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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2.01.13
제 목 :마음을 새롭게
본 문 :에베소서 3장 14절 ∼ 19절
우리 한국 역사에 이태조와 무학대사의 대화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기에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태조께서 어느 때 무학대사와 대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사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돼지상이네, 그려.” 돼지 닮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아, 물론 농담이지요. 그런데 무학대사는 이태조를 쳐다보다가 하는 말이 “임금님은 부처님 상입니다” 그랬어요. 이태조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임금님과 신하의 이야기이지만은 농담은 농담인데 나는 자네더러 돼지 같다고 했는데 자네는 어째서 날더러 부처님 같다고 하는 건가?” 이때에 무학대사는 시침을 떼고 한마디했습니다. “그거야 물론 누구든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의 얼굴 보는 거죠.” 나는 내 마음이 부처님 같으니까 다 부처님으로 보이고, 당신은 돼지 같으니까 나를 돼지로 보는 거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그래 뭐, 할 말이 없었지요.
여러분,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을 봅니다. 자기 마음 생긴 대로, 행동도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 다 같이 앉으셨지만 여러분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지기도 하고 안들려지기도 하고, 이렇게 듣기도 하고, 저렇게 듣기도 하고, 이렇게 깨닫기도 하고 정반대로 깨닫기도 합니다. 내 마음 생긴 대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잠언 16장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용사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 mind control,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느냐? Mind control by my self is impossible, 이게 유명합니다. 여러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 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걸 인정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가끔 보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 내 생각대로 한다. 뭐, 자신만만하게 얘기합니다만 그건 철없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소중한 요 내 마음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더라구요. 그걸 인정을 하면서부터 이제 그 생활이 시작됩니다요. 그래서 윤리학에서는 생각과 마음이 함께 하지 않는 행위를 행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몸만 움직인 거니까요. 그 마음이 문제거든요. 브라이언 카바로프라고 하는 분이 쓴 ‘마음의 정원’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마음의 정원. 마음은 마치 정원과 같다. 그래서 거기에 잡초가 나기도 하고 좋은 곡식이 자라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요. 그런데 좋은 곡식은 좋은 종자를 심어도 잘 자라질 않아요. 그리고 잡초와 곡식이 함께 있으면 어느 사이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그리고 곡식은 시들시들 말라서 그만 죽어버려요. 그러기 때문에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그게 가꾼다는 얘기 아닙니까? 곡식을 가꾸고 김을 매주는 거예요. 부지런히 김을 매서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그 땅에서 오는 좋은 기운을 받아서 영양을 받아가지고 곡식이 잘 자랄 수가 있는 것이거든요. 자, 우리 이 마음에 정원, 알게 모르게 못된 생각은 그저 무성하게 자라는 거예요. 별 노력 없이도 자라는 거예요. 그러나 좋은 생각과 착한 마음은 애써 보전하려고 애써도 어느 사이에 그만 시들어 버리고 마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그래서 불끈 화를 내고 깜짝 놀라요. ‘내가 언제 이런 사람이었던가? 내 마음속에 무서운 생각이 들어올 때, 어찌 내 마음속에 이런 악한 마음이 있단 말인가?’ 놀라는 거죠. 놀랄 수 밖에요.
사람의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사회학 적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Social Isolation. 이 사회적으로 소외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많은 사람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고 느낄 때, 고독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서며 그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때. 그런가 하면 Major Life Change 라고 해서 중요한 사건에 부딪힐 때가 있어요. 바로 배우자가 죽었다던가 자녀가 죽었다던가 엄청난 사건에 부딪힐 때, 그만 감당을 못합니다. 또한 자신감이 없고 자기 만족이 없을 때, 그리고 일에 대해서 불만할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생의 의미를 잊어버릴 때, 그만 점점점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건강이 허약해 질 때, 허약해지기 시작하면 가속화되면서 점점 무너져 내려갑니다. 그리고 Pessimism 이올시다. 염세주의요. 이런 잘못된 세계관, 비관주의가 내 마음을 자리잡게 됩니다. 딱 자리잡고 나면 만사가 어둡습니다. 만사가 괴롭습니다. 만사가 짜증이 납니다. 도대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벌써 자살을 하게 됩니다. 만성 자살이 문제입니다. 그래 요새 뭐 술을 먹지 마라, 담배를 피우지 마라, 뭐 그런 얘기들 많이 합디다만은 아, 누군 모르나? 그 사람 건강을 위해서 피우는 거 아니에요. 죽을테면 죽어라 하고 피우는 거지. 살고싶지 않아서 마시는 거예요. 폭탄주를 마시는 사람이 살자는 겁니까? 오늘 밤 죽어라, 하고 마시는 거죠. 불행하게도 다음날 아침에 살아나니까 걱정이지. 안 그렇습니까? 그거 살자는 게 아니거든요. 왜 이래야 되냐? 정신적으로 이미 죽었어요. 정신적으로 죽었기에 죽음을 위한 행동을 과감하게 거침없이 행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살고 싶지 않으니 남의 생명도 해하는 거죠. 너도 그만 살자 그 말이요.
