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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이웃입니까

누가복음 10: 29 ~ 37

곽선희 목사

2003.03.16

날 짜 :2003.03.16
제 목 :누가 내 이웃입니까
본 문 :누가복음 10 : 29 ∼ 37

가슴이 찡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베스트셀러 서적 중에 연탄길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 나오는 실화이야기 입니다. 서울 근교에 유원지를 다녀오는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차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동리에 들어오면서 어두운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서 오던 길에, 차도 한 쪽에 검은 물체가 길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감이 심상치 않아서 차를 멈추고 내려보니 한 청년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뺑소니 사고였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고 우리는 관여하지 말고 가버리자는 아내의 말을 돌이키고 설득을 해서 그럴 수 없다고, 이 골목에 애들과 함께 이대로 좀 서있으라고 말을 한 후, 이 신음하는 사람을 차에 태운 후 인근병원에 갔는데 너무 중상인지라 작은 병원에서 볼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그를 차에 태워서 큰 병원으로 가서 입원수속을 하는 동안에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 일을 끝내고 돌아와서 그 골목에 아내와 아이들이 서있어야 할 곳에 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모름지기 아마 너무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편으로 집에 갔다보다 생각을 하고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데, 자기 집 쪽으로 불자동차가 싸이렌 소리를 내며 갑니다. 왜 그런가 하고 갔더니, 자신의 집, 조그만 빌라가 지금 불이 붙고 있습니다. 큰일이 났다고 생각하고 걱정을 했는데, 차에서 내려보니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밖에서 서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윗집에 살고 있던 처제 식구들도 나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니, 기다리다 지처서 처제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가지고 좀 와서 우리를 데려가라 했더니, 처제가 식구들과 함께 차를 몰고 와서 언니네 집 식구들을 태워서 가는데, 가스폭발로 불이 났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무사했습니다. 모두 무사했는데, 102호 내외만 죽었습니다. 그 뒤에 경찰 조사에 의하면, 바로 102호에 사는 그 사람이 뺑소니를 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밝혀짐으로 모두의 마음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구하려고 나섰다가 이 남자는 자기 집안 식구를 다 살릴 수 있었고, 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나만 살겠다고 뺑소니를 쳤던 사람은 죽었습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까. 오늘 성경 말씀에 율법사는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심각한 질문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여러 가지 공부를 하는 중에 유대사람들의 신학을 궁금히 여겨서 한 과목을 신청을 했더니, 유대 랍비가 와서 가르칩니다. 아주 재미있고 흥미 있는,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공부였다고 생각됩니다. 이 랍비의 도움으로 그는 여러 유대사람들이 모이는 교회 회당에 견학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회당, 저런 회당을 다녀 보았는데, 그 어느 회당에 갔을 때, 그날 설교하는 랍비의 설교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래서 우리와 같군, 회당에서도 우리와 같은 설교를 한다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10분 동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말을 바꾸는데, 이웃이 누구냐고 합니다. 도대체 이웃이 누구냐? 원수는 누구이고, 이웃은 누구이냐? 딱 이분법론으로 원수와 이웃을 구분해서 설명을 하는데, 그때는 좀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웃은 이런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생할 때 바로왕이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고 했죠? 그 산파에게 명령을 했는데, 그 애굽 산파가 가서 그 어린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차마 죽일 수가 없어서 긍휼을 베풀어서 숨겼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이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편에 섰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읽은 이야기이지만, 아직도 이스라엘이 이렇게…. 지금은 아랍국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늘 말합니다. 온 세상이 다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웃은 없다. 다 우리를 괴롭힌다. 그렇게 부르짖는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원수라고 하면, 저도 날 향해서 원수라고 할 것입니다. 내가 원수처럼 행동하면 저도 원수가 될 것입니다. 다시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원수가 아닌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로 오늘 본문에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참 불쌍한 사람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인도주의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지금 불한당을 맞은 사람은 유대사람이고?그를 돕는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유대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을 상종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만나지도 않고, 같이 식사하지도 않고. 물론 결혼하지도 않고, 그 뿐만 아니라 그 동리를 지나가지 않습니다. 더러운 땅이라고 멀리 돌아가더라도 사마리아 사람의 땅을 지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유대사람들은 도도하고 고고하고 교만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멸시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 교만하고 도도한 유대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구제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멸시 받은 때를 생각하면 그냥 집에 들어가지. 