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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3.02.16
제 목 :먼저 할 일 먼저 하라(3)
본 문 :마태복음 7 : 1 ∼ 5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스티븐 코비 박사의 저서 “Seven Habit of Higher Effective People”이라는 책은 벌써 수년 동안을 비소설계에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감동을 주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말로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고 번역됩니다. 이 책에서 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공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입니다. 첫째, 주도적인 사람들이다, 하였습니다. 주도적이란 내 책임은 내가 진다는 것입니다.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고 또한 남의 책임도 내가 지는 것입니다. 주도권이라는 것입니다. 주도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둘째, 목표가 분명합니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셋째, 소중한 것을 먼저 합니다. 어차피 다 할 수 없으니까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는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넷째, 상호이익을 추구합니다. 나만 유익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장사를 한다면, 나도 이롭고 저도 이롭고, win-win으로 통하는 것이지 나는 이익을 보고 남에게는 손해를 주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사소한 행동도 win-win으로 통합니다. 나도 좋게 너도 좋게입니다. 나만 좋고 너는 희생해라,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다섯째, 경청을 먼저 하고 그 다믕에 설명을 합니다. 보면 대체로 남의 말을 잘 안듣습니다. 자기말만 옳다고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충분히 듣는 것부터 먼저 한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여섯째, 시너지(Synergy)를 활용한다, 했습니다. 혼자의 힘이 아니고 공동상승작용, 시너지를 잘 활용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심신을 단련한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 성공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하고 싶은 것은 바로 먼저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 먼저 하라, 먼저 할 일을 먼저 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먼저 듣는다, 먼저 내가 할 일부터, 내 책임부터 먼저 다한다- 그것이 책 전체에 흐르는 맥락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언덕을 향해 가실 때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뿐만 아니라 간간이 로마군인이 마구 내려치는 매를 맞으며, 쓰러져 쓰러져가면서 가십니다. 이 어려운 고난의 길에서 예수님께서 한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의 유일한 말씀입니다. 울면서 따라오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십니다.(눅 23:28). 그 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각지 않으시고 뒤에 따르는 불쌍한 우리백성을 생각하십니다. 너와 네 자녀를 위해서 울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의 그 받을 저주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후로 이스라엘백성은 2000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 백성으로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그 후손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할 사람들이 죽지 못하고 뒤따라가면서 기껏 울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나약한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고난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 감상주의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받을 고난과 네 자손들이 받을 저주를 생각하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총 주제는 비판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여기에 큰 뜻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비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이고, 둘째는 비판하는 자가 누구인가, 누가 비판을 할 수 있는가이며, 셋째는 비판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 그 대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유명한 헬라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Procroustes)의 침대’라고 하는 신화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라고 하는 장대하고 날쌔고 교활한 강도가 아테네로 향하는 요로의 길목에 제 철침대를 가져다놓고 거기에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을 붙잡아 뉘어봐서 몸이 침대보다 크면 잘라내고 침대보다 적으면 두들겨 늘여서 죽입니다. 제 철침대를 놓고 이것을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커도 죽이고 작아도 죽이고. 그런 못된 강도가 있었다-이야기는 그것뿐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자신의 잣대로 남을 재기 일쑤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잣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객관적으로””객관적으로”하지만 다 거짓말입니다. 객관이라는 말까지 주관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백미(人生百味)」라고 하는 책에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서 몇 개 소개합니다. 손님을 대접할 때 내가 손님을 집에 모셔서 대접할 때는 “나는 사람들을 좋아해서 선심을 써서 이렇게 하노라”하고, 다른 사람이 손님을 대접하면 “저사람 집자랑 하느라고 저런다”라고 말합니다. 내 아이가 음악을 공부하겠다고 음악을 선택하면 “이 아이는 아주 절대음감이 있어서, 소질이 있어서 음악을 시킨다”하고, 남의 집 아이가 음악을 공부한다고 하면, 저것은 허영이라고, 잘못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선거에 출마할 때는 사회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출마한다고 떠들고 남이 출마할 때는 저 사람 불순한 목적이 있다, 합니다. 내가 승진할 때는 내 능력의 결과로 승진했다 하고 남이 승진하는 것을 보면 줄을 잘 서서라고 말합니다. 내가 새 집을 마련하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는 필요가 있었다 하고 남이 새집을 마련하면 주제넘게 허세를 부린다고 말합니다. 