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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하는 자에게 주신 권세

요한복음 1: 9 ~ 14

곽선희 목사

2002.12.22

날 짜 :2002.12.22
제 목 :영접하는 자에게 주신 권세
본 문 :요한복음 1 : 9 ∼ 14

어느날 늦은 밤에 한 외판원이 자동차를 급히 몰고 어느 호텔 앞에 도착했습니다. 호텔에 들어가서 방을 하나 얻겠다고 했습니다만은 안내원 하는 말이 빈방이 없다고 했습니다. 빈 방에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실망과 낙담을 해서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루종일 이렇게 여행을 하고 수고하고 밤 늦게 호텔에서 쉬려고 했는데 이제는 또 호텔을 찾아 헤메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스러운 몸으로, 지친 모습으로 그 호텔문을 나서려고 할 때에 로비에서 쉬고있던 점잖은 신사 한 분이 가까이 오면서 하는 말입니다. “방이 없다고 하니 몹시 힘드시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자신을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윌리암 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소개와 함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늦은 시간에 여기저기 다녀봐도 방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몹시 피곤해 보이니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지금 이 호텔에 묵고 있는데 제 방은 twin-bed라서 작은 침대가 둘이 놓여있는데, 제가 한 침대를 사용하고 침대 하나는 비어있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하룻밤 동숙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듣다가 이 갑작스런 친절에 세상이 바뀌는 것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이런 고마운 분이 어디에 있나. 그래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감사, 감격, 감지덕지 “그러죠” 그랬습니다. 그분의 안내로 호텔방에 들어갔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하룻밤을 쉬었습니다. 새벽이 되었을 때에 눈을 떠보니 벌써 이 점잖은 신사는 세수를 하고 단정히 하고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 손님에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성경보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는데 선생님도 나와 같이 기도하고 성경읽고 그렇게 할 수 없겠습니까?” 신세를 진 터라 싫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그러죠.” 급히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단정히 하고 앉았는데 성경을 쭉 읽고 나서 기도를 하는데, 나라를 위해서 대통령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특별히 마주앉은 자신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경건 순서는 이제 끝났습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보겠는데” 손을 딱 잡고 하시는 말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마음이 없습니까?” 이것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죠.” “그러면 당신은 이제부터 내 친구요 내 형제입니다.” 그리고 굳게 악수를 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는 순간에 이 분의 생각으로는 세상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고마운 분이 있는가,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나.’ 그러고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은 감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사람이 뒤에 다시 알고 보니까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이라고 하는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습니다. 이런 분을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감격으로 한 평생을 살게 됩니다. 또 하나의 말씀을 드릴까요. 한 스승이 제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세상에는 밤이라는 것이 있고 낮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밤과 낮을 구분하는 그 증거가 무엇인가. 무엇으로 그 밤과 낮을 식별할 수가 있나?” 라고 물었습니다. 한 제자가 대답하기를 “저기 오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때에는 밤이고 이 사람은 남자고 저 사람은 여자다라고 식별이 되면 낮입니다.” “그렇구나.” 또 한 제자가 말하기를 “저기 동물이 서있는데 저것이 말인지 소인지 알 수 없을 때, 그 때는 밤이고 이것은 말이고 이것은 소라는 것이 식별이 되면 낮입니다.” “그렇구나.” “또 멀리 서있는 나무가 저것이 보리수인지 혹은 망고 나무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이 바로 밤이고 저것이 무슨 나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면 그것이 낮입니다.” 이 세 제자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고 말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원수인지 친구인지 모르면 밤이고, 이 사람이 분명히 내 친구다 생각하면 그게 바로 낮이구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사람이 반갑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어지고 신뢰가 가고 저들은 나를 사랑한다, 이렇게 느껴지면 그것은 낮입니다. 세상 사람이 많지만 다 원수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른다, 내 뜻을 모른다, 나는 혼자다, 오로지 혼자이다, 사막에 버려진 외로운 나그네다 이렇게 생각된다면 당신은 지금 밤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밤에 있는 것입니까 낮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나와 함께 한 자와의 관계에서 나를 평가하게 됩니다. 나의 나됨을 아는 데에서부터 인생은 시작됩니다. 유명한 웅게스마의 명제가 있습니다. To know self to be known by another, 유명한 말입니다. 다른 사람, 내 이웃과의 나와의 관계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평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란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있는 나를 발견할 때에 그리고 ‘그 크신 은총 속에 내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자녀다. 이웃은 내 형제다’ 바로 그럴때에 그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하나님 자녀되는 권세에 대한 소중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Becoming,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에 따라서 권세가 주어진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이것은 기독교적 교리의 핵심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가지는 소중한 진리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이란 다른 말로 해서 인간이 인간 되는 길은 결코 그의 선행이나 그의 지식이나 그의 의나 그의 공로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노력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내게 향한 말씀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수용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Receiving heart.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오심을 내가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마음을 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인격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인격이 출중한가 못한가, 사람이 큰 사람인가 작은 사람인가, 그가 능력이 있나 없나? 그것도 역시 그의 Receptivity, 수용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만은 제가 어느 대통령이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남북관계가 아주 긴장 관계에 있어서 아무도 북한을 방문하지 못할 때,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그 때에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특별히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 수령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청와대에 들렸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만났을 때에 자, 우리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소중한 시간입니까? ‘내가 못가봤는데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갔다왔으니, 어떻습니까? 뭐라고 하더이까? 그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인 것 같습니까?’ 