 쥐고 있습니다. 한밤을 아주 고대로 세웠습니다. 새벽녘이 되었을 때 이 노인은 세상을 떴습니다. 그리고 꽂아놓았던 산소 호흡기라던가 모든 주사바늘을 다 뽑고 제하고 간호원이 이런 일을 다 한 다음에 이제 물러서게 될 때 이 청년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노인은 누굽니까?” 간호원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노인의 아들이 아니세요? 이 노인의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세요?” 할 때에 청년은 말했습니다. 아니라고요. “전혀 아닙니다.” “근데 어떻게 해서 그 노인과 함께 밤을 세운 겁니까?” “제가 이 병실 문을 여는 순간 ‘아차’ 무슨 착오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언가 사무착오가 되어서 동명이인이 되어서 내가 여기에 왔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노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거기에 사로잡혔고 도저히 내가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이 자리를 지켜야했고 임종을 보아야 했습니다. 나는 도저한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목이 타는 듯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수 한 그릇입니다. 오직 냉수 그 외에 아무 것도 소원이 없습니다. 사랑에 목말라 하는 임종이 가까운 이 노인에게는 누군가가 옆에서 손을 잡아줄 바로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간절한 소원을 뿌리치지 아니한 이 청년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가장 행복한 그런 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여러분 잘 아시는 테레사 수녀는 말합니다.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니라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도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친다고 하지만 고독과 절망은 아무 것으로도 고칠 수 없고 오직 따뜻한 사랑뿐이라고요.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한 개의 빵 외에 그 어떠한 것으로도 사랑을 설명할 수는 없다. 여러분, 빵 하나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빵 하나에 담긴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메말랐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어느 때 이렇게 돼버린 일이 없어요. 인간성이 이 모양이 되고야 전들 어떻게 행복하겠습니까? 어찌 이 땅에 복이 임하겠습니까? 누구를 탓하지 마세요. 인간 심성이 이렇게 되고는 절대로 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사랑이 없어서 죽어 가는 불쌍한 심령들이 불쌍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냉수 한 그릇, 그건 작은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큰 집, 좋은 시설, 굉장한 대접, 그거 바라지 않아요. 냉수 한 그릇 말입니다, 냉수 한 그릇. 여기 목숨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바로 몇 주일 전에 제가 북한 평양을 며칠 다녀왔습니다. 놀란 것은 고려호텔, 제가 여러 번 가봤지만 그런 일 없었어요. 고려호텔, 그 큰 호텔에 난방시설이 없습니다. 영하 18도 추위에 난방 없이 잠을 자야했습니다. 그러나 춥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그 누구도 춥다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외국 사람들까지도 춥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 춥다고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추위를 견디지만은 저 거리, 저 농촌에는요 수많은 사람이 움막에서 굶으며 이 추운 겨울을 지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 어떻게 춥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습니까, 죄 받을 마음이지. 어찌 춥다고 생각이라도 하겠습니까?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절박한 현실이라는 게 뭡니까? 우리는 그까짓 거 하죠? 냉수 한 그릇에 목숨을 걸었다니까요.