그러나 저들은 우리를 멸시했지만, 지금 이 사람은 이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마음으로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사람을 도와준 것입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웃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 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여 착하고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making neighborhoods, 이웃을 만들어야 합니다. 원수를 이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날 미워하는 사람을 기어이 날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관계를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깊이 탐구하면 더 귀중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 상상을 해보십시오. 만일에 이 도도한 유대사람이 조금만 상처를 입었다고 합시다. 발에 상처를 입어서 피를 흘리고 있다고 합시다. 이 정도 되었을 때에 사마리아 사람이 여기에 머물러서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라고 했다면 이 사람이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더러운 손을 내 몸에 대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마리아인의 더러운 손을 내게 대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원채 죽을 지경입니다.?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의 이 도움을 이 사람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이 어려운 역경이 이웃되게, 이웃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고난이 오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참사랑의 이웃을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대학교 1학년 때, 옛날이야기 입니다. 아주 옛날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기 전입니다. 그 때 군대에서 나와서 신학 1학년을 공부할 때 대구에 27육군 병원이라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육군병원인데, 너무 부상자들이 많아서, 이들을 돌아보는데 사람이 너무 부족하여 신학교 1학년 학생을 보조 군목으로 임명을 해서 군복을 입고 십자가 뱃지를 달고 거기에 가서 봉사를 했습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부상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거기서 제가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조금 부상당한 사람들이 있는 병동에 가면, 담배, 술 마시고, 도박하고 난장판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들어가면, 핍박을 합니다. 못 들어갑니다. 쫓겨나야합니다. 그런데, 중환자실이 있습니다. 중상을 당한 사람들, 어려운 분들이 있는 그 방에 들어가면, 제가 하는데, 아주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목사도 아닌데, 들어갔을 때에 목사님하며 붙들고 놓지를 않습니다. 성경 읽어주세요. 기도해주세요. 그렇게 밤늦도록 붙들려 전도하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깨달았습니다. 그저 부상을 당하려면 많이 당해야 된다. 그래야 사람이 되지, 이것이 어설프게 당하면, 점점 더 못되어집니다. 여러분, 잘 들어두십시오. 고난이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이 이웃을 만듭니다. 이웃의 사랑을 고맙게 여기는 사람을 만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아직도 오만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손을 보실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온유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이 가운데 연세가 있는 분들은 제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있을 까봐 좀 걱정이지만, 아주 오래전에 흑과 백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보니 몇 사람이 본 것 같습니다. 그 영화는 감옥에서 흑인과 백인이 탈옥을 합니다. 쇠고랑이 두 사람에게 같이 묶여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도망을 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도망을 하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검둥이라하고, 양키라 하며 둘이서 얼마나 싸우는지, 두 사람이 함께 묶여 있는데 도망은 가야하니, 같이 가야하는 운명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는데, 가면서 얼마나 많이 죽을 뻔 하는지 많은 고생을 하면서 조금씩 친해집니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에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모릅니다. 고난이 흑과 백을 친구를 만들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늘 이 사마리아 사람이 겪는 이 사실. 이 사람이 귀한 사랑을 베풂으로 오만한 이 유대 사람이 그대로 이웃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해석도 있다고 합니다. 만일 이 사건이 여리고 길에 있지 않고,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이런 불한당 맞은 사람이 누워있다고 하면,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을 리가 없다. 바리새교인이 이 일은 자신이 할 것이라고 얼마나 근사하게 봉사를 했을 것 같습니다만, 여리고 가는 저 골짜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쓰러져 있으니, 이 제사장과 바리새인은 그냥 지나갔던 것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해석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가 아니고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꾸며내어서 만든 이야기였다고 하면, 예수님은 이 말씀만 하고 어느 골목에서 맞아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가고 그들이 천히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사실이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이고…. 