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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2.05.19
제 목 :성령 충만한 자의 고백
본 문 :사도행전 7:54∼60
감리교 창시자이기도 한 요한 웨슬레 목사님께서 어느 날 깊은 명상과 함께 주님을 생각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며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환상 중에서 천국 문에 들어서게 되었었다고 합니다.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베드로 사도께서 그를 맞이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 선생님은 천국에 들어서지를 않고 문간에서 베드로 선생님께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감리교를 위하여 전심전력을 했는데 자기가 전도하고 자기와 같이 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이미 죽은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 분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보았다는 거 아닙니까. “나와 함께 영광스러운 Methodist, 즉 감리교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천국에 얼마나 들어왔는지 그것이 좀 궁금합니다”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는 어떤 명부를 한참 뒤적거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요한 웨슬레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 그렇다면 나의 신앙은 잘못된 모양이군요. 그러면 한가지 더 묻겠습니다. 영광스러운 칼빈의 5대 교리를 강조하는 장로교인들은 몇 사람이나 들어왔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한참 살펴보고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때에 그는 더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겸손히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종교개혁운동은 대단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거 같군요. 한가지 더 물읍시다. 그럼 천주교인은 얼마나 들어왔습니까?” 베드로 선생님은 한참 있다 대답하기를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 때에 요한 웨슬레 선생은 깜짝 놀라서 “그러면 도대체 누가 이 천국에 들어오는 겁니까?” 베드로 사도께서는 빙그레 웃으면서 요한 웨슬레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오는 곳이죠. 다시 말해서 감리교인이냐 장로교인이냐 천주교인이냐 그게 문제가 아니죠. 누구든 예수 믿으면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요” 라고 말씀을 해주어서 요한 웨슬레가 깊이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대표적인 성령 충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신약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 가운데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높이 존경하는 그런 대표적인 그리스도 인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 저는 늘 스데반을 생각해봅니다. 그는 짧은 동안 복음을 전하고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마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부럽고 너무나 존경스러운 그런 신앙의 선배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함의 속성과 그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대표적으로 말해주는 분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여기 충만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풀레리스라고 하는 말은 곧 체험적 신앙을 말합니다. 그리고 합리적 이해를 말합니다. 그가 체험한 바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 이성의 거부가 없어요. 이성마저 구원을 받아서 잘 소화가 되는 거예요.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성적 비판의 충돌을 그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이해가 되니까요. 그런가하면 큰 감동이 있어요.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다 넘어설 만큼 감동, 큰 감격이 있는 그게 충만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 그리스도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자기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원수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나약함도 이기고 슬픔과 탄식도 이기고, 그리고 성령의 충만한 사람의 극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느껴지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충만함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믿음을 얻어 구원에 이릅니다. 성령의 은사로 능력을 얻어 우리는 나와 세상을 이깁니다. 이러한 충만함, 우리 한번 보십니다.
오늘 스데반의 이 순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 충만함의 뜻이 무엇인지를 만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오늘 본문을 보는 바와 같이 자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향해서 이를 갈았다 그랬어요. 이를 갈며 성밖으로 내쳐서 돌을 던졌다 그랬어요. 여러분 간단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초대교회의 총 지휘관은 베드로가 아니고 스데반입니까? 왜, 사도가 아니고 집사 스데반이 먼저 죽느냐 이 말이요.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이 특별했기 때문이에요. 이 사람은 지성인이요. 헬라파 유대인이요. 그런 고로 저 갈릴리 촌사람들이 아니고 헬라파 유대인이요 지성인인, 당시로 말하면 세계적인 문물에 능숙한 이 사람이요. 지성인이요.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하게 될 때 같은 동료, 왕년에 같은 친구였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여기서 용납하지 못한 거예요. 마치 저들이 배신을 느끼는 거 같아요. 그래서 돌을 던져 법을 어기고 스데반을 때려 죽이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때에 지금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이 바로 엊그제까지 친구예요.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돌을 던집니다. 거기에는 물론 오해도 많고 문제도 많겠죠. 그러나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그거 상관하지 않아요. 본문에 보는 대로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땅을 보지 않았어요.
