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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2.07.21
제 목 :너는 이것을 기억하라
본 문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금년 93세의 대학자이자 교수인 피터 드러커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경영학과 미래학의 대가입니다. 그의 신간 Next Society라고 하는 책 중에 이런 제목이 나옵니다. ‘미리 가 본 미래’ 라고 하는 논문의 제목이 나오는데 그 논문 제목이 참 마음에 듭니다. 미래를 미리 가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생기겠습니까? 미래는 반드시 현재로 다가옵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미래는 내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현재는 반드시 과거의 뒷전으로 밀려갑니다. 그리고 미지의 불확실한 미래가 현재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운전을 하십니까? 운전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오로지 앞만 보아야 됩니다. 만일 뒤를 돌아본다면 결국은 미래가 망쳐지는 것입니다. 잘했어도 못했어도 지난 일은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아버지께서 밭갈이하는 곳에 나가서 시중을 하고 도와 드렸는데 물론 제가 밭을 갈 만큼 그렇게 힘도 없고 경험도 없었지만 저를 가르치시려는 생각에서 언젠가는 한 번 보습 쟁기를 잡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소 두 마리가 끄는 보습을 손에 잡고 땅에다 대고 ‘이랴!’ 했는데 아시는 대로 소걸음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는 참으로 천천히 걸어가지만 이렇게 보습을 잡고 보니 얼마나 빨리 가던지… 한참 하다가 내가 제대로 했나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보습쟁기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 시간 저의 아버지께서 성경을 읽어 주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성경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보습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합당치 않다. 여러분, 잘되었든 못되었든 과거는 과거입니다. 거기에 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생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라고 하는 소중한 선물, 소중한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각이 지혜요 생각이 행복이요 때로 생각이 잘못되면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지난 7월 18일날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세계적인 골퍼요 골프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잭 니클라우스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가 골프 레슨에서 말해주는 아주 지혜로운 말이 있습니다. 프로 골퍼와 아마추어 골퍼의 차이가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샷을 날릴 때를 보면 일반 골퍼도 아주 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 그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기억력이라는 것입니다. 전문가적인 골퍼는 한 번 골프채를 휘둘러도 잘했다 못했다를 생각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잘했는지를 꼭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문가가 못되는 일반적인 골퍼는 잘못되면 마누라 탓이요 기후가 어떻고 잔디가 어떻고 다 남의 책임으로 돌린다고 합니다. 한가지 더 있다면 재수가 없고, 뭐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골퍼이고 프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프로는 course management가 훌륭하다고 합니다. 내가 나가서 운동하게 될 이 골프장을 미리 답사를 하고 photograph memory, 사진을 찍듯이 골프장을 전부 살펴보고 머리에 환하게 기억을 하고 밤새 그것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 생각을 가지고 다음에 나가서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단히 말하면 프로 골퍼는 생각이 있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멍청하다 그런 말입니다. 생각이 없이 하는 일은 되는 일이 없습니다. 생각, 기억해야 됩니다. 현대인을 가리켜서 쿼터리즘이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쿼터리즘이라는 말은 짧게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책을 볼 때에도 한 페이지를 다 읽지 않습니다. 몇 줄을 보고는 알았다고 넘깁니다. 한 권의 책도 그저 몇 장을 넘기고는 다 안 것처럼 넘겨버리고 맙니다. 연애를 해도 옛날에는 1년 2년 심지어는 10년씩 길게길게 연애를 했지만 요새는 세 번 만나보면 끝난다고 합니다. 속전 속결입니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그리고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아도 한 테마를 설명하는 데에 옛날에는 한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15분, 이 quarter란 말이 1/4을 뜻하는 말입니다. 한 시간이 1/4로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은 quarterism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보다 더 멀리 생각하는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큰 결점이올시다. 여러분, 반드시 다가오는 미래, 이 결정적 미래는 반드시 생각을 해야됩니다.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것을 생각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생각이란 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후회라고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지나간 다음에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미래는 더더욱 없고 꼭 지나간 다음에야 ‘그랬으면 좋았을 걸, 그랬으면 좋았을 걸’ 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지나간 다음에야 생각을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건을 사오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물건 사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하는데 꼭 사 가지고 와서 후회를 합니다. 그리고 바꿔온 후에 또 후회를 합니다.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산 다음에는 생각하지를 말아야지 그것을 가지고 와서 또 무르자 또 바꾸자하면 그것은 사람이 처절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이 뒤에 가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자꾸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을 하는 겁니다. 제가 이 후회라고 하는 말을 생각하면 꼭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고 하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뮤지컬인데 저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했던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고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죽었다가 혼령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혼령이 슬피 울면서 울부짖습니다. 울부짖는 제목이 무엇인가 하면, “Why didn’t you tell me?; 왜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다고 왜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제가 알았다면 제가 왜 예수를 팔았겠습니까?” 이렇게 슬피 웁니다. 저주받은 영혼이 울부짖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후회입니다. 지나간 다음에 뉘우쳐도 도리가 없습니다. 후회라는 고통은 인간이 겪는 가장 무거운 구제 받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후회입니다. 또 하나는 현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생각은 현재에 있는 것이고 또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고 기뻐하는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전망입니다. Perspective,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망이올시다. 저희 교회 이름이 소망교회 아닙니까? 중국에 갔을 때에 소망교회라고 말을 했더니 중국사람들이 못 알아들었습니다. 중국에는 소망이라는 말이 없고 희망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우리가 중국사람한테 배운 것인데 왜 없냐고 그랬더니 학자인 장관, 우리가 부장이라고 하죠, 장관되는 분이 제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예전엔 소망이라고 했는데 요새는 희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소망이 좋은 것입니다. 소망은 바라는 바입니다. 바라는 바. 그러나 희망은 내가 생각하는 소원일 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주관적이고 소망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소망교회, 이름 참 잘 지은 것입니다.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에 소망교회라고 짓자고 했더니 마음에 안 드는지 임시로 그렇게 하자고 했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지금 25년이 된 것입니다. 좌우간 이름을 얼마나 잘 지었나 보세요. 서울 안에 소망교회가 30개가 넘습니다. 좋으니까 따라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왜요? 소망이거든. 