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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1.09.23
제 목 :선으로 악을 이기라
본 문 :로마서 12 : 14 ∼ 21
요새 볼만한 영화가 한편 있었습니다. ‘지옥의 묵시록’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옥’ 자가 나왔는데 안 보면 되겠습니까? 게다가 묵시록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안보겠습니까? ‘지옥의 묵시록’ 이것은 코폴라감독, ‘대부’라고 하는 명화 1,2편을 제작했던 그분이 만든 명작입니다. 3시간 16분, 긴 시간 상영되는 영화입니다.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커츠라고 하는 대령 한 사람이 전쟁을 하는 중에 전쟁광이 되버렸습니다. 전쟁에 미쳐버렸어요. 그래서 캄보디아 어느 산중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전제 군주로 군림하게 됩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추격하면서 시체를 매달아 놓고 이렇게 하면서 거기서 왕같이 호령을 하며 지내는 한 사람이 있는데 정보부에서는 이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 월러트라고 하는 대위를 파송을 합니다. “네가 나가서 저 사람을 제거하라. 뭐 생사간에 제거하라.” 그런데 이분이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 많은 어려움, 천신만고 끝에 도달을 하고 정말 어려운 가운데서 그 대령을 제거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거 실화입니다. 그 영화를 보다 보면 이건 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 같은 실제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전쟁이 뭐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 처음에는 누구든지 나라와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나가요. 좋은 이름으로 좋은 명분 하에 나라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그런 마음으로 출전을 합니다만은 전쟁 상황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상황에 딱 부딪히면 이제 뭐 나라고 국가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요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나 한 몸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써바이벌을 위해서 싸웁니다. 셋째는 이제 싸우다 보면 싸우기 위해 싸웁니다. 안 싸울 수가 없게 돼있어요. 이 싸움이라는 불가피성에 몰려서 싸우기 위해 싸웁니다. 한 단 더 나아가면은 싸우는 것을 즐기면서 싸웁니다. 여기서 전쟁 미치광이가 되는 것이올시다. 저도 6.25전쟁 때 최 일선에 육박전을 하는 현실 속에 잠깐 있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전쟁이란 무섭습니다. 이 상황 속에 들어가면 몇 번 치르고 나면은 눈이 빨갛게 뒤집힙니다. 그러면은 이제는 어느 순간에서는 그대로 총으로 난사하면서 쓰러지는걸 보고 즐깁니다. 그런 전쟁광이 되는 것이예요. 그 영화에 한 장면에서 보면 바그너의 음악을 틀어대며 인간 사냥을 하는 미군 헬리콥터 편대를 볼 수 있습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바그너 음악을 대형 고성능 스피커로다가 음악을 틀어대고 그리고 인간 사냥을 하는 겁니다. 마구 갈기고 쓰러지는 걸 보면서 불타는 것을 보면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세를 부르고. 이것이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악의 속성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누구나 선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선으로 시작한 행위가 악을 척결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선한 목적은 사라지고 이제 악한 방법으로 선을 이루려고 합니다. 악을 대항하면서 나 또한 악해지고 맙니다. 마침내 목적은 상실하고 왜 싸워야 되는지도 모릅니다. 더 악해집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 나쁜 놈 버릇 가르친다고 하다가 자기가 더 나빠진다고.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말합니다. 분노란 흔히 어리석음이나 경솔에서 시작하고 후회로 끝내기 쉽다. 분노란 것은 언제나 저 끝에 가서 후회로 끝나는 것이요.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내가 악해졌다면 나는 판정패올시다. 이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악은 그 속성이 매우 복잡합니다. 오늘 우리가 흔히 악이라고 하게 되면은 뭐 십계명에 있는 대로 살인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며 도둑질하지 말며 거짓증거 하지 말며 이렇게 단순 제약을 생각해 봅니다만은 아니올시다. 현대의 악은 더더욱 지능적이고 아주 복잡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 악 중에 가장 무서운 악이 논리적인 악입니다. 논리적 악의 대표가 소위 변증법적 유물론입니다. 여기서 모든 악을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 ‘The end justify means’ 유명한 명제입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 어떤 수단이든 관계없다. 결과만 좋으면 다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럴까요? 여기에 논리적인 악이 있습니다. 또는 목적만 선하면 된다. 어찌 방법까지 선할 수 있겠느냐. 방법에 악이 좀 있다하더라도 좋은 목적이라면 그 방법은 정당화 되는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주장을 합니다. 이 악이 세상을 이처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스또옙스키가 쓴 죄와 벌, 아마도 이 소설을 젊었을 때 안 본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주인공이 되는 로마노비치 라스꼴리니코프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주인공은 젊었을 때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이 있고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초인간적인 사람이 있다고. 