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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고난의 의미

베드로전서 2: 18 ~ 25

곽선희 목사

2002.08.25

날 짜 :2002.08.25
제 목 :선택적 고난의 의미
본 문 :베드로전서 2장 18절 ∼ 25절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저서 “Man for Himself”라고 하는 그 책에서 건강한 성격을 지닌 사람의 특징을 논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성격. 요새 우리는 건강하지 못한 성격, 건강하지 못한 인격으로 인해서 많은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판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한 성격은 네가지 특성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생산적 성향을 가졌다. 생산적 성향이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생산적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랑 자체가 남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남을 죽이는 것이 많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로 얼마나 남을 괴롭히는지… 이것은 비생산적입니다.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산적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자의 어려움에 내가 책임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책임을 같이 지면서 특별히 상대방을 높이 존경하는 것입니다. 존경해서 그를 높이고 동시에 결과로 나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생산적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생산적 사고입니다. 생각이 생산적입니다. 그래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볼 줄 알고 과거와 현재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볼 줄 압니다. 우리는 과거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아주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바라볼 줄 알고 또 주관적인 생각, 자기 생각에 집착을 하면서 정신을 못 차립니다. 객관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사이에. 객관적 시각을 넉넉하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산적 사고이고, 또 하나는 생산적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행복 그 자체가 바로 창조력입니다. 요새는 창의력으로 산다는 말을 합니다. 창의력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마음에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이 창의력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생산적 양심, 저는 오늘 여기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 양심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양심에 고통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당장 얼굴이 썩습니다. 몸도 비틀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정말 본의 아니게 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양심이 훨훨 나는 것처럼 항상 자유로워야 합니다. 외부의 압력에 대해서 초연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바로 그러한 양심이 바로 생산적 양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사에서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The City of God,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저 속에서 이렇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궁극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고통은 같은데 전혀 다른 두 가지 사람입니다. 그 고통의 결과를 이렇게 맺고 있다 하는 말입니다. 또한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습니다. 빅터 E. 프랭클(Victor E. Frankel) 이라고 하는 분을 많이 알고 계십니다. 그는 나치 독일의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고 다른 사람들도 고난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책을 썼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는 이 책을 특별히 감명 깊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비슷한 북한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한 5개월 동안 고생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제 노동 수용소는 땅에 있는 지옥입니다. ‘세상에 이런 데도 있구나.’ 참 하나님께서 어찌하던 간에 그걸 한 번 나로 하여금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서 그냥 죽었으면 여러분을 못 볼 뻔하였는데… 어쨌든 참 기적 중의 기적으로 제가 살아서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보통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가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으십시오. 고난 속에서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저주이지만,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놀라운 축복일 수 있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자에게는 고난은 축복일 수 있다. 여러분, 두고두고 생각할만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난 당하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떻게 해야 고난을 면할 수 있다. 고난을 피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실존적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말합니다. 오로지 고난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 또 하나는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 그리고 의를 위하여 스스로 선택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 여러분은 어느 쪽 고난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어떤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원칙적으로 기본입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 시장에 가보면 어머니들께서 아이들을 집에 둘 수가 없어서 데리고 나왔는데 겨우 걸어 다니는 세,네살 아이들이 어머니를 따라나와서 고생하는 것을 봅니다. ‘집에 떨어져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이 복잡한 곳에서 고생을 하나’하고 생각을 합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치마 끝을 붙들고 그 복잡한 시장을 다니려니까… 가끔 보면 어머니가 또 쥐어박더라구요, 징징거린다고. 그래도 그냥 울면서 어머니를 쫓아다니는 것을 볼 때에 ‘이것이 믿음이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어머니가 쥐어박아도 나를 사랑한다. 절대로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저 어머니가 나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 끝까지 믿고 따라가면서 칭얼대는 아이들을 보면서 참으로 훌륭한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고난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여러분, Meaningful, Dispensational 그리고 Scenario의. 반드시 해피엔드로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 해피엔드를 믿는 사람은 그 과정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혹 여러분, 서부영화를 보십니까? 서부영화를 볼 때에는 마음을 탁 놓고 보십시오. 주연배우는 절대로 안 죽습니다. 안 죽게 되어있습니다. 나쁜 놈만 죽지 좋은 사람은 안 죽습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 해피엔드, 오메가 포인트( point)를 딱 손에 들고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엄청난 아들을 나를 위하여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그래서 죄 사함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은사입니다. 모든 것들이 축복입니다. 철저하게 그렇게 믿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해도.” 세상에는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아디코스”라는 말은 unjust라는 뜻입니다.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나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나의 실수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로 인해서 내가 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옆집 사람이 불조심하지 않아서 불이 붙으니까 그 집 붙으면서 우리 집까지 타버렸잖아요.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연루되어서 뜻도 모르는, 아무 이유도 없는, 정말로 맹랑한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요새 더구나 사업하시는 분들은 연쇄부도가 나서 어렵게 되는 분들이 참 많더라구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합니다. 