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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사랑의 속성

요한일서 4: 7 ~ 11

곽선희 목사

2001.07.01

날 짜 :2001.07.01
제 목 :원초적 사랑의 속성
본 문 :요한일서 4 : 7 ∼ 11

요사이 유행하는 말 중에 ‘대책 없는 자’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하고, 도대체 구제할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인가 한번 봅시다. 몽고반점을 중국 음식점이라고 우기는 사람, 이걸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L.A와 Los Angeles가 다르다는 사람. 으악새가 새의 이름이라고 우기는 사람. 제가 사전 찾아보았더니 으악새라고 되어있지 않고 억새라고 되어 있어요. 으악새는 방언이랍니다. 어쨌든 으악새는 풀 이름이지 새 이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으악새는 새 이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사람, 이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컴퓨터 바이러스가 몸에도 전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랑받고 살면서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 구제불능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뉘우칠 때에는 또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하늘 아래 사랑이 있냐는 것입니다. 사랑을 부정하고 사는 사람,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대책 없습니다.
Cast Away 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나갔습니다만은 아주 명화입니다. 그 내용 중에 보면 두 남녀가 열렬히 사랑을 하고 약혼을 하고 결혼날짜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놀랜드’ 라는 이 남자가 자기가 나가는 회사의 일로 인해서 그는 잠깐 출장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이 비행기가 추락되면서 그 비행기에 탄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이 ‘놀랜드’ 라는 사람이 남태평양 어느 무인도에 표류됩니다. 거기서 그는 살아남고 감격합니다만은 그러나 전혀 사람이 살지 않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 이 섬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과일을 따먹고 바위틈에 은신하면서 이렇게 버티고 4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 뜨거운 사랑이 그로 하여금 이 많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뗏목을 만들어서 그 배를 만들었죠. 이렇게 띄워 가지고 나가다가 지나가는 상선에게 발견되어서 구출이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자기 애인은 다른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어요. 이 나라의 법은 실종되고 1년이 지나면 사망처리를 합니다.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장례식도 치르고 그럽니다. 그리고 정당하게 결혼을 하고 어린 얘들까지 낳았어요. 이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지만은 사랑하는 사람, 모처럼 안정을 얻은 그 사람, 그 가정을 파괴할 수가 없어요. 그는 할 수 없이 물러섭니다. 그리고, 넓은 광야를 앞에 놓고 갈 곳을 잃었어요. ‘앞으로 가야하나? 뒤로 가야하나? 옆으로 가야하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리고 광야를 바라보며 방황하는 그런 장면으로 이 영화는 끝납니다. 여러분, 무인도에서 4년을 고독하게 가난과 고통과 어려움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었지만은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린 허탈감, 이제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렇게 딱 한 문장으로 기록된 곳은 성경에 여기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생명이다.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사랑 없이 생명 없습니다. 살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사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사랑의 계시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확실하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다고요.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로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계시합니다.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했다고. 독생자를 주었다고. 왜? 그 속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가 죄인을 사랑하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희생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증거하고, 이제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믿으라’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믿으라, 이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행복하라고. 또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받고 이 사랑을 베풀라고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동물적 사랑과 인간적 사랑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동물이라는 것은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동물적 충동, 행복이올시다. 탄자니아나 케냐, 이런 데 가서 보면 넓은 벌판에 많은 짐승들이 사는 것을 봅니다. 짚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을 해보면 동물들은 정말 배만 부르면 만족합니다. 나는 그 들판을 지나가다가 사자들이 모인 곳, 잘 보기 힘든 곳이니까 사자가 한 30마리 있는 그런 자리를 그 소굴에 들어가보면, 전 재미있게 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자가 짐승을 잡아먹고 배가 부른 다음에 말이죠, 나무 밑에서 아주 벌렁 누웠어요. 