이 초인간적인 사람의 행위는 정당화되어야 된다, 이런 이상한 철학을 가집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 돈은 많은데 그냥 긁어모아서 못된 방법으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조금도 선한 일에 쓰지 않아요. ‘저런 쓰레기같은 인간은 죽여도 된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좋은 일 하면 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 쓰레기같은 저 인간을 없애고 저 돈으로 위대한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죽여버렸어요. 그러나 그는 뒤에 두고두고 아무리 변명을 해도 변명이 통하지 않아요. 마음속에 노파를 죽인 가책의식에 한평생을 괴로워합니다. 죄와 벌입니다. 여러분 어떤 악도 좋은 목적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는 없음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책임전가올시다. 언제나 나는 결과일 뿐이요 동기는 저쪽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모든 악의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이 책임전가라고 하는 데 악의 극치가 있는 거예요. 오늘도 우리가 엄청난 사건을 봅니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그대로 폭파되었습니다만은 그분들에게 물으세요. 이것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이러한 악한 철학, 그 논리가 오늘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 약자는 죄가 없다. 가난한 자는 무죄다. 억울하게 당했으니까 그에게 잘못은 없는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게 당했으면 이런 일이 왔겠느냐. 그런 고로 이것은 결과일 뿐이요 그런고로 약자와 가난한 자와 피해자는 무죄다. 무죄 선언을 해버립니다. 이 무서운 철학, 이 논리가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은 도적질해도 되는 것입니까? 내가 어느 남자로부터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이제 이 여자가 많은 남자를 괴롭혀도 되는 것입니까. 내가 피해자가 되었다고 해서 나의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냐고요. 정말로 피해자와 가난한 자는 무죄입니까. 알게 모르게 이 무서운 논리적인 철학이 이 세상을 점점 수렁으로 빠뜨리는 것이예요.
또한 악의 속성이라는 것은 심미학적인 악이 있습니다. 사람은 행복이라는 것도 좋은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잠깐 오락도 그렇고 기쁨도 그렇고 우리의 행복은 전부 선한 일, 아름다운 일, 진선미를 찾아가면서 행복을 찾아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나면은 그 오락성과 행복관도 바뀝니다. 그래서 남 잘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남 망하는 걸 보고 기뻐합니다. 잘 걷는 사람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는 사람보고 폭소를 합니다. 그래서 남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너무 재미가 있어가지고 자꾸 돌아가며 퍼뜨리고 다니는 거예요. 이 자체가 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심미학적 악이예요. 그래가지고 거짓말하는 게 재미있고 속이는 것이 재미있고 악한 일을 하면서 거기서 통쾌함을 느끼는 거예요. 이 자체가 악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악 자체를 즐깁니다. 악을 행하면서 통쾌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무서운 악입니다.
또 하나는 의지적인 악입니다. 악을 행하고 승리감을 누립니다. 성취감을 즐깁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기가 지금 악마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대로 성공, 물리적인 성공, 권력 이것만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벌써 그는 어느 사이에 악마의 도구가 되어있어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 이제 성경은 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하여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을 이기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먼저는 신앙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원수 갚는 것,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네가 갚지 마라, 네가 손에 피를 묻히지 마라.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느니라. 내가 갚을 터이니 너는 네가 할 일만 해라.’ 이것이 성경 말씀이요.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말합니다. ‘평화하라’ 그랬어요. 평화하라. 내가 악한 대접을 받아도 내가 어떤 핍박을 받아도 평화하라. 내 마음의 참 평안이, 이 평안이 흔들려서는 안돼요. 그리고 나아가서 평화하라. 내가 미워해야 할 사람, 내가 대하는 저 대상의 마음 속에 평화를 심어줘야 되요. 그가 평화하고야 내 평화가 평화 될 수 있는 것이예요. 내 마음이 먼저 평화하고 저를 평화하게 해야 됩니다. 샬롬-샬롬, 윈-윈(Win-Win)이올시다. 나는 얻고 저는 잃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고, 거기에만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평화하라 그랬어요. 어떤 대우를 받아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그 때는 심방을 많이 했어요. 하루에 스물일곱 집, 심방을 많이 할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심방을 어떤 가정에 갔더니 집에 들어서자 마자 그 집에서 난장판이 났어요. 왜냐하면 그 집에 4대 독자 외아들이 있는데 얘가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인가 뭐 그 정도 되는 아이인데 밖에 나가 놀다가 얘들하고 싸웠던가봐요. 얘가 지금 너무 귀하게 커서 좀 버릇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아이한테 몇 대 맞았대요. 그리고 대신 때리려고 하는 순간에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가 나가서 붙들고 들어온 것이에요. 