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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2.06.30
제 목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본 문 :고린도후서 6 : 1 ∼ 2
‘아더 베리(Arthur Barry)’라고 하는 분은 명문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유족하게 자라난 그런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런 행복한 유족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천부적 재능을 고루 갖추고 태어나 아주 이러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지능지수도 탁월하고 또한 학벌도 특출했습니다. 용모도 뛰어나고 키도 훨씬 크고 늠름한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운동신경도 좋아서 못하는 운동이 없고 또 음악적으로도 재질이 있어서 피아노 독주회를 할만큼 피아노도 천재적으로도 잘치는 그런 재능이 있는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춤은 또 얼마나 잘 추는지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춤을 즐기는 사람이었고요 말재주 또한 특별히 좋아서 사교계의 영웅처럼, 혜성처럼 높이 떠있었습니다. 뭇 여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한 번 만나는 것을 큰 영광처럼 생각을 했더랍니다. 이렇듯 부러워할만한 모든 여건을 고루 갖춘 이 사람, 여러분 무엇에 전념했을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았을 것 같습니까? 그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보십니까? 어이없게도 이 사람은 보석 도둑이었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 명성이 높은 유명인사가 뒤에서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그는 보석 도둑질을 하면서 유족하게 사교계에서 살아왔습니다. 마침내 꼬리가 길어서 그는 잡혔고 체포되어가지고 너무나도 지능적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큰 벌을 내렸습니다. 20년 징역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출옥할 때에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보석을 훔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훔치고 산 죄인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라는 분을 여러분이 들어 아실 것입니다. 그에게 우화적인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소재에 착안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 베푸신 사람들이 많고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받은 사람이 많잖아요. 많은 문둥병자들을 고치셨으니 고침 받은 사람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셨으니 그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뭐 장례 하러 가다가 살아난 청년도 있잖아요? 이 많은 은혜받은 사람들, 성경에는 그 사람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았다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은혜 베풀고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그것을 나름대로 추리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과거에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만나본 일이 있다는 것으로 소설은 설명합니다. 어떤 곳에서 예수님은 알코올 중독자를 만났습니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어디서 본 일이 없습니까?” 그분이 대답합니다. “아, 있었지요. 나는 본래 절름발이 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제가 이렇게 걷게 되었습니다. 절름발이였을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건강해지고 나니 할 일이 없어요. 또 누가 나를 환영하지도 않고. 그래 이럭저럭 하다보니 타락하고 타락해서 이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또 한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아니 내가 네가 창녀일 때에 용서하고 구원했는데 아직도 창녀인 것이냐?”하고 꾸중하듯이 물었더니 이 창녀가 대답하는 말이 “물론이지요.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딸이 되고 감사해서 창녀생활을 청산했었지요.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워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와서 삽니다.” 또 다시 창녀가 되었답니다. 또 한 곳에 가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싸움질을 하고 있는, 아주 혈기와 주먹이 있는 조폭을 하나 만났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 옛날에 본 사람이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폭력배가 되었나?” “예수님 죄송하지만 저는 원래 시각장애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저의 눈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만은 눈 감았을 때는 몰랐는데 눈뜨고 보니까 아니꼬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부정부패 사치와 타락, 여기에 울분이 터져서 주먹을 쓰다 보니 조폭이 되었습니다.” 말 되는 이야기죠? 정말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 하는 사실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에 그가 어떻게 살았을까? 은혜를 지켜가며 은혜 안에 살았나, 그것이 문제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 같으나 알고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왜? 다 죄인이니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죄인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죄인이 있다. 하나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죄인됨을 알고 사는 죄인, 또 하나는 죄인이면서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혹은 내 잘못까지도 남에게 떠맡기고 내가 왜 죄인이냐고 죄인이 아니라고 굳이 고집부리면서 사는 교만한 죄인,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글쎄입니다. 저는 이 시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 속에 태어나서 은혜 속에 삽니다. 모두가 은혜 속에서 사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배반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은혜로 은혜 되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가 은혜 되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인식론에 있어서 감정을 앞세웁니다. 그래서 생각 이전에 감정이 있다고.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마십시오. 