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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지자의 고민

요나 4: 3 ~ 11

곽선희 목사

2002.09.15

날 짜 :2002.09.15
제 목 :이 선지자의 고민
본 문 :요나 4장 3절 – 11절

유대사람들 랍비들 사이에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 한 천사가 광야를 지나가고 있는 두 나그네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걷게 되었는데 서로 헤어질 때가 가까워 왔습니다. 그 때에 천사가 말하기를 “나는 천사인데 여러분들과 오늘 이렇게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헤어지는 마당에 한 가지 소원은 들어주겠습니다. 그러니 한가지씩만 말씀하십시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한 사람은 욕심쟁이고 한 사람은 심술쟁이라고 합니다. 아주 질투가 많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원을 들어주겠는데 먼저 말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리할 때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말한 사람의 그것을 배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받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이 배를 받는다니까 욕심 많은 사람은 꼭 배를 받아야겠습니다. 절반만 받아서는 안되겠어요. 두 몫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고, 또 심술 많은 사람은 내가 못 받으면 못 받았지 다른 사람 많이 받는 것은 못 봐주거든요. 그래서 서로 신경전을 하고 긴장 관계에서 누구도 먼저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정말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재촉을 합니다. 이제 떠나야겠다고. 그러니까 욕심 많은 사람이 그 심술쟁이 목덜미를 붙들어 꽉 쥐고 “이놈아 빨리 말해. 말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지요. 그러고는 숨을 못 쉬게 목을 조였어요. 그러니까 심술쟁이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래요, 그렇다면 말하지요. 나는 눈이 두 개가 필요 없거든요. 눈 하나는 없고 애꾸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소원입니다” 그랬어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욕심쟁이는 그 시간 두 눈 다 없는 시각 장애자가 되어버렸어요. 기막힌 얘기 아닙니까? 이것이 절대로 지나가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속에서 사람이 무엇인가를 많이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사람마다 문제가 많은데 그 문제를 분석해 보면 딱 두 가지예요. 하나는 욕심이고 하나는 심술이에요. 하나는 끝없는 욕심이고 하나는 질투예요. 이 시기, 질투 때문에 나도 못살고 남도 못사는 거예요. 나도 못 받고 저도 못 받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것을 받기를 원하지만 받자마자 더 받은 사람에 대한 질투요. 언제든지 욕심과 질투, 이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마음을 잘 진단해 보세요. 내 마음속에 정말 욕심이 없는가. 내 마음속에 시기 질투가 깨끗이 사라졌는가. 이것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참 평안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에 불만을 품은 선지자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심판하는, 하나님 잘못되었다고 심판하며 골 부리는 어지간히 못된 선지자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름은 요나 입니다. 그는 믿음이 있어요. 그러나 사랑이 없어요. 율법은 있어요.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고민에 빠졌습니다. 기뻐해야 할 일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축제를 지내야 될 시간에 이 시간 지금 죽기를 소원합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정말 못난 사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못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 많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는 북쪽은 이스라엘이고 남쪽은 유다입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은 그 위에 있는 앗수르 나라가 쳐들어와서 나라를 온통 망하게 하고 포로해 가고 또 돌아와서 잡혼을 하고 해서 아주 이스라엘을 망가뜨렸어요. 나라가 망해 없어질 정도가 되었거든요. 이 앗수르 나라는 한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는 원수입니다. 또 한가지는 북쪽에 있는 바벨론이 남쪽 유대 나라에 또 들어와서 포로해가서 남쪽 유대나라도 멸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니느웨성이라는 말은 앗수르의 수도예요. 이스라엘 나라를 아주 멸망시킨 그리고 공략을 한 그 앗수르 나라의 수도입니다. 그 수도가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보실 수가 없어서 소돔 고모라와 같이 멸망시키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멸망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심판을 선언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교학적인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양심도 주었고 이성도 주었고 감성도 주었고 많은 사건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선지자를 통해서 반드시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지 않고 멸망케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비록 이방 나라도 뭐 바벨론이건 애굽이건 앗수르던 어디든지 간에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회개하라고. 그리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통첩을 받고 회개하지 않음으로 망하는 것이지요. 죄로 인하여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도 민족도 사회도 마찬가지요.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십 일로 한정하시고 니느웨성을 향해서 요나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가서 사십일 후에 망한다고 마지막 통첩을 하라’ 그랬지요.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마지막 경고를 하고 회개를 하면 용서하겠다는 그런 깊은 뜻이 마음에 있었어요.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을 잘 압니다. 가서 외쳤다가 만일에 회개하면 안 망할 거라는 거죠. 그래서 그는 혹시라도 회개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안가겠다고.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동안 있다가 그것이 토해버림으로써 니느웨 성에 아주 직행을 하게 되었어요. 이제 꼼짝 못하고 니느웨 성에 왔는데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2장에 보면 회개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니느웨 성에 와서 이제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돌아가서 전합니다. 뭐라고 했겠어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니 40일 후에 망한다고 합니다. 빨리 회개하세요. 그래야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해야 되겠지만 그럴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까 “40일 후에 망한다. 40일 후에 망한다” 하고 억지로 메시지를 전했단 말이에요. 