그 옛날 로마황제 시저가 암살 당한 일이 있죠. 그 친구가 칼로 찔렀을 때 그가 돌아보면서 “너냐?” 유명한 얘기죠. “너냐” 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를 보지 않았습니다. 네가 그럴 수 있냐. 야! 네가 그럴 수 있느냐. 과거에 같이 가던 동지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네가 나에게 돌을 던지다니’ 이런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유대사람들의 탈무드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앞이 막히고 뒤도 막히고 옆도 막혔으면 이제는 위를 보라.” 여러분 한순간도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어떤 사건 어떤 상황에서든지 먼저 위를 보세요. 위를 보는 것, 그것이 충만한 자의 기본자세입니다. 위를 본다. 골로새 3장 1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마라. 위에 것, 먼저 눈을 들어 위를 보시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세요. 그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또한 “주목했다” 그랬어요.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어요. 집중적으로 보았어요. 그 말은 그 외에 다른 생각을 안 했다는 거예요. 그 외에 아무 것도 안 본다는 뜻이에요. 집중적으로 주목해서 Concentration,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리할 때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어서 올라오너라 하고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보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집중적으로 볼 때에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보세요. 그 주님에게 자기 생명을 바쳐버립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내 생명을 바쳐버립니다, 내 미래를 바쳐버립니다, 내 운명을 맡겨 버립니다. 여러분 뭐니뭐니 해도 고민 중에 가장 큰 고민은 죽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뭐 감기만 걸려도 ‘이러다 죽지 않는가’ 혹은 종합진찰을 갈 때마다 ‘또 무슨 중한 병이 걸리지 않았나.’ 아니 어차피 죽을 거 안 죽으려고 버둥거리지 마세요. 죽음을 환영하세요. 적어도 믿는 사람을 죽을까하는 걱정은 하지 말아야 되요. 그거 할 필요가 없어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리고 저주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되요. 그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자기를 기다리는 주님을 쳐다보면서 그에게 생명을 위탁해 보였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했습니다. 죄의 문제, 불안과 공포의 문제, 세상에 대한 미련, 다 접었어요. 그리고 주님께 Total Commitment, 자기 자신을 완전히 위탁해버렸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 영혼이 자유하게 됩니다. 평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십시다. 이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그 원수들을 용서합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원수 사랑은 기본입니다. 가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 “어떻게 사랑하나?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나? 그건 특별한 성현들이나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이나 할 일이지 아니 우리 같은 보통사람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한다는 건가” 라고 말하기 쉽습니다마는 그렇질 않습니다. 이건 기본입니다. 제가 북녘 땅에 자주 갑니다. 북한에 갔을 때에 제가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늘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면서요.” “아 그럼요.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온 것 아닙니까?” 그들은 말합니다. “아니 됩니다. 원수는 갚아야지요. 피값을 해야죠. 복수해야지요.” 변증법적 유물론은 한 마디로 말해서 원수갚는 이론입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오로지 싸움만이 있을 뿐이요. 투쟁만이 있습니다. 쟁취만이 있습니다. 혁명만이 있습니다. 결국은 모든 공산주의 나라들이 하나같이 못살고 하나같이 망했어요. 왜? 저는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생각합니다. 저 복수심 때문에 망했다. 그 미워하는 마음, 그 저주하는 마음, 그 싸우는 마음. 약육강식의 그 Struggle for existence, 그러한 싸움이 그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농사도 안돼요. 생각도 없어요. 결국은 경제, 정치, 문화 다 무너지고 말더라구요.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은 또 어떻게 여길 오셨냐고요. 저는 말합니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내가 무슨 대단한 성자인 줄 아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을 위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실을 내가 살기 위해서 그럽니다. 당신들을 살려야 우리가 사니까. 당신들이 죽으면 우리들도 죽습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우리가 살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고서야 내가 살 수 있음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 누구를 미워하십니까? 미워하고 있는 동안은 나라는 생명을 내가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지금 빼앗기고 있는 거예요. 내 마음도 내 진실도 내 소중한 건강까지 다 빼앗기는 거예요. 빨리 벗어나세요. 조금이라도 누구를 미워하는 그림자가 있거든 빨리 벗어나세요. 거기에 매여있는 동안 영영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고로 원수를 사랑하라 이건 기본이에요. 이건 기초적인 것이에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고야 내가 자유인이 될 수가 있어요.
영성가인 끌레르보의 버나드라고 하는 분이 The Love of God 라고 하는 책에서 사랑의 네단계를 말합니다. 흔히들 쉽게 알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마는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이 뭐냐 하면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이기적이고 육체적입니다. 나를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국은, 결국은 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요새는 하나님 사랑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전부 자기 사랑이에요. 열심히 봉사해서 복을 받고, 열심히 봉사해서 칭찬을 받고 축복을 받고. 이 기복사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신령한 세계에서 추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감동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러나 여기는 구체적인 것이 없기에 곧 이 마음은 사라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내가 너무 소중하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너무 고마우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자기자신을 사랑해야지요. 아이들을 사랑하십니까? 아이들을 위해서 내가 건강해야지요. 부모님을 사랑하십니까? 부모님을 위해서 내가 명랑해야지요. 내가 낙심하고 한숨쉬고 절망하면 내가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고로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해요. 그런 구체성이 있어야 현실적으로 그 참 사랑을 지켜 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스데반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참사랑의 사람이 되는 순간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의 얼굴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에 보면 스데반이 바로 이 순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우리는 천사를 본 일이 없지마는 천사의 얼굴이 무엇인가 짐작은 합니다. 바로 그것이 변화된 모습입니다. 위를 보는 사람,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원수를 다 수용하고 사랑해 버릴 때 천사의 얼굴이 됩니다. 요새 재미있는 일이 있대요. 미인 대회를 하는데 아예 한 사람을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어제 뉴스 나오는 것을 보니까 부위 별로 미인 대회를 하더라구요. 이 사람은 얼굴이 예쁜 사람, 이 사람은 가슴이 예쁜 사람, 이 사람은 배꼽이 예쁜 사람, 이 사람은 뭐 다리가 예쁜 사람, 이렇게 부위 별로 예쁘게, 뭐 그렇게 참 세상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확실히 젊었을 때는 예쁜 것이 있어요. 확실히 예쁘고 덜 예쁘고가 있다구요. 그러나 한 50쯤 넘어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다 비슷합니다. 별 차이가 없어요 보니까. 그러나 제가 나이도 좀 들고 긴 경험에서 깨닫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밝은 얼굴과 어두운 얼굴이 있어요. 뭐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예뻐지겠다고 성형수술 아무리 해보아도 거 참 이상하데요. 그 하나님이 만든 것은 조화성이 있는데 사람이 손을 대면은 이상해져요. 예쁘지 않아요 그게.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밝은 얼굴이 필요합니다.
