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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말씀이 있는 교회

요한복음 6: 66 ~ 71

곽선희 목사

2007.10.07

말씀은 사람의 인생을 바꿉니다.

창립 30주년을 맞는 소망교회에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은퇴한 다음 꼭 만 4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가끔 길에서 소망교회 교인들을 만나면 다른 교회 원로 목사님들은 설교하던데 왜 소망교회 원로 목사님은 본 교회에서 설교를 안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이제 공개적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은퇴하기 전 3년 전부터 하나님 앞에 준비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은퇴 한 다음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50년을 목회 했지만 개척한 교회는 소망교회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사와 건강을 주셔서 생전에 다섯 교회를 개척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미리 준비해서 소망교회의 많은 성원과 기도로 분당 예수 소망교회를 세워 현재 8천명의 교인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일산에 소망교회를 세워  500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분당에서 설교하고 차를 몰고 한 시간 가서 일산에 가서 설교하면서 두 교회를 섬기니 너무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교회 셋을 더 세워야겠기에 내년에 개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많은 성원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생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또 다시 개척하려다보니 소망교회에 못 왔으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주일 내내 할 일없이 빈둥거리던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두 젊은이가 너무 심심하고 따분해서 이번 주일은 좀 화끈하게 한번 놀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두 사람이 모여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도박장으로 가는 길에 교회를 지나가는데 교회 게시판에 있는 설교제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이 글을 보고 한 청년은 발이 딱 붙은 것처럼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설교제목을 보고 그는 거기서 발길을 돌려 교회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대로 도박장으로 가서 화끈하게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놀았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30년 후, 교회로 들어간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라는 사람은 미국의 22대 대통령이 되었고, 도박장으로 갔던 사람은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친구가 대통령이 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더 많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주일에 어떤 집사님 부부 가 꼭 교회를 가야겠는데 그 날 따라 갑자기 일이 생겨서 여 집사님이 교회에 못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부탁했습니다. “여보, 오늘 교회 가서 졸지 말고 설교 잘 듣고 은혜 많이 받고 와서 내게 전수해주십시오. 나도 말씀을 들어야 한 주일 동안 살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은 알았다고 하면서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 갔다 돌아온 남편은 아내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부엌으로 들어와 아내를 끌어안고 화끈하게 사랑해주었습니다. 이것은 4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4개월 동안 얼굴도 마주본 일이 없고, 손 한번 잡은 일이 없었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아내는 너무 행복해서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은혜 많이 받았어요? 무슨 말씀을 들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대답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여 집사님은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과일을 사가지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 목사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목사님, 어제 제 남편이 와서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네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안 했는데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점점 더 궁금해진 집사님은 목사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네 아내를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면 윤리강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서 아내를 사랑하면 복음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말씀은 지식이나 윤리강연이 아닙니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은 사람을 중생케 하고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말씀은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설교는 사람을 인도하고 구원하며 변화시킵니다.

나이가 좀 드니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50년 동안 설교를 했는데 한국이나 미국이나 할 것 없이 목사 중에 설교를 제일 많이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 설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후배들 가운데 저의 설교 연구를 해서 논문으로 나온 것만 현재 석사논문이 100편이 넘고, 박사 논문이 4개 나왔습니다. 아무튼 제 설교가 이렇다 저렇다 많은 말을 하는데 제가 그 논문들을 읽으면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제 마음을 감동시킨 내용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지식을 주고,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감동을 주는데, 곽 목사님의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참 고맙게 생각할 뿐더러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평가 중에 제가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중요한 한 대목이 있습니다. 저는 논문이 나올 때까지 얼굴을 본 일도 없는 김홍기 교수라고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제 설교에 대해서 “역사 신학적 조명에서 본 곽선희 목사의 설교와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이 논문 서론에 나오는 말입니다. “춘원 이광수가 만약에 곽 목사 같은 신학적 설교를 들었더라면 그가 불교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성인들의 지성을 교회가 인도하고 목사의 설교가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른 설교를 못 들으면 구원 받지 못할 뿐더러 바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고, 사람을 구원하며 변화시킨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르트 신학에서 하는 말입니다.

“말씀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주체이다.”

왜냐하면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와서 말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란 “not interpretation but application”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설교란 성경을 공부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현대 설교학에서 말합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바르트가 말하는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이 되셨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주의 종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사람을 고용해서 은혜의 방편으로 교회를 사용하여 오늘도 친히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변화됩니다.

