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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증인

사도행전 3: 11 ~ 16

곽선희 목사

2001.04.15

날 짜 :2001.04.15
제 목 :부활 신앙의 증인
본 문 :사도행전 3 : 11 ~ 16

얼마 전 중앙일보에 “증인 사생활보호 허점”이라고 하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검찰에 각종수사기록이 공판 과정에서 그대로 노출되어서 관련된 증인들의 신변과 사생활보호에 허점을 드러낸다고 하는 이런 문제를 크게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증인과 피해자는 보복이 두려워서 진술을 꺼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그 사실을 목격했다” 라고 당당하게 나서서 증명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사건을 확실하게 보았노라!” 이 한마디,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다 없어지면 사건은 그대로 미궁으로 묻히고 맙니다. 엄연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종종 증인이 없고 증거가 없어요. 그래서 아주 없던 일들처럼 덮어버려지고 마는 사건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어느 하나 똑바로 증거된 일이 있습니까? 왜요? 증인이 없어요. 증거가 없어요. 그 누구도 내가 증인이라는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에 따르는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 불이익이냐 이익이냐의 문제가 아니요. 사실을 사실대로 목숨을 걸고 말할 수 있어야 되겠는데 증인들이 다 도망갔어요. 피해자들마저도 보복이 무서워서 다 숨어버렸어요. 진실을 은폐하고 있어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이것이 진실입니다. 사실이 사실대로 이해되면 이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사실이 사실대로 확증되면 거기에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진실도 없고 진리도 없고 정의도 표류되는 그런 세상에 살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가 안보이는 것입니다. 암담한 것이올시다. 진리가 땅에 묻히고 정의가 표류하는데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겠습니까?
사실과 사실에 대한 믿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긴장관계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엄연한 사실이지마는 사실을 사실로 내가 믿지 않는다면 역사적 사실이 숨어있어도 내게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이러한 죽을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나는 죽을 병에 걸렸다하는 것을 나는 믿지 않아요. 내가 또 모르고 있어요. 그러면 나는 지금 현재는 죽을 병에 죽어가면서도 나는 죽어 가는 사람의 의식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이 불신이 문제요. 또 병든 이성이 문제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성을 굴립니다. 자기생각으로 자기 합리적 이해능력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사건은 사건이지, 내 마음에 들던 안 들던 사실은 사실대로 있는 거예요. 당신이 그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와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자기 이성의 제한 속에서 만사를 이해하려고 들고 때로는 긍정하고 부정하고. 이게 얼마나 한심한 생각입니까.
또한 오판이 문제입니다. 판단이 빗나갈 때 사건 자체가 빗나가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기 집착과 자기 경험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내 경험에 그런 일 없다. 들은 바도 없고 본 바도 없다. 그런고로 없다.’ 그래서 없는 일입니까. 내가 못가본 세상이 없고 내가 못 본 세상은 없고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없는 거냐고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경험과 지식에 집착해서 진리의 엄연한 것, 사건 자체의 놀라운 진리를 우리가 부정하며 미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됨과 진리 됨을 모독하면서 사는 우리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믿을 때만 사건이 됩니다. 특별히 사랑에 대해서 소중한 사랑을 받고 있어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내가 믿지 않으면 그 사랑은 나와 상관이 없구만요. 한평생을 기뻐하며 감사 찬송을 할만큼 엄청난 사랑을 내가 받는데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내가 믿지 않고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과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내 생활은 여전히 종말로 치닫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해와 논리, 그 대단히 중요한 거 같으나 사실 자체와는 거리가 멀답니다. 한번 불신의 노예가 되기 시작하면 진리와 그리고 의를 벗어나서 표류하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 엄연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 당시에부터 지금까지 믿는 자가 있고 안 믿는 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어떤 사건이든 믿는 자가 있고 안 믿는 자가 있어요.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대한 기록들을 성경에서 자세히 보면은 이상하게도요 성경은 ‘그가 믿었다’고 하는 말보다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더라’ ‘오히려 의심하더라’ 그렇게 돼있어요. 당연하죠 나도 의심할텐데. 누군들 그걸 의심 안 하겠습니까? 