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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와 죄인의 친구

누가복음 7: 29 ~ 35

곽선희 목사

2002.03.10

날 짜 :2002.03.10
제 목 :세리와 죄인의 친구
본 문 :누가복음 7 : 29 ∼ 35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 의를 위하여 부활하시고 그 부활하신 거룩한 몸을 맨 먼저 보여주신 분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 놀라운 역사 그 엄청난 사건 첫 번 증인, 첫 번 목격자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그 천한 여자에게 거룩한 몸을 먼저 보여주셨는지 그가 첫 증인이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놀라운 기적입니다. 또 한가지 궁금한 것은 어떤 경로로 또 어떤 계기에 막달라 마리아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까?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때에 예수를 만나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까? 이 또한 궁금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해서 그것을 근거로 한 소설가가 어디까지나 그건 추리 소설 입니다마는 소설 속에서 그 경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99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Christ 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는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 책의 저자는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입니다. 포르투갈 사람인데 그가 전설에 근거해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전도하실 때 가버나움 동구 밖으로 나가시다가 그만 실족을 해서 발을 좀 다쳤습니다. 그리고 발 어디서 피가 납니다. 이걸 좀 싸매고 싶지마는 인근에 집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리번하고 보았더니 저 동구밖에 외딴 집 하나가 있어요. 그래서 외딴 집을 찾아가십니다. 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거기서 나옵니다. 이 집은 전문적으로 간판을 내걸고 하는 창녀의 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요염하게 차려입고 손님을 기다리다가 문을 두드리니까 반기면서 “어서 오십시오” 하고 문을 열었는데 보자 하니 점잖은 어른이 문 밖에 섰거든요. 막달라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 집이 어떤 집인지 알고 오셨습니까?” 예수님 말씀이 “어떤 집인데?” “창녀의 집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저는 이 소설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영접합니다. 만일에 이때에 예수님께서 화다닥 놀라면서 “이 더러운 것!” 하고 그만 비켜갔더라면 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그 상처를 치료받고 그 집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막달라 마리아와 이야기하면서 그 날밤 거기서 유숙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는 나사렛고향으로 가셨다가 일주일쯤 있다가 이 자리를 또 지나가게 됩니다. 지나가다가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 마리아가 어떻게 지낼까? 나를 만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창녀 직업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갈까?” 궁금합니다. 그래서 이 집을 또 찾아들었습니다. 이제 마리아가 반갑게 맞이합니다. 예수님이 궁금한 것은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여자가 변화됐나? 아니면 그대로 창녀 일을 하고 있나?” 하지만 그렇게 물어볼 수가 없어요. 그의 자존심과 그의 아픈 마음을 생각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새 손님이 많으냐” 그래요. 참, 그 말이 얼마나 얼마나 깊은 사랑에서 하는 말입니까? 요새 손님이 많으냐? 그랬더니 막달라 마리아가 정색을 하고 대답합니다. “선생님, 여자는요 참으로 존경하는 어른을 한번 만나고 나면 다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래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따르고 마침내 십자가까지 따라가고 부활하시는 언덕까지 그 무덤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무엇이 사랑입니까?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까? 정말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누구를 친구로 맞아 보았습니까? 내가 누구의 친구라고 생각해 보십니까?