얘가 억울하고 분해서 지금 못견디는 것이에요. 당장 달려 나가야 된다고. 어머니가 참으라 그러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한 대 맞았으면 한 대 때려야 되는 거 아니냐 이거예요. 그리고 그냥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데 도대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요. 모처럼 그 집에 찾아갔는데. 그래 제가 그 놈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이길 자신 있냐?” “아, 그러믄요.” “그럼 이겨라 이놈아. 왜 지냐.” 했더니 당장 나가려 해요. “잠깐만 기다려. 이 놈아, 울면 진거야. 사내자식이 왜 우냐.” 뚝 그치더라고요. 그리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한 마디 더 하고 싶습니다. 미워하면 진 것입니다. 맞고도 웃으면 이긴 것이고요 때리고도 불안하면 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손해를 보고도 내 마음에 평안함이 있으면, 샬롬, 피스(Peace), 평안이 있으면 이긴 것이예요. 그러나 불안에 떨고 저를 미워하게 되면 그건 진 거예요.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라고요. 원수를 사랑하라.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라 하면 도덕 규범의 극치처럼 들려집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도덕군자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성자들이나 얘기지, 예수님의 얘기지 우리같은 보통사람이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나. 추상적인 진리처럼 얘기합니다만은 이제는 우리가 현실상황에 왔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것입니까, 미워할 것입니까? 원수를 미워하면 또 원수, 원수 해서 이제 세상이 다 끝나겠는데 아직도 원수를 미워해도 되느냐고요. 이제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 왔습니다. 원수를 미워하고는 다 죽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언제나 실제적 진리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악은 미워하되 원수를 사랑할 것이구요 오늘 성경은 너무나도 높고 냉철함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배고프거든 먹이라. 내 인도주의, 내가 할 사랑, 내 의무는 다 하는 거예요. 원수가 배고프면은 먹이라.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아주 냉철하길 원하십니다.
에리히 프롬의 ‘The Sane Society’ 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회’ 이 건강한 사회는 이 건강한 정신에서 오는데, 건강한 정신이란 뭐냐? 먼저 사랑하며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래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 얼마나 창조적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미움 받고 사랑하는 거예요. 창조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바로 거기에 건강한 사회가 있고요. 민족, 토지, 이런 것에 지나치게 유대관계에 머물지 않고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집단의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어야 되요. 자기 자신의 주체적 의식, 주체적 행위를 지켜가야 되요. 자기가 책임을 져야 되요. 내부 외부의 현실파악에 냉철해야 됩니다. 리얼리티(Reality), 사실을 똑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객관성과 이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주관성에 매이고, 나 자신에게 매이고, 내게 돌아오는 이득에 매이는 순간, 벌써 건강한 정신이 아닙니다. 객관성을 지키고 그리고 바른 이성을, 맑은 이성을 가지고 있고, 착한 양심을 지켜가야 된단 말입니다. 거기에 건강한 사람, 건강한 사람이 모였을 때,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말씀하십니다. 그 모진 고통, 고초를 당하면서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벤허’라고 하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극찬한 나머지 벤허는 성경 다음 가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자, 왜요? 여기 보면 벤허는 미움을 받습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끝까지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몸부림을 치고 승리합니다. 그것을 그려 놓은 겁니다. 그가 마지막 장면에 유명한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시기를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하는 음성이 내 귀에 들리는 순간, 내 손에서 검이 떠나는 것을 보았노라.” 그 후에 그는 검을 쓰지 않고 끝까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벤허를 보세요. 얼마나 크고, 놀라운 메시지가 거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악은 점점 극렬해갑니다. 장악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악에게 지지 말 것입니다. 절대로 미워하지 말 것입니다. 악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이기고 선으로 이기고 끝까지 진리로 이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여기에만이 승리가 있고 여기에만이 평화가 있고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절박한 상황에 왔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 말씀과 우리 생활은 좀 거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해답을 얻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악을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또 악해지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승리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