의심했다고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엄청난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게 되면 가지는 순간에 그 부활 생명과 내 생명이 연합해서 내 자신이 부활하는 놀라운 기적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을 때는 이 엄연한 사실도 아무 상관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부활사건과 부활신앙, 그건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성경은 아주 드라마틱하게 구구절절이 우리에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뭐 인간적으로 예수님 앞에 참 못할 짓을 했죠.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만나 주십니다. 그 놀라운 얘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주셔요. 감사, 감격, 깜짝 놀라구요.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래서 그날부터 베드로는 새사람이 되어 살았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를 않아요. 그 사람, 예수님 몇 번 만나고 나서 ‘부활한 건 확실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것 같은데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갑니다. 이거 웬일입니까? 우린 그 점에 깊이 생각을 둬야 됩니다. 예수님 부활, 그 객관적 사실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거예요. 믿은들 그것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거예요. 여기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절과 오순절은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객관적 사건, 객관적 진리로 남고, 자 이제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이라고 하면 이거는 덧없는 신비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올시다. 이런 사건과 그에 대한 신앙, 이것이 서로 연합해서 귀중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 받으므로 비로소 새사람이 됩니다. 그전에 그가 물고기 잡으러 갔을 때에 예수님 친히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합니다. 다정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꾸짖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용납해주시는 주님 앞에 감격했습니다만은 그 감격만 가지고는 별 도리가 없었어요. 문제는 성령 충만하게 될 때 그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고 부활신앙의 사람이 될 때 부활의 증인으로 새로운 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초대교회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생각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고향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일로 돌아가 보세요. 자,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마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를 한 번 보세요. 예수님 대제사장과 빌라도, 가야바, 뭐 이런 사람들이 바리새 교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럴 때에 저들의 지식, 저들의 경건, 저들의 신앙적 상식으로는 이 예수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거예요. 그래서 재판을 하고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았고, 빌라도도 나름대로 ‘저는 죽어 마땅하다’ 생각해서 십자가에 못박았어요. 예수는 죽었어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걸 부활시켰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를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의인으로 살렸어요. 우리는 그를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해서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다’하고 높여 의인으로 영화롭게 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 순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다 같이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의인을 죽였으니까요. 이제 제자들이 “예수 부활”,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하는 순간에 그 속에 많은 뜻이 있어요. ‘예수는 죽어야 할 자가 아닙니다. 죽여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그를 죽인 사람들은 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는 메시지가 그 속에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완악한 무리들 앞에 “예수 부활!” 이렇게 말해놓고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줄줄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던 것이올시다. 그러니까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할 때는 한마디로 말하면 죽을 각오를 해야되는 거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각오를 하고야 그 한마디를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예나 오늘이나 증인에게는 용기가 필요해요. 비상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요.