설교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많은 지식과 성경 지식을 주어 사람이 변화되기를 바라지만 잘 안됩니다. 성경공부 많이 한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윤리적 차원에서는 성경을 이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이래야 한다. 효도해야 한다. 진실해야 한다. 거짓말해야 한다. 성경을 하나의 윤리 규범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처세학 지혜 하나를 얻었습니다.
첫째,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충고하지 마라. 알면서 곁길로 가는 사람을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교만한 자를 충고하면 벌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둘째,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마라. 듣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 왜 자꾸 말을 합니까? 잔소리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대답하기 싫어하는 말은 묻지 마라. 남편이 대답하지 않으면 “자기 왜 말이 없어?”하면서 말을 안 하느냐고 계속 묻습니다. 자꾸만 형사 취조하듯 해 봐야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잘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선동적이고 감동적인 마치 엔터테이먼트 같은 설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말씀 자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두 번 고백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누구로 아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또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한복음 6:68-69)

이 둘을 비교해보면 두 번째 고백이 한 차원 높은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니 말씀을 봤습니다. 그뿐 아니라 말씀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에 갔을 때 백부장 하나가 찾아와 예수님 앞에 와서 절을 하면서 말합니다. “내 하인이 병들었습니다. 고쳐주세요.” 그때 예수님께서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 집에 가자.” 순간 백부장이 말합니다. “우리 집에 오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고 이방사람입니다. 거기에는 우상도 많습니다. 이런 집에 예수님께서 출입하면 바리새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우리 집에 다녀가면 비난거리가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시지 말고 말씀으로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말씀으로만 하면 내 하인이 낳을 것이라고 할 때 예수님이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칭찬을 하십니다. “온 이스라엘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일이 없다. 가라. 네 하인이 나았을 것이다.”

말씀 중심의 신앙에 영생이 있습니다.

말씀중심의 신앙에 무슨 해석이 필요합니까? 말씀을 말씀으로 받는 순간 이것은 능력이요, 생명력이요, 그 속에 영생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2살 난 야이로의 딸이 방금 죽었을 때, 예수님이 죽은 아이에게 가서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 그 때 아이가 일어납니다. 또 청년이 죽었을 때 장례식을 치루면서 관을 메고 나가는데 멈추게 하고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 때 청년이 벌떡 일어납니다. 그런가 하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랬더니 시체가 걸어 나옵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귀신이 나가는 말씀이 곧 능력입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 책을 먹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신학적 요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봅니다.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깨닫습니다. 깨닫고 옳다고 긍정하며 수용하는 순간 ‘이대로 살아야겠다. 맞아 옳은 말씀이니까 그대로 살아야겠다.’하고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유진 피터슨은 그것은 설교가 아니요, 말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역사할 때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말씀의 역사하여 나도 모르게 확 달라지면서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어두운 세상이 환하게 보이고, 땅에 살지만 영원한 세계가 보이는 결과로 원수 같은 마누라가 예뻐지는 것입니다. 누가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겠다고 결심하고 왔다가도 만나면 미워지는데 어떡하면 좋습니까? 이것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역사할 때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변화케 하는 역사입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사죄권 행사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 환자 하나가 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갈수가 없어서 침대를 그냥 끌고 올라가서 지붕에서 달아 내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앞에 지금 환자가 하나 누워있자 예수님 보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라고 엄청난 말씀을 합니다.
누가 죄를 사할 수 있습니까? 회개한다고 사해집니까? 눈물 흘린다고 됩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이것을 비유로 이렇게 말합니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어 자기가 자기 머리카락을 위로 잡아 땡겼다고 합니다. 아무리 댕겨 봤자 밖으로 나올 것 같으냐? 내가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일생동안 울어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떨어져야 합니다. “네 죄 사함 받았으니라.” 할 때 “아멘”으로 대답할 때 죄 사함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네 많은 죄가 사함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실 때 막달라 마리아가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옆에 있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한 영혼이 구원을 받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하는 순간 확 사람이 변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됩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여 집사님의 남편이 예수를 안 믿어서 교회 나올 때마다 남편이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늘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데 은혜 받는 순간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들어 집에 돌아가서 “여보, 나는 행복해요.”라고 했더니 경상도 남편이 “너 미쳤나?”라고 했답니다. 그래도 아내는 계속해서 “아니, 행복합니다. 정말로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더니 또 남편이 말했습니다. “술주정뱅이하고 살면서 뭐가 행복하다는 거냐?” 그 때 여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매일같이 술은 먹는데 건강하니 행복하고, 하루같이 맑은 정신이 아닌 술 취한 정신으로 돌아오는데 제 집 찾아오니 행복하고, 술 먹고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는 집안 식구들 다 굶겨 죽을 것 같은데 제법 돈을 벌어서 잘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행복해요.”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고만해라.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가줄게.”라고 했답니다.
이처럼 은혜 받는 순간 행복해지고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원수가 없고 어두움이 없습니다. 말씀과 함께 말씀의 능력이 생명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하나님의 말씀은 조용히 들어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너무 시끄러운 세상을 봅니다. 보는 것이 많아지면 듣는 것이 적어집니다. 듣는 소리가 커지면 생각하는 능력이 줄어듭니다.
디스코 장에 가면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고성능 스피커로 꽝꽝하며 뇌 세포까지 망가진답니다. 시끄러워지면 영원히 죽습니다. 생각하는 기능도 없어집니다. 조용하게 엘리야에게 해주신 말씀처럼 묵상 중에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인이 누구입니까? 교회 나오는 사람이 교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직접 나타날 때 거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조용하고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주의 음성을 들으면 들릴 것입니다. 들려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배우고 예수를 따르다가 예수로 인해서 출세하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이제 깨닫습니다. “당신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영생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당신에게 있음에 내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바로 이 사람이 교회요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말씀이요, 말씀의 방편입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것이 교회, 살아 역사하고 선포되며 생명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마다 이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7:29)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하는 영생의 말씀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인생관이 변하고 세계가 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오늘도 내일도 살아 역사하는 교회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30년 동안 소망 교회를 지켜주시고 주의 말씀으로 역사해 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구원 받고 소생함을 얻고 새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며 오늘도 귀하고 놀라운 역사를 이렇게 이루어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친히 이 교회를 통해 역사하여 주시고, 주의 사람들을 만나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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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 66 ~ 71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말씀은 사람의 인생을 바꿉니다.

