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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회개

누가복음 5: 1 ~ 11

곽선희 목사

2001.03.11

날 짜 :2001.03.11
제 목 :이 사람의 회개
본 문 :누가복음 5 : 1 ∼ 11

증참이라고 하는 사람은 공자선생님보다 마흔 여섯 살이나 어려서 나이로 비교한다면 공자선생님의 손자뻘 밖에는 안됩니다. 그는 아주 젊은, 어찌 생각하면 어린, 그런 제자였습니다만은 공자선생님께서는 이 증참을 가르쳐서 늘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증참이라고 하는 제자가 남긴 간단한 상식적인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일삼성(一日三省)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일일삼성이란 말을 들어왔습니다, 어른들로부터. 저, 그런데 일일삼성 할 때는 하루에 세 번 자기를 반성한다 그렇게 늘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해 보면 그게 아닙니다. 매일같이 세 가지를 반성한다는 겁니다. 그 첫째가 뭐냐하면, 남을 생각하고 행동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린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자기 기분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매일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남을 생각하고 살았는가? 그것에 대해서 진실하고 충성되었는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두 번째는 ‘친구와의 교제에 있어서 신의를 저버린 일은 없는가?’ 신의. 신실한 교제의 기본인 믿음을 저버린 일이 없는가? 또 하나는 ‘배우지도 않고 자기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친 일은 없는가?’ 모르면서 아는 척, 그렇게 남을 가르치며 위선적으로 살아간 일은 없는가? 그것을 이 세 가지를 매일같이 반성해서 그와 같이 공자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제자가 되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서양사람들은 늘 입버릇처럼 또 그의 많은 책 중에서 지적합니다. 사람은 두 말을 많이 하고 잘할 줄 알고 그래야 인격이 세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두말. 간단합니다. Thank you! 여러분은 하루에 고맙다는 말을 몇 마디나 하고 삽니까? 작은 일에도 큰일에도 중심에서부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감사, Thank you! 라는 말을 항상 잘할 수 있어야 그게 바로 인격자입니다. 또 하나는 I’m sorry.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잘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우리는 그 공자의 문화, 유교문화, 이런 걸 좀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못돼먹은 게 많아요. 마치 고맙다고 하면 자기 인격이 내려가는 줄 알아요. 게다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 아주 족보가 망가지는 줄 안 다니까요? 그래가지고 죽을 때까지 I’m sorry 한 번도 못해보고 죽는 사람도 있어요. 되게 못됐지요. 참으로 저질 인간입니다. 볼 것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그건 제 잘못입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또 자주 그렇게 마음에서부터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훌륭한 인격자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첫번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내가 잘못했습니다”그러라 그 말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라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회개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도 회개요, 내 인격을 높이 세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회개에 있습니다. 1963년이니까 아주 옛날 얘기이구만요. 제가 처음으로 유학을 갔을 때 어리둥절합디다. 참 거 큰 미국에 가서 보는 것 듣는 것이 다 신기하기만 해요. 그런데, 마침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서 많은 연보를 해서 보내시는 분이 저를 만나서 같이 저 뭐 영어도 잘 못하는데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아주 클럽 식당인데 굉장히 화려하고 큰 그런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뭐 그때 사정으로서는 내 일생 처음이죠. 