아주 고약한 사람이에요. 어쨌든 “40일 후에 망한다” 하는 말을 마지못해서 니느웨 성에 가서 외쳤는데 놀라운 것은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재를 무릅쓰고 다 회개했어요. “그래, 그래, 우리가 죄를 너무 많이 지었지. 이제는 살아남을 수가 없지” 하고 다 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저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못마땅한 거예요.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4장 1절에 보면 기막힌 얘기가 나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요나가 못마땅한 거예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원망할 뿐만 아니라 괴로워하고 싫어하고 그 다음에 죽기를 소원합니다. ‘나 이런 꼴보고 사느니 죽고 싶습니다.’ 참 못난 사람이에요. 아니 죽을 사람이 살았다면 잘 된 거지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이런 꼴 보느니 나가 죽고 싶습니다.’ 정말 못된 사람이에요. 이게 선지자입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어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 생각, 내 뜻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해요.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그 다음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어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탕자비유를 아시지요.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거지가 돼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환영해서 잔치를 합니다. 너무 좋아서. 그럴 때 형은 못마땅해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거기 보면 그 아들도 못났더라구요.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나와요. 아니, 내 동생이지 당신의 아들입니까? 당신의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창기와 함께 먹어버리고 돌아왔는데 어째서 환영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아들로 영접하는 것입니까. 아주 못마땅해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하는 말이 “내 아들이요 네 동생이 죽었다 살았는데 왜 기뻐하지 않느냐.” 이 탕자는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지만 이 형님이라는 이 사람은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괴롭힌 거예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어요. 그 또 하나의 무서운 탕자요.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 말이에요. 여러분,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또 한가지는 요나는 지금 자기 생각에 집착해요. 그리고 자기 과거를 잊지 못해요. 민족이 당한 굴욕을 지금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저 앗수르 나라가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다 짓밟아 버리고 우리를 이렇게 착취해가고 이렇게 못살게 망가졌습니다. 어떻게 용서하라는 겁니까. 자기 과거, 자기가 본 손해, 자기 민족이 당한 굴욕, 여기에 딱 붙들려 가지고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리고 자기 생각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앗수르는 망해야된다, 앗수르는 원수다.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앗수르 나라를 아주 망하게 하고 싶은데, 죄 때문에 망한다는데 저절로 손 안대고 망한다는데 얼마나 잘된 일이냐, 통쾌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어요. 자기 생각이죠. 자기 생각에 집착하고 있어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라고 하는 심리학자이면서 의사인 유명한 분이 계시죠. The Strong and the Weak 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의 일상 생활 중에 현대인은 너무 피로하다, 너무 피곤하게 살아간다. 그 피곤한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일을 많이 한다, 순수한 과로입니다. 자기 건강에도 한계가 있고 정신에도 한계가 있어요. 여유 없이 너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많이 해서 순수한 과로 현상이 오고 있다는 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정신적인 압력이에요. 그래서 윗사람에게 관계되고 아랫사람에게 문제되고 또 사회의 여론과 평판, 동기와 특별히 하나 더 질투가 있어요. 이 정신적 스트레스가 사람을 몹시 피로하게 한다는 일반적인 얘기입니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항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큰 일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어요. 그걸 알았으면 순종해야지요. 마음에 들던 안들던 그것이 어떤 일이라도. 여러분 마지막에 죽음이 오더라도 ‘아, 이제 죽는 시간이구나, 그러면 조용히 가야지.’ ‘왜 죽어’ 그러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왜 하필이면 내가 죽느냐,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반항이 많아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때에는 우리는 조용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걸 반항하게 될 때 피곤하게 되지요. 그것은 누구도 위로할 수가 없는 거예요. 현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반항하게 될 때 피곤한 거예요. 더 중요한 것은 게으름 때문이라고 했어요. 이거 아주 재미있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해야 할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해야 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거기에 정열을 기울이며 일하면 피곤이 없는데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해야 될 일에 대해서는 게을러 빠졌어요. 하지 말아야겠다고 하면서도 그 일에 끌려갈 때 그것은 피곤한 것이에요. 그 피곤은 누구도 위로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요나는 어떻게 해야 할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큰 뜻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찬양하고 감사해야 할 시간에 찬양해야 할 시간에 원망하고, 감사해야 할 시간에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못났습니까? 이것이 바로 요나의 고민입니다.