보세요. 지금 우리가 나진에 고아원을 세우고 열었습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거기서 자라고 있는데 여기서 일하는 분들, 한 달에 월급이 18불입니다, 18000원. 이게 얼마냐?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10불이면은 다섯 식구가 한달 살 수 있는 생활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산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어떻게 연명한다는 것을.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유를 묻지 마세요. 이렇게 굶주린 자가 바로 지척에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더 잘살기를, 더 복 받기를, 무슨 뭐…… 뭘 더 바란다는 얘입니까? 그리고 원망, 불평입니다. 이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스운 얘기하나 할까요? 어느 날 신앙심이 아주 두터운 교인 하나가 길거리에 나섰다가 아주 끔찍한 보았어요. 한끼의 식사가 없어서 헤매는 사람, 노숙자들도 보고요 젖이 나오지 않는 빈 젖을 빨면서 우는 어린아이를 보았어요. 너무 비참한 모습을 보다가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비참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대책을 세울 겁니까, 안 세울 겁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협박기도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대책이라고? 이 답답한 녀석아, 내가 심심풀이로 너를 만든 줄 아느냐?”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뭐냐 이거예요. 나는 넉넉히 주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상에 넉넉한 양식을 주었습니다. 온 사람이 이제부터 50년까지도 충분히 먹고 남습니다. 사람들이 못돼서 너무 많이 먹어. 그래가지고는 뭐 찜질방에 가서 땀을 흘리고 앉아있어요. 그거 죄요. 적게 먹으면 되지. 이 짓을 하고 있으니 이 땅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어요? 하나님의 시각에서 한번 내려다보세요. 지척에는 이 모양이고 바로 여기서는 또 이 모양이니,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냉수 한 그릇, 그와 같은 것이 없어서 절망하고 죽어 가는 그런 심령들이 우리 주위에는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요. 그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만은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입장이고 제자들은 씻김을 받는 입장인데 베드로 같은 사람은 어쩌다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서 “내 발은 영원히 씻지 못할 겁니다” 하고 거절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는 자가 있고 받는 자가 있고 어떤 사람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바로 그 세번째 사람이 문제입니다. 나는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 마틴 부버는 “I and Thou”라는 책에서 현대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어찌 이젠 누가 나는 받지 않았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여기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은혜 입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받지 않고 내가 있습니까? 다 받은 것뿐인데 어찌 나는 받은바 없으니 주지도 않겠다, 안 받고 안주겠다. 그것이 세상이 비참해지는 이유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 보십시다, 성령 충만한 교회. 성령 충만의 윤리가 어떻게 나오나 보세요. 그들이 전에는 못 보았습니다. 전에는 가난한 자가 옆에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보니까 내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나는 너무 많고 저기는 너무 없구나. 그래서 유무상통한 것 아닙니까? 전에는 이게 보이질 않았어요. 성령 충만하고 보니까 즐비하게 가난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내가 도와줘야 될 사람이 있는 것을 알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더라” 이게 성령 충만의 윤리요.
오늘 성경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요 ‘냉수 한 그릇이라도’라고 말씀하셨어요. 영어로는 Even, 냉수 한 그릇이라도, 이렇게 말했습니다만은 자, 원문대로 보면은 ‘모논’이라고 하는 말이요, 영어로 번역하면 Only, 오직, 오직 냉수 한 그릇만, 한 그릇만 주어도, 그 말이에요. 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냉수 한 그릇, 정말로 소중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제자의 이름으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는 해요. 할 마음도 있어요. 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딱 여기서 걸리거든요. 내 이름으로. 꼭 내 이름을 내려고 해요. 어느 북한의 고관이 한번 제게 그런 얘기하더라구요. “참 남조선 사람들 이름 좋아합니다” 그래요. “글쎄 말입니다, 그거 쌀 몇 톤을 가져왔는데, 단동에다 갖다놓고 봉지, 봉지 만들어 가지고, 거기다가 아무 교회라고 쓰고, 주 예수를 믿어라 쓰고, 심지어는 교인의 이름까지 쓰고.” 이렇게 해서 봉지 봉지 만드는데 사흘 걸렸대요. 그걸 신의주로 옮겨놓고, 신의주에서 다시 또 그걸 뜯는데 사흘 걸렸대요. 그래요. 쌀 봉지 하나 주면서 “예수 믿으세요” 이래야 되겠습니까? 이래야만 되겠냐구요? 꼭 내 이름으로. 거 어느 교회에서는요, 약품을 십오만불어치나 보냈어요. 거기다가 교회 이름을 써서 보냈어요. 그 약 되돌아 왔어요. 날보고 묻더라구요. “왜 돌아왔을까요?” 제가 그랬습니다. “성서적으로 하지 않아서 돌아왔지.”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사람 앞에 하지 마라. 예수 님이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그까짓 몇 푼 주면서 말이요, 자기 이름을. 우리 가만히 보면 선한 일 많이 해요. 그런데 딱 문제가 이름이 걸려요. 내 이름으로. 꼭 내 이름으로 하고 싶은 거야. 심지어는 제가 이런 걸 호소해 보면요 내가 북한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악수하면서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서 주면 내 하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만두세요” 그랬어요. 내 이름으로 하고 악수하면서 해야되겠다는 거예요. 탈무드에서 말합니다. 구제란, 받는 자가 있고 주는 자가 있는데, 받는 자가 주는 자의 얼굴을 못 보아야만 구제라 그랬어요.
