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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 8 ~ 13

곽선희 목사

2001.07.15

날 짜 :2001.07.15
제 목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본 문 :고린도전서 13 : 8 ∼ 13

어떤 어머니가 자기의 어린아이 하나를 나무라고 있었습니다. 네가 부엌에서 과자를 훔쳐먹었는데 “훔쳐먹을 때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그러니까 이 아이 대답하기를 “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늘 지켜보고 네 마음속까지 다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네” 그랬어요. 꼬박꼬박 “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다 못해서 “그럼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보면서 네가 과자를 훔쳐먹을 때 뭐라고 말씀하시던?”하고 물었습니다. 이 어린아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던 걸요. ‘이곳에는 너와 나 둘 뿐이구나. 그러니 두 몫을 훔쳐라'” 그럽니다. 어린 아이는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지켜보신다, 하는 것도 자기에게 이롭도록 해석합니다. 뭐든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에게 이롭도록 해석하는 그러한 속성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말합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심리학자 데이빗 엘킨트 라고 하는 분은 이 박사님께서는 The Hurried Child라고 하는, ‘재촉받는 어린이’라고 하는 책을 쓰십니다. 부제로서는 Growing up Too Fast Too Soon 이라고 하는 부제가 있습니다. 최대한으로 아이들은 지금 재촉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모든 것의 성장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필요합니다. 상당한 시간 기다려 주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재촉했습니다. 빨리 크고 빨리 알고 빨리 천재가 되라고 몰아칩니다. 그래서 ‘초등교육부터 잘해야겠다.’ 요새 ‘초등학교 교육부터 영어를 가르쳐야겠다’ 뭐 이런 거예요. 그런가 하면 ‘아∼ 초등교육은 늦다. 유치원부터 해야 된다.’ ‘유치원도 늦다. 나자마자 말도 못할 때부터 그때부터 가르쳐야 된다.’ 좀더 나아가서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모교육부터 해야되겠다.’ 이렇게 서두르다 보니 ‘빠를수록 좋다.’ 학습의 압력, 대단합니다. 이 속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몸이 커지는 것을 성장이라고 합니다. 속에 있는 내적 인격이 커지는 것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장은 있는데 성숙이 없다. 없는 것만이 아니라 반비례해서 더 작아졌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새 아이들 많이 컸어요. 우리집에도 중학교 1학년 손녀가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저희집에서 쭉 키웠는데, 요새는 제가 집에 들어가면 “할아버지”하면 쳐다봅니다. 쳐다봐야 돼, 얼마나 큰지. 내가 인사를 받는 건지 내가 인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새 밖에서도 아이들 만나면 우리 교회 청년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할 때 보면 어떻게 큰지 전부 쳐다봐야 됩니다. 많이 컸어요. 대단히 컸는데, 문제는 속은 옛날 얘들만도 못해요. 너무 어려요. 유치해요. 군대에 나간 청년들이 말입니다, 군대에 나갈 나이면 얼마나 좋은 나이 입니까? 여기에 나가서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요 군대생활을 감당하지 못해가지고 정신병원에 치료를 받는 사람이 5%예요. 그 중에도 대표적인 예는 얘들이 불안에 떨구요 정신을 못차려요. 하도 괴로워해서 어머니를 오시라고 했어요. 특별 휴가를 주어서 그 부대 가까이에 있는 하숙방에 들어가서 하룻밤 어머니하고 자고 오라 그랬지요. 얘가 어머니를 만나가지고 밤새껏 울더랍니다. “왜 우느냐?” 대답이 없어요. 뭐, 우는 이유가 없잖아요. “울지마라” “왜 우느냐?” “울지마라.” 밤새껏 시달리다가 어머니가 그만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까 목매달아 죽었어요. 여러분, 이게 현실이에요. 얘들이 너무 어려요. 마마보이요. 결혼을 한다구요? 요새 결혼, 연상의 여자하고 결혼하는 것이 27%예요. 나도 결혼 주례 늘 하지만 척 보면은 이쪽이 위야. 신부가 확실히 나이가 몇살 더 위거든요. 내가 물어보지는 않습니다만은 뻔해요. 그 결혼주례하는 순간에도 여자한테 꼼짝을 못해요. “이래”하면 “예잇”하고. 아이고 벌벌 떨면서 반지를 제 손가락에 못 끼우고 여기다 끼우고 그래요. “이게 뭐야?” 그러면 꼼짝을 못합니다. ‘너는 죽었다’ 내가 속으로 생각합니다. 왜 이 모양이 되었지요 이게? 심지어는 이게 왜 이런가 심리학적으로 연구를 해보니까 너무 어렸을 때 어머니의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면서 잔소리가 많으면 주도력이 없어져요. 자기 주체 의식이 없어진다 말입니다. 자기 의지가, 자기 판단 능력이 다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차라리 나이 많은 여자하고 결혼해서 또다시 잔소리를 들어가며 사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그 많은 잔소리가 아이들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못 자라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합니까? 