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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3.02.09
제 목 :먼저 할 일 먼저하라(2)
본 문 :마태복음 5 : 21 ~ 26
어렸을 때 시간이 있을 때 마다 할아버지를 붙들고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할아버지도 밑천이 없어서 가끔 보면 이야기 한 것을 또 하고, 또 하셨습니다. 이미 들은 이야기가 시작이 되면, 나는 중도에 그것은 들은 것인데, 다른 것을 들려달라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니 할아버지 말씀이 좋은 이야기는 들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셨습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주 오랜 옛날 의가 좋은 두 형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이가 좋아서 그 의가 좋기로 소문난 두 형제가 있었는데, 어떤 날 둘이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발에 채이는 돌을 보니, 특별한 돌 같이 보여서 그것을 동생이 주워서 보았더니 금덩어리였습니다. 주먹만한 금덩어리를 얻었습니다. 이 노다지를 얻고 그는 너무 좋아서 기뻐 할 때 형님이 “그것 나 좀 보자.” 형님이 들고 이리 저리 만져보면서 하는 말이 “자, 이만하면 우리는 이제 고생은 면한 것 같다. 어쩌면 우리 둘 다 한 평생 먹고 살만큼 재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랬습니다. 동생이 불안해서 “그거 나좀 봅시다.” 동생에게 넘어갔습니다. 좀 있다 형이 “나 좀 보자” 이 금덩어리는 동생에게 왔다. 형에게 왔다 했습니다. 가다가 강을 만났습니다. 나루를 건너게 될 때에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다가 형이 그 금덩어리를 물 속에 덤벙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펄쩍 뛰면서 “아니! 그건 내가 주워서 내 것인데, 왜 형이 물에다 던지냐고……” 그 때 형이 말했습니다. “그 금덩어리가 내 손에 있을 때에는 욕심이 생기고, 네 손에 있을 때에는 미움이 생기더라. 우리 둘이 생각하고 볼 때마다 서로 사랑했는데, 그 금덩어리가 우리 사이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물에 넣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화목이 좋은 줄은 압니다. 그러나 화목을 깨뜨리는 요인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화목하지 못합니까? 무엇이 작용해서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싸워야 합니까? 불화의 원인을 진실하게 정직하게 과감하게 물 속에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끊어야 비로소 참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욕심과 시기, 질투를 그대로 놔두고 악수한다고 화해가 됩니까? 같이 간다고 화해가 됩니까? 아니 한평생을 같이 살아도 그것은 남남입니다. 화해는 없습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말씀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부보다 화목이 먼저다.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기본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를 만들었고, 온 세계를 어지럽혔습니다만, 지금도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이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변증법적 유물론은 진화론에 근거합니다. 다윈의 진화론, 그는 동물의 생활 속에서 이 철학을 발견했습니다. 동물로부터 배우고 사회로 옮겨서 사람도 마찬가지 동물이다. 결국 사회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뭐, 간단합니다. 이 원리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미혹되고 세상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존 경쟁입니다. Struggle for existence.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모두는 살기 위해 싸운다. 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한다.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 아니 죽여야 내가 산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 입니까? 내가 살기 위해 저를 죽여야 하고, 어쩌면 저가 죽어줘야 내가 산다. 이런 이론입니다.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데, 그 주인은 지혜로운 사람이라서 금붕어에게 먹이를 많이 주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주었는데, 이 큰 금붕어가 생각하길, ‘저 작은 금붕어가 없으면 내가 배부르게 먹을텐데……저 놈과 나눠 먹으니 내가 배고파서 못살겠다.’ 그래서 어느날 큰 금붕어가 작은 금붕어를 물어죽였습니다. 이제는 주인이 주는 먹이를 자기 혼자서 먹을 것이라고 했는데, 작은 물고기가 죽어서 썪었습니다. 