그래서 이 말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 할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 레위사람들은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니까 거룩한 일에 봉사를 해야 하는데, 이 시체나 만지고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버렸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특징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없습니다. 중국 선교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중국에 가서 선교하는 미국 사람이 있었는데, 미국 선교사인데,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갔다고 합니다. 꼼짝 못하고 홍수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어느 젊은 사람이 둑에서 밧줄을 던져주어서 살았습니다. 살아서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죽었을 것이 살았던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청년에게 선생님 이름을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일생동안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 청년이 빙그레 웃으면서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름이 있습니까? 그리고 가더랍니다. 선한 일은 이름이 없어야 합니다. 거기에 이름이 붙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 거기엔 이름이 없습니다. 오직 긍휼, 오직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단순한 마음으로 이렇게 선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오늘 성경을 잘 보면, 참 좋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나귀에 태워 갔고, 그 주막집에서도 돈을 주고 내가 다시 줄 때에 돈이 더 들었으면 갚겠습니다. 책임을 집니다.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이 아름다운 마음을 보십시오. 우리는 왜 이웃을 잃어버렸습니까? 칼 라노라고 하는 신학자는 랭카우터라고 하는 유명한 책에서 현대인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이웃도 잊어버리고 산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공허한 소리 때문이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너무 시끄러운 많은 정보를 듣고 있어서 꼭 들어야 하는 소리를 못 듣는다. 또한 의미 없는 분노 때문이다. 여러분 피해망상증에 걸려서 전부 분노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도 모른 채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이 분노 때문에 조용하게 이웃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또한 안이한 호기심 때문이다.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까? 이런 일 저런 일 쓸데없는 관심. 그러는 동안에 관심을 두어야 할 분에게 관심을 두지 못합니다. 그것이 현대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무 기대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행동해 옮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하늘아버지께서는 악한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고, 선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우니라. 너의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긍휼을 베푸는데, 무엇을 따질 것입니까? 선한 일을 하는데 무엇을 더 가릴 것이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이웃 만드는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이웃을 찾지 말고 내가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누가 나에게 친절하게 하기를 기다리지 마시고, 내가 남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랑의 길에 접어든 분들도 있습니다. 여기 가서 기웃, 저기 가서 기웃하며 어디 좀 친절한 교회 없나. 여러분, 내가 베풀지 않는 친절을 어디서 받겠습니까? 내가 먼저 친절하지 않는데, 누가 나에게 친절하겠습니까?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에릭 프롬이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건강한 사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합니다. 건강한 사회란 생산적 사랑을 하는 곳이다. 책임을 지고 존경을 하고 기다려 주고 생산적 사랑이 있을 때에 건강한 사회이고 생산적 생각이 있어야 부분에 메이지 않고 전체를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지 않고 이웃을 생각할 줄 알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생각 할 줄 아는 그것이 건강한 사회이다. 행복을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결과에 의한 행복이 아니라 과정에 의한 행복, 봉사 자체를 행복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선한 일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자원봉사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복된 사회다. 그리고 양심이 살아있어서 항상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남의 소리가 아닌 내 소리를 그런 자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격이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현대인에게는 큰 죄가 있는데, 고독입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생각 때문에 이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자식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남편도 없고 아내도 없습니다. 이웃이 없습니다. 왜? 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 기도
하나님아버지 주께서 우리에게 많은 물질도 주었고 편리한 문화생활도 주었지만, 어느새 우리는 이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웃의 관계를 다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울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잃어버린 이웃을 되찾게 하시고 이웃을 만들고 그 거룩한 사랑을 지켜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하시고, 선한 이웃 속에서 선한 이웃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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