결정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망! 소망이라고 하는 생각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향락, 요새 말로 날마다 파티, 댄스파티만 했대요. 날마다 enjoy 했다. 그런데 거지는 여기에 보니까 나사로 라는 거지는 몸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얻어먹는 처지라 부잣집에서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개가 와서 상처를 핥았다. 그 말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을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라”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간단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둘 다 죽었다,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자도 죽고 잘살아봐도 죽고 못살아봐도 죽고 행복하다고 해봐도 임시요 고통 당해봐도 죽으면 그만이니까 임시적인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같이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안 죽으려고 몸부림을 치더만요. 여러분 어떤 때에라도 병에 걸리거나 중요한 병에 걸렸으면요 의사가 좀 힘들어 하거든 ‘그냥 갑시다’ 그러세요. 자꾸 살려달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거 보기 흉하더라구요. 사람 인격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갈 때 가는 것이지 뭘 그렇게 야단스럽습니까? 여러분, 안 죽으려고 노력하지 마시고 잘 죽으려고 하십시오. 또 하나는 안 늙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안 늙어 보려고 요즘에는 화로 앞에 앉아 있기도 하고, 마사지도 하고 수술도 하고 야단을 하는데 안 늙으려 한다고 안 늙습니까? 곱게 늙으세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은 점점 젊어져요.” 그래서 “거짓말도 정도 있게 하세요” 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어떻게 젊어집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습니다. 늙을 생각을 하십시오. 단, 좋게 늙으십시오. 발악을 하지 말고 좀 예쁘게 늙으십시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엇을 남기려고 합니다. 죽으면서 남기긴 무엇을 남긴다는 말입니까? 기념사업이라나. 어떤 장로님들은 저보고 “목사님께서 40년 목회를 하셔서 기념사업을 해야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립니다. 절대 안합니다. 기념사업은 무슨 기념사업입니까? 다음 일은 다음 사람이 하라고 하십시오. 내가 하던 일을 거기까지 물려갈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기념사업처럼 맹랑한 것이 없습니다. 기념비를 세우지 말아라. 이것은 성경이 주는 교훈입니다. 사울왕이 이것을 세웠다가 망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기억하려합니까? 아니, 지금도 시원찮은 사람이 무슨 다음 세대까지 기억이 되려고 합니까? 그냥 깨끗하게 가십시오. 무엇을 남기십니까? 제가 우리 교회 묘지에 어떤 사람이 “비석 뒤에 이름 좀 쓰면 안될까요?”라고 해서 “왜? 꼭 써야 하겠습니까?” 가만히 있더니 “그만 두죠.” 쓰면 무엇을 하고 안 쓰면 무엇을 합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하십시오. 오늘 성경에 예수님 말씀이 ‘이것을 기억하라’ 둘 다 죽었다는 말씀이십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부자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현세에 산 그 생활대로 내세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고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말합니다. ‘지옥과 천당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있다 없다 시비에 앞서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는 모순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조리도 많고 모순도 많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없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거기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주제가 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가 평가되느냐는 것입니다. 잘살고 의롭고 깨끗하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선한 일 많이 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기준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긍휼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자가 어떻게 돈을 벌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부정 축적을 했는지 못할 짓을 했는지 율법을 지켰는지 지키지 아니하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 긍휼함이 없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고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야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남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오직 긍휼,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이것은 수직적인 마음이요 위에서 내려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닮은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비유를 아시지요. 여기에 불한당을 만난 사람이 여리고의 길에 누워있었다.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사람이 지나가고. 바빠서 갔겠지만 문제는 제사장, 레위사람 그 사람들이 얼마나 깨끗한지 의로운지를 묻지 않습니다. 단, 긍휼이 없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윌리엄 바클리(William Barclay)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The mind of Jesus’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죄는 오직 하나! 긍휼뿐이다.”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의라는 것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단, 긍휼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 하나를 묻고 계신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죽어 가는 사람보고 그냥 지나가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살인을 했느냐 간음을 했느냐 묻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긍휼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부자가 저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때 가서 뉘우쳤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러나 때는 지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긍휼이란 때가 있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베풀어야 할 시간에 베풀지 않으면 베풀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야 할 시간에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불쌍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사할 때에 “안녕하십니까”도 하고 “Good morning” 하기도 하고 그리고 요즘에는 “좋은 아침입니다” 등 좋은 인사가 많지만 수도사들은 그렇게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Memento mori.” Memento는 기억하라, 생각하라. Mori는 죽음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라. 오늘이 네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항상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해준 복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거지 나사로는 복된 사람입니다. 부자는 불행한 사람이더라구요.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앞에 가서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은 위로를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땅에서 아무리 잘 살았더라도 하늘나라에 가서 버림을 받으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끓어오를 때 이것을 배반하지 마십시오. 배반하고 나면 잠 못 잡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불쌍히 여길 때에 힘에 넘치도록 한 번 긍휼을 베풀어 보십시오. 불쌍히 여겨요. 베풀어주고 나면 여러분의 마음이 밝아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 행복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오직 긍휼만이 영생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요 오늘을 사는 길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오늘이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다시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게 하사 긍휼하심을 힘입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불쌍히 여겨야 할 시간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거절하지 않게 하옵소서. 말만 하는 저희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긍휼하심을 실천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한 길을 갈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