공교롭게도 이 증거라고 하는 말을 ‘증인’ ‘증거’라고 하는 말을 헬라어로는 ‘마르투리아’라고 말합니다. ‘마르투리아’라고 하면 되요. 그런데 순교자를 영어로 뭐라고 하느냐 Martyr라고 합니다. 증거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서 영어로 발음하게 될 때 순교자가 됩니다. 그건 무슨 말인고 하니 증인이 순교자요 순교자가 증인이요. 부활의 증인은 순교자요. 자 보세요.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누가 죽이겠다 그러면 도망가면 되겠어요? 예수가 부활했고 예수를 믿는 나도 부활한다, 하는 것을 믿는다면 당당하게 죽어야지. 특별히 예수의 이름으로 죽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죠. 그래서 순교자만이 부활의 증인이란 말이요. 그 부활의 증인은 죽음을 넘어서는 거죠. 사망권세를 넘어서는 것이죠.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다” 그랬어요. 예수 부활에 대해서 부활 사건에 대하여 내가 증인이다. 아, 얼마나 놀라웁니까? 얼마나 큰 용기입니까? 얼마나 확실한 믿음입니까?
월리암 제임스라고 하는 교수님께서 “종교체험의 다양성”이라고 하는 책을 씁니다. 그 책 속에서 성숙한 종교적 인격, 그걸 가르쳐서 ‘성자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Saintliness 성자성을 가졌다. 이걸 네 가지로 표현하는데요, ‘성자’ 그 만이 아니고 ‘성도’ 다같이 성숙한 성도라면 같은 이러한 철학적 이러한 삶의 자세로 살기 마련이에요. 첫째가 세상 일상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큰 삶을 비전으로 삼고 산다. 일상적인 이해관계, 조금 더 벌면 어떻고 못 벌면 어때. 잃으면 어떻고 얻으면 어때. 오래 살면 어떻고 적게 살면 어때. 그게 중요하질 않아요. 보다 넓고 크고 위대한 세상을 저 앞에 있는 비전을 바라보며 사는 거죠. 이것이 바로 성자성이요.
또 한가지는 절대자인 하나님과 자신의 생명사이에 친애의 연속성을 가지고 살아야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요. 그 사랑 안에 내가 있어요.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어요. 내가 그 섭리 안에, 내가 있어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내가 고용되고 있어요. 그러한 가치관, 그러한 정체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죠.
또 하나는 이기적 폐쇄성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고 초월적 마음의 기상을 지니고 산다. 참 좋은 말씀이에요. 이기적인 폐쇄성. 여기에 노예가 될 때 사람은 비참합니다마는 이건 자유롭습니다. 나 중심한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삽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요.
넷째는 감정의 중심이 조화 있는 사람과 애정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율법적이고 도덕적 인격과는 달리 초월적 차원에서 산다는 것이죠. 여러분, 가장 무서운 것이 율법이요 또 무서운 것이 죽음입니다. 율법과 그리고 사망권세를 다 이기고 초연하게 자유인으로 누구도 그를 심판할 수 없어요. 누구도 그를 비판할 수 없어요. 누구도 말리지 못해요. 그러한 당당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는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속에 크게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돼 있고 부활사건 속에 우리는 의롭다하시는 증거가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부활의 약속을 믿고 십자가의 사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오늘 내가 지는 십자가 속에도 더 많은 신비로운 의미가 있음을 순간순간 해석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 부활을 바라보았기에 십자가를 쉽게 편하게 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조금 있으면 나를 못보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고 가는 그 길에 십자가라고 하는 사건은 아무 별것이 아니었어요. 이와 같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리는 신앙의 세가지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는 성서적 지식입니다. 성경적 지식이 없이는 신비주의에 빠진다. 또 하나는 경험입니다. 신앙적 체험이 없으면 신념과 관념주의에 빠져든다. 그리고 셋째는 봉사입니다. 봉사가 없으면 그 믿음은 자라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부활사건 앞에서 부활신앙을 가지고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갑니다. 부활신앙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용기 있게, 거침없이,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큰 표적이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벌떡 일으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깜짝 놀랄 때에 “놀랄 것 없네. 당신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하셔서 나와 함께 계셔서 여기서 이 표적을 주셨느니라”라고 겸손하게 증거합니다. 오직 부활의 능력, 오직 부활 증인, 부활신앙으로 살 때 비록 모순된 세상을 살면서도 밝은 세상을 바라보고, 절망으로 치닫는 속에서도 역사 저 건너편에 있는 밝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가장 활기 있고 용기 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증인의 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에게 부활을 통하야 확실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건만 우리는 때때로 믿음이 흔들려서 이 세상에 치우치고 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들임을 용서하시고, 베드로가 흔들릴 때에 함께 하신 것처럼 사도 바울이 약해질 때에 힘을 도와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다시 확증해 주시사 이 거친 세상에서 자유인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사망권세를 넘어서 주의 약속을 바라보며 늘 승리 생활하는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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