왜 당하는지, 어째서 당하는지, 결과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저 당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님께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우니라. 아름답다는 말은 헬라원문대로는 카리스, 은혜롭다는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는가?’ 보지도 마십시오. ‘왜 이런 일이 있느냐?’ 더 이상 묻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 큰 은혜를 생각하면서 참으십시오. 그리하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또, ‘죄악이 있어서 고난 당하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인생은 추수입니다. 가만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오늘도 심고 또 한편으로 거둡니다. 어제 심고 오늘 거두고, 오늘 심고 내일 거둡니다. 부모가 심고 자식이 거두고 여러분이 심고 자식이 거둡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까? 당신 눈에 피가 날 것입니다. 남을 속이셨습니까? 근사하게 속이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엄청나게 속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내가 말 잘못 한 것, 말로 인한 실수, 부덕한 말, 부덕한 행동, 내가 심고 내가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회개가 있을 뿐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죄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은 가장 저질적인 고난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다른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이제라도 회개의 길을 찾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니까 ‘의를 위하여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면’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선택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쿼바디스”라고 하는 영화를 대개 다 보셨을 것입니다. 쿼바디스의 장면을 자세히 보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맘에 안 들어서, 소위 예술가를 자처하는 네로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불을 지릅니다. 다 태워버리고 다시 만들려고. 아, 불을 지른 다음에 원망이 많으니까 이것을 기독교인에게 씌워버립니다. 기독교인들이 항상 불로 심판한다고 하다가 불을 지른다고. 이래서 정말 애매하지 않습니까? 불은 네로 황제가 지르고 죽기는 기독교인이 죽습니다. 수만 명을 잡아다가 원형극장에서 죽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무모한 죽음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있던 베드로가 같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도망을 합니다. 로마에서만 빠져나가면 되니까. 로마성 밖으로 나갈 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쪽으로 향하여 가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바로 그 말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를 향해서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서 로마로 갑니다. 가서 그는 십자가에 죽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같은 모양으로 죽겠느냐? 거꾸로 매달아라.”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베드로가 순교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던 곳, 거기에 발자국이 있습니다. 저는 로마에 갈 때마다 그 자리에 한번씩 서봅니다. 여기 서서 주님을 만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베드로의 그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여러분, 피해가다가 잡히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한탄하며, 저주하며, 죽는 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선택적입니다. 온전히 선택적입니다.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일부러 당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잘 아는 대로 억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말이 있죠, 악법도 법이라고. 악법에 의해 그는 처형이 되는데, 처형장에 나갈 때에 그의 제자들이 따라가면서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억울합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선생님이 이렇게 죽으십니까?”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돌아서서 빙그레 웃고 한 말이, 이것이 명답입니다. “이놈들아, 그럼 내가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죄가 없이 죽어야지. 여러분, 어차피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억울하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사실 억울한 고난을 당해야 사람다운 사람이지 죄가 있어서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억울하다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선택적으로 고난의 길을 갑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본을 끼쳐 우리로 하여금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첫째, 죄 없이, 죄 없이 당하였고 둘째, 입에 괘사가 없었습니다. 아무 변명이 없었습니다. 변명이 없어야 됩니다. 한마디 변명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대신 욕하지 않았습니다. 욕을 당하되 대신 욕하지도 않고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짓궂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만약에 예수님께서 두 가지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하나, “이놈들 두고보자. 심판 날에 지옥으로 보내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뜻이 망가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고 괘사를 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고 위협하지도 않고 오직 공의로운 하나님께 다 맡기고 즐겁게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는 길입니다.
한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살도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힘겨워서 동생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장성한 뒤에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결혼한 지 13년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는 무려 스물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의 열명이 열살 전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생을 살았습니까? 그 남은 가운데도 하나는 정신박약아입니다. 이 예술가는 노후에도 비참했습니다. 인생 말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서 역경을 뚫고 끊임없이 불후의 명작을 썼습니다. 명곡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마다 그 첫머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쓰고 작품마다 마무리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썼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바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하의 곡을 듣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영광이 넘치는 바하를 알지만은 바하가 한평생 이렇게 모진 고생을 했다는 것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모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의미를 압니다. 고난의 결과도 압니다. 고난의 필요도 압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압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은, 높은 곳으로 점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을 어떤 의미로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를 통해서 날마다 새로운 승리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람도 아니오 손이 짧음도 아니오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함도 아니라 오직 사랑 가운데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미쳐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고난을 주시고, 은사로 주시는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을 통해서 주시는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고난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주님을 알게 하시고, 오늘도 새롭게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확인하면서 늘 승리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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