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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2.01.27
제 목 :눈을 새롭게
본 문 :마태복음 6장 22절 ∼ 32절
한국은 금년에 월드컵 축구경기로 인해서 축구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관심을 여기에 모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축구 황제라고 불리워지는 ‘펠레’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무려 1300골 가까운 득점을 올린 명실공히 축구왕이었습니다. ‘펠레, 나의 인생과 아름다운 경기’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원작명은 ‘펠레’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는 열다섯살에 프로 축구팀에 스카웃 되어가지고 축구와 함께 한평생을 삽니다. 양말로 둥글게 말아서 만든 공을 맨발로 차야 했던 가난한 시절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고 축구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치료할 수 없는 근시였습니다. 눈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나쁜 눈을 가지고 축구선수가 어찌 통산 1,300골을 득점할 수 있는 축구왕이 될 수 있었을까?”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근시 때문에 지장 받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내게는 말초적 감각, 즉 감각적 시력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에 넘칠 때 공이 크게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이 골프 치는 사람들, 어느 날은 성적이 좋고 어느 날은 나쁘고 그럽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골프공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고 작게 보이는 날이 있습니다. 또, 활을 쏘는 사람들도 과녁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고 과녁이 작게 보이는 날이 있어요. 그것은 내 심리적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근시라고 하는 핸디캡을 그는 말 그대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신적 시각, 정신력이 말해주는 감각적 시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을 때가 있습니다.
손문의 ‘삼민주의’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인생을 세종류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선지선각자입니다. 언제나 먼저 생각하고 먼저 알고 먼저 깨닫는, 그리고 행동하는 그런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후지후각자입니다. 꼭 경험을 한 다음에야 생각하고 깨닫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부지부각자입니다. 경험하기 전에도 모르고, 경험한 다음에도 모르고. 어차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세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본다는 것이 뭡니까? 역시 보는 것도 경험은 경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촉이라고 하는, 이 만진다는 경험보다 먼저 오는 것이 본다고 하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손에 닿기 전에 먼저 물체를 봅니다. 문제는 사고가 나기 전에 먼저 앞에 있는 것을 봅니다. 본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경험 중에 가장 앞서 있는 경험입니다. 어쩌면, 우리 육체적 경험보다 앞서있는 것이 ‘시력’이요 본다고 하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눈을 ‘아인’이라고 합니다. 이 ‘아인’이라고 하는 말은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샘’이라는 말이요 ‘원천’이라고 하는 뜻도 됩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본다고 하는 것이 우리 생각과 우리 모든 경험의 또 혹은 지혜의 샘이요 지혜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죠. ‘얼마나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거든요. 그런고로 원천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랬습니다. 눈이 밝아야 한다고. 그 눈이 어두우면 그 생활 전부가 얼마나 어둡겠느냐. 눈이 밝아야 한다. 밝히 보고 밝게 깨닫고 밝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흐린 눈이 있습니다. 혹은, 나쁜 눈도 있습니다. 그럼 왜 어두워 졌느냐? 무엇엔가 씌웠지요. 무엇엔가 씌웠고 가리워져서 그 앞에 있는 것을 못 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너무나 유감된 얘기입니다만은 성경에 나오는 가롯유다라는 사람,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 많은 기적을 보았고 그 많은 능력을 함께 했고 그 많은 귀한 말씀을 다 들었건만 어쩌면 이 사람이 예수를 은 30을 받고 판다는 말입니까? 돈에 대한 욕심, 무엇인가 또 다른 욕심이 있었기에 그 많은 말씀을 듣고도 깨달음이 없고 그 많은 이적을 보고도 그는 무지 무각이요. 본 것도 깨달은 것도 없어요. 눈에는 돈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를 팔면 은 30이 될 것이라고, 예수를 은 30짜리로 보았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눈이 어두웠다는 말입니다. 돈에 눈먼 사람,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할 때, 제자들이 배를 먼저 타고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건너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풍랑 때문에 시달리는 것을 아시고 물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가까이 옵니다. 저들이 풍랑 속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멀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유령이다” 그럽니다. 전 그 말이 너무너무 마음에 아파요. ‘사랑하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다니, 이 사람들이 이게 정신이 있나?’ 하지만 도대체 물 위로 걸어온 사람을 본 일이 없으니까, 또 그럴 수도 없고, 또 자기들이 너무 두려우니까, 지금 죽을 지경이니까, 또 혼비백산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밖에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죠. 어쨌든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질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잘못된 경험에 집착된 사람, 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특별히 걱정과 근심에 메여있는 사람들, 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밝은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곧은 것을 곧게 보지 못합니다. 