이제 내 마음을 누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이 같이 기울어진 마음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이냐 말이요.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해야 될 사람이 쓰러지고 또 쓰러질 때, 졸고 있을 때, 예수님 말씀 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에는 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해요. 마음과 의지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정말로 마음이 원했을까? 정말로 마음이 원하면 어떻게 잠이 오겠습니까? 정말로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 내일 아침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어쩌다가 돈 몇 푼만 잃어버려도 잠이 안 오는데, 어쩌다 기분 나쁜 전화 한 통만 받아도 잠이 안와서 걱정인데, 그래 이게 잠이 올 시간입니까? 그러나 저들은 잤어요.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참, 이건 자비와 긍휼로 충만한 그런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이성과 마음은 별도라고 합니다. 지식과 감성이 다릅니다.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 또 의지와 마음이 별도로 갑니다. 이 따로따로 노는 괴리를 인정하고 바로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감성이라고 하는, 이 감정이라고, feeling 이라는 것은 이성과 의지보다 더 원초적입니다. 보세요. 자, 사랑해야될 줄 알면서 사랑해지질 않아요. 어차피 저 사람하고 이제 한평생 살다가 갈 거예요. 그러면 사랑해야 하잖아요. 마땅히 사랑해야 할 줄 알면서 만나기만 하면 미워해요. 또, 용서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잘못했다” 하고 내가 얘기해야겠다.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얘기를 해야겠다고 입으로 외우다가도 딱 만나면은 “용서 못해” 이래 버린다고요.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마음이 이렇단 말이에요. ‘정직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번번이 거짓말해요. ‘부지런해야 되겠다’ 생각하면서 오늘도 여전히 게을러요. 때로는 ‘봉사해야 되겠다. 나는 봉사하며 살아야겠다’ 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앞서요. 생각하면 감사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라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정말 따져서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죠. 그런고로 나는 범사에 감사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한숨이 나오고 원망소리가 나와요. 걱정근심에서 헤어나질 못해요. 이거 왜 이러는 겁니까? 내 마음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에요. 마음은 별도더라고요. 이 속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것보다 더 깊은 세계, 더 원초적인 그런 속성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이란 오직 성령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네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 말은 의지 이전의 말입니다. 내 생각이나 의지로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내게 함께 해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주장해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먼저 깊은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실 때 ‘바람이 임의로 와서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성령도 그와 같으니라’ 그랬어요.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성령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실 때, 내가 이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내 심령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그의 어두운 과거, 그의 나약함, 다 이기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룬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완덕에의 길’ 이라고 하는 요한 타울러 라고 하는 분의 책이 있습니다. 그건 아주 수도사적인 글 입니다만은 그 속에서 내적 생명을 고갈하게 하는 것이 무어냐 이겁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세속적 교만’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무엇인가 교만했다 이거요. 또 하나는 감각적 만족이다. 감각적 만족에는 반드시 죄책이 따라와요. 육체를 따라간 일에는 반드시 후회가 있게 마련이요. 또 하나는 분노와 의심과 성급함이다. 자, 그런데 이런 것들을 무엇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까? 내가 이길 수 있는 겁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내가 겸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까? 이 모든 악한 마음을 물리칠 수 있더냐고요. 그래서 말입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 중생하게 됩니다. 중생한 심령만이 이 모든, 이 어두운 마음을 물리치고 밝은 마음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것이고요.