여러분, 찬송가 가사에도 보면 이름 없이 빛 없이, 뭐 그런 말씀 있죠. 어떤 사람은 그 찬송가 안 부른데요. 이름 없이 빛 없이, 아니 난 그거 싫다 이거예요. 여러분 성서적으로 합시다. 그 이름 그거 뭐 별것도 아닌 거, 뭐 별로 좋은 이름도 아닌 거 잊어버려. 이름이 뭐 대단한 겁니까, 그게? 그 부끄러운 이름을 뭘 그렇게 자랑하고 싶어요.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여기 보니까 제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이유는 묻지 마세요. 어떻게 들었냐도 묻지마세요. 왜 그러해야 되느냐도 묻지 마세요. 이것이 없이는 내가 살지를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살지를 못합니다. 깊이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특별히 보상문제를 말씀하고 있어요. 보상.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내 이름으로 주었을 경우 절대로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다 기억하시겠다는 것이죠. 세상에는 빼앗으며 살다가 빼앗기는 사람 많고요, 더불어 살면서 풍성한 사람이 있고요. 계속 베풀며 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답니다. 여러분이 선택하세요. 인종차별이 아주 심할 때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백인이 정원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메리칸 인디안 한 사람이 마침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가까이 와서 “제게 물 한 그릇 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없어!”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마시던 맥주라도 좀 주시지요” 하니까 “인디안 놈한테 못 줘!” 그랬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디언은 갔습니다. 바로 몇일 후에 그 백인이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사냥개를 잃어버렸어요. 길을 잃어버려가지고 그만 조난당해가지고 헤매다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가지고 쓰러졌어요. 산에 쓰러져 있는 거를 이 아메리칸 인디언이 보고 그걸 간호하다가 자기 집에다 갖다 뉘어서 물을 주고 그리고 죽을 써주어서 정신을 차리게 됐어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까 자기가 물을 거절했던 그 아메리칸 인디언이에요. 기가 막혀서 깜짝 놀라니까 그때 그 추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했더라면 당신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십니까?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잘살기를 바랍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치를 잘못해서요? 그 누구 때문이요? 아닙니다. 우리의 심성이 지금 복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이런 유명한 얘기가 있죠. 마틴 이라고 하는 로마 장교였는데 로마군 장교인데, 어느 날 군 일선에 나가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어요. 피투성이가 되고 옷은 다 찢어지고 그러면서 간신히 간신히 헤어나서 그가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휘청거리면서 돌아가는데 문 앞에 문둥병 환자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서 물 좀 달라고.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을 주었어요. 배가 고프다고, 아이고 밥 나 줄게 없는데. 춥다고, 문둥병 환자가 춥다고 해서 자기의 그 찢어진 군복 외투를 벗어서 그에게 입혀 주었어요. 또 춥다고 해서 문둥병 환자를 꼭 끌어안아 주었어요. 이러고 나서 그가 다시 일어나서 자기 길을 가다가 조금 더 가다가 너무 출혈이 심해가지고 그만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하늘나라에 갔는데 예수님이 나와서 영접을 하는데 너무 반가워서 예수님을 만나보았더니 예수님이 자기가 그 문둥병자에게 준 찢어진 옷을 입고 계시더랍니다. 깜짝 놀랐대요. 오늘 성경은 그걸 말씀하고 있어요. 내 제자의 이름으로 대접하면 절대로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냉수 한 그릇이 절대로 필요한 바로 그 사람이 눈에 보입니까? 여기 감격이 있습니까? 여기 절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저들을 돕지 아니하고는 나는 절대로 살 수 없다. 여러분, 저들이 굶고 있는 동안 우리는 절대로 번영할 수 없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되고, 베풀며 살도록 연구하십니다. 당신의 행복의 근거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베푸는 마음, 베푸는 생활, 그리고 더불어 사는 생활, 그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기까지는 우리는 절대 자유할 수도 없고 평안할 수도 없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때때로 원망과 불평도 해봅니다만은 우리는 너무 많이 받았고 너무 잘살고 너무 편안합니다. 너무 안일한 가운데 있어서 주님의 뜻까지 거역할 때가 많은 저희들입니다. 저희들의 부끄러움과 저희들의 잘못한 일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거룩한 성도의 심성으로 돌아가 이웃을 돌보고 형제를 돌보고 냉수 한 그릇에 목숨을 건 불쌍한 심령들을 돌볼 줄 아는 그런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복을 내리시는 그러한 우리가 되고 우리 민족이 되고 성도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