밝은 얼굴, 그것은 뭡니까? 마음에 원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이렇게 되면은 자유하면서 마음이 천사가 되면, 얼굴도 천사가 되는 것이에요. 밝아지는 거예요. 한경직 목사님이 남한산성에 계실 때 한 100세에 가까웠을 때 제가 한 번 찾아가서 문안을 드렸더니 한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목사가 설교를 해야 하는데 설교를 못하고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답답하고 컬컬하고 살았으나 살은 것 같지 않아” 그러시더라구요. 그러실꺼예요. 한 평생 설교하시던 분이 설교를 못하니까. 그래 제가 “아니올시다. 목사님은 설교를 많이 하십니다. 위대한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그랬더니 “내가 설교를 못한 지가 몇 년 되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 앉아서 이렇게 밝은 얼굴로 계시면 ‘예수 잘 믿으면 나만큼 사느니라’ 그것이 설교 아닙니까? 이렇게 밝은 얼굴로 계시면 이 보다 더 큰 설교가 없습니다” 했더니 한경직 목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곽목사는 역시 설교를 잘해” 그러더라구요.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가 딴 것입니까? 밝은 얼굴이 설교예요. 전도가 다른 곳에 있습니까? 밝은 얼굴이 전도예요. 아 제 얼굴도 썩어가지고 누구에게 전도를 해요. 생각해보세요. 입만 벌리면 비아냥인데,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무슨 전도를 하겠다는 것이에요? 내가 알기는 우리 소망교회에서는 무슨 특별 전도활동은 안합니다, 제 목회방법이기 때문에. 그러나 제가 알기에는 저희 소망교회 교인들은 얼굴이 밝다고 해요.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저 사람 요새 와서 얼굴이 달라졌어” 그래서 친구도 교회에 나왔다 해요. 그것이 전도라고요. 천사의 얼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사울을 자기 제자를 삼았습니다. 여기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울 이라는 사람이 뒤에 바울이 되는데 생각해보세요. 그는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만은 거기서 큰 감동을 받고 스데반이 마침내 사도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대학에서 바울신학이라는 학문을 그저 한 몇년 동안 강의한 일이 있어요. 그래서 바울에 대해서 그 사상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열심히 학문적으로 그저 이렇게 연구 좀 해보는 중에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은 완전히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에서 온 것이에요. 바울의 신학체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스데반이 죽을 때에 한 설교, 그 스데반의 사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은 스데반의 제자요.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무어라고 하는 분이 교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에 마지막으로 한 말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죽을 때에 옆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며 용서하며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었는데 결국은 그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고 예수를 믿고 한평생 복음을 전하고 순교해서 하늘나라에서 서로 만나서 영원한 친구로 행복하게 산답니다. 내가 오늘 당신의 손에 죽지만 언젠가는 당신이 예수를 믿고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만나서 영원히 친구로 함께 할 것을 믿노라”고.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스펄젼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어느 날 기도하다 말고 자꾸 울더랍니다. 훌쩍훌쩍 울어서 사모님이 옆에서 왜 우시느냐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냐고 했더니 그 목사님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요새 웬일인지 십자가를 생각할 때 감격이 없어. 이것은 신앙적 위기야” 그리고 울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생각하며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하며 큰 감격이 있습니까? 그 감격으로 모든 것을 이기는 거예요. 이 감격이 메말라 떨어지면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요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충만한 사람, 그에게 하늘이 열립니다. 충만한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아니 어떻게 죽고 싶습니까? 사람은 잘 죽어야 되겠더만요. 제 때에 좀 근사하게 죽어야겠어요. 이게 잘못되면 이게 아주 한평생 수고한 거 다 망가지고 말아요. 여러분, 스데반의 이 장엄한 순교를 보세요. 이 영광된 시간을 보세요. 부럽지 않습니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주님의 영접을 받는 저 스데반을 보세요. 충만합니다. 그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오직 밝은 마음과 소망과 영광과 천사의 얼굴이 있을 뿐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부르사 다시 한번 위를 보게 하시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를 향한 감격이 잠시도 사라지지 않게 하시고 그 충만함에 살도록 도와주시고 그 거룩한 은혜 영광 속에 내가 있음을 알고 항상 순간순간을 천사의 얼굴을 지켜가며 천사의 마음을 이어가면서 늘 승리 생활하게 하시고 그 언젠가라도 우리 앞에 하늘이 열리며 주님의 영접을 받는 주의 사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