런던 타임즈가 설문조사를 해서 도대체 친구가 뭐냐. 어떤 걸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해서 많은 응모를 받아 가지고 깊이 조사해서 그 가운데서 가장 잘 됐다고 하는 친구의 정의를 내 놓았습니다. 그 첫째가 뭔고 하니 모든 사람이,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에 그때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 그 사람이 친구라고. 어떤 이유로든지 모든 사람이 나를 배척하고 버릴 때에 나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이 친구다. 둘째는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말이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설명하려고 그러면 설명하지 말라고 그래요. 다 아니까. 무슨 긴긴 말이 필요합니까?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나는 너를 안다. 네 억울함을 안다. 네 고통을 안다. 네가 바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네 진실을 안다. 침묵을, 나의 침묵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 그게 내 친구요. 또 하나는 나의 기쁨을 곱해 주기도 하고 나의 슬픔을 쪼개 주는 자다, 그랬어요. 나의 기쁨에 대해서는 멀티플라이(Multiply), 그와 만나면 기쁨이 배나 커져요. 점점 커져요. 제곱으로 커져요. 슬픈 마음으로 만나면 슬픈 마음이 반으로 감해져요. 자꾸만 작아져요. 그것이 친구다. 참 훌륭한 해석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런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때때로 너무 쉽게 감상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의 의미를 우리가 잘 깨닫질 못해요. 우리가 가진 편견과 그 집착된 잘못된 관념 때문에 참 사랑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참 사랑을 깨닫는 순간, 벌써 나는 새 사람이 됩니다. 참 사랑을 베푸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내 앞에 전개되는 것이올시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예수님 보세요. 우리 죄인을 사랑한 결과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반갑지 않은 오명을 받았습니다.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가졌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여러분 다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창녀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이제 어떤 오해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소문이 많이 나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집에서 창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문을 차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면 변화됩니다. 먼저 사랑을 하는 순간 내가 변합니다. 누구를 사랑하는 순간에 내가 달라집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먼저는 듣는 마음이 생깁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들어주는 게 사랑입니다. 비판이 없습니다. 지루함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들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됩니다. 이게 사랑이라는 거요. 긴 설명이 없어도 사랑하면 ‘그랬을 거다. 오, 나도 그랬을 거다. 아니 나는 너보다 더 어려워졌을 거다. 네 심정을 내가 안다.’ 어떤 형편이라도 충분히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해 못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된다고 그럴 수 있느냐, 택도 없다,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그 누구라도 충분히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게 달라지는 거예요. 전에 같으면 비판했는데 이제는 비판할 마음이 없어요.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되니까요. 또 하나는 애정의 눈으로 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니 다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희망적으로 봅니다. 사랑에는 낙심이 없습니다. 어떤 자를 사랑했든지 사랑하는 순간 그에게서 소망이 보입니다. 희망적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실망이란 없습니다. 환하게 미래가 보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가끔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 싹이 노랗다” 그래요. “야, 이것아…….” 이게 사랑입니까?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말하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또 사랑은 내가 그에게로 가까이 갑니다. 저가 나에게 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그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그의 처소에 머뭅니다. 그와 함께 합니다. 그와 함께 먹습니다. 함께 잡니다. 함께 삽니다. 그리고 책임을 같이 집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주인이 “이제는 더 땅을 허비할 수 없으니 찍어 버리라. 열매 없는 나무 찍어 버리라” 했는데 과원지기가 대신 나서면서 하는 말이 “1년만 더 기다려주세요.” 여기는 중요한, 깊은 신앙이 있습니다.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 있는 겁니다. 이 책임을 내가 지겠습니다. 내게 기회를 주십시오. 열매 없어 심판 받은 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책임을 과원지기가 대신 집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요. 아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함께 지고 아니 대신 집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사랑은 주는 겁니다. 주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주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얻고자하는 마음이 베푸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기 시작합니다. 내 입장에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주는 게 아닙니다. 그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게 뭔가, 그걸 알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충만했던 바로 그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필요, 필요를 알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뭡니까? 정말로 필요한 게 뭡니까? 그것이 보여지는 거예요. 그것을 알게되는 거예요. 또한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거예요. 