내버려둬서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고, 그래가면서 이게 성장을 해야 되겠는데, 일일이 보살펴 주는 가운데 얘들이 성숙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 자, 얘들만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구요, 요새 보니까 정치가라는 사람들이 그래요. 유치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문제될 것이 아닌 걸 가지고 문제되구요, 시시한 일 가지고 온통 국민을 혼란하게 만들어요. 왜 이렇게 어른스러운 데가 없나? 옛날 어른들의 그 은근한 덕, 좀 이런 것들이 풍겨나오면 좋겠는데 전혀 이런 걸 볼 수가 없어요. 왜 이렇게 유치한가? 그걸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말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이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뭡니까? 어린아이라는 것은 부분적으로, 오늘 성경에 자세히 나타납니다,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고 전체를 모르는 거예요. 그것이 문제요. 부분적인 것,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인식이 없고, 한 부분만 보고 전체를 다 판단하려고 그럽니다.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전체를 보면 예술이요, 부분을 보면 외설”이라고. 소설을 보던지 영화 한편을 봐도 전체 흐르는 테마를 알아야지요. 거기서 주는 메시지를 찾아야 하는데 이건 모르고요 어느 한 부분의 키스장면만 보고, 홀랑벗은 여자만 보고, 뭐 어쩌구 저쩌구. 유치하기는요. 왜 이모양이 되었느냐? 그 정신이 어리기 때문이에요. 전체를 볼 줄 몰라요. 나무는 보는데 숲을 못봐요. 땅은 보는데 하늘을 못봐요. 부분에 부분적인 것에 매여있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중심적이요. 자기 밖에 몰라요. 어린아이의 심리가 그러하다고 해요. ‘어머니가 왜 젖이 둘이냐? 하나는 먹으라는 거고,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거다.’ 이 젖 하나를 누구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둘 다 내꺼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아버지는 돈 벌어 오는 사람, 어머니는 나에게 음식을 주는 사람. 오빠들이라는 것은 내가 타고 놀라는 거고요 전부가 나, 나 밖엔 몰라요. 여기서부터 점점 성장하면서 자기 인식이 넓어지고 커져야 하는 것인데 항상 거기에 매여 있거든요. 또 어린아이들은 지극히 물질적인 것이에요. 물질을 받았으면 사랑이고 못받았으면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현세적이고 순간적이에요. 보다 더 먼 미래를 생각하지 못해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대로 있습니까, 젊은이가 젊은이대로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결혼 주례할 때 말합니다만은 “자, 지금은 신랑 신부다. 며칠 있다가는 아버지 어머니다. 조금 있다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다. 그것을 잊지 마라.” 할아버지, 할머니 때를 생각하면서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 되자’ 하고 살아야겠는데 지금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마음에 드느니 안드느니, 취미가 어떠느니, 재주가 있느니 없느니, 티격태격하다가 차버리니 이게 도대체 유치하고 말이죠. 당신이라고 항상 젊었더냐구요. 머지않아 저 나이가 내게 다가오고 있지 않아요? 결정적인 미래, 보다 더 먼 미래를 볼 줄 알아야 되는 것이거든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요 항상 300m 앞을 봐야 되는 거예요. 처음 운전하는 사람은 발 밑밖에 못봐요. 바로 1m 앞밖에 못봐서 휘청휘청 하지만은 운전에 능숙한 사람은 먼 곳을 보면서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것까지 종합적으로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숙이라는 거죠. 또한, 유치한 사람들은 분쟁을 해요. 고린도 교회가 분쟁이 있어서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너희들은 유치하다”하고 그렇게 판단을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아볼로파다, 바울파다, 게바파다, 예수파다. 왜 파가 있느냐? 자기가 잘났다는 거죠. ‘나는 아블로가 한, 그런 정도가 아니다. 나는 예수를 만나본 사람이다, 내가.’ ‘내가 사도바울에게 세례받은 사람이다.’ 뭐 이런 자랑을 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도 시원치 않으면서 남의 권위를 빌려서 자기를 높이고 어쨌든 자기를 높이려고 몸부림을 치니까 분쟁이 생기는 거죠. 단 두 사람 결혼생활 하는데도 자기를 높이면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자기 특권을 주장하면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결국은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면서만이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이 유치한 사람은 끝끝내 저만 잘난 거예요. 그런고로 어린아이죠. 유치하다는 것이죠.
