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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복음 21: 15 ~ 17

곽선희 목사

2002.04.14

날 짜 :2002.04.14
제 목 :주께서 아시나이다
본 문 :요한복음 21 : 15 ∼ 17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쓴 책 중에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중에 지미 카터가 한평생을 지향했던 그의 좌우명이 나옵니다. 그의 좌우명은 이렇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이 좌우명을 선택하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해군장교가 되기 위하여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 바로 직전에 그 유명한 해군 제독 릭오버 제독과 함께 면담할 기회를 가졌었답니다. 제독께서 이 젊은 사관에게 전술에 대하여 전략에 대하여 혹은 군인의 자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젊은 사관은 땀을 흘리면서 벌벌 떨며 대답을 했습니다. 얼마 이야기한 후에 화제를 좀 부드럽게 바꾸면서 말씀하기를 “공부는 재미있었는가? 성적은 어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지미 카터의 성적이 괜찮았었답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지고 점수와 등수를 말씀드렸습니다. 제독께서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성적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카터는 식은땀이 났습니다.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가?”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야 말씀드릴 수 없겠지요.” 그때 제독은 무섭게 쏘아보며 다시 질문을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대답을 못했습니다. 제독은 다시 물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라고 묻고 있는 않느냐?” 그는 더더욱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최선이라는 게 뭡니까? 최선이란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집중적으로 딴 생각 없이 내가 하는 일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았는가? 얼마나 그 하는 일을 즐겼는가? 혹이라도 불평하던가 원망하던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면 그건 최선이 아니죠. 얼마나 하고있는 일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즐겁게 생각하고 했느냐. 또 주어지는 기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했느냐. 혹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으면 그건 최선이 아니죠. 얼마나 충만히 감사했느냐. 시간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지식에 대하여 기회에 대하여 주어진 능력에 대하여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그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최선과는 먼 거리에 살았기 때문이요. 그는 다시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 내게 물으실 겁니다. 너는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그 두려운 질문이 가슴에 꽉 차게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업적이나 실적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성적이 좋으냐 나쁘냐 몇 등이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문제는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죠. 이것이 인생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양적으로 묻고 있지 않아요. 질적으로 묻고 있는 거예요. 최선을 다했느냐?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 여러분 주님 앞에 가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앞에는 실적이나 업적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문제는 주어진 현실 여건 속에서 내가 얼마나 최선을 충성을 사랑을 다했느냐,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는 아주 엄숙하고 중요한 질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베드로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지어주었던 반석이라고 하는 그 유명한 이름, 베드로, 페트라스, 페트라 라고하는 그 이름이 아니고 낮추어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같이하면서 깊이 생각해 보면 여러번 여러번 말로나 행동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마는 결정적인 것으로는 세가지 실수를 합니다. 그 첫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준비하려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라.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죄 가운데 기도하지 않는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고 시험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졌지만 기도없는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은 베드로가 약했던 게 아니에요. 상황이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베드로가 기도가 없었어요. 기도하지 아니한 죄, 깨어 기도하지 아니한 죄가 결정적인 죄요 실수요. 두 번째는 물론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삼중 부인이라고 하죠. Threefold Deny,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 저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저 뒷전에 앉았다가 어린아이가 나와서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요 예수님의 제자…” 아∼ 아니라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세 번째는 저주했어요. 삼중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거야말로 씻을 수 없는 실수죠. 큰 죄를 졌지요. 큰 실수를 했죠.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를 만나주셨습니다. 여러 차례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래도 나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 앞에도 죄송하고 자기 자신을 볼 때도 무자격한 것을 알고 그는 갈릴리로 옛 생업을 따라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밤새껏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못잡고 허탈감에 빠져있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저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가 본래에 받았던 사명의 길을 떠나서 갈릴리로 돌아갔다는 것, 그 물고기 잡으러 갔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실수였습니까?
자, 그런 가운데도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에 대해서 비판하고 원인을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랬느냐, 어떻게 그 지경이 됐느냐, 전혀 말씀하지 않습니다. 딱 한마디 물으십니다. “아가파스메” 원문대로는 “지금 네가 현재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 말입니다. 현재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많은 말씀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긴 원인분석적인 뜻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된 줄 아느냐? 니가 왜 이렇게 실수가 많고 이렇게 형편없이 된 줄 아느냐? 원인은 오직 하나, 사랑이 없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이 비참하게 됐느니라. 또한 현재 이 꼴이 뭐냐 이게. 3년 동안 메시아를 따라 다니고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갔어요. 왜 이 모양이 됐느냐? 이런 실망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같은 이같은 하잘 것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 되지 않았느냐. 왜 이렇게 비겁한 인간이 되지 않았느냐. 또 하나는 네가 지금 미래를 걱정하는가 본데 예수님이 안 계시고 예수님이 안계시는 가운데에 나는 무엇을 할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를 그냥 둘 수가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되나. 그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 왜 이 모양이 됐느냐. 이것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절망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좌절이 없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운 가운데 대답합니다. “아가파스메”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을 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오이다 호티 필로세” 여기서는 “아가페?”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필로” 라고 대답합니다. “플레오” 라는 말은 프랜드쉽. 친구라는 뜻입니다. 