환하게 열린 길을 전혀 볼 수가 없는 그런 기막힌 처절한 형편에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리스 컬리(Iris V. Cully) 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Education for Spiritual Growth’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의 특징을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왜 평안이 없을까? 먼저는 불안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불안합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 불안을 어떻게 하면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도 또 빗나가고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소유’를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고 있어요. 돈을 많이 가지고, 은행에 돈을 많이 가지고, 땅을 많이 가지고, 집을 많이 가지고,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뭔가 이 많은 것을 가지면, 이 소유에 의해서 불안이 해소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이것이 또 하나의 착각이에요. 많이 가질수록 점점 더 불안해요. 그런가 하면 알게 모르게 적개심의 노예가 되었어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어요. 그 동안은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눈이 흐려집니다. 도대체가 모든 사람들이 나를 공평하게 나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불만이 있어요. 그래서는 어딘가 모르게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요. 혹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마음으로 있는 동안 절대로 밝은 세상을 볼 수가 없어요. 여러분 미워하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볼 수 있는 사람 보았습니까? 문제는 사랑밖에는 없어요. 사랑하고야만 세상을 밝게 볼 수 있는데, 어느 사이에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고 있어요. 혹은 섭섭한 마음으로, 이것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어요. 또 한가지는 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 불안과 적개심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힘밖에 없다. 권력이다, 힘이다. 글쎄올시다. 결국은 힘이 우리의 마음을 또 한번 어둡게 하고 있어요. 오직 겸손만이 밝은 시각을 가지게 하는 것인데 어느 사이에 힘에 의존하면서 교만해집니다. 점점 더 마음 눈이 어두워지고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어리석고, 너무너무 어리석을 정도로 눈이 어두워지고 만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어두워진 눈을 말합니다. 나쁜 눈. 그것은 편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균형을 잃고 한쪽만 보는 것이에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를 못해요. 새는 보는데,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못 봐요. 넓은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의 솜씨를 보지 못하느냐 참으로 미련한 것이에요. 역사는 보는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보지를 못한다는 것. 이 편시가 마음과 눈을 세상을 다 어둡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Diplopia’ 입니다. 복시올시다. Overlap이, 겹치고 포개서 보는 거예요. 두 마음으로. 둘이 하나로 보이고, 하나가 둘로 보여요.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오버랩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가지를 한꺼번에 보려고 하니까 다 못보고 마는 것이죠.
최인호씨의 베스트셀러 ‘상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새 연속극으로도 나오는 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임상옥 이라는 사람은 아주 천한 신분의 참으로 어렵고 고달픈 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장사를 배웁니다. 마침내 큰 거부가 되는데 그 상도 전체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돈을 벌러 다니는 장사꾼이지만 이익보다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하는 것이에요. 그는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요. 돈은 잃을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죠. 현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운다고 말합니다. 강자는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스스로 만족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장사꾼이에요. 어디까지나 돈을 따라다니는 사람이에요.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지만 아니에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과 인간을 볼 줄 아는 그런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그렇게 살았어요.
오늘 성경말씀에는 ‘눈이 성하면’ 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성하다.’ 아플로스 라고 하는 말은 싱글 홀드(Single hold)를 말합니다. 잘 조정된, 초점이 맞추어진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시력일 뿐만 아니라 단순하게 순수해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초점이 흐려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가끔 여러분, 해외에 나가서 사진을 찍어옵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가 여행 중에 카메라에 특별한 기술이 없다고 하니까 그냥 오토매틱, 자동으로 찍는 걸 가지고 가서 열심히 찍어왔어요. 찍어다 놓고는 척 보더니 “이거 왜 경치가 안나왔니?” 그런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카메라를 손에 들려면 카메라를 좀 공부를 해야지요. 이 공부 없이 카메라를 들고 나갔는데 이 ‘자동카메라’라고 하는 것은 초점을 가운데에다가 맞추게 되어있거든요. 요거 초점이 하나예요. 한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딱 맞추면은 그것은 틀림없이 깨끗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두사람을 세워놓고 가운데다 찍으면 초점이 가운데로 지나가 버리거든. 그러면 또 사람도 희미하게 나올 뿐만 아니라, 사람을 세워놓고 사람에다 맞추면 뒤에 경치가 나오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 카메라를 제대로 쓰는 사람은 자동카메라를 안씁니다. 자 이제 보세요. 초점이 맞아야 되는 거예요. 초점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카메라도 소용없고 아무런 경치도 담을 수가 없어요. 초점이 중요하죠.