또한, 자기 집착에 매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만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하는 일은 다 잘못했고, 내가 하는 직업은 좋은 직업이고, 남의 직업은 나쁘고. 전부 그런 식의 판단이 알고 보면 유치한 것이에요.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고린도서에서 가르쳐 줍니다. 자, 여기에 농사를 짓는다고 하자. 심는 자가 있고, 가꾸는 자도 있고, 물주는 자도 있고, 추수하는 자도 있다. 각각 자기 일을 할 뿐이다. 다 소중하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시다. 누가 물을 줬느냐? 누가 거름을 줬느냐가 중요하지를 않아요.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있지요.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거예요. 그걸 볼 줄 알아야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경륜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자의 지각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유치하게 분쟁하고 잘난척하고 뭐 이거 비판하고 이런 시시한 거 다 버렸노라, 하고 말합니다. 성숙이란, 바로 사랑의 이해에 있고 사랑의 성숙에 있습니다. 내 사랑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랑을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유치한 사람은 사랑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사랑받는 것만 생각하는 중에도 또 있어요. 그것도 정신적으로 높은 차원에서의 사랑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물질적, 육체적인 것만 생각해요. 얄팍한 것만 생각해요. 사랑받는 그 자체도 유치해요. 그런가 하면 성숙한 사람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요. 사랑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것도 높은 차원에서 사랑해요. 때로는 상대방이 이해하던지 못하던지, 때로는 오해를 하더라도 멀리 내다보며 그 언젠가 다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사랑하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들이 성숙한 부모님들은 때로는 자식을 괴롭히기도 해요.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기도 해요. 그러나 언젠가는 네가 내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게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유치한 사람은 말이 유치하고, 행동이 유치하고, 생각이 유치하고, 전부 유치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생각하는 것, 이해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다 높은 수준에, 성숙한 수준에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심리학자인 고든 올파트라고 하는 박사님께서 Pattern and Growth in Personality 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요 이 사람의 성품의 성숙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기에 성숙을 몇가지로 지적해 말합니다. 먼저는 “성숙이란 자아감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랬어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커지는 거예요. 내가 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요. 이제 어린아이들이 처음에는 나 혼자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크면서 아니요, 부모가 있고 내가 있는 거예요. 형이 있고 내가 있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존재의 인식이 점점 커지는 거예요. 여기에 가정이 있고, 나라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잖아요. 이 자아감이 점점 확장해서 큰 뜻에서의 나를 생각하게 되는 거죠. 얼마나 크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래서 지금 내가 편하고 불편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보다 더 넓은 의미의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저 사람이 편해야 내가 편한 것이고, 아내가 편해야 내가 편한 것이고, 남편을 기쁘게 하고야 내가 기쁘게 될 수 있어요. 누구를 슬프게 하고 누구를 아프게 하고는 내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거죠. 선린관계를 이루면서 비로소 내가 편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게 큰 사람이요. 성숙한 사람이예요. 가령 남을 손해 끼치고 남의 눈에 눈물을 내게 하면서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 유치한 사람이에요.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성격이라 이말이에요. 그런가 하면 정서적 안정을 가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수용하게 됩니다. 이제 전후좌후 불편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내가 책임을 집니다. 그게 성숙한 사람이에요. 가끔 이런 사람 있다면서요? 하도 성격이 못돼가지고 자꾸만 화를 내고 집안에서 짜증을 내니까 그 아내가 말하기를 여보, 왜 전에 없이 요새 와서 자꾸 짜증을 내느냐고 무슨 잘못된 일이 있냐고, 왜 그렇게 스스로 화를 내기를 하느냐고 그랬어요. 남편이 하는 말이 “나는 본래 안그랬는데 너하고 살면서 나빠졌다” 그랬대요. 이 남자 나빠진 것이 아내 탓입니까? 물론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성숙한 자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관리합니다. 