썪어서 냄새를 발하고 독을 발했습니다. 그 물을 먹고 큰 물고기도 죽고 말았습니다. 저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남을 낮추면, 내가 높아지는 것으로 착각을 하곤 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에 어떻게 지내십니까? 남편을 깎아 내리면, 내가 올라갑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애들이 공부를 좀 잘 못하면, 용케 네 아빠 닮았다. 이럽니다. 또 아버지는 네 엄마를 닮지 말라고 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깎아 내리면, 자신이 올라가는 줄로 알고 있는데, 동반자살입니다. 같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미워도, 고와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올려야 합니다. 남편을 높여야 아내도 올라갑니다. 아내를 높여야 남편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교육의 기본입니다. 상대방을 높이면 다같이 올라갑니다. 깎아내리면, 다 끝나고 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가 살아야 내가 산다고… 제가 간혹 북녘땅에 갈 때마다 사람들은 묘한 심정으로 저를 대합니다. 저는 주러갔고, 저들은 받지 않습니까? 여하튼 많거나 적거나 나는 주는 사람이고 저는 받는 사람입니다. 조금 부끄러워 합니다. “무엇하러 또 오셨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한마디 합니다. “무슨 대단한 성자가 되어서 당신들을 도우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게 아닙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망해야 살 줄 알지만, 나는 다릅니다. 당신이 살아야 우리도 삽니다. 당신들을 살려야 나도 삽니다. 그래서 나 살자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위로해보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저를 살리고야 내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진리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먼저 화목하라. 이것 프로토스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에서는 프로토스라고 하는데 영어에서는 First라고 합니다. 첫째입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가 문제가 아니고 그 속성적으로 근본이요, 먼저 첫 번째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보다 최우선, 그런 의미의 첫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무엇보다 먼저 화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먼저. 기도하는 것 보다 먼저. 예배하는 것보다 먼저. 화목하라. 화목이 먼저입니다. 화목이 없는 예배, 화목 없는 제사, 화목이 없는 기도. 소용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화목의 근본 뜻을 생각해봅시다. 화목을 대단한 선행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화목이라는 것은 기본입니다. 화목을 덕목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화목은 존재의 의식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성경에 ‘형제를’ 이라고 했습니다. 아델포스. 형제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의 별명이 형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다 형제, 자매. 아래 위도 없습니다. 남자 여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형제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모두가 형제로 정해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형제란 무엇입니까? 한 아버지가 있고,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입니다. 한 아버지의 한 자녀들이라는 말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이것은 숙명적인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형제가 된 것입니다. 무슨 이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고 나쁜 것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형제라는 뿌리가 형제를 만든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형제입니다. 그래서 기쁨도 하나요, 또 형제이지 때문에 슬픔도 하나요. 저가 살면 나도 살고 저가 기쁘면 나도 기쁩니다. 저가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이것은 숙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기에, 똑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형제라는 말입니다.
