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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2.01.20
제 목 :생각을 새롭게
본 문 :히브리서 12장 1절 ∼ 3절
어느 가정 주부가 고등어 두 마리를 시장에서 사가지고 집에 가지고 갔습니다. ‘내일 아침 이것으로 반찬을 하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고등어가 간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구두가 냉장고 안에 들어있더랍니다. 신발장을 가보니깐 신발장에 고등어가 놓여 있습니다. 이 여자가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여러분, 행동은 있는데 생각이 없다 말입니다. 그 생각은 어디로 갔습니까? 여러분, 이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어느 사이에 행동만 남고 생각은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이 먼저 가고 때로는 욕망이 먼저 가고 생각이 뒤따르면 그 일에는 계속 후회가 있습니다. 끝없는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이 먼저 가고 그리고 행동이 가서 생각한 바를 사건 속에서 행동 속에서 확증해 나갈 때에 그래서 때로는 더 높은 의미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올시다. 가령 생각과 행동이 따로 따로 간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인간을 학술적 용어로써는 호모사피엔스라고 합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말은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혹은 호모에렉투스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직립 보행하는 사람이다. 두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런 존재란 뜻입니다. 호모파베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도구, 용기를 사용할 줄 아는 존재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학술적 용어 속에서 사람의 사람 된 높은 가치는 어디 있느냐 하면, 호모사피엔스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 그 생각이 없는 인간 그건 다만 동물일 뿐입니다. 이 생각하는 능력, 기능,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있는 가장 귀중한 기능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생각을 져버릴 때 ‘인간 됨을 져버렸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올시다.
생각은 두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각하면서 자꾸 의심으로 갑니다. 생각이 의심으로 발전합니다. 의심하는 쪽으로 계속 추리하게 됩니다. 가령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남편이 저녁에 늦게 들어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아이고, 이거 우리 식구를 위해서 이렇게 밤늦도록 수고하는구나. 지금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배고플까?’ 이런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요것이 어디로 샜나. 오늘 아침에 수상한 전화가 오는 거 같던데 이기 어디로 빠졌나’ 생각한데요. 생각이 의심 쪽으로, 의심하다보면 이게 계속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됩니다 이게요. 이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올시다. 이렇게 의심으로 이어지는 생각, 이런 유형을 아담타입이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 유형입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생각하면서 믿어집니다. 이러니까 그렇다. 확실히 이건 믿을 수 있다. 믿음이 점점 깊어집니다. 생각하면서 믿음이 깊어집니다. 이러한 것을 아브라함 타입이라고 그럽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 그런대요. 그리고 ‘약속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자손을 주마’ 이렇게 했거든요. 이 약속을 믿고 갑니다. 믿고 가면서 사실은 여러 번 휘청거렸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주신다고 했는데도 흉년이 드니까 애굽으로 피난도 갔고, 자식을 주신다고 했는데 10년 20년 기다려 보다가 이게 도무지 영 안되니깐 그만 서자를 얻었지요. 그게 이스마엘입니다. 이렇게 휘청거렸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내가 네게 말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생각을 고쳤습니다. 믿음을 더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은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믿을 수 있다. 과연 그 능력과 지혜는 놀라운 것이고 나를 선택하신 경륜은 위대한 것이다.’ 계속 믿음을 확증해 나갑니다. 그리고 모리아산에서 이 클라이막스를 이루게 됩니다. 생각이 그 믿음을 발전시켰습니다.