요한복음 9장 25절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큰 능력을 얻어 눈을 떴습니다. 눈을 뜨고 나니까 시비가 많아요. ‘당신을 눈뜨게 한 사람이 누구냐?’ ‘네가 눈뜬 날이 안식일이 아니냐?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이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했겠느냐? 안식일을 범한 것 보니까 너 눈뜨게 한사람은 죄인이다.’ 뭐 시비가 많아요. 복잡해요. 그때 이 사람은 요한복음 9장 25절에서 아주 명답을 합니다. ‘거 복잡하게 묻지 마라. 내가 아는 것은 장님으로 눈 떴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눈떴다. 예수로 말미암아 눈떴다. 이것 뿐이다.’ 그리고 담대하게 그 모든 비방을 물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초점을 맞추세요. ‘double focus’는 불가능해요. ‘single focus’초점을 분명 맞춰야 되요. 그런데 말입니다, 난시라고 하는 게 있어요. Astigmatism이라고 하는 이 난시라고 하는 것은 캠블 모건(Cambell Morgan) 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광선이 눈의 안막 초점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되어진 눈의 구조적 결함’을 말합니다. 눈이 잘못됐어요. 구조적으로 잘 못됐어요. 그래서 빛이 안막에 똑바로 들어오지를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무엇인가가 내가 주님을 똑바로 보도록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내 눈이 아무리 깨끗하고 밝아도 빛이 없으면 못 봅니다. 그래서 카메라에서는 초점문제와 빛 조리개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빛이 문제예요.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눈이라도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향하여 눈을 뜨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비춰야 됩니다. 말씀이 눈을 뜨게 하고 그리고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성령이 감화감동할 때 사물을 밝게 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 세상이 달라지길 원하십니까? 그것도 중요하겠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눈이, 내 시각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달라지기 전에 바르게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 교인 가운데 이런 여 집사님이 계세요. 제가 어디가나 자랑을 합니다. 이런 교인이 있다는 걸……. 예수 믿은 지 참 오래됐고 집사님인데도 언제가 은혜를 받았대요. 은혜를 받으니까 어느날 눈이 싹 달라지더래요. 눈이 바뀌면서 20년이나 같이 산 남편이 오늘따라 그렇게 예뻐지기 시작하는데 정신을 못차리겠대요. 눈을 봐도 예쁘고 코를 봐도 예쁘고 앉는 것을 봐도 예쁘고 걷는 것을 봐도 예쁘고……. 너무너무 예뻐서 잠자리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불평을 했어요. ‘하나님, 저렇게 예쁜 얼굴 좀 보면서 자게 만들지 왜 눈을 감고 자게 만들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소망교회 1등 교인이요”그랬어요. 여러분, 얼마나 잘 믿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남편의 얼굴이 견딜 수 없이 예뻐지거든 잘 믿는 줄 아세요. 아내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이거든, 내 신앙의 수준이 높은 줄 아세요. 그리고 자녀를 보나 세상을 보나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그렇거든 내 신앙의 수준이 높은 것이고요 ‘에이, 망할 놈의 세상!’하고 느껴지거든 땅에 떨어지는 시간이에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눈이 밝아지면 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예수님 보세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 그리스도를 보고 나를 보고 구원받은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리고 나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는 겁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세상이 어둡다고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내 눈이 흐려지고 있는 것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우리의 심령의 눈을 밝히사 우리 앞에 있는 밝은 기업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리고 이 세상을, 나 자신을 아름답게 보며 감사하며 찬송하며 밝게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