벌렁 누워가지고 이리저리 뒹굴면서 낮잠을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옆에는 커다란 수놈, 왕 사자가 떡 버티고 앉아 있고 거기에는 여러 마리의 암놈 사자가 있고 그리고 새끼들이 이렇게, 그 가정을 거느리고 이러고 앉아있는데 꺼벅꺼벅 졸고 앉아있는데, 그 숫사자를 자세히 보니까요 얼굴이 만신창이더라구요. 그 가정을 지키느라고 죽을 고생을 한답니다. 그 왕권을 2년밖에는 지키지 못한답니다. 조금만 힘이 약해지면 다른 젊은 숫사자가 와서 점령을 해버린답니다. 그 사자도 편하지 않더라구요. 아주 힘든 생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저 ‘자네들도 별로 행복하지 못하겠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지나와 봤습니다. 동물은 이 본능적 욕구를 충족할 때 편안합니다. 인간은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사랑을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보면은 어떻게든지 사랑을 확인하려고, 스킨쉽을 통해서 가까이 손을 잡고, 비비고, 안기고, 무릎에 앉고 잠깐이라도 이 사랑 옆에서 떠날 때, 무릎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밀치던가 해보세요. ‘엥’하고 울고 사흘 후에는 감기 걸립니다. 아주 힘듭니다. 순간순간 자신만만하게 ‘우리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사랑한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때만 행복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이고 원초적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지 않고는 못 살고,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삽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확인하고 알고 깨닫고 느끼고 감사하는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설사, 좀 어려운 고난을 치른다 하더라도 사랑만 확실하면 살 수 있습니다.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질병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무너질 때, 나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이자 지능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urg)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유명한 사랑의 삼각 이론이 있습니다. ‘사랑은 마치 정삼각형처럼 삼각 균형이 잡힌 그 가운데에 참 사랑이 있다’ 하는 것이올시다. 첫째 요소가 뭐냐하면은 Intimacy, 친밀감이올시다. 사랑은 친밀함을 느껴야 되요. ‘가까이 있다. 저와 나는 가깝다. 저는 나를 이해한다. 저는 나의 사정을 잘 알아주신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이렇게 친밀감을 느끼는 그런 정서가 이게 사랑입니다. ‘가까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비록 조금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다. 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친밀감, 그것이 사랑입니다. 두번째는 Passion 이올시다. 이것은 정열입니다. 사랑이 정열로 작용해서 로맨틱하고 어떤 때는 욕망으로 치닫습니다. 그래서 소유하려고 하고 꼭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사실은 그 뿌리에 사랑이 있어요. 세번째 요소는 Promise and Responsibility입니다. 이것은 약속과 책임이 있는 거예요. 책임을 지는 거예요. 약속이 확실하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나아가서 책임을 집니다. 저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요 저의 실수가 나의 실수입니다. 저는 나와 상관이 없듯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실수를 보더라도 그건 바로 내 책임이예요. 자식의 실수를 내 탓이라고 아내의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남편의 잘못도 그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책임을 지는 마음이 그게 사랑이요. 무책임하게 비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은 바로 동체의식이거든요. 일체 의식이요. 하나로 생각하게 될 때 책임을 집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자, 그러면 여기서 이것이 삼각형처럼 꼭 균형을 잡아야 된대요. 왜냐하면 친밀감에 치우치면 감상주의자가 되요. 요새말로 ‘마마보이’ 같은, 이런 것이 된다 이거예요. 또, 정열에 치우치게 되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정신을 못 차립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약속과 책임, 이 의무에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면, 아주 메마르게 됩니다. 냉정하고 메마르고. 요새 말로 정열이 없어요. 그런고로, 이 세 요소가 함께 합쳐서 정삼각형처럼 이 세 변이 같은 길이로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참 사랑이다, 라고 합니다. 이제 이 사랑의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순간부터 사랑의 성격을 떠납니다. 사랑은 받아들임에 있는 것이올시다. 받는 존재 의식이요 받는 감격이요 받는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5장에 있는 말씀을 전 개인적으로 많이 사랑합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혹이라도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함에 있어서 의심이 생길 때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믿어집니다. ‘내가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기 사랑을 확증해 주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셨다’고요. 그 때가 중요합니다. 연약할 때, 또 죄인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때 벌써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어요.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해서 사랑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살고, 봉사한다고 이제서야 사랑을 받을 거라고, 보상적으로 사랑을 받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참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잘해서 사랑을 받는 겁니까? 그렇게 똑똑한 척 하고 계산 많이 하는 자녀는 사랑받지 못해요. 