친하다는 정도예요. ‘희생적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을 때 ‘친구의 사랑정도 합니다’ 그 얘기예요. “아가파오세”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필로세”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좀더 내려가서 그 친구의 사랑마저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오이다 호티 필로세”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주도권을 그리스도께 내드리는 것입니다. 아주 겸손해진 것입니다.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저도 생각이 있기에 그러나 내가 이지경이 됐지마는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다시 주님께 위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얼마 전에 96세 된 할아버지와 92세 된 할머니가 텔레비젼에 나와서 이렇게 인터뷰하는 걸 보았는데 결혼 70주년 기념이랍니다. 참 지긋지긋하게 같이 살았더만요. 근데 결혼 70주년 기념, 그런 프로그램에 나와가지고 이말 저말로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데 참 인터뷰 끝에 그 할아버지한테 아나운서가 짓궂은 질문을 했어요. “만일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 부인하고 결혼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가만히 있더니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대답이 시원치 않더라구요. 그런데 할머니보고 물어봤어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면 다시 이 남편과 결혼하겠습니까?” 했더니 대답이 전혀 다릅니다. “내가 돌보아 주어야죠.” 뭐 사랑한다 안 한다, 결혼한다 안한다가 아니고 저 사람에겐 내가 필요한다 이거요. “내가 도와줘야 됩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구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처럼 어려운 말이 없어요. 사랑이 에로스냐 아가페냐 이건 굉장히 중요한 철학적 이론입니다. 그러나 쉬운 일입니다. 에로스라는 사랑은 항상 나를 중심합니다. 나를 위해서 저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게 저가 필요하고 내가 저를 돕고 그래서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을 괴롭힙니다. 보세요. 사랑의 이름으로 남편 못살게 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아내를 죽입니다. 다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요? 그건 자기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아가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그분으로 중심이 옮겨갑니다. 그에게 맡깁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사랑하는 그것마저도 당신이 압니다 그거예요.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나의 운명, 그에게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현실, 주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 만이 아십니다’ 하는 겸손한 고백이 있는데 베드로가 말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C.R. Rogers 라고 하는 분이 심리학에 있어서 심리치료 방법의 삼원리를 말합니다. 심리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혹은 병든 심리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세가지 절대 조건이 있다. 첫째가 무조건적 존중함이 있어야 한다. 수평적인 것이 아니요. 내려다보는 것도 아니요. 높이 보는 거예요. 사랑의 대상을 높이는 거요. 나보다 훨씬 높이는 거요. 그가 아십니다. 그 존중이 없는 사랑이란 정신적으로 허약해집니다. 그것이 정신병을 만드는 겁니다.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입니다. 당신이 훌륭합니다, 당신의 뜻이 옳습니다, 당신 생각이 옳습니다, 존경하는 바로 그런 심리가 건강한 심리를 창출한다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공감적인 이해입니다. 내 뜻을 남에게 이해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의 공감대를 이루어야 되요.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리할 때 건강해질 수 있어요. 내가 사랑하는 분의 뜻을 내가 수용할 수 있어야됩니다. 전혀 수용할 마음이 없어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뜻을 밀어붙일 생각밖에 없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이런 공감적인 충분한 이해가 따라가야 비로소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있고 세 번째는 믿음과 진실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데 대한 믿음이올시다. 사랑하면 믿어집니다. 믿어지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직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 정직합니다. 그때에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심리학 이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내 마음도 내 뜻도. 내가 지금 이 정도 입니다마는 주님은 아십니다. 내가 이 모습이요 처절합니다마는 주여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아주 겸손합니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말하면 에로스적 사랑이 아가페적 사랑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그 동안은 자기 중심적으로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자기 출세를 위하여 자기 장래를 위하여 자기 영달을 위하여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소리 고백했던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아가페로 돌아갑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받고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아가페적 응답을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독선과 아집에서 떠나서 겸손과 헌신으로 돌아가며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변화 심리학자인 안소니 로빈스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책 가운데 Awake the Giant within 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은 무려 세계적으로 천만권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입니다. 1997년 국제 상공회의소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 열 사람 중에 이 사람을 꼽고 있습니다. 그의 이론입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살아가기 위한 건강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신의 감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현대인으로써 중요한 것이 감정 문제요. 이 감정을 방임하고 있어요. 감정을 다스려야 돼요. 여러분의 실수가 다 어디서 온 겁니까? 잘못된 감정을 내버려두었거든요. 자기 감정을 자기가 바로 통제할 수 있어야한다. 또한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절제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됩니다. 무질서하게 살면서 건강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건 미신입니다. 이걸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건강을 잘 관리해야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경제를 관리해야 됩니다. 인간관계를 관리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말하는 말은 시간을 정복해야 됩니다. 여러분 내가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주어진 시간을 정복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시간 안에서 최선으로 사는 거죠. 낭비되는 시간이 없어야 되요. 꽉꽉 채워가지고 살아야돼요. “시간을 정복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정복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시간을 무엇으로 다스리겠습니까? 사랑한 시간만이 시간이요 미워한 시간은 빼앗긴 시간이에요. 이걸 잊지마세요. 사랑으로 꽉 찬 시간만이 살아있는 시간이에요. 섭섭해하고 불면하고 원망하고 그건 다 낭비된 시간이에요.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의 일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one condition!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아주 겸손하게도 신앙적으로 새로운 고백을 하게 될 때 주는 그에게 다시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사 지난날의 그 많은 실수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현재 이 시점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 그 크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생각을 다 버리고 새롭게 정리하고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겸손한 사랑의 응답을 할 수 있게 하사 그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그리고 최선의 충만한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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