그런데 이 식당이 높은 곳에 휘황 찬란하게 장식해놓은 샹들리에 등은 다 불은 끄고요, 내가 앉은 식탁, 똥그란 식탁 한가운데에 촛불을 하나 켜 놓고 고걸 또 빨간 유리 갓을 또 이렇게 씌어 놨어요. 그리고 그 불이 깜빡깜빡하는데 이렇게 하고 이제 식사를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더라구요. 이러다가 손가락을 베일는지도 모르겠어요. 즉, 그런 상황이라서 내가 공부하러 간 터에 무엇을 못 물어보겠습니까? 거기 나이 많은 웨이터가 나와서 봉사할 때에 “웨이터, would you tell me 이거 왜 이렇게 깜깜하게 하고 먹으라는 거요? 아 저거 불 키면 좋을 텐데 이거 어둡게, 왜 이렇게 하고 식사를 하라는 거냐?”하고 물었더니요, 그분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진리를 말해주었습니다. “보자하니 뭐 나이 그만큼 들었으니까, 손가락 베지는 않을 것 같다고. 또 한 가지는 이렇게 불그스레한 얼굴 불빛에 비추어 보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미인 아닌 여자가 없고 미남 아닌 남자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 방안에 불 너무 크죠? 밝게 켜지 마세요. 불그스레하게 이렇게 해 놔야 주름살도 안보이고 그저 다 예쁘게 보인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어두운데 비추어보면 다 예쁘게 보인다 그말이에요. 여러분, 여자 분들이 화장을 합니다만은 그 화장도 그게 원래 위장술이거든요. 그건 어두운데서 통하는 거예요. 대낮 밝은 빛에 햇빛에 비추어 보면 화장한 거 못 봐줍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고로 우리가 이래 혼탁한 세상에 죄악 중에 사니까 내가 깨끗하고 내가 잘났고 뭐 그런 거 같지. 다 그럴 듯 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그 밝은 심판대, 밝은 빛 앞에 비추어보면 그 모든 것이 다 노출이 되요. 모든 것이 다 이렇게 드러나게 되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앙의 사람,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은 죄라고 생각도 안해요. ‘뭐 그까짓 것’하고 지나가지만 믿는 사람은 안 그래요. 당연히 도와줘야 될 사람을 도와주지 못했고 용서해야할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어요. 이럴 때에 그는 괴로워서 잠을 못 자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도 민감하게 죄라고 생각하고 안타깝게 뜨겁게 회개하며 사는 바로 그 사람이 인격도 있는 사람이요 신앙도 있는 사람이다, 하는 말입니다. 회개의 깊이와 은혜의 높이는 언제나 이렇게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해야 될 줄 알면서도 회개 안 합니다. 아니, 회개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또는 모든 것을 환경에 돌리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 뭘 잘못된 건 누구 때문이요 누구 때문이요 해버리는. 또 하나는 변명체질에 사는 사람. 무슨 일이든지 간에 잘못되었으면 내가 잘못했습니다. I’m sorry. 딱 끝나고 말아야 되요. 뭐 이런데 고 다음 말이 또 따르죠. 그러나, 너도 그렇고, 그러나 누구도 그렇고, 그러나 환경이 어떻고……. 이 뒷이야기가 필요가 없는 거예요. 사과하면서 말많은 사람, 구제 불능입니다. 이유 없어요. 이건 내 잘못이요. 이것으로 끝이에요. 그 다음에 주가 달리면 안 되요. 그러나 어떻고, 어떻고……. 왜 이런 쓸데없는 말이 따라가는 겁니까? 내가 잘못했어요. 아주 간단한 말로 끝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주 변명이 아주 체질이 되었어요. 이거 배냇병신이요. 그저 말이 많아요. 이거는 영영 구제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또 한가지는 운명론자도 회개를 할 줄 몰라요. 모든 것을 팔자 소관으로 돌려요. 팔자가 어떻고 어떻고. 특별히 교만한 사람, 겸손한 사람이 회개할 수 있지요 교만한 사람은 회개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회개로 인해서 오는 후속 결과, 그 불이익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 때문에 그는 회개할 수가 없어요. 만사에 원망과 불평으로 사는 사람, 이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그 심령이 그 몸이 계속 썩어가고 있는 거예요. 회개할 때만이 그 영혼이 온전히 자유할 수가 있는 것이죠.
회개의 종류가 몇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지적으로, 지적인 회개로서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건 누구에게 말할 것 없어요. 내 잘못이요, 내가 원인이요. 내 잘못이라는 걸 인정하는 지적인 회개가 있어야 되고요, 변명 없이. 또 하나는 정적인 회개가 있어요. 이 회개로 인해서 오는 형벌과 심판과 저주를 미리 생각을 하면서 미리 느끼면서 통분해 하는 것이에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하고 가슴 아파하는 통분함이 있어야 되요.