창립 30주년을 맞는 소망교회에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은퇴한 다음 꼭 만 4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가끔 길에서 소망교회 교인들을 만나면 다른 교회 원로 목사님들은 설교하던데 왜 소망교회 원로 목사님은 본 교회에서 설교를 안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이제 공개적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은퇴하기 전 3년 전부터 하나님 앞에 준비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은퇴 한 다음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50년을 목회 했지만 개척한 교회는 소망교회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사와 건강을 주셔서 생전에 다섯 교회를 개척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미리 준비해서 소망교회의 많은 성원과 기도로 분당 예수 소망교회를 세워 현재 8천명의 교인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일산에 소망교회를 세워  500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분당에서 설교하고 차를 몰고 한 시간 가서 일산에 가서 설교하면서 두 교회를 섬기니 너무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교회 셋을 더 세워야겠기에 내년에 개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많은 성원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생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또 다시 개척하려다보니 소망교회에 못 왔으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주일 내내 할 일없이 빈둥거리던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두 젊은이가 너무 심심하고 따분해서 이번 주일은 좀 화끈하게 한번 놀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두 사람이 모여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도박장으로 가는 길에 교회를 지나가는데 교회 게시판에 있는 설교제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이 글을 보고 한 청년은 발이 딱 붙은 것처럼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설교제목을 보고 그는 거기서 발길을 돌려 교회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대로 도박장으로 가서 화끈하게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놀았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30년 후, 교회로 들어간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라는 사람은 미국의 22대 대통령이 되었고, 도박장으로 갔던 사람은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친구가 대통령이 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더 많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주일에 어떤 집사님 부부 가 꼭 교회를 가야겠는데 그 날 따라 갑자기 일이 생겨서 여 집사님이 교회에 못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부탁했습니다. “여보, 오늘 교회 가서 졸지 말고 설교 잘 듣고 은혜 많이 받고 와서 내게 전수해주십시오. 나도 말씀을 들어야 한 주일 동안 살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은 알았다고 하면서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 갔다 돌아온 남편은 아내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부엌으로 들어와 아내를 끌어안고 화끈하게 사랑해주었습니다. 이것은 4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4개월 동안 얼굴도 마주본 일이 없고, 손 한번 잡은 일이 없었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아내는 너무 행복해서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은혜 많이 받았어요? 무슨 말씀을 들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대답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여 집사님은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과일을 사가지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 목사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목사님, 어제 제 남편이 와서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네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안 했는데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점점 더 궁금해진 집사님은 목사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네 아내를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면 윤리강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서 아내를 사랑하면 복음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말씀은 지식이나 윤리강연이 아닙니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은 사람을 중생케 하고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말씀은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설교는 사람을 인도하고 구원하며 변화시킵니다.