여기서 마음이 가고 관심이 가고 사랑이 갑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뭐냐면 의를 줍니다. 내 명예가 더러워지지마는 그에게 의를 줍니다. 의롭다 함을 줍니다. 이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어요. 보세요, 마태복음 8장 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세무를 보고있는 사람, 마태를 현장에서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아, 이 세리가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세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다니 너무 감격해서 자기 동료들을 다 불러 가지고 집에서 잔치를 합니다. 예수님 이 집에 들어가서 잔치를 잡수셨습니다. 이건 안 되는 겁니다. 세리의 집에 들어가도 안 되고 세리와 만나도 안 되고 그 집에 가서 음식이라는 건 말도 안됩니다. 그것이 당시 풍속이요.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가 주는 돈을 안 받았답니다. 모르고 받았다가 저만큼 가는데 “너 지금 돈 한푼 구제해 준 사람이 그게 바로 세리다.” “그래?” 도로 갖다 던졌대요. 죽어도 세리 돈은 안 받는다 이거요. 자, 이런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집에 가서 잡수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쓰느니라” 말씀하셨고 머물렀고 잡수시고 유숙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집에 선물보따리를 가지고 온 게 아니라 오히려 대접을 받았습니다. 같이 잡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이요. 왜요? 그를 죄인을 의인으로 대접하는 겁니다. 추한 자를 거룩한 자로 영접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의를 주셨다 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렇게 참 사랑을 베풀면 이제 사랑 받는 자가 변합니다. 사랑 받는 자가 달라집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할 때 내가 변하고 저가 변합니다. 내가 달라지고 저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게 사랑의 신비요 사랑의 속성입니다. 사랑하는 내가 달라집니다. 사랑 받는 저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사람이 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경험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날 젊은 여자 분이 찾아와서 자기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일류대학을 다녔는데 대학을 다니면서 소위 학사들 사이에 서로 연예가 돼서 학사 부부로 결혼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아주 무난하게 아이 둘 낳고 잘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더니 어느 여대생과 동거하고 있다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오기도 하고 한 달에 한번도 돌아오고. 그런데 이건 지금 큰일 났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는데 영 안 돌아오는 거예요. 제가 물어봤어요. “혼자 살 자신이 있느냐.” 없대요. “사랑하느냐.” 한대요. 그래서 자기가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뭐 갖은 방법으로 잘해주고 불평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몸이 약해 보여서 약도 대접을 한다고 그래요. 보약도 대접을 하고. 그럼 보약 먹고 보따리 싸 가지고 나간데요. 이런 기가 찬 일이 어디 있나. 아, 이거 아무리 해도 안 돌아오는데 자기가 또 몰래 가보았더니 그 여자가 자기보다 젊기는 하지마는 어느 모로 보나 자기만 못 하더래요. 그런데 왜 저기 가서 저 여자를 좋아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정말로 남편을 살아합니까?” 했더니 사랑한대요. “그렇습니까. 나 하나 물을텐데 부끄러워하지 말고 대답하세요. 그러면 돌아왔을 때 잠자리는 어떻게 합니까? 부부생활은 어떻습니까?” 펄쩍 뛰면서 “그건 안돼요. 그 더러워진 거 안돼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더라고요. 그래 저는 이야기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내가 죄인이 되야 됩니다. 더러운 자를 사랑하려면 내가 더러워져야 됩니다. 당신이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자기 사랑일 뿐입니다. 갔어요. 얼마 있다가 다시 왔는데 남편이 돌아왔대요. 어떻게 돌아왔냐 했더니 집에 돌아가서 가만히 기도하며 생각해 보았대요. 많이 기도하는 중에 그는 응답을 받았대요. 이 남편이 밖으로 나아가게 된 동기가 그 원인이 내게 있더래요. “당신은 밖으로 나돌고 원인 제공자는 나입니다. 내가 잘못한 겁니다. 당신에게 잘못이 없소. 이것은 내 잘못입니다” 하고 고백했대요. 했더니 저쪽에서 “아니야, 사실은 내가 나쁘지.” 아주 가정에 부흥이 일어났어요. 아주 뜨거운,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하게 됐어요.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높은 자리에 서서 얼마의 구제금을 던져줄 생각입니까? 내 자랑하면서 선한 일 했노라고 할 것입니까? 사랑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을 사랑한다면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명언을 제가 늘 마음에 새깁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거라고. 창조적 사랑,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참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참 사랑을 얼마큼 깨달았습니까? 여러분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받는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걸 아십니까? 주께서 나를 위하여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죄인이 되시고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셨어요. 나를 사랑하기 위해 그는 죄인이 되었어요. 내가 죽는 대신 그는 죽으셨어요. 여기에 사랑의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그 사랑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게 될 때에 나도 변하고 저도 변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바꿉니다. 오직 사랑만이 세상을 바꿉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고 미련한 저희들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리고 때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하며 스스로 속고 스스로 속이며 사랑하는 미련한 저희들, 참사랑을 모르기에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고 참사랑을 해본 일이 없기에 사람됨의 의미도 모르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이 얼마나 엄청난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 거룩한 사랑에 감격할 뿐더러 그 사랑을 다소라도 실천하면서 사랑의 행위 속에서 주의 사랑을 확증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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