유명한 독일의 젊은 신학자였던 본 훼퍼의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형제가 하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얼마 가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들려지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잘 들어두십시오. 형제와 불화해서 이제 형제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안 듣기로 결심했습니다. 멀지 않아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93세가 된 유명한 교수 피터 드러커가 말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첫 성품, 첫 속성,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높이고 그 기쁨을 내가 함께 하는 것이, 이것이 지도자의 제 1조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형제와 화해하지 못하면, 근본 운명이 빗나가는 것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할 때에 나는 벌써 자녀가 아닙니다. 형제 관계가 깨질 때에 하나님 앞에 나는 벌써 하나님의 자녀됨을 상실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성경은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하면 깨지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말했습니다. 분노하고, 라가라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보통 있는 일입니다. 미친놈이라고도 하고, 망할 자식이라고도하고 문둥아라고도 합니다. 편히 쓰는 말 같은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말이 축복이 되고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내 귀에 들리는 대로 행하리라.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니라. 말조심해야 합니다. 한 순간의 말, 그 말 그대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아무 생각없이 한 부당한 말 한마디가 하늘 안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를 낸다. 그래서 내가 심판 주가 되는 것이요. 내가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이요. 나는 형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높은 위치에 서서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라가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 말입니다. 이것은 이제 너는 구제불능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너는 선한 일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 요즘 말로 말하면, 배냇병신이라는 말입니다. 아주 고치지 못할 영영 구제불능이라고 말을 하는 욕설입니다. 이것은 절망하는 욕설입니다. 이것은 인격살인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에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흔하게 쓰는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축복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지혜에 반대가 미련함입니다. 미련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이제 끝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예의 끝을 말하는 것입니다. 명예 살인행위입니다. 명예 살인행위. 그래서 이렇게 상대방을 심판해 버릴 때, 형제를 심판할 때 오늘 성경은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지옥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살인행위니, 사람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명예를 죽이고, 인격을 죽이고, 운명을 죽여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놓고 돌아섰는데, 뒤를 보니 이 사람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상태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더니,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내가 남을 원망하는 것도 죄이지만, 원망을 듣는 것도 죄입니다. 이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잘했다고 하겠지요. 아닙니다. 나는 정당하다고 하겠지요. 정당하고, 안하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가 마음 아파하고 있는 한 당신을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에 주시는 주제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얼마나 귀하게 말씀하십니까?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화평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중국에 선교사로 가서 일하는 분들의 선교수기가 기록 된 것들이 많은데 그 중에 이런 설교가 있습니다. 만일 누구를 미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마치 유리벽에 쌓인 것과 같다. 유리벽이니 볼 수는 있어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예배할 수는 있어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을 듣는 동안은 내 마음에 아무 주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기도응답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먼저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화목하고 와서 드리라. 아주 구체적이고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이 먼저니까. 제사보다 먼저라는 것을 알았으면, 이제는 제물은 놔두고 가라. 기다리라가 아닙니다. 가라입니다. 우리는 화평을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저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하지. 저가 찾아오면, 맞아주지. 그런 정도로 의가 된다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아주 적극적입니다. 너는 가라. 가서 화목하고,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4장 50절에 말씀하십니다.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여러분, 더욱이 우리 부인들은 잘 아십니다. 뻣뻣한 김치, 배추라도, 소금을 한 번 치면, 부들부들 해집니다. 교만한 것도 소금을 치면 겸손해집니다. 소금이 부드럽게 합니다. 온유하게 하고 고르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소금은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소금의 본질은 잃지 않으나, 소금의 형체는 없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본질의 변화는 없으나. 소금은 간 곳이 없습니다. 그리할 때에 화목한 것입니다. 여러분, 화목하려면 많은 손해가 오고, 형제가 없어져야 합니다. 나란 존재가 없어져야 합니다. 내 명예고 뭐고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화목할 수 있고, 또 하나.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는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하나됨이 없다는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구약에 돌아가보면, 야곱이 에서와 불화하였습니다. 따져 말하면 야곱은 할 말이 있는 사람입니다. 정당하게 거래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잘못을 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안됩니다. 그는 20년 동안 헤어져 원수로 지내다가 압복강변에서 기도하고, 압복강변을 건너가서 자기 형님과 20년만에 만납니다. 원수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 만납니다. 끌어안고 입을 맞출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보니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형님과 화해할 때에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제사 예배 기도 다 중요하지만, 아닙니다. 이보다 먼저 화목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할 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라. 그리고 예배하라. 그리고 찬송하라. 화목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늘 기도하고 늘 찬송하면서도 주의 얼굴을 가까이 뵙지 못하고 우리 마음에 깊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감격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오늘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화목하라 했는데, 화목없는 기도 화목없는 제사. 화목 없는 예배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늘 답답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은총을 더하사 먼저 화목하게 하소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깨끗한 화목이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의 음성이 들려오며 야곱처럼 하늘이 열리는 기쁨. 주님의 얼굴을 뵙는 감격 그 안에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