이걸 남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경문제도 나 자신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또 나아가서는 현실을 정확히 인식합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봅니다. 순간만 보지 않고 다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성찰 능력이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볼 줄 알고, 자신을 객관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칭찬을 듣는다고 해서 정신 못차리고 촐랑거리지 않아요. 교만해지지도 않고. 또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당장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자기 실망하지 않습니다. 자기 성찰의 능력을 확고하게 지켜갑니다. 동시에 통일된 인생관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삽니다. 이랬다 저랬다 휘청거리고 있는 동안은 아직도 유치한 겁니다. 아직도 제자리 찾지를 못했습니다. 확고한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일관성 있게, 누가 뭐라던 말던, 나는 내 길을 의연하게 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보람을 찾습니다. 후회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무디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르게 섬겼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숙도를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기의 장성한 사람이라는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떻게 성장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성장하도록 키워가고 있는 겁니까? 많은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우리는 성장해 나갑니다. 평안하고 안일한 가운데에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비바람을 많이 맞은 나무라야 튼튼한 나무가 됩니다. 인격도 많은 환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높은 수준의 성장을 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크게 성장한 그 사람은 유치한 것을 버린다 그랬어요. 큰 것을 발견한 사람, 참 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유치한 것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전에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다 버리게 됩니다. 사도바울을 말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나니까 전에 소중하던 것을 분토와 같이 해로운 것으로 여겼노라. 다 쉽게 내버렸다고 말합니다. 큰 것, 소중한 것을 깨닫고 나면은 시시한 것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사랑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벤허’라고 하는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이 없을 겁니다. 당대에 유명한 영화가 아닙니까. 언제 보아도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그런데 벤허는 한평생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칼을 들지 않습니다. 누구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온유한 사람으로 진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 모릅니다. 칼을 들지 않습니다. 영화장면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지시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렇게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시는데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올 때, 내 손에서 칼이 떠나는 것을 느꼈노라.”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는 그 거룩한 사랑의 선포를 보면서 그 사랑에 이렇게 부딪히는 순간 내 손에서 칼이 떠나버렸다고. 나는 누구도 칼로 대할 수가 없고, 누구를 미워할 수가 없다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다 버렸습니다. 십자가 사랑에 대한 이해 인식과 그 거룩한 말씀 속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나게 될 때, 유치한 것,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 다 떠나게 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를 믿는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어린아이로 살아야 합니까? 언제까지 유치한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고 그 많은 후회를 반복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어서 속히 저희들의 신앙이 높은 수준의 성장을 이르게 하사 어린아이 같고 유치한 일들을 다 버리고 밝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주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명에 충실할 수 있는 자유인으로 살아가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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