또 두 번째는 오늘 성경에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서 그리스도가 나를 주장하게 하는 것이지요. 요한복음15장 7절에 보면 ‘내 마음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님이 나를 주장하고 주께서, 주의 말씀이 내 안에 있어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실 때, 지식에 넘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항상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믿음으로 우리는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여러분, 소위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게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이, 그 믿음이 바로 믿는다는 뜻이에요. 교회 다닌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달라요.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에게 내 마음을 바쳐요. 그리고 그가 나를 다스려 주세요. 이건 희한한 능력이에요. 그때만이 자유할 수가 있고요.
또 하나는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이 새사람의 윤리성을 말하는 것이에요. 오직 사랑을 깨달아 나가는 것이에요. 계속 사랑을 깨닫는 것이에요.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그렇습니다. 물질로 되는 게 아니에요. 환경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집을 몇 번 이사가도 안돼요. 중요한 것은 은혜로써만 마음은 깨끗해 질 수 있고 굳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십자가의 사랑, 넘치는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요. 그리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겸손해 질 수 있어요. 내 힘으로 겸손할 수가 없어요. 몇 번 맹세해도 안돼요. 오직 성령으로만이 나를 부정하고 내가 참으로 겸손할 수 있고요. 겸손하게 될 때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모든 번민은 아직도 교만이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또 하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될 때 여유가 있습니다. 충만함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 확실한 종말과 미래가 보장되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이런 여건에서도 저런 여건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올시다.
데일 카네기의 ‘세가지 유형의 인간’이라고 하는 비판이 있습니다. 하나가 방관자입니다. 대부분이 방관자인데 방관자이면서 막연한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성공해도 두렵고, 실패해도 두렵고. 또 하나는 패배자입니다. 철저하게 패배의식으로 삽니다. 항상 실패한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왜요? 다른 사람과 같이 못하기 때문에 가진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못 가진 것만 생각합니다. 항상 패배의식에 삽니다. 그런가 하면 참된 은혜의 사람은 승리의식으로 삽니다. 오늘 실패해도 이것은 다음에 성공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합동하여 선을 입은 것을 압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스케줄 속에 시나리오 속에서 된다고 믿습니다. 그런고로 그에게 여유가 있습니다. 또한,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의 응답은 사랑이요 사랑의 결과는 선함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의 마음은 선해집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사랑받는 사람은요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아세요? 두 사람밖에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불쌍히 여기는 사람, 그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 사람들의 허물이 보입니까? 남 잘못하는 게 보입니까? 못마땅한 것이 있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내 죄를 구속하신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깊이 감격하고 보면은 두가지밖에 없어요. 아무 허물도 보이지 않아요. 잘못된 사람 보면 불쌍해요. 이것도 불쌍해요 저것도 불쌍해요. 나를 괴롭히는 그 누구도 불쌍하게만 보일 뿐이에요. 그 사람이 나쁘게 보이질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불쌍히 보이는 사람밖에는 없어요. 그리고모든 사람의 장점을 보게 됩니다. 단점이 보이지 않아요.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이에요.
어떤 청년이 차 사고로 인해서 큰 충격을 받아서 그만 두 눈, 안구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내가 너무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수술을 하겠지만은 어차피 안구가 다 빠져나가서 눈을 볼 수는 없을 것일세”하고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장님으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지”그런고로 나 수술하지 말아달라고, 이대로 죽을 것이라고, 바락바락 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 사람아, 생명은 소중한 것이야.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그리고 강제로 붙들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몇 일 후에 붕대를 풀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축하하네. 자네는 분명히 실명을 했지만 자네를 위해서 안구를 기증해 주는 분이 있어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으네. 축하하네” 그랬습니다. 또 소리 질렀습니다. “애꾸눈으로 살기보다 죽는 게 낫지.” 의사는 크게 책망을 했습니다. “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무슨 망령된 발악인가?” 그러며 붕대를 풀어주었습니다.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점점 밝게 환하게 보이는데 눈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청년은 여기서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는 한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감사한 이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건강지수는 얼마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얼마의 건강이 있습니까?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을 주께 바쳐버리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하세요. 그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사랑을 확인하고, 병들면 병드는 대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할 때 ,그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하게 은혜로 충만하게 될 때, 삶 자체가 소중해지고 세상도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정말로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그 사랑의 확증을 얻지 못하여 우리의 마음은 잡초로, 세상욕심으로, 그 더러운 것들로 얼룩질 때가 많습니다. 주님, 용서하시고 우리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순간순간 확인하면서 늘 감격하며 늘 찬송하며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우리의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