생각이 없는 감정은 감정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잠재의식에까지도 지식이 있어서 감정이 더 많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뱀을 만져도 뱀인 줄 모르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사자를 만나도, 사자라는 것을 모르는 동안은 내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십시오. 어쩌다가 남편이 결혼 10년만에 집에 돌아오면서 그래도 큰 맘 먹고 장미꽃 한 송이를 사왔다고 생각합시다. 이 의미를 아는 사람은 감격을 합니다. 그러나 의미를 모르고 보면, 그까짓 장미꽃 한 송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뭐 그렇게 감격을 주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죠. 결국은 내가 과거에 얼마나 은혜 가운데 있는지, 내가 은혜를 얼마나 헤아릴 수 있는지, 은혜를 은혜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감격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은혜를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은혜에 대한 감각지능은 역경 속에 있습니다. 결코 유족한 가운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의 코가 예민하다’고. 배부른 사람의 코는 둔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배고파보면 몇백 미터 앞에서 나오는 불고기 냄새도 코를 찌릅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대한 것도, 이 고마운 마음도 알고 보면 유족한 사람에게는 감각이 둔합니다. 그 감각지수가 낮습니다. 그까짓 것 그까짓 것 그래요.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운 역경 중에 있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 가끔 그럴 때 좀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전에 어떤 분이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수술을 받습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제가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에도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로 기도합니다.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전화로 잠깐 기도를 하는데도 얼마나 울면서 감사해 하고 은혜를 받는지. 그런데 이 건강한 사람들은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고마운 줄 모르더라고요? 안 그래요? 어렵고 어려울 때 ‘정말 전화로 한 통의 기도를 받으면서도 이렇게 감사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하나님 내가 무엇입니까? 이 기도가 그에게 꼭 응답되도록 해주세요” 한참동안을 계속해서 기도할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R. A. 토레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에게 어느 날 어떤 여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안타까운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좀 화끈하게 믿고 싶습니다. 좀 더 뜨겁게 믿고싶고요 충만한 가운데 살고 싶은데 이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부흥회에도 참석해보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도 여러번 따라다니면서 은혜를 받아 보려고 애를 썼는데 이 은혜가 오지를 않습니다. 좀 화끈하게 은혜 속에서 살아야겠는데 이렇게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해도 은혜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께서 참 지혜로운 말씀을 가르쳐 주셨어요.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기도제목이 많지요 뭐. 뭐 뭐 뭐.” “그러지 말고 늘 기도하는 것 하나님이 다 들으셨을 테니까 미루어 놓고 딱 한가지 제목으로만 기도하십시다.” “무엇인대요?”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자신을 똑바로 알게 해주세요. 정직하게 알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정말 그대로, 착한 그 아주머니께서 그대로 순종을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나 자신을 바로 알게 해주세요. 바로 보게 해주세요.” 간절히 며칠 기도를 했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 속에서 자기 모습이 나타났어요.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어요. 더럽고 시기, 질투, 명예, 욕심, 게다가 거짓, 너무너무 더럽고 추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그러고 나니 남편을 볼 수도 없어요. 부끄러워서. 아이들을 대할 수도 없어요. 이렇게 추해졌어요. 또 다시 목사님께 와서 “목사님, 이제는 너무 창피해서 살수가 없는데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다음 기도를 하세요. ‘십자가를 알게 해주세요.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십자가를 생각하세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보여주었어요. 그를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시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요.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너무 감격했어요. 이제 비로소 충만한 은혜의 사람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의 나됨을 똑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나면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를 비방할 자신이 없어요. 섭섭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입게되면 은혜를 알 때는 나 자신의 의가 부정됩니다. 그래서 내 공로도 아니고 내 진실도 아니고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지혜도 아니고 다 없어져요. 오직 은혜. 그것도 현실적인 은혜. 그 속에서 자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은혜만 남습니다. 여러분, 요새 우리는 월드컵 행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만은 여러분 월드컵 시작하기 전에 몇 달 전부터, 심지어는 어떤 분들은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뭡니까? 16강입니다. 꿈에도 소원은 16강입니다. 오로지 소원은 16강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8강으로 바뀌었습니다. 아, 그 다음에 4강으로 바뀌고 아, 그 다음에 요코하마 간다나? 사람이 이렇게 둔갑을 잘해요. 어제 저녁에 축구 보다가 그거 참 어이없게 두골 먹었습니다. 그래서 분해가지고 분해가지고 잠을 못잔다구. 16강 어디에 갔습니까? 여러분, 제 정신 차리세요. 모든 것은 은혜요. 그 은혜의 현장을 잊어버리지 마세요.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은혜 속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은혜 속에 목적성이 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은혜를 쏟아버리지 마십시오. 기적이에요. 이건 다 기적이에요. 그리고 은혜를 부르신 이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되요. 그리고 여러분 이제 감격해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은 기쁨입니다. 은혜로 주셨으니 감사해야지요. 용서받았으니 감격해야지요. 만족함이 중요합니다. 만족함. 그리할 때에 그 만족과 충만함이 사람을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품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얼굴도 변할 것입니다. 어떤 여집사님이 아주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찬송도 부르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그런데 자기 남편은 가자고 자꾸 조르면 한 달에 한 번 교회에 따라갑니다. 따라가서는 그냥 졸다가 오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니까 가자면 그저 ‘아니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그래가지고 따라올 뿐이지 은혜를 못 받아요. 이게 마음이 아픈 거예요. 어떻게 남편이 좀 은혜를 받아야겠는데, 이래가지고 애를 쓰다가 유명한 목사님이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잘 달래가지고 남편을 모시고 가서 뒷전에 앉았는데, 여집사님은 은혜를 받고 기뻐하는데 남편은 여기서 졸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속상해서 다음날 또 데리고 갔습니다. “여보, 오늘은 뒷전에 앉지 말고 앞에 앉아서 아랫목에 가서 뜨끈뜨끈한데서 은혜 받읍시다.” 여기가 아랫목이예요. 앞자리에 가야 은혜가 크지. 그래서 같이 제일 앞자리에 가서 은혜를 받으려고 했는데 역시 집사님은 은혜가 충만한데 남편은 여전히 졸고 있어요. 이게 속이 상해서 나오면서 ‘당신 어떻게 이럴 수 있소.’ 어찌 이럴 수 있냐고 왜 은혜를 받지 못하느냐고 그러니까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은혜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이제 부인이 할 말이 없어요. “은혜 받은 당신, 그것이 은혜요? 나 은혜 별로 바라지 않아” 그렇게 말했답니다. 여러분, 그 부인의 마음속에 감격이 있고 생활이 변화가 왔어야 되는데 그것 없이 잔소리꾼이에요. 은혜는 말에만 있고 성품에 없었어요. 그러므로 이 남편은 그런 은혜라면 나 받고 싶지 않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이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참 은혜는 삶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새사람 되게 하고 얼굴까지 달라지고 마음도 달라지고 말이 변합니다. 오로지 덕스러운 말만, 은혜로운 말만, 그래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다. 은혜를 지켜가려면 겸손해야 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은혜의 극치는 겸손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겸손합니까? 그만큼 은혜에 살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은혜 받았다가도 쏟아버립니다. 얼마만큼, 얼마만큼 겸손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은 은혜의 극치입니다. 클라이맥스입니다. 은혜는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점점 더 자신은 낮아집니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훌륭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보다 의롭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질 때 아무도 원망할 마음도 없고 주어진 현실 그대로 감사 감지덕지 할 밖예요. 겸손,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겸손하게 하는 은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겸손하게 하는 은혜를 주어서 나로 하여금 은혜를 지속하도록 은혜를 보존하도록 하셨다, 그렇게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처럼 은혜 받았다가 교만해지면 다 쏟아버립니다. 더구나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교만한 것처럼 구제불능한 일은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교만해진 순간 벌써 마귀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겸손해 집니다. 어쩌면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그것이 은혜의 극치입니다.
나아가서는 사도바울 같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주어서 꼼짝 못하게 만들었어요. 교만하려고해도 교만할 것이 없어요. 교만할 거리가 없습니다. 싹 제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에서 은혜로 계속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은혜요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 내가 있다고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그 뿐입니까? 바울에게 주신 은혜는 이렇습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저는 이 요절을 사랑합니다. 신조처럼 생각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sufficient, 만족은 아니요 충분이요.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져있는 은혜를 충분하게 생각하십니까? 더 바랄 것이 없어야 합니다. 더 다른 것을 원치 않아야 합니다. 이대로 만족해야 합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네게 있는 내 은혜가 충분하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기에 은혜의 지속성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자유를 반납해 버립니다. 은혜의 말씀께 부탁해 버립니다. 은혜에게 자신의 생명을 위탁해 버리고 그대로 감사하며 삽니다. 살아도 죽어도, 잘되어도 못되어도. 범사에 그를 높이고 감사하며 은혜의 종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 그랬습니다. 지금은, 현실을 은혜로 은혜의 극치로 수용하는 그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은혜를 간증하면 커집니다. 은혜를 기뻐하면 증폭됩니다. 은혜를 함께 나누면 극대화됩니다. 여러분, 은혜를 감추지 마시고요 은혜를 나누세요. 함께 나누세요. 내가 결혼주례를 한 다음에 신랑 신부가 와서 “신혼여행 갑니다” 하고 인사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제가 꼭 한마디합니다. “몇 일 다녀올 건가?” “사흘동안 다녀올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싸울 일이 많을 테니까 이 사흘동안 싸우지 말게. 제발 싸우지 말게. 그저 좋게 축제로 그렇게 지내주게. 그러기 위해서 좀 낭비성이 있어야 되네. 택시를 사서 만원이 나왔으면 그까짓 거 이 만원 줘라. 운전기사가 ‘왜 이 만원 줍니까?’ 하거든 ‘신혼입니다’ 그러면 ‘행복하게 사세요’ 그럴 것이라고요. 복을 빌어줄텐데 적어도 사흘만은 좀 베풀며 살아다오.” 은혜를 나누자. 나 좋으면 저도 좋아야지. 그것이 은혜요. 여러분,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라.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되지 맙시다. 모처럼 받은 은혜를 쏟아버리는 자가 되지 맙시다. 나의 나됨의 은혜가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높아지고 더 많은 열매를 맺으며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사는 그런 귀한 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도 못하고 은혜를 은혜로 지켜가지도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고 주여,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사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아니하는 은혜의 사람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