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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보여 주옵소서

요한복음 14: 7 ~ 11

곽선희 목사

2002.06.16

날 짜 :2002.06.16
제 목 :주여 보여 주옵소서
본 문 :요한복음 14장 7절∼11절

‘안소니 드 멜로’라고 하는 분의 ‘일분지혜’라고 하는 책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하나님을 찾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스승은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바라볼 때마다 거기 있는 그대로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그래야 보게 될 것이라고. 제자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스승은 다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달을 바라볼 때에 달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예컨대 배고픈 사람은 달을 보면서도 ‘저게 빵떡이 아닌가.’ 빵을 생각하면서 보면 달을 달로 볼 수가 없느니라. 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달빛을 쳐다보면 달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생각하니까 또 달을 바로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볼 때에는 하나님만 보아라.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의 아주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중요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는 말합니다. “예수님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하나님을 보면 족하겠나이다. 하나님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소원했습니다만 예수님의 대답은 “벌써 보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못보았느냐? 아직도 너희는 하나님을 못 보았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래 전에 젊었을 때 읽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짤막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 목사님께 찾아온 아주머니가 있는 대로 자기 근심 걱정을 다 털어놓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해서 아이들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직장에 대해서 좌우간 숨도 쉬지 않고 자꾸만 주워섬깁니다. 목사님이 한 시간을 듣다 듣다 못해서 “이제 그만합시다. 그런데 하나만 물을텐데요” “아, 물으세요.” “혹시 이 모든 생각을 하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럼 나도 하나 물읍시다.” “물어보세요”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거기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은 “No, I don’t”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그 말을 저는 늘 기억합니다.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풀 포기 하나에서부터 별까지 어느 것 하나 하나 하나님의 역사 아닌 것이 없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고 삽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명답이올시다. 여러분,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어윈 대령이라고 하는 분이 달나라에 갔다왔습니다. 그 분을 공교롭게 제가 어떤 호텔 로비에서 만나서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참 좋은 기회였습니다. 아, 제가 그 분을 면회 신청을 한다고 만나겠습니까? 그런데 우연히 만나가지고 서로 소개하면서 한시간 동안 얼마나 진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달나라에 가서 이 지구를 보면요 다르답니다. 우리가 달을 볼 때에는 흑백입니다. 흑백영화같지 않습니까, 흑백 텔레비젼처럼. 그러나 달에서 지구를 보면 총 천연색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그 아름다운 세계,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할렐루야 찬송을 하고 감탄했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구 소련에 가서 강연을 하면서 한마디했더니 거기에 있는 공산주의자가 그러더랍니다. “우리 우주인들은 우주 밖에 나가서, 대기권 밖에 나가서 하나님을 못 보았다는데 어떻게 당신은 달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래서 어윈 대령 자신이 하는 말이 나는 그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랬다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아침식사를 하는데 보니까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개가 무릎 앞에 앉아서 루터를 쳐다봅니다. 루터가 빵을 집으면 빵을 보고 고기를 집으면 고기를 보고 입으로 올라가면 입을 보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열심히 쳐다보는 거예요. 하도 열심히 쳐다보아서 한 조각 찢어서 주고 나서 무릎을 탁 치고 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개가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것 같이 내가 하나님을 쳐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개는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집중하는 거예요. “나는 어떤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해 놓고 또 이 생각 저 생각 이래서 되는 것인가” 그것 참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쳐다보아야 하나님을 보겠는데 무엇을 그렇게 복잡하고 가리우는 것이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식이라는 것은 먼저는 논리적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의 기능을 통해서 맑은 이성, 투명한 이성일 경우에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온 세계를 똑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이 병들면 이것이 문제가 달라집니다.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성을 통해서 비판, 추리, 분석, 통합하면서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생각으로 봅니다. 왜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 만물의 근원이 무엇일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다.” Energy다 이거야.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이 물질이냐 인격이냐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참 멋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늘 이것을, 그분의 말을 참 소중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물질로부터 물질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 생명체로부터 물질이 온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과학적 지식에 의한 하나님을 설명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주체”라고.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만큼 그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맑은 이성으로 그 능력을 따라, 그 기능을 따라서 논리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감성적 지식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어린아이를 아는 것처럼. 울 때에 무엇이 필요한지 압니다. 가슴과 가슴으로 압니다. 그 아기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린아이의 사정을 충분히 어머니는 이해합니다. 마음으로 압니다. 자, 이제 보십시오. 사랑을 하게 되면 가슴이 열립니다. 그래서 알 수가 있습니다. 미워하게 되면 가슴이 닫힙니다.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지식의 문이 꽉 닫히고 맙니다.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참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그들은 아직도 그 옛날 생각을 하면서 일본놈 미워하고 미 제국주의 미워하고 남한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폭격을 해서 우리가 많이 죽었다고 그냥 50년 동안 미워합니다. 아직도 미워하니까 아무것도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그 미움에서 벗어나야 무엇인가가 생각이 나겠는데 무엇인가 들리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겠는데 아주 너무 답답합니다. 그 증오 아, 무섭습니다. 이 미운 마음 때문에 마음의 문이 꽉 닫히고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의심하게 되면 지식이 굴절작용을 하게 됩니다. 의심하게 되면 오해가 생깁니다. 의심이 이미 마음에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이래도 오해하고 저래도 오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감성이 깨끗해야 마음이 깨끗해야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는 지식인데 소중한 것입니다만은 경험 자체만으로는 지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속에 이미 있는 지식이 그 경험 속에 작용해서 이미 있는 지식의 방향에서 이해하고 그 분량만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무엇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경험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래서 고집이 생기고 자기 우상화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의 Psychotherapy and Existentialism 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에서 현대인의 고장난 징후에 대해서 인간심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삶에 대한 하루살이적 태도라는 것입니다. 