또 하나는 의지적인 회개입니다. 잘못된 줄 알았으면 거기서 멈추는 거예요. 결단하고 멈추는 거예요. 그것이, 그리고 돌이키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동기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스러워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그 심리학적 이유 때문에 그 가책 때문에 그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회개하는 사람이 있지요.
미국에 심리학자인 마틴 샐리그마 라고 하는 분이 그의 책 가운데서 말합니다. 삶을 우울하게 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 첫째가 뭐냐하면 영구성입니다. 변화를 믿지 않아요. 나는 이대로 머물 수밖에 없고, 이대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내 이 잘못, 또 이런 행위는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거죠. 또 하나는 확산형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다 그 모양이다. 너는 구제 불능하다. 이것도 못했고 앞으로도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다.’ 스스로 자기를 절망적으로 평가하고.
그 다음에 개인성입니다.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 문제 있다’ 하고는 자괴감에 빠져요. 자기 스스로를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로 평가해 버립니다. 거기도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창조적 역사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에요. 때로는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경우도 있지요. 뭐 형벌을 피하려고, 어쨌든 벌을 면하기 위해서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게 되지요. 이것은 율법적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이없게도 보상을 바라고 대가를 요구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상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회개하면 용서받을 것이다. 축복이 올 것’이라고 그런 보상 심리적으로 회개하는 수가 있습니다. 생각하면 이 모든 회개는 그리 아름다운 회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은혜와 은총에 감사하면서 감격한 중에 회개하는 그 회개가 진정한 회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매를 맞으면서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하고, 어머니가 그에게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어 줬을 때, 잘못한 걸 다 알고도 사랑했을 때 그의 가슴에 안기면서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그 회개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은혜 가운데서 회개하는 회개가 진정한 자기 정체의식이요 진정한 회개란 말씀이죠.
오늘 본문에 잠깐 나타난 사건이지만은 이 가운데 예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 회개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참 이상하게, 엉뚱하게 나오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분명히 베드로가 물고기 잡았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여기에 물고기 잡아놓고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시간에 그가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습니까? 매를 맞았습니까? 저주를 받았습니까? 병이 걸렸습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 은혜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볼 때 나는 너무 초라하고 너무나 못됐어요. “하나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이제 무슨 일이든지 한번 끝낸 다음에 다시 시작하는 건 거 귀찮은 일이거든요. 밤새껏 물고기를 잡느라고 수고하다가 그물을 씻어서 지금 다 말려서 걸어놓았습니다. 이제 일을 끝낸 거예요. 정돈해 놓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그물을 내리라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이 바다에서 한평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물이란 깊은 데서 내릴 수 있는 성격이 못돼요. 그래서 언제나 밤에 어두운 때에 얕은데서 그물을 내리거든요. 그런데 오늘 대낮에 이건 전혀 상식 밖이에요. 특별히 예수님은 목수예요. 베드로는 어부로서 호수에서 한평생을 산 사람이요. 목수가 어부에게 “깊은데 그물을 내리라.” 시간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많은 설교를 하신 다음에 감동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라.” 베드로의 생각은 확실했습니다. ‘이건 못 잡는다. 못 잡을 건 뻔하다.’ 그래도 오늘 성격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물을 내려 밤새껏 수고하여 잡은 것이 없습니다만은” 거기다 괄호하고 하나 더 넣어야 되요. ‘이제도 못 잡을 것이 뻔합니다만은’ “말씀하시니까 그물을 내리리이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인격과 그 말씀하시는 분의 체면을 보아서 일단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렸는데 물고기를 가득 잡아서 그물이 찢어지게 됐다. 이때에 그는 충격을 받습니다. 왜요? 내가 분명히 의심하고 했거든요. 순종은 했으나 믿음은 없었어요. “물고기 잡어라” 할 때에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제는 만선이 되었습니다” 그때 감사했어야 되는데 그런 마음 없었어요.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고 다만 “그저 하라 하니 합니다. 안될 줄 알지만 합니다.” 억지로, 부득이 순종을 했더랍니다.