내가 여행을 할 때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 하노라, 하고 남이 여행을 하면 면세품 쇼핑하러 갔다, 한다고 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똑같은 사건인데 이렇게 자기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음속에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악이 뿌리박고 있어서 이같은 비평을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비방을 하면 그 인격이 썪어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에 비판하지 말라, 하십니다. 헬라말 원문은 ‘메크리네테’인데 ‘크리노(비판)’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판결봉을 두드리며 판정을 내리는 그 판결을 말합니다. 이런 판결을 내릴 때 문제는 이것입니다. 누가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까. 누가 남을 판단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남을 판단하는 순간 내가 심판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재판장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무서운 것입니다. 보십시오. 구약성경 민수기 20장에 읽을 때마다 참 마음이 아픈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그때마다 늘 마음이 괴롭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모세 120세입니다. 그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느라고 40년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그런 그가 가나안에는 못 들어갑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비스가 산언덕에서 가나안을 멀리 바라보고 느보 산에서 죽고 맙니다. 차라리 그가 120세 되어서 기진맥진하여 죽었다, 라고 기록되었더라면 마음이 덜 아프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민20:12)” 세 가지 죄목을 딱 드시고 ‘너희는 가나안에 못들어간다’하십니다. 모세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무슨 죄가 있었냐고요?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갈 길이 멀다고 원망하고 마음에 안든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겠다고까지 했습니다. 모세가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난 순간에 확 돌아버렸습니다. 신앙에서 떠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말을 합니다. “패역한 너희여!” 이것이 심판입니다. ‘소망 없는 백성아!’함입니다. 소망 없는 백성이라고 외칠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사람아, 내 백성 내가 심판하지 네가 왜 심판하느냐, 네가 무엇인데 심판하느냐,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를 믿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대로 심판하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모세가 실수한 적이, 구스 여자를 취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모세의 형 아론과 모세를 업어 키운 누나 미리암이 모세를 사정없이 몰아세웁니다. 모세의 누나요 형이니 또 쉽게 말하게 되거든요. 하나님의 종 모세가 이럴 수 있느냐고 나오는대로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2장 8절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바로 내려치십니다.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모름지기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판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 너도 비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실수했습니다. 시편 106편 33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망령되이 말하였다고 했습니다. 망령되이 말을 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습니다.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심판하는 말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잘못하는 것, 이것이 잘못입니다. 그 다음으로 2절에 보면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하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면 나도 심판을 받습니다. 남을 비방하면 나도 비방을 받습니다. 저주하면 내가 저주를 받습니다. 참 이상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오면서 많이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남 넘어지는 것을 보고 웃어보십시오. 꼭 그 다음에 가서는 내가 넘어집니다, 꼭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감히 누가 남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사막의 교부’들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분들이 사막에 들어가서 이 세상과 단절하고 거룩하게 경건하게 깨끗한 영혼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가려고 한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사막의 교부라고 하는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서 산 그 생활, 사막 수도원 생활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그 수도원은 있습니다. 그 기록에 보면 그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규칙 중에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가 뭐냐하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도 죄인이요 너도 비판을 받을 것이므로 너 자신을 살피고 남을 비판하지 말라 – 이것을 제1조로 내세우는 규칙입니다. 두 번째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기록 중에는 너무도 엄청난 얘기가 있습니다. 2년에 한 마디만 하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세 마디 하고 죽은 사람도 있더라고요. 말하지 말라, 할말이 있으면 명상과 기도로 새기라, 한 것입니다. 비방할 말이 있습니까? 명상과 기도로 다 소화하십시오. 그 영혼이 깨끗해져야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수도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말라. 일절 말하지 말라.’ 사실 또 그렇습니다. 한마디 했다가 그 다음에 그 말이 자기가 한 말이 옳다고 하다보니 더 말이 많아지고, 정당화하다보니 말에서 말을 낳아서 나중에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니, 말하지 말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로지 명상과 기도로 다 소화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비판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 하십니다.