나이가 좀 드니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50년 동안 설교를 했는데 한국이나 미국이나 할 것 없이 목사 중에 설교를 제일 많이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 설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후배들 가운데 저의 설교 연구를 해서 논문으로 나온 것만 현재 석사논문이 100편이 넘고, 박사 논문이 4개 나왔습니다. 아무튼 제 설교가 이렇다 저렇다 많은 말을 하는데 제가 그 논문들을 읽으면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제 마음을 감동시킨 내용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지식을 주고,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감동을 주는데, 곽 목사님의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참 고맙게 생각할 뿐더러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평가 중에 제가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중요한 한 대목이 있습니다. 저는 논문이 나올 때까지 얼굴을 본 일도 없는 김홍기 교수라고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제 설교에 대해서 “역사 신학적 조명에서 본 곽선희 목사의 설교와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이 논문 서론에 나오는 말입니다. “춘원 이광수가 만약에 곽 목사 같은 신학적 설교를 들었더라면 그가 불교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성인들의 지성을 교회가 인도하고 목사의 설교가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른 설교를 못 들으면 구원 받지 못할 뿐더러 바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고, 사람을 구원하며 변화시킨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르트 신학에서 하는 말입니다.

“말씀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주체이다.”

왜냐하면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와서 말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란 “not interpretation but application”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설교란 성경을 공부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현대 설교학에서 말합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바르트가 말하는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이 되셨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주의 종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사람을 고용해서 은혜의 방편으로 교회를 사용하여 오늘도 친히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변화됩니다.

설교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많은 지식과 성경 지식을 주어 사람이 변화되기를 바라지만 잘 안됩니다. 성경공부 많이 한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윤리적 차원에서는 성경을 이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이래야 한다. 효도해야 한다. 진실해야 한다. 거짓말해야 한다. 성경을 하나의 윤리 규범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처세학 지혜 하나를 얻었습니다.
첫째,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충고하지 마라. 알면서 곁길로 가는 사람을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교만한 자를 충고하면 벌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둘째,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마라. 듣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 왜 자꾸 말을 합니까? 잔소리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대답하기 싫어하는 말은 묻지 마라. 남편이 대답하지 않으면 “자기 왜 말이 없어?”하면서 말을 안 하느냐고 계속 묻습니다. 자꾸만 형사 취조하듯 해 봐야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잘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선동적이고 감동적인 마치 엔터테이먼트 같은 설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말씀 자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두 번 고백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누구로 아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또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한복음 6:68-69)

이 둘을 비교해보면 두 번째 고백이 한 차원 높은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니 말씀을 봤습니다. 그뿐 아니라 말씀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에 갔을 때 백부장 하나가 찾아와 예수님 앞에 와서 절을 하면서 말합니다. “내 하인이 병들었습니다. 고쳐주세요.” 그때 예수님께서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 집에 가자.” 순간 백부장이 말합니다. “우리 집에 오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고 이방사람입니다. 거기에는 우상도 많습니다. 이런 집에 예수님께서 출입하면 바리새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우리 집에 다녀가면 비난거리가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시지 말고 말씀으로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말씀으로만 하면 내 하인이 낳을 것이라고 할 때 예수님이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칭찬을 하십니다. “온 이스라엘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일이 없다. 가라. 네 하인이 나았을 것이다.”

말씀 중심의 신앙에 영생이 있습니다.

