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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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2.03.24
제 목 :십자가로 승리하시다
본 문 :골로새서 2 : 8 ∼ 15
아프리카 우간다 어느 교회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의 우간다는 독재자 이디아민이라고 하는 악명이 높은 그러한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케파쎔팡기 라고 하는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는 7000명이 넘는 큰 교회로 영적 지도자로서 귀한 역사를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부득불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독재자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그런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정부에 알려졌습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다섯명의 비밀경찰이 찾아왔습니다. 모두는 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 후에 그들은 사무실에 총을 가지고 겨누며 들어와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각오했던 것처럼 태연스럽게, 온유하게 대답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나는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게 2분간의 시간만 주시면 기도하고 나의 생을, 내 목회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또박또박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 통치자 이디아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명령을 원치 않으면서도 받아들여야 하는 불행한 이 다섯 사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기도하는 목사님의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솟았습니다. 비밀경찰도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대장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합니다.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못본 것,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하고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습니다.
여러분,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이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하는 제목의 글입니다. “가장 강한 것은 돌이다. 그러나 돌을 깨뜨리는 것은 쇠다.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불을 끄는 것은 물이다. 물은 구름에 흡수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에 날려간다. 바람은 사람을 어찌하지 못한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런고로 죽음이 가장 강하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챤이 누구입니까? 도대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뭡니까? 크리스챤이라는 것은 바로 십자가 이해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어떤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올시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속성이 결정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 것은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아주 처참한 죄인에 대한 처형법입니다. 아주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역사상의 가장 비참한,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그 속에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생명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바로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제자들 앞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하시고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승리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나타난 신비입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는 시간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선언이요 여유요 엄청난 위세입니다. 비록 죽으면서도 그렇게 죽이는 자들을 여유 있게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에 짓궂은 생각입니다만은 한마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떨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좀 할 때가 있어요.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이놈들, 두고보자” 만일에 그렇게 말씀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한마디가 역사를 바꿉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만든 것이올시다. 여러분, 십자가는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돼요. 그것이 승리올시다. 억지로 도망가다가 능력도 없고 지혜도 없고 일이 꼬여들어서 할 수 없이 죽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성경이, 복음서가 계속 증거하는 그 주제의 초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십자가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요. 십자가는 예정된 것이요 십자가는 계획된 것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미리 약속된 것이요 그리고 십자가를 진 거라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책 전부입니다. 총 주제올시다. 이걸 모른다면 성경을 못 본 사람이지요. 예수님의 많은 이적이 무엇을 말합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귀머거리를 열게 하고 아,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와라”고 소리를 칩니다. 죽은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이건 뭘 말하는 겁니까?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 이 말이에요. 그걸 설명하자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이게.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그래 빌라도는 그것이 알 수가 없어서 “Behold this man,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말없이 죽어가느냐” 하는 거지. 그걸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거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언해 왔습니다. 예표로 확증을 해왔습니다. 수많은 양,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예표입니다. Prototype 입니다. 계속해서 보여주고 예언해주고 그 예언이 오늘 와서 십자가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클라이막스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에요. 십자가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우주적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계획적인 일이라는 것이죠.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성이요 이것은 예언의 성취요 이것은 본래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요 그것이 이 시간에 와서 결정적인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올시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는 뭐니뭐니 해도 사랑의 계시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승리올시다.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사랑 자체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랑의 소위 말하는 커뮤니케이션, 사랑을 전달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 쉽게 사랑한다는 말했다가는 뺨맞아요. 안 그렇습니까? 이 사랑이 전달이 돼야겠는데 이 사랑의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의 진실한 언어는 희생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부잣집 아들딸들이 이게 문제라고요. 부모님이 아무리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그리고 뭐, 이거 해주고 저거 해주고. 그저 못마땅합디다만은 저로서 볼 때는 그거 지금 철따구니 없는 아이들 장가가고 시집가는 데다가 뭐 큰집을 사주고……. 난 마음에 안들어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들도 저들대로 고생을 하고 살아야지. 그런데 부모가 옛날에 고생했다고 해서 “너는 고생하지 마라”해서 집 사주고 차 사주고 다 사주는데, 틀림없는 것은 이렇게 사랑 받은 자녀는 불효자가 됩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워서 밥 한끼를 제대로 못 주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면서 키운 그 자녀는 커서 철저하게 효자가 됩니다. 