우리가 흔히 읽을 수 있는 교양서적 중에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번쯤은 꼭 읽을만한 아주 유익한 교양서적입니다. 그 리차드 칼슨이 이제 다른 저서로써 ‘생각의 집착을 버리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 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관점의 선택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는 겁니다. 꼭 같은 일을 놓고 어느 쪽을 생각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죠. 행복은 소유의 문제도 아닙니다. 행복은 지위의 문제도 아닙니다. 행복은 지식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생각하느냐는 것이죠. 거기에 따라서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해요. 아시는 대로 인간의 행복 곧 인간적인 행복이란 생각의 문제입니다. 결코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낙천주의자가 됩니다. 좋은 방향으로 좋게좋게 생각하고 밝게 생각하는 그런 생각의 성향을 가지게 되면 그는 범사에 행복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계속 부정적이고 의심하고, 부정하고 의심하고, 부정하고 마지막에는 우울증에 빠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거 정신적으로 죽어지고 맙니다. 이 사람은 영영 구제 받을 수 없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그 보다 더 강한 사람은 적을 친구로 만드는 사람이다. 가장 풍족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처지에서 만족하는 사람이다’ 생각이에요. ‘나는 만족하다. 아~ 나는 넘친다. 나는 넘치도록 행복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제일 큰 부자입니다. 또한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남을 칭찬하는 사람이다.’ 칭찬하지 않고 칭찬 받는 사람 보았습니까? 여러분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까? 칭찬하는 쪽으로 계속 우리 생각이 발전해야 되요. 그래야 칭찬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이라는 것이 뭡니까? 여기 몇 가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먼저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걸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또 멀리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 마지막 궁극적 종말은 어디 있느냐. 그걸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미래를 생각하고, 오늘에 살지만 끝을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어떤 방향에서 생각하느냐. 흔히 말하는 대로 과거 지향적이냐 미래지향적이냐. 항상 우리는 과거를 생각합니까? 아니면 밝은 미래를 내다봅니까? 어느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또 하나는 집중력입니다. Concentration, 집중해야된다. 생각이 건성으로 되어선 안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생각하십시다. 가만히 보세요. 이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니까요 공부할 때는 놀 생각을 해요. 밖에 나가 놀 생각밖에 없어요. 여기 앉아있긴 하지만 생각은 지금 저기 가 있어요. 그러니까 공부가 안돼요. 또 그런가하면 나가 놀 때는 또 공부할 걱정을 해요. 이거 숙제 안 해 가지고 가서 내일 가서 얻어맞을 생각을 하고 앉았어요. 걱정이 되는 거예요. 놀 때는 놀기만 하고 공부할 때는 공부만 해야돼요. 집중해야 되는데 이 집중력이 부족하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요. 뿐 만 아니라 자기가 가진 이 생각의 능력, 이 창조적 능력을 다 잃어버려요. 집중, 결국은 집중력 훈련입니다. 집중이 인격이요 집중이 그 사람의 운명입니다. 얼마나 집중적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죠. 또 하나는 지속성입니다. 한 두번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평생, 계속 생각합니다. 이 집중 그리고 지속적 생각이 마지막에 구멍을 뚫어요. 저 미래를 향하여 큰 소망의 길을 열어 놓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어요. 다 알 필요도 없고 다 가질 필요도 없고 또 다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됩니다. 무엇이 우선적인가. Priority number one. 이 최우선! 절대우선적인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생각하나마나한 거 쓸데없는 거 그 복잡한 거 그거 생각할 필요 없어요. 집중적으로 생각하되 최우선적인 것을 생각하고, 또 하나는 유치한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은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행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제 그 유치한 생각 제발 좀 그만하고 이제는 성숙한, 인격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생각을 해야되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각 자체를 생각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의 기능인 이성, 그 이성이 건강하냐 병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생각 자체를 생각해야 되요. 저는 여러 모임에 이렇게 설교나 혹은 강연을 하러 다닐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나는 강사로 갔고 그 사회하시는 분은 따로 있죠. 그 사회하시는 분이 초조하게 이러구 있다가 강단에 올라가서 대체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만요. “시간이 됐으므로……” 그러거든요. 그래 내 시간을 보니깐 아직도 5분 전이에요. 이 사람은 자기 시계에 의해서 “시간이 됐으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시계가 있더라도 그 시계는 표준시계에 맞춰야지 고장난 내 시계에 맞추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내 생각이, 병든 내 이성이 사고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면 그처럼 멍청한 일이 어디 있어요. 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 인격이? 이게 바로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념의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이 타락한 이성, 타락한 생각, 타락한 생각의 기준, 이 병든 이성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내 생각이, 내 이성이 근본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개선해 보려고 어떻게 고쳐보려고, 어떻게 따라가 보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거기서는 밝을 미래를 창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가장 핵심적인 말씀은 중생한 이성이어야 합니다. 그 이성이 중생해야 됩니다. 이성이 거듭나야 됩니다. 그리고야 합리적인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야 밝게 볼 수가 있어요. 추리능력, 비판 능력이 바른 궤도에 설 수가 있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이 차 운전을 하고 다니다가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 앞에서 큰소리로 호령을 했답니다. “왜? 불을 안켜고 이렇게 컴컴하게들 앉아가지고 뭘 하는거냐!” 하고 소리질렀어요. 그러니깐 아이들이 “불 켰는데요.” 보니깐 썬글라스를 끼고 있더랍니다. 밖에서 끼고 있던 썬글라스를 끼고 ‘왜 방이 어두우냐!’ 방이 어두운 겁니까? 제 눈이 문제지……. 내 생각의 척도가 빚나갔다고요 벌써……. 근본적으로 잘못됐어요. 이걸 어떻게 해요. 거기다 의지해 가지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중생하지 못한 인간이 아무리 공부를 하면 뭘해요? 기껏 한다는 게 사기꾼이나 되고 말이지. 아 요새 머리 좋은 사람들 많데요. 뭐 증권이 어떻고, 나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어요. 