또한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을 심판했습니다. 어이없게도 하나님을 심판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흥하고 앗수르는 망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40일 후에 망한다 했으면 망해야지 망한다고 저는 심부름을 했는데 제 체면은 뭐가 됩니까? 망해야지.” 이거 참, 못났다고요 이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심판합니다. 여러분, 심판이라는 말을 쓰기는 죄송하지만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심판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참 못마땅합니다. 하나님 왜 일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떤 일에도 그런 말, 그런 심판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 율법을 넘어서는 놀라운 높은 긍휼하심에 대하여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나의 뜻이요 만백성이 구원을 받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가 크게 잘못한 것은 내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전하라 하면, 전하면 됩니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My part and His part,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하나님께서 하셔야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내가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주제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욕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조용하게 내가 할 일 내가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심판을 하던 벌을 내리던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내가 할 일을 하고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라고 하는 분이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라고 하는 유명한 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성숙의 단계를 네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점점 자라서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 첫째 단계가 무엇인가 하면 현실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 이기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넓은 세계를 지향해야 합니다. 내가 좁은 생각에서 자기 생각에 집착하는 것, 이것은 아직도 신앙생활 입문도 못한 것입니다.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초능력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내 생활 속에 연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 안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역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꾸 그렇게만 느껴집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되어진다 하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낍니다. 내가 할 일은 이것 뿐이요, 나머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자기 한계를 확실하게 인정하는 순간, 그 신앙생활은 온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정서 중심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의 극치입니다. Core quality of spirituality라고 말합니다. 영성의 핵입니다. 그 중심에 사랑이 있어야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세상을 사랑으로 보게 됩니다. 사랑으로 듣게 됩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사랑의 세계를 전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성의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 점에서 잘못하고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중국의 첫 선교사이고, 중국의 선교의 문을 여셨던 분입니다. 그분이 선교사업 하던 중에 고국에 돌아가서 동역자, 후배 선교사들을 좀 많이 모집해 오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지망생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들을 하나하나 면접을 해서 시험을 봅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선발하게 되는데 그 때에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중국의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제가 구원하기 위해서요.” “알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중국을 변화시키고 문명의 세계로 인도해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가 꼭 있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세 번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려고 합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입니다.” 테일러가 말하기를 “이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좋은 생각이지만, 이런 동기만을 가지고는 못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지망생 하나가 되돌려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당신은 왜 선교사가 되셨습니까?” 그 때에 허드슨 테일러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중국사람을 사랑하거든요. 오로지 사랑 때문에.” 여러분, 사랑이 없는 선교, 이게 문제요. 사랑이 없는 봉사, 원망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없는 희생,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는 헌신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 자식을 위해서 한평생을 사느니 남편을 위해서 한평생을 고생했느니 가정을 위해서 온 생을 바쳤느니, 이 말이 다 왜 나오는지 아십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수고, 소용없습니다.
요나는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정말 제정신을 차린 선지자라면 니느웨가 40일 후에 망하게 되었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축제요 축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벌이고 감사해야 할 시간에 왜 원망을 합니까? 왜 죽겠다는 것입니까? 감사와 찬송으로 축제를 벌어야 될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고민에 빠집니까? 이렇게 절망합니까?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났습니다”라니 참으로 못난 인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찬송을 불러야 할 시간에 절망하게 됩니다. 아직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 미련한 인간은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또 원망과 불평으로 끝납니다. 여러분, 구원받는 니느웨 성을 보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영광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축제의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를 믿는다 하면서도 주의 뜻을 모르고 있고 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은 형식 뿐이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있기에 때로 우리는 평안도 없고 때로는 원망과 불평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사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의 뜻을 알고 주의 거룩한 사랑 안에 살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또 이웃을 사랑하며 주의 뜻이 이루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구원을 받는 백성을 보며 감사할 수 있는 온전한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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