그걸 아셔야 되요. 오직 희생만이 사랑의 효과적 언어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경험했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어려워서 겨울에 추운 때에 어머니가 메리야스 장사를 해요. 메리야스 몇 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그저 이집 저집 다니면서 팔아요. 아들은 남의 사무실에 가서 청소하면서 일을 하고 밤에 야간 고등학교를 다닙니다. 밤중에 돌아온 아들을 놓고 “미안하다. 오늘은 밥을 못했다” 구워놓았던 고구마 하나를 까주면서 “이거를 먹고 오늘은 때우자.” “어머니 시장하실텐데 어찌하여 이걸 제게 줍니까?” 그 고구마 하나를 받아먹으면서 눈물을 뚝뚝뚝뚝 흘렸어요. 이 아들이 고려대학교 상과 수석으로 들어갔어요. 그 어려운 가운데 고학을 해서 졸업을 했어요. 졸업식 날 제가 같이 참여했어요. 그 아들이 졸업장을 갖다가 어머니에게 주면서 “이것은 제게 아닙니다. 어머니의 졸업장입니다.” 어머니가 “내가 너를 위해서 해준 게 뭐냐. 밥도 제대로 못 주고 학비도 못 줬는데…….” 둘이 끌어안고 우는 장면은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고구마 얻어먹고 자란 아이는 효도하더라구요. 자동차 준 아이는 효도하지 않습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이래서 많은 고난 속에 희생, 사랑은 분명합니다. 저 분이 얼마나 희생하나? 나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나? 그걸 보고야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수용합니다. 사랑을 믿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살리기 위하여 그는 죽으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안에 엄청난 사랑이 계시되어있고 그 사랑 안에 나의 삶의 의미가 계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 이것은 의의 개시입니다.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죄란 그저 흐지부지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죄 값은 사망입니다.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 되는 것이에요. 우리나라 정치처럼 흐지부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으로 벌을 받아야지요.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지요. 그냥 슬쩍슬쩍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심판은 엄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했던 것이에요.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니까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어느 마을이 아주 Puritan 마을인데 깨끗하게 정결하게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자랑삼고 사는 좀 엄격한 마을이 있는데, 어느 처녀가 어쩌자고 결혼하기 전에 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요 또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의 궂은 일은 온 마을의 궂은 일은 그 수도사가 하는 거예요. 이런 수도사 한사람이 그 마을에 있었는데 이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이것은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잘못하면 맞아죽게 됩니다. 그런데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해요. 그래서 지금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직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어요.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역을 당하고 감옥에 처넣어졌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감옥에서 죽었어요.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예요. 남장 여인이었다고요. 모든 사람은 숙연해졌습니다. 이 여자는, 이 수도사는 왜 ‘그것이 내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왜 안했을까? 저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했어요. 내가 죽어야만 그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는 의의 승리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거기서 완전히 충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원리라고 합니다. 충족돼요. 그리고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긍휼의 승리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율법과 은혜? 은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만이 이 십자가만이 이 긍휼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음을 확증해 주시는 것이올시다.
또한 이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입니다. 죽음을 넘어섭니다. 죽음을 초월합니다. 십자가는 생의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죽음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 십자가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의 길입니다. 칼 바르트 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그의 교회 교의학 속에서 “사람의 생의 단 한번의 기회”라고 하는 논문을 씁니다.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기회는 딱 하나 있어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은 바로 곧, 죽음이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향하는 길로 맞이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저주로 끝내는 시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삽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그 한순간을 작품처럼, 클라이막스로 그렇게 맞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모멘토리(Mementori)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모멘토리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모멘토 도미니(Memento Domini), 모멘토 도미니,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라. 바로 이것이 나의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기회를 가장 귀한 기회로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고 방향을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저는 이래저래 북한을 자주 내왕을 합니다. 북한에 있는 고관들과 자주 만나서 얘기도 해봅니다. 언젠가는 여러분 아시는 대로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재단 이사장의 임명장을 받고, 큰 행사를 치루고 저녁에 이렇게 파티를 하는데, “목사님, 목사님은 왜 우리를 돕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한 것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북한을 10여년 동안 돕는데, 그 돕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겁니까?” “대가 없습니다. 내가 평양시내에다가 굉장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얘기는 안하겠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뭘 요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보느냐?” 그러니까 “그래도 한 말씀 해주세요.” “딱 한마디만 할께요. 예수믿는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이것만 약속해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작년에도 400명 죽였다며. 인정을 하더라고요. 그런고로 기독교인들 죽이지 말아달라고. 그는 말합니다. “안 죽일 수가 없어요.” “왜요?” “반동이거든요.” “어째서?” “공산당보다 기독교인은 훨씬 셉니다.” 왜 세냐고 물었더니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죽기를 기독교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하고 산 사람들 만나보니까 그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더라고요. 기독교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지상의 영광입니다.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입니다. 그러니 사양할 리가 없죠. 두려워할 리도 없죠. 승리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승리를 위하여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것입니다. 승리를 믿고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승리의 계시가 바로 십자가에 확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이 길을 통하여 승리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호산나를 먼저 부르고 당당하게 갈보리 언덕으로 가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늘 십자가를 쳐다보며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직도 우리 마음은 어둡고 비겁하고 나약할 때가 많음을 용서하옵소서. 십자가 안에 있는 감추어진 승리의 의미를 날마다 확인하면서 영원한 승리의 생을 오늘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