좌우간 머리 좋은 사람들이야. 그러나 멍청한 사람이에요. 저도 망하고 남도 망하고. 이 무슨 짓입니까? 나라를 망치고 말이에요. 이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해가지고 그 짓 하자는 겁니까? 왜요? 이성이 병들었거요. 그런고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두가지로 명령을 하십니다. 이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중생케 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생각하라.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생각하라. 생각의 초점을 예수께 맞춥니다. 마치 경기자가 푯대를 향해 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나를 보고 세상을 보아서는 세상을 모릅니다. 나를 보고 예수를 보아도 예수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를 보고 나를 보아야 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옵니다. 나를 보고 아버지를 보면 부끄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보고 나를 보니까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 기뻐하는 아버지, 정신없이 기뻐하는 그 아버지 얼굴을 보고 나를 보니 나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이제 복잡한 과거, 생각할 것 없습니다. 다시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나를 보고, 예수를 보고 나를 보세요. 그래 오늘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는 능력이 많습니다. 지혜도 있습니다. 기회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를 안 질 수도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 왜 십자가를 져야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 말없이 서있는 예수님을 보세요.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를 생각하는 순간에 세상에 억울한 게 뭐 있습니까? 여러분, 억울하고 분하고 뭐 어쩌고… 말도 안돼는 소리입니다. 십자가를 보세요. 참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슨 변명이 그렇게 많소. 무엇을 못 참을 수 있다는 얘기요.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의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죄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사랑하셨다”고. 여러분, 하나님을 거역한 분이 한 두 분입니까? 얼마나 많은 동안 하나님을 거역했습니까? 양심을 거역했습니까? 불의의 길로 행했습니까 마는 하나님은 오래오래 참아주셨어요. 무던히도 참아주셔서 오늘 내가 있는 거 아닙니까? 나를 참아주신 그를 생각하세요. 사랑이 뭡니까? 사랑이란 곧 믿음이에요. 나를 믿어 주었어요. 사랑은 참는 거예요. 나의 모든 불의를 참아 주셨어요. 사랑은 기다려 주는 거예요. 너무나 오래오래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돌아오기를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 주었어요. 사랑은 자기희생이에요. 내 대신, 내가 죽어야 할 대신 그가 죽으시고, 내가 고난당해야될 것을 그가 당하시고, 내가 저주받아야 할 것을 그가 당하시고 대신 십자가를 졌어요. 그 분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나를 소중히 여겨서 내게 일을 맡기셨어요. 많은 은사를 주어서 오늘도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분을 생각하세요. 그분을 생각하세요.
골로새서 3장 2절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오묘한 말씀이죠. 어떤 한사람이 길을 지나가면서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왜요?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중이거든요. 지금 한시간이 바빠요. 이 며칠만 이제 직장을 못 얻어도 처자식들이 굶고 앉았어요 지금. 그래서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고 원망하면서 지금 직장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이 사람은 본래 슈퍼마켓을 경영했는데 어느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가지고 슈퍼마켓 홀랑 날아가 버리고 말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어요. 문밖에 나서게 됐어요. 이제는 한끼의 식사가 어려워요. 그래서 이렇게 길을 가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했는데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면서 십초만에, 본인의 말이 십초만에 생각이 확 돌아가면서 환한 미래를 보게 되었답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분이 자세히 보니까 두발이 없어요. 두발이 없는 분이 휠체어에 앉아서 바로 이 사람을 만나서 “안녕하십니까? Good morning!” 그 다음에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그러더랍니다. ‘아니, 발이 없어 휠체어에 앉은 분이 날씨 좋은 건 또 뭐요. 저 사람도 날씨 좋은 날이 있나?’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그는 화장실에 있는 큰 거울에다가 이렇게 써 놓았답니다. “구두가 없어서 불편하거든 구두 신을 필요가 없는 사람을 생각하라.” 구두가 문제가 아니오. 구두 신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라. 그 순간 생각이 확 돌아가요. ‘나는 행복하다. 나는 넉넉하다.’ 거기서 새로운 일을 개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케리어의 법칙이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윌리스 H. 케리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성공을 하고 그가 성공한 비결을 요약해서 많은 사람에게 가르쳤어요. 그 말이 바로 캐리어의 법칙이 되었어요. 고난을 이기는 법칙. 첫째는 무엇을 위하여 내가 걱정을 하나?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목적의식이에요.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요. 두 번째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수용하라. 이 현실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수용하라 그거예요. 받아 들이라. 세 번째는 깊이 생각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침착하게 현실에서 열린 문을 찾으라. 무엇인가 길이 있어요. 그런 개선방법을 생각하라, 고 말합니다.
여러분, 행동하고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생각 없이 살았습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후회와 절망과 낙담뿐입니까? 다시 생각하십시다. 이제라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나를 생각하고 앞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할 나를 생각하세요.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서 죽으실 뿐더러 내 운명을 책임지고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 고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저 미래를 바라보면서 종말을 전망하십시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생각하고 그리하는 동안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올 것입니다. 생각이 중생하고야 새로운 운명이 열리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미련하고 우둔한 저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래오래 참아주시니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로 확증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빛을 보고 현실에서 저 먼 미래,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