순간, 하루살이처럼 하루만 생각합니다. 순간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미래를 향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죽든 살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한 순간만 생각하고 마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마치 마약환자가 한 번 주사를 맞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맞고 죽어도 좋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한 순간만 생각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병든 상태라고 말합니다. 또 한가지는 운명적 태도입니다. 일단 운명에 맡겨버립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긍정적인 것 같으나 이것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또 한가지는 자신의 자유와 책임에서 도피하려고 합니다. 아주 기피적인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입니다. 집단주의로 향합니다. 그래서 집단적 역사에 편승해보려고 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덕에 삽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우상화할 때에 광신주의에 빠집니다. 여러분, 내 마음속에 우상이 무엇입니까? 요새 보니까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 그것 고칠 수 없는 병이더군요. 자존심 하나 때문에 망칩니다. 오늘과 내일을 다 망치는 그런 것을 볼 때에 자기 우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올시다.
또한 감각적 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운동 선수들을 봅시다. 운동장에서 뛸 때에나 혹은 볼을 찰 때, 저기서 오는 볼을 보고 ‘가만있어보자, 이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훈련이 되어서 볼을 보자마자 벌써 탁 갖다 대는 것이 아닙니까? 감각적입니다. 아주 자동적으로. 여기에 무슨 판단하고 무엇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주 몸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익숙해진 감각적 지식,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각화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벌써 보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을 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벌써 깨달을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이 인식적인 방법론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계시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하나님을 보고 삽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같이 다니면서 보지 않았느냐? 네 마음속으로는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벌써 만났어야 되는데 아직도 못 만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 모릅니다. 경험은 있으나 이해가 부족합니다. “오늘 네가 하나님을 못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게 보여주지 않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네가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마음속에 오해가 있고 의심이 있고 정욕이 있고 욕심이 있고 무엇인가 가득찬 잘못된 것이 있어서 아직도 하나님을 못 보았구나” 하는 말씀입니다. 또 “내게 듣는 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느니라.”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설교를 들으면서 영으로 내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음성을 듣고 양심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순간 순간. 영이 깨끗한 자는 계속 들려지고 계속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보여집니다. 충분하게 보여집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돌아오는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그가 그만큼이라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왜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 체면, 자기 자존심 생각해도 못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기에 그는 그만큼 소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때에 나는 소중해집니다. 나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을 생각할 때에 나를 위해 희생하신 분을 생각할 때에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나는 소중해집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가치를 높게 소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탕자는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맞이해 주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그럴 때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볼 때에는 버려진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만은 아버지의 밝은 얼굴을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니 내가 너무 소중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란 예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 믿는다’란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자기 존재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비극 작품 중에 리어왕이라고 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리어왕이 이렇게 절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젊어서는 육신의 눈은 떴으나 마음의 눈이 멀었고 나이가 드니 마음의 눈은 떴으나 육신의 눈이 멀었도다.” 차라리 육신의 눈이 멀더라도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쯤은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에 우리는 월드컵 사건 때문에 온 국민이 떠들썩하고요 제가 평양에 있으면서 궁금해서 못견디겠어요. 이걸 어떻게 알긴 알아야겠는데 여기는 전화가 안되고. 할 수 없이 거기에 있는 분들이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서 중국에 있는 분들에게 물었어요. 이겼다고. 아, 그래서 우리는 이긴 줄 알고 기뻐했습니다만은 자, 이 사건을 놓고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뭐 “예외가 많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만은 간단하지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그렇지 않습니까? 인천비행장에 들어오면서부터 얼마나 교만했는지 누구라고는 안하겠습니다. 교만했는데 다 부끄러워 돌아갑니다. 거기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더라구요. 그런가 하면 또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미국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아, 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큰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하고 한국하고 붙는다며. 아이고, 이거 큰일났어요. 미국이 이기면 자존심이 상하고, 한국이 이기면 장사를 못해먹겠고. 아이고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거 이겨야 합니까 져야 합니까? 뭐라고 기도할까요?” 그래서 “내 주여 뜻대로” 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또 묘하게 비겼습니다. 그 뿐입니까? 미국이 한국 덕분에 16강에 올라갔습니다. 신세졌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쓸 수 없는 시나리오입니다. 하나님께서 묘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역사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미 보았습니다.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조용히 마음 문을 열고 주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음성이 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건만 마음 문이 닫혀서 주를 뵙지도 못하고 주를 듣지도 못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완악한 마음을 다 깨뜨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가운데 정결한 심령을 이루어 항상 주의 역사를 보며 주의 역사를 몸으로 경험하며 주의 음성을 가까이 들으며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암울한 가운데 여기까지 왔사오나 남은 해는 밝고 명랑한 저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주의 음성에 진실하게 응답하며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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