말씀중심의 신앙에 무슨 해석이 필요합니까? 말씀을 말씀으로 받는 순간 이것은 능력이요, 생명력이요, 그 속에 영생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2살 난 야이로의 딸이 방금 죽었을 때, 예수님이 죽은 아이에게 가서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 그 때 아이가 일어납니다. 또 청년이 죽었을 때 장례식을 치루면서 관을 메고 나가는데 멈추게 하고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 때 청년이 벌떡 일어납니다. 그런가 하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랬더니 시체가 걸어 나옵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귀신이 나가는 말씀이 곧 능력입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 책을 먹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신학적 요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봅니다.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깨닫습니다. 깨닫고 옳다고 긍정하며 수용하는 순간 ‘이대로 살아야겠다. 맞아 옳은 말씀이니까 그대로 살아야겠다.’하고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유진 피터슨은 그것은 설교가 아니요, 말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역사할 때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말씀의 역사하여 나도 모르게 확 달라지면서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어두운 세상이 환하게 보이고, 땅에 살지만 영원한 세계가 보이는 결과로 원수 같은 마누라가 예뻐지는 것입니다. 누가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겠다고 결심하고 왔다가도 만나면 미워지는데 어떡하면 좋습니까? 이것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역사할 때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변화케 하는 역사입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사죄권 행사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 환자 하나가 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갈수가 없어서 침대를 그냥 끌고 올라가서 지붕에서 달아 내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앞에 지금 환자가 하나 누워있자 예수님 보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라고 엄청난 말씀을 합니다.
누가 죄를 사할 수 있습니까? 회개한다고 사해집니까? 눈물 흘린다고 됩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이것을 비유로 이렇게 말합니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어 자기가 자기 머리카락을 위로 잡아 땡겼다고 합니다. 아무리 댕겨 봤자 밖으로 나올 것 같으냐? 내가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일생동안 울어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떨어져야 합니다. “네 죄 사함 받았으니라.” 할 때 “아멘”으로 대답할 때 죄 사함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네 많은 죄가 사함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실 때 막달라 마리아가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옆에 있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한 영혼이 구원을 받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하는 순간 확 사람이 변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됩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여 집사님의 남편이 예수를 안 믿어서 교회 나올 때마다 남편이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늘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데 은혜 받는 순간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들어 집에 돌아가서 “여보, 나는 행복해요.”라고 했더니 경상도 남편이 “너 미쳤나?”라고 했답니다. 그래도 아내는 계속해서 “아니, 행복합니다. 정말로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더니 또 남편이 말했습니다. “술주정뱅이하고 살면서 뭐가 행복하다는 거냐?” 그 때 여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매일같이 술은 먹는데 건강하니 행복하고, 하루같이 맑은 정신이 아닌 술 취한 정신으로 돌아오는데 제 집 찾아오니 행복하고, 술 먹고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는 집안 식구들 다 굶겨 죽을 것 같은데 제법 돈을 벌어서 잘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행복해요.”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고만해라.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가줄게.”라고 했답니다.
이처럼 은혜 받는 순간 행복해지고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원수가 없고 어두움이 없습니다. 말씀과 함께 말씀의 능력이 생명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하나님의 말씀은 조용히 들어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너무 시끄러운 세상을 봅니다. 보는 것이 많아지면 듣는 것이 적어집니다. 듣는 소리가 커지면 생각하는 능력이 줄어듭니다.
디스코 장에 가면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고성능 스피커로 꽝꽝하며 뇌 세포까지 망가진답니다. 시끄러워지면 영원히 죽습니다. 생각하는 기능도 없어집니다. 조용하게 엘리야에게 해주신 말씀처럼 묵상 중에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인이 누구입니까? 교회 나오는 사람이 교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직접 나타날 때 거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조용하고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주의 음성을 들으면 들릴 것입니다. 들려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배우고 예수를 따르다가 예수로 인해서 출세하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이제 깨닫습니다. “당신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영생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당신에게 있음에 내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바로 이 사람이 교회요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말씀이요, 말씀의 방편입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것이 교회, 살아 역사하고 선포되며 생명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마다 이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7:29)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하는 영생의 말씀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인생관이 변하고 세계가 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오늘도 내일도 살아 역사하는 교회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30년 동안 소망 교회를 지켜주시고 주의 말씀으로 역사해 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구원 받고 소생함을 얻고 새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며 오늘도 귀하고 놀라운 역사를 이렇게 이루어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친히 이 교회를 통해 역사하여 주시고, 주의 사람들을 만나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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