뭐 할말도 많고 물어볼 말도 많잖아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30분 동안 면회를 했는데 대통령 혼자 말했습니다. 어쩌고 저쩌고. 너무 너무 유감스러워서 같이 갔던 사람이 민망해서 혼났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면회를 끝내고 나와서 차를 타고 가는데 조마조마 한데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뭐라고 하나 보았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He talks too much. 딱 한마디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유감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좀 어떻습디까 하고 물어보면 빌레그레함 목사님이 오죽 말을 잘하십니까? 잘 설명할 것이고 미국 가서 한바탕 돌아다니면서 설명할 텐데 아 글쎄 그것을 He talks too much. 이것으로 끝냈거든요. 이것이 작은 그릇입니다. 이래서 이 나라가 어지러운 것입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큰 그릇은 남의 말을 듣습니다. 많이 듣습니다. 넓게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듣는다, 영접한다는 말은 믿어준다는 말입니다. 일단 믿어주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한 40여년동안 강의를 했는데, 제가 강의를 할 때마다 첫 시간에 꼭 주의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내 강의에는 질문은 없다. 강의 도중에 질문하지 말아라. 의심하지도 말아라. 집에 가서 의심해라. 다음에 올 때에 질문해라. 강의를 듣는 중에 이렇게 의심하고 저렇게 생각하는 것은 학생 당신의 손해다. 듣는 이 시간만은 믿고 전적으로 total acceptance, 그렇게 들어라. 그것이 공부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이설교듣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전적으로 가슴을 열고 그대로 들으면 좋은데 그런 사람들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웃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웁니다. 어떤 사람은 절대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생각인 참 안됐고 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영접하는자, 믿는 자. 영접한다는 말은 믿는 것이요 믿는다는 말은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을 어떻게 영접합니까? 대접한다고 음식대접한다고 대접입니까? 인격과 인격과의 만남에서의 영접이란 듣는 것이요 믿어주는 것이요 신뢰하는 것이요 그리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홀만 헌터의 유명한 명화가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그림. 아마 여러분도 이래저래 카드에서나 화랑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림은 굳게 닫힌 문이 있습니다. 대문이 있는데 너무 오랫동안 열어본 일이 없어서 그 밑에 잡초가 우거졌습니다. 굳게 닫힌 문을 밖에서 등불을 들고 두드립니다. 노크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대문은 밖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손잡이가 없는 문, 그 대문 밖에서 등불을 들고 기다리고 두드리고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문 밖에서 두드립니다. 우리가 마음문을 열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주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를 누구나고 고백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나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사로 생각하면 나는 환자요, 예수님을 기적의 사람으로 생각하면 나는 기적을 따르는 사람이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영접하는 순간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제는 주님을 영접한다 하는 순간에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를 주로 모시는 순간, 그에게 완전히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Discipline 입니다. 그의 커리큘럼을 따르는 것이고 그의 교과 과정을 만족하게 여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어디로 인도하던지 아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할지라도 믿고 따릅니다. 납득이 가도 따르고 안가도 따르고 이해가 되도 따르고 안되도 따릅니다. 그 전적인 순종, 그것이 바로 주를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를 옳게 영접하지 못했었습니다. 다 이해하지도 못했고 따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완전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Total Commitment 입니다. 데이빗 A. 씨맨스라고 하는 분이 Healing Grace 라고 하는 책에서 은혜의 장애물 세가지를 말합니다.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첫째가 자기 의존입니다. 아직도 내 의, 내 노력, 내 어떤 것으로 인해서 무엇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의존도가 높으면 결국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수용하지 못합니다. 또 하나는 철저한 개인주의입니다. 개인주의자는 사랑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지 않기에 남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자는 엄청난 사랑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런가 하면 철저한 행동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에 집착합니다. 누가 이런 새로운 이야기를 할 때에 “다 해봤어? 다 지내봤어?” 이것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경험한 것입니까? 내가 안다면 어디까지 아는 것입니까만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고 더 이상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고로 오늘 성경말씀을 말합니다. 주를 영접한다는 말이 무어냐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뜻이요 그리고 하나님께로만 나온 자만이 하나님께로 나온자들이라. 이것은 영생과 중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함께할 때만이 이 귀한 역사는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에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주 극치적인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에, 은혜는 신앙적이고 진리는 철학적입니다. 신앙적 욕구와 철학적 욕구가 다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과 의지 지식 할 것이 없이 그 모든 욕구가 만족하게 채워지는 순간이 충만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고백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그러나 성경을 읽어나갈 때에 참 유감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헤롯 같은 왕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당장 죽이려고 합니다. 왜? 그가 왕이 되면 내가 죽으니까. 내가 왕이 되기 위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그런 사람은 오늘도 있습니다. 내가 내 보좌를 내어 놓아야 합니다. 완전히 내어놓고 그를 왕으로 영접합니다. 그것이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영접하는 순간 신비로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세상이 전개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에 그는 그의 무자격함을 알고 있습니다. 전혀 아들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뉘우치며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놀란 것은 아버지는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엄청난 사랑을 감격하는 순간에 그는 지난날의 어두운 과거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 잔치에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자기의 자녀됨을 확증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권세입니다. 거기에 존재가 있고 신분이 있고 내 가치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누리며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살아오면서도 사랑받는 자의 합당한 길을 가지 못했고, 하나님의 자녀됨이 분명하지만 자녀됨의 권세를 잃어버리고 살았으며, 주님을 영접하는 것, 온전히 영접하지 못했기에 그 큰 권세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 가슴을 열고 온 생명 내 온 지식 다 그대로 송두리째 주께 바치면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한 제물로 바치며 주를 영접하게 하사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과 그 권세를 깊이 깨닫고 감격하며 그 놀라운 은혜 속에 오늘 내일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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