또 그 다음에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형제, 그는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를 비판하면 그가 아프고,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그가 눈물 흘리면 내 눈에 피가 납니다. 형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를 비판하는 순간 형제관계가 끊어집니다. 형제관계가 끊어지면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더 끊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므로 형제를 비판하지 말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 보면 난센스같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할 일 먼저 하라.’ 왜요? 내 눈에는 들보가 있고 저 눈에는 티가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성경을 읽으면 들보라는 말이 나올 때 아마 들보라는 것이 티보다 조금 큰 것이겠지, 했습니다. 크면서 자세히 참고하다보니 진짜 들보입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들보가 이 들보입니다. 성경에 있는 들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비교가 됩니까. 티와 들보. 내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따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난센스입니까. 이것이 확실한 사실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속에 자기자랑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옳다, 하고 싶은 것을 남 비방하는 말로 대신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의 불의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부부싸움 안하는 사람은 남 부부싸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남 부부싸움 했다고 신바람 나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스스로들 매일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싸웠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니 방망이, 몽둥이가 무엇인지 알지요. 그뿐입니까. 이래놓고는 그런고로 저 사람들보다는 나는 좀 낫다 – 이렇게 정당화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정당화를 위해서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남말 많이 하는 사람은 보나마나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제 눈에 들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 ‘나 먼저 나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생각하라.’ 케네스 리치라고 하는 영성신학자의 [True Prayer]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경험의 사람, 실천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이 없습니다. 조용하게 실천합니다. 조용하게 봉사합니다. 도대체 말 많이 하는 사람 제대로 봉사하는 법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대단한 일같이 말하지만 저는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높이 성숙한 사람은 실천하면 깨닫고 실천하면서 배웁니다. 봉사하면서 배우고 있기 때문에 그는 말이 없습니다. 그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는 거룩한 생활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이 되는데, 그것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거룩해집니다. 명상을 통해서도 아니고 말을 통해서도 아니고 설명을 통해서도 아닙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 영혼을 거룩하게, 좀더 거룩하게 끌어올립니다. 세 번째는 분별의식이 있습니다. 분별력이 있어서 어떤 경우에도 내가 누구냐를 잊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알고 나 자신을 비판하는 일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pace를 언제나 먼저 지켜갑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네 눈에 들보가 있다’하십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허물은 들보요 남의 허물은 티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만큼 우리는 확실하게 규정을 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비방하는 것은 마치 들보를 가진 사람이 남의 티를 말하는 것과 같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눈의 들보에 먼저 관심을 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요한 결론은 무엇입니까. 네 눈의 들보를 빼라, 그것을 먼저 빼라, 먼저 네 눈의 들보를 확 빼어버리라, 그리고 “밝히 보고” –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야 밝히 보게 됩니다. 그러면 남의 눈의 티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눈의 들보를 빼고, 그리고 보십시오. 그 때에 밝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나를 비판하고 다른 사람의 티가 보일 때마다 나를 살피고 내 눈에 들보가 있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먼저 뺄 것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빼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밝히 보게 되면 밝은 세상, 밝은 관계, 밝은 은혜의 세계를 볼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께서 인도하사 은혜의 보좌 앞에서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으며, 주 앞에 선 내 모습을 보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수많은 말을 했습니다. 티를 말했고, 허물을 말했고, 많은 비판을 했습니다마는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몰랐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기도하오니 용서해주시고 이제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게 하시고, 이것을 빼고 밝은 눈으로 이웃을 보고 세상을 볼 수 있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밝은 눈으로 나를 보고 내 앞에 있는 운명도 보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으로 볼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