오히려 실수도 많고 부족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우리 아버지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는 그 깨달음과 그 믿음이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예요.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거지요.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비유를 아시잖아요. 그가 집을 나가 버렸어요. 그리고 허랑 방탕했어요. 왜 안돌아 왔을까?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돈 벌어가지고 가야지, 출세해서 가야지, 내가 이 모양으로 갈 수 없지 않나? 체면, 위신, 생각하는 중에 그는 못 돌아왔어요. 바르게 돌아와 보려고 애썼겠지만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서 마지막에 굶어 죽게 되어가지고는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그를 환영하고, ‘소를 잡아라, 옷을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잔치를, 환영 잔치를 합니다. 아들은 너무 부끄러워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에 저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머슴꾼의 하나로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렇게 기뻐하고,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이렇게 기뻐하고 환영합니다. 그때 탕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올 걸.’ 내가 집을 나갔으니 아버지도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고, 내가 아버지를 잊었을 때 아버지도 나를 저주하고 호적에서 지워버리고 잊어버린 줄 알았지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 그 아버지는 사랑했고,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게 아닙니다.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동안 탕자는 너무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올시다.
오래 전에 읽은 책 한 권의 이야기를 저는 늘 잊지를 않고 종종 생각합니다. 캐시라고 하는 여성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주 발랄하고 연애를 했는데 연애에서 실패하고 배신당하게 됩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어머니가 말렸지만은 그는 집을 나갑니다. 넓은 세상에 가서 마음대로 살아버립니다, 그 젊은 육체를 가지고. 창녀가 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마지막엔 마약 중독자까지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나니까 몸은 시들고 병들고, 이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는 죽을 때가 되었다. 강가에 나가서 투신자살을 하려고 내려다 보는데 강물에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비칩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했습니다. ’10년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늙었을까? 어떤 모습일까?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한번 뵙고, 그리고 돌아와서 죽을 것이다. 죽는 일은 바쁘지 않다.’ 그래서 낮에 올 수가 없어서 먼 빛으로 보려고 밤에, 캄캄한 밤에 집에 돌아와 봤는데, 집안과 밖에 외등까지 불을 환하게 켜 놓았어요. ‘오늘 무슨 파티가 있었나? 왜 이렇게 불을 켜 놓았나?’ 그런데 조용해요. ‘이상하다. 파티가 끝났는가?’ 대문을 잠깐 밀어보았더니 잠그지 않았어요. ‘대문도 잠그지 않고 주무시누만.’ 조금 더 미는데 ‘삑’하고 소리가 나자마자 안에서 어머니가 “캐시야” 그냥 맨발로 뛰어 나옵니다. 꼼짝 못하고 붙들렸습니다. “어머니, 어째서 이렇게 불을 많이 켜 놓은 것입니까?” 그때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네가 집을 나간 후 10년 동안 한번도 불을 끈 일도 없고, 문을 잠근 일이 없다.” 케시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내가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계속 나를 사랑하고 있었더라’는 것이에요. 돌아왔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그 아픈 마음으로 그 딸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이것을 모르고 방황한 것이예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고, 그런고로 벌써 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내가 죄인입니까? 더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내가 병들었습니까?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지요. 내가 실패했습니까? 남보다 나는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에요. 받고 있는 것이에요.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은 믿음입니다.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한 이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진실한 자세는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 영원한 세계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낙심함이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마땅하다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런고로 내가 남을 사랑하고, 또 나 자신도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엄청난 사랑 안에 있는 나, 사랑받는 나, 그 존재는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를 이처럼 사랑해 주시고 오늘도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방황할 때에도 끝까지 사랑해 주시니 그 사랑, 깊이 깊이 깨닫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 충만함이 있게 하소서. 내가 처한 처지 이대로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랑의 사람으로 그런 사람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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