자, 이제 문제예요. 주께서는 그것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너무 중요한 거예요. “이 믿음 없는 사람아” 이렇게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이 믿음 없는 행위에 대하여 주께서는 모두 다 용서하시고 물고기를 많이 잡도록 해주었단 말이에요. 물고기 잡았다는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의 불신앙을 용서해 주신 것, 나의 불신앙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용해 주신 것.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덮어주신 거예요. 너무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회개는 은총 속에 있는 것이에요. 감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사랑을 느끼며 회개하는 그 회개가 진짜 회개란 말이에요. 구약성경에 보면 욥기 42장에 볼 것 같으면 그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10남매나 되는 자녀를 잃었지요, 재산을 다 잃었지요, 몸의 건강을 잃었지요, 많은 친구를 잃었지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너무 힘들어서 그는 어머니가 나를 왜 세상에 낳아 놓았던가. 낳으셔서 왜 나를 이렇게 젖을 먹였던가? 너무 살기가 힘들어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어요. 원망 아닌 원망을 했어요. 그러나 이 모든 어려운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주실 때 배나 주셨어요, 배나. 더 많이 주었어요. 그때 그는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이여 전에는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니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내가 지난날에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이제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나이다. 욥기에 처음 나오는 말이에요. 회개하나이다. 그가 징계를 받으며 회개한 게 아니에요. 큰 은혜를 받으면서 너무 감격해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간에 믿음이 없었던 거, 원망한 거, 불평한 거, 참 잘못됐습니다” 그때 회개하더란 말입니다. 이 회개가 높은, 하나님의 사람의 회개란 말이에요.
리스트에 대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작곡가 리스트가 어느 날 저 독일에 조그마한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마치 아주 피아니스트 하나가 있는데 이 아가씨가 피아노 독주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방에 광고를 써 붙이고 또 소문을 내게 되었습니다. 신문에도 내고. “아무개가 피아노 독주회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는 리스트의 제자입니다” 이랬단 말입니다. 그 리스트의 제자라면은 아주 명예가 높아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독주회하기 바로 전날 리스트가 이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이 여자는 리스트의 얼굴도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여자가 이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리스트가 여기 왔으니 이제 난 죽었다.’ 그래서 숙소에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빌었습니다. “저는 고아출신으로 혼자서 피아노를 배웠고, 이제 독주회를 가지려고 하는 타임에 선생님의 고귀한 이름을 제가 이렇게 도용을 하고 선생님의 제자라고 광고를 했는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많이 회개를 했습니다. 리스트가 껄껄 웃으면서 “큰 실수를 했구먼요.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한답니다. 이리 오세요. 피아노에 앉아서 한 곡을 치세요.” 그래서 잠깐 피아노를 쳤습니다. 리스트는 말했습니다. “여기 이렇게, 이렇게 조금 달리 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리스트가 하는 말이 “분명히 내가 당신을 가르쳤습니다. 그런고로 이제는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떳떳하게 나는 리스트의 제자라고 말할 뿐 아니라 연주회에 내가 참석하겠는데, ‘마지막 곡은 제 스승 되시는 리스트 선생께서 하시겠습니다’ 라고 하세요. 제가 한 곡 쳐드리겠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거기서 눈물을 흘리고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그 회개가 진짜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을 알고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기적을 보여줍니다. 그가 회개할 때에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내 제자가 되라.”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그것으로 끝입니다. 베드로는 이에 감격해서 예수를 위해 삽니다. 닭 우는 소리가 날 때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 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닭소리만 나면 엎드려 회개했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됩니다. 내가 회개하기도 전에, 내가 죄를 다 회개하기도 전에 벌써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푸셨어요. ‘그 은혜에 감격해서 이제 회개합니다. 아니 일생을 회개합니다.’ 바로 그 회개 속에 창조가 있고 능력이 있고 위대한 역사가 있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 당연히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도 않고 하지도 못하며 살아가는 미련한 저희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크고 위대한 은혜를 매일매일 새롭게 감격하면서 더 깊이 회